소실점 2부

소실점 2부(33)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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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기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예약했던 카페의 작은 공간 안에 앉아 있자면, 누군가 반투명한 문 너머에 비쳤다. 내부를 가리는 코팅 틈새로 나타난 익숙한 눈. 시선이 마주쳤던가. 의문이 스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진이 유리문을 밀며 들어섰다.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면, 달라진 분위기가 뒤늦게 눈에 띄었다. 그를 직접 마주할 때면 늘 입던 후줄근한 옷 대신, 멀끔하게 차려입은 이는 위험을 피해 몸을 숨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헤르데가 제 이야기도 하던가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까. 찰나 고민이 스쳤으나, 이리트가 이상한 소리 말고 앉기나 하라며 재촉하는 게 더 빨랐다. 멋쩍은 웃음이 한 차례 스치고, 모두가 자리에 앉으면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분위기야 어떻든, 이리트는 설렁설렁 서로를 소개했다. 진을 몇 안 되게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이라 말한 이리트는 저를 파트너이자 연인이라고 칭했다. 그게 끝이냐는 듯 바라보면, 어차피 대충 알고는 있지 않냐는 듯 이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어지는 대화는 일상적이기 그지없었다. 안부를 묻고,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묻는 신변잡기 같은 대화. 진은 이리트가 묻는 말에는 대부분 숨기는 것 없이 대답하곤 했다. 정보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로를 신뢰하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보통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일신상의 정보를 감추려 하지 않나. 진은 이리트와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었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표정은 이리트가 지닌 견고한 포커페이스와 비슷했으나, 진 쪽이 감정의 폭 자체는 더 큰 것 같았다. 그건 그들의 출신 때문일까.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는 의문이 여럿 스쳤다.

그즈음 머뭇거리던 진이 제 가방을 뒤적거렸다.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새것 같은 지갑에서 꺼낸 건, 신분증이었다. 그의 지갑과 매한가지로 흔한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한 작은 플라스틱 카드에는 진의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페가 상황의 맥락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이리트가 낚아채듯 카드를 잡아 들었다. 이리트는 신분증을 기울여도 보고, 빛에 비추어 보기도 했다. 잘 만들어진 위조 신분증은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계좌도 개설했어. 네게 전화해서 만나고 싶다고 했던 그 날, 연락하기 전에.”

“……”

“오래전부터 꿈이었어. 더는 레만의 시선을 피해 숨을 필요가 없게 되면, 꼭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었거든.”

굳이 꺼내지 않은 말, 행간 속에 숨은 의미를 읽어낸 그리페가 입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일전에 이리트가 이야기한 적 있었다. 그의 신분은 말소된 지 오래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말끔한 플라스틱 카드를 뒤집어 보던 이리트는 한참 만에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레만의 영향력이 미약해졌음을 그 어느 순간보다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상부가 센티넬을 어떤 식으로 대우하든, 악질적인 집단과 싸우는 것도, 괴수와 혈투를 벌이는 것도 해야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탓일까. 신분증을 돌려주고서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리트는 한쪽에 내려둔 커피를 크게 들이켰다.

“네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어쩌면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네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까지……”

“레만을 한 번 만날 예정인데, 거기 네가 동행해주면 좋겠어.”

꿈에도 그린 적 없던 말이었다. 제가 속했던 곳이 일반적인 보육원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이리트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던 그 날부터 레만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피해야 할 존재로 여겼다. 여느 소설처럼 성형수술로 얼굴을 완전히 바꾸고 살아가는 것도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차라리 이렇다 할 신분도 없는 채,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인 삶을 연명하게 되더라도 그만큼 큰 고통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제게 고통은 지긋지긋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첩보원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지난한 훈련은 언제나 고통스러웠으므로.

