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32)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반은 자의로, 나머지 반은 타의로 나흘 내내 침실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한 탓일까. 흘러간 시간이 그다지 체감되지는 않았다. 내내 그리페가 물고 빤 탓인지 유두는 셔츠 자락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따가웠고, 허리 아래로는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더 토해낼 정액도 없어 물만 줄줄 흘렸던 지난밤을 떠올린 이리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체력에 끝이 있기는 한가 싶었다. 그는 조금쯤 지친 것 같다가도, 식사하거나 자고 일어나면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므로.
발정기 짐승도 이보단 덜하겠다고,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이리트는 자리에 없는 그리페를 욕했다. 식자재가 뚝 떨어졌다며 장을 보러 나간 그리페는 적어도 이십 분은 더 있어야 돌아올 터였다. 물론 이미 몇 번쯤 미친놈이라거나, 짐승 새끼라거나 하는 말을 면전에 내뱉긴 했다. 그 말을 듣고서도 그리페는 타격을 받지도 않았다. 되레 당신은 좋지 않았냐고 되물었고, 거기에 답할 말이 궁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유두가 쓸려 따가운 나머지 이리트는 거의 뒤척거리지도 않은 채 한참을 누워 있었다. 가슴이 이 꼴이 났는데 아래는 아프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듣는 이 없는 한숨이나 푹푹 내쉬는 와중에, 협탁에 대충 던져둔 기기가 알림음을 울렸다. 귀찮음과 호기심을 저울질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을 쭉 뻗으면 곧바로 가슴 쪽에 불쾌한 통증이 스쳤다. 이 정도면 차라리 옷을 벗고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귀찮게 느껴졌다. 기기만 가져와서 또 누워 있을 테니 괜찮겠거니, 느슨하게 생각한 이리트는 늘어진 채 기기를 들여다봤다.
따로 부탁한 적도 없고, 제대로 답장하지도 않았건만 웨이드는 하루에 한 번씩 협회며 레만의 소식을 전해 왔다. 협회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도 어수선했으나, 현장직 쪽 분위기는 대체로 좋은 편이라고 했다. 다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뿐, 상부가 움직이는 방향이 어느 순간 바뀌었음을 알았던 탓이리라. 어쩌면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레만이, 그의 협회가 지닌 문제가 겉으로 터질 수 있었을까. 잠시간 고민하던 이리트는 금세 생각을 떨쳐내었다. 뭐가 됐든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고민해 본들 시간 낭비였다.
협회 분위기는 그럭저럭 수습된 것 같았으며 특별한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 않았으나, 레만은 예상대로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처해 놓았는데도 꼭 이능을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차라리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 좋을 텐데. 정신계 이능을 지닌 탓에 기본적으로 저항력이 높아 여타 다른 정신계 이능을 지닌 이의 능력도 통하지 않는 게 난관이라 했던가. 죽고 나서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일 테지만, 시신으로부터 기억을 빼낼 수 있는 기억은 한정적이었다.
언제까지 대치 상태가 이어질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소수만이 독점하던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값어치가 꽤 나갈 터였다. 운이 좋다면 올슨이 바라는 협회에 도움이 될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보를 독점했던 이들을 무너트릴 때 사용할 좋은 카드가 되겠지. 하나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끌 수는 없으리라. 적어도 한 달 안에 레만을 죽여야 했다. 그 이상 사건을 끌었다간 저나 올슨이 가장 원치 않는 방식으로 레만의 신병이 타 정부 기관에 이관될 터였다. 그 또한 모를 리 없는 사실이니, 결단을 내리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레만이 죽기 전에 한 번쯤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마지막을 고집하지 않아도 레만을 엿 먹이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제가 간들 무언가 특별하게 상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와 레만은 그저 악연으로 엮였으며, 그 덕분에 제가 조금 더 레만의 속내를 알아채는 데 익숙할 뿐이었다. 팔마와 관련된 기억은 레만의 예상과 달리 알맹이가 없는 데다, 패배하여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까지 탐낼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여러 생각을 곱씹는 사이 어렴풋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평소 같았다면 나가봤을 테지만, 지금은 한 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기기를 대충 한구석에 내려놓은 이리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닫힌 방문 너머 기척은 희미했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문고리가 돌아갔다. 조금 연 틈새로 고개를 내민 그리페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한층 더 짙은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자고 있을 줄 알았어요, 이리트.”
“잠들었다가…… 금방 깼어.”
“간단하게 먹을 것 챙겨올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귀찮은 듯, 이리트는 마주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대충 뜻을 알아듣게 된 지 오래인 그리페는 흐트러진 이리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안에 찬바람이라도 들까, 문을 닫으려는데 이리트가 이름을 불러왔다. 커피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리트는 간단하게 제가 원하는 바를 피력했다. 아직 빈속이잖아요. 괜찮아. 고집을 꺾기는 요원해 보이는 단호함이었다. 어차피 식사도 할 테니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이리트는 만족한 기색을 내보였다.
물이 흐르는 소리며 칼이 도마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금세 기척은 잦아들고, 바깥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는 빠르게 돌아올 터였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나 등을 기대고 앉으면, 또다시 가슴 근처가 따끔거렸다. 그리페와 배를 맞춘 다음 날 제 몸에 남아 있는 흔적은 이제는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제 몸이 어떤 모습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쯤 되면 호기심이 스치기 마련이었다.
셔츠 자락을 잡아 올리자마자 채 옅어지지 않은 흔적이 보였다. 도대체 언제 배에까지 새겼는지 알 수 없는 자국을 지나쳐, 셔츠를 조금 더 잡아 올리면 발갛게 부어오른 유두가 보였다. 이런 방면의 지식이 풍부한 건 아니었음에도 이게 몇 시간 만에 괜찮아질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생각해야 할까. 도대체 근육이나 조금 붙은 가슴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물고 빤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실 그것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그리페가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쾌감이었지만.
인상을 찌푸린 채 울긋불긋 난잡하게 물든 몸을 보고 있는데, 기척도 없이 안방 문이 열렸다. 새파란 눈과 시선이 얽힌 순간, 이리트는 반사적으로 한껏 잡아 올렸던 셔츠를 슬쩍 내려 몸을 가렸다. 서슴없이 서로의 몸을 탐하던 순간의 기억이 선명함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심 내지는 부끄러움 따위가 솟구쳐서. 분명 커피며 샌드위치 따위가 올라가 묵직할 게 분명한 쟁반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든 그리페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침묵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스치고, 문간에 기대선 채 웃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곤란한 기색이 섞인 웃음이. 그건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표정이었다.
“안 돼. 못 해.”
“알아요. 왜 그러고 있었어.”
“……가슴이 자꾸 쓰라려서.”
끝내 기절하다시피 잠든 이리트를 씻기는 중에 유두가 조금 부어있는 건 알았는데, 아플 정도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자신이 원흉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리페는 이리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쟁반을 협탁 위에 내려놓은 그리페가 이리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간 눈을 감았다가 뜬 이리트는 어쩐지 심통이 난 기색이었다. 아파서 짜증이 나는 걸까. 아니면 제 탓을 하고 싶은 걸까.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며, 어느 쪽이든 변명할 바 없는 일이었다.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리페는 우선 이리트의 손에