그러니 이리트의 제안은 이상하게 들렸다. 제가 아는 단어만으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 나쁜 건 아니나, 분명 기쁘지도 않았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 채 굳어 있으면, 이리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괜찮아. 내키지 않는다면 억지로 답할 필요 없어. 계속 대답을 망설이면, 이리트가 훌쩍 떠날 것처럼 느껴졌다. 목적만을 전한 뒤에 미련 없이 가 버릴 만큼 사이가 나쁘지 않음에도.

“그런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말을 내뱉는 순간마다 제 어딘가가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순간을 제외하고, 한 번도 레만을 좋게 여긴 적 없었다. 그는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새롭게 협회장 자리를 차지한 올슨이 기자회견을 열기 전, 소식을 미리 알고서도 쉽사리 행동에 나서지 못할 만큼. 진, 심호흡해. 그를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섣불리 목을 죄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제가 헐떡이고 있음을 깨달은 진이 제 손바닥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너는…… 헤르데, 너는, 어떻게……”

“……진.”

“도대체 어떻게 늘 그렇게 담담해……. 아직도 레만의 그늘이 내게 드리운 것처럼 느껴져. 금방이라도 찾아와 나를, 그걸로도 모자라 내 동료까지 처분할 것 같아. 내 시간이 아직도 이따금 보육원에 있던 그 시절에 멈춰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날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사실, ……무서웠어. 두려움을 못 이겨서, 그렇게까지 급하게 도망칠 필요가 없는데도 몸부터 숨겼어. 머저리같이……”

진은 보는 이마저 숨이 막히는 듯한 착각이 일 만큼 짙은 공포를 토해냈다. 손바닥 안에 갇혀 먹먹한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웅크린 몸은 설움에 떠는 건지, 두려움에 떠는 건지. 진을 바라보는 이리트의 표정은 더없이 착잡했다. 입이 쓴 건 저도 매한가지였다. 작게 움츠린 채 떠는 이는 이리트와 연배가 같거나, 기껏해야 두세 살 정도 많을 터였다. 처음 얼굴을 마주한 지 고작 몇십 분쯤 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트, 따듯한 차라도 주문해 올게요.”

“……응, 미안해.”

“미안하긴요.”

차라도 주문하겠다며 나왔으나, 기실 그건 변명거리에 가까웠다. 제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지. 변명이든 뭐든 일단 말하고 나왔으니, 우선 캐모마일 차를 주문한 그리페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채 카운터 근처에 서 있었다. 제가 정말 거기 껴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문자를 남긴 그리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차가 채 나오기도 전에 돌아온 답장은 단호한 이리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상관없어.]

이유라도 설명해주지,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진의 상태를 생각하면 그 정도로 기기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겠다 싶긴 했다. 무작정 자리를 피하는 것도 예의는 아닐 터였다. 문득 그리페가 시선을 돌려 불투명한 유리 벽을 바라보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이 내뱉은 절박한 물음에 대한 이리트의 대답은 저 또한 궁금했다. 진의 탈출을 도운 건 분명 이리트였고, 이리트라고 별개의 훈련 과정을 겪진 않았으리라. 자신이 제대로 아는 바가 없긴 했으나, 진의 반응을 보면 분명 일정 수준의 학대를 동반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벗어나는 데 성공한 진마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건만, 이날까지도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리트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 레만을 직접 대면하면서도 짜증이나 불쾌감 정도만 내비칠 뿐, 별달리 이상 반응을 내비친 적은 없긴 했다. 하나 사람의 정신은 섬세한 구석이 있어서, 단순히 당장 반응이 괜찮다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도 없었다. 기회가 될 때 이리트에게 물어보면 솔직하게 답해줄까. 고민이 깊어질 즈음, 주문했던 캐모마일 차가 나왔다.

유난히 빠르게 나온 것 같은 차를 받아 든 그리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내밀면, 그새 조금 진정된 듯 웅크리지는 않은 이가 잔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작은 목소리에는 여전히 떨림이 남아 있었다. 힐끗 바라본 이리트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머그잔을 꼭 붙잡은 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이러려던 건 아닌데, 감정이 격해져서.”

“아니, 괜찮습니다. 정말로.”

“진, 어떻게 하고 싶어. 이 이후로는 영영 기회가 없을 거야.”

“……잠깐, 이리트.”

“괜찮아요. 차라리 냉정하게 말해주는 게 나아요……. 하지만 헤르데, 설명해 줘.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내게 그런 제안을 했어?”

이리트의 손끝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망설임이 섞인 움직임이었으나, 상황이 여기까지 온 판에 설명하지 않을 수도 없음을 알았다. 아니, 애초에 설명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는 이에게 속내를 숨기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적어도 그의 친우로서는.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할 작정으로 말을 꺼내기도 했다. 다만 막상 설명하자니 입을 여는 게 쉽지만은 않을 뿐이었다.

“레만은 한 달 내로 죽게 될 거야. 이쯤이면 그 자식도 제 죽음을 받아들일 때가 됐는데…… 아무튼 난 마지막까지 레만이 마음 편히 먹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널 이용하려 든다고 생각해도 돼. 아니, 실제로 그런 목적에 가깝지.”

“그런 건 괜찮아. 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널 돕고 싶어. 하지만 헤르데, 레만이 이제 와 날 본들 무언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

“아니, 너를 마주하는 건…… 진, 오해 말고 들어. 레만에게 너는 실수였어. 네가 죽은 뒤에 그 자식은 안타까워했어. 적어도 그 순간에 네가 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네 뒤를 집요하게 캐는 이들이 붙지 않았던 것도 레만이 정말로 네가 죽은 줄 알았기 때문이야.”

“안타까워했다고.”

“유용한 도구를 놓친 꼴이었으니까. 진, 너라면 어떨 것 같아.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어린애가, 실은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친 거라면.”

물건을 잃어버린 정도의 아쉬움이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저를 비롯해 보육원에서 동고동락하던 이들은 레만에게서 동정심 따위를 끌어낼 수 없을 테니. 또 한 번 마른세수한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트가 내민 전제 조건이 모두 맞아들어간다면, 레만이 그 성격에 속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 나약한 정신이 레만을 직접 마주하고서도 버틸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잊었다고 생각한 두려움은 레만의 손길이 제게 끼쳐온 순간, 낙인처럼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건만.

“내게 며칠만 시간을 줘……. 늦어도 사흘 내로는 확답할게.”

잠시간 진을 바라보던 이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태로 대답한들,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만 커졌다. 이 정도로 레만을 두려워하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진은 정보를 캐낼 때까지만 해도 심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더욱. 만일 진이 거절한다면, 그건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미적지근한 커피를 한 모음 마신 이리트가 잔을 내려놓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이미 엉망이 되었다. 진은 애써 웃어 보였으나, 억지로 웃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무리하지 않아도 돼.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레만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

“그래, 네가 그런 의도로 말 꺼내지 않았다는 거 알아. ……헤르데, 오늘은 여기서 파하자. 기한 내로 다시 연락할게. 미안해, 만나자고 해놓고 면목 없지만……”

“괜찮아. 마음 잘 추스르고 다음에 봐.”

“응. 저기, 하랄트 씨, 초면에 못 볼 꼴을 보인 기분이라 죄송하네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니,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색하게 굳어 버린 분위기, 자리에서 일어난 진은 터덜터덜 걸어 카페를 떠났다. 도로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제 몫의 커피만 홀짝였다. 힐끗 살핀 이리트의 표정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조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정도일까. 뭘 생각하고 있을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조금 전 자리를 뜬 진과 관련된 문제겠지. 자꾸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리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놀랐어?”

“조금은요.”

“물어보고 싶은 건.”

“있어요. 물어봐도 괜찮아요?”

“얼마든지.”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어려운 문제는 은근슬쩍 얼버무릴 생각이긴 했지만, 그리페도 그 정도는 넘어가 줄 터였다. 아마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 그리페의 손끝이 가볍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그가 무엇을 물어올지 예상하는 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관점의 차이일까, 그리페는 제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의 의문을 표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리페가 제 안위에 관해 물어보리라는 사실을.

“……보육원에서의 훈련이 폭력을 동반했어요?”

과거를 회상하듯, 이리트의 시선이 어딘가 먼 곳을 향했다. 잠깐 스친 아득함, 곧 다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색 눈은 여느 때처럼 말간 빛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래, 폭력이었지. 흔들림도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러한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한 기색조차 없는 이를 마주하고 있자면 치미는 감정에는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까. 아마도 그건 참담함에 가까울 터였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냐고, 절규하듯 묻던 진을 뒤늦게 이해한 그리페는 눈을 내리감았다가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소속되어 있던 아이들 모두가 그런 일을 당했어요?”

“개개인의 능력이나…… 그 비슷한 요인으로 정도 차이는 있었어. 하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걸.”

“보편적인 관점이라니요.”

“난 괜찮았다고.”

고민조차 하지 않고 튀어나오는 대답을 마주하면 말문이 턱 막혔다. 물론 같은 폭력을 마주한다고 해도 각 개인에게 남는 상흔은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과거, 협회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이리트를 모르는 이상 섣불리 정상적이지 않은 반응이라 결론을 내릴 수도 없었다. 하나 이리트는 분명 자각하고 있었다. 제 가치판단이 지나치게 비인간적일 때가 있음을. 그것만으로도 이리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타의로 인해 깎여 나간 인간성, 그 파편을 앞에 두고 있자면 무작정 이리트를 끌어안고 싶었다. 비록 이리트가 제가 이러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리트를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리트가 그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 불행이라 인식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십 년 전의 자신은 그만큼 더 어렸고, 아마 그때 이리트를 만났다 한들 제대로 된 후견인이 되어 주지 못하리라. 지금의 제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진 씨는…… 어쩌다가 도와주게 되었어요.”

“같이 지내던 이들 중에 레만의 이능에 잠식되지 않은 건 나와 진뿐이었거든. 영향이 미미했던 이유는 각각 달랐지만……. 어쨌든, 같이 지내는 중엔 모를 수가 없었어. 눈빛이 달라서.”

타인에게 정신을 잡아먹힌 이들은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교묘하고 세심하게 정신을 매만진다고 해도, 자력으로 사고하는 이들의 눈에는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어 이능을 지닌 이 본인이 직접 조종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어렸을 이들이 어떻게 레만의 이능으로부터 자유로웠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나 그건 나중에 물어봐도 늦지 않았다. 정신계 계통의 능력은 수없이 많은 이능 중에서도 규명된 사실이 가장 적은 힘이었으므로, 기실 이리트조차 명확한 이유를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페를 가만히 보던 이리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진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천애에 혼자 남은 자신과 달리, 그는 가족이 있었으므로. 정확히 어떤 경로를 통해 협회 휘하의 보육원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그런 것을 알아보기에는 무능력했고,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했다. 진의 탈출을 돕고자 한 데에는 별달리 대의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을 향한 반감이 가장 컸고,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어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때마침 어떻게든 탈출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겠다, 상황이 딱 알맞게 돌아갔을 뿐이야.”

“하지만 이리트, 실패한다면 당신도 진도 위험했을 거예요.”

“나라고 몰랐겠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시도도 못 해. 나는 결국 해냈고, 살아남아서…… 이제는 레만을 무너트리는 것까지 성공했지.”

“당신 말이 맞긴 하지만……. 진 씨는 트라우마가 남은 것 같았는데.”

“그것까지는 나도 이유를 제대로 알진 못해. 게다가 너도 알듯이 개인차가 큰 문제니까.”

“하나만 더, 이리트. 어떻게 레만의 이능으로부터 자유로웠어요?”

“자유로운 수준은 아니었어, 그때는. 영향을 덜 받는 정도였지.”

당시 이리트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마저도 경악스러울 일이었으나, 이리트는 별달리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다 식어 버린 커피로 목을 축인 이리트는 잠시간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레만의 이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말해 줬던 거 기억나? 보통은 아는 이가 더 드물 정보, 그런 걸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묻고 싶었던 사안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만의 이능은 타인의 정신을 뭉개는 무작스러운 방식이 아니라고 했다. 빈틈을 파고들거나, 이미 있던 감정을 자극해 키워내는 식이라고 했던가. 고개를 끄덕이면, 이리트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그 정도 능력이면 발현 방식은 나중 문제고, 어린애들 머리를 뭉개는 건 어렵지도 않지. 하지만 그래선 안 됐거든. 반항하지 않되, 제 말이라면 두려움조차 모르고 목숨마저 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제힘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리페, 거기에 어떤 감정이 가장 적절할 것 같아?”

“……충성심.”

“그래, 게다가 그 정도 나이대 애들은 맹목적인 구석이 있으니까 더욱 쉽지. 그러면 이제 왜 나나 진이 레만에게 큰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짐작이 돼?”

“조금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언제나 한 명 정도는 이능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내 위로는 잘 모르겠는데, 아래로는 더 있긴 했어. 그런데…… 오래 못 가더라. 동화되거나, 그게 아니면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춘 뒤로 다시는 볼 수 없었어.”

“당신이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무슨 그런 말을 해.”

이리트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양 웃었으나,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사는 데 별 미련이라고는 없는 듯 굴던 이리트였으나, 그의 생은 늘 생사의 기로를 딛고 이어져 왔으리라. 늘 선택한 적도 없던 위협으로 가득한 위기를 넘어. 이리트를 당겨 안으면, 그는 늘 그렇듯 저를 마주 껴안아 왔다. 그다지 따듯하지도 않은, 그저 미적지근한 체온을 품에 계속 가둬두고만 싶었다. 이리트의 손이 등허리를 가볍게 토닥이고, 그리페는 한참 만에 이리트를 놓아 주었다.

“다 지난 일이야. 괜찮대도.”

“그래도 속상해요.”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로 속 썩이지 마. 레만도 거기 관련된 놈들도 다 조져 버리면 그만이니까.”

당신의 시간은 누가 보상해 주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더 말한들 이리트가 저를 위로하는 꼴이 될 뿐이었다. 한숨을 삼킨 그리페는 이리트의 길고 가는 손가락 새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을 얽어 잡으면, 이리트의 손가락이 제 손을 장난치듯 툭툭 건드렸다. 그리페, 집에 갈까.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말간 자색 눈이. 잡은 손을 당겨 가볍게 깨물었다가 놓아 준 그리페가 고개를 저었다.

“드라이브 어때요.”

“그것도 좋아.”

 


 

약속한 사흘이 되기도 전에 진은 연락해 왔다. 레만을 만나 보고 싶다고, 그러면 형체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며. 가장 큰 관문을 넘어섰으니, 남은 건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바쁜 이들을 굳이 불러 모으고 싶지는 않았으나, 얘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또 한 번 협회장의 집무실에 모여 앉은 이들.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으면, 눈가에 거뭇한 그림자가 드리운 올슨이 얼른 이야기해 보라며 운을 뗐다. 그 못지않게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웨이드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한 빠른 기일 내로 레만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또한, 그때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만.”

“하랄트를 말하는 거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약속을 잡진 않았겠지요. 누굽니까?”

“예전엔 나와 함께 협회 휘하 보육원에서 함께했고, 도중에 사망을 위장하여 탈출한 사람입니다.”

이리트와 나이대가 비슷하며, 협회 내에서 사망한 이. 웨이드는 기억을 차분히 되짚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앳된 얼굴이 떠올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오래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자신은 보육원 쪽 일과는 거리가 있는 탓에 기억은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그래,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드물게 레만이 사망을 아쉬워했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떠오르는 건, 그 애의 이름을 짜증 섞인 투로 되뇌던 레만의 목소리였다.

“랑 클라인?”

“그땐 그런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은 협회를 나가면서 함께 버렸어. 잊었을 줄 알았는데.”

“쉽게 잊을 수 있을 만한 일은 아니었지……”

웨이드 또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신원 보증이 불가한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과거 레만이 속을 만큼 철저하게 사망을 위장했다면, 공인된 신분이 없다고 봐도 모자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리트는 믿을 만한 상대였다. 여기까지 와서 레만을 구출이라도 하겠답시고 시답잖은 수작을 부릴 이도 아니었거니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건 기실 저보다도 이리트가 먼저였다. 숨죽인 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저를 찾아온 이리트의 앳된 얼굴은 각인된 것처럼 선명했다. 위험할 줄 알고도 하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목소리도.

애초에 이리트는 원한다면 자신이나 웨이드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는 위치였다. 그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도 약속을 잡아 미리 말해준 것만으로도 이리트의 의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제안이 아니라면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올슨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하나, 그가 대화하는 동안에는 제가 참관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고. 예상한 범위 내인 듯 이리트는 쉬이 수락했다.

“날짜는 언제가 좋겠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일주일 뒤?”

“음…… 알겠습니다. 일정을 조절해 보죠.”

“어려우면 조금 늦어도 괜찮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조금 밝히기 부끄러운 이야기는 하지만…… 레만이 유의미한 정보를 실토하지도 않는 중이어서.”

알 만한 이야기였다. 위험성 높은 정신계 이능 보유자의 처분이 늦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이능을 바깥으로 발출하지 못하도록 보호장치를 해놓았다고 한들, 그건 단지 타인을 향해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일 뿐이었다. 정신계 이능 특유의 견고한 정신 방벽은 더 강한 센티넬이 와야 겨우 파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 그만한 힘을 지닌 센티넬을 찾는 일이 쉬운 일이던가. 애초에 S급은 전체 센티넬 수의 이 퍼센트에 조금 못 미쳤고, 그중에서도 정신계는 더더욱 드물었다. 게다가 현재 협회 내 정신계 센티넬 중에는 레만을 제외하면 S급이 없었다. 레만이 죽어서야 머릿속을 겨우 까뒤집어 볼 수 있는 상황이니, 시간을 내주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레만이 내뱉는 정보가 없더라도 레만의 떨거지들을 처리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까?”

“그 정도 확신도 없이 그 치들을 다 갈아치워 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겠어요. 그건 하나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더 있을까, 걱정하는 거지.”

“레만을 만났을 때, 한번 말이나 꺼내 보겠습니다. 소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죠. 레만이 어찌나 지독한지, 아직도 눈빛이 안 죽었어요.”

보통 부패한 권력자들은 제 고통에는 약하기 마련 아닌가. 어쩌면 레만이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건, 한때나마 균열에 맞서 싸우던 센티넬인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만의 과거는 그 자신의 과오로 빛을 잃은 지 오래였으니, 이제 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레만이 지닌 유무형의 자산 모두를 바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되돌아올 수 없었다. 차라리 그저 그런 부패한 권력자라면 좀 나았을까. 그러면 일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더 이른 시점에 스스로 몰락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용한 가정을 떠올리고 있자면, 그리페가 제 손을 살짝 붙잡아 왔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운데…… 식사라도 하고 가지 그래요.”

“선약이 있어서. 그럼.”

올슨은 저를 두 번 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다음을 기약했을 뿐. 선약이라고 해 봐야 그리페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었으나, 그리페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닫아 주었다. 진의 옛날 이름을 기억해 낸 뒤로 웨이드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얼이 빠진 건지, 생각할 게 많은 건지. 가겠다는 제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이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대충 건넨 이리트는 한 번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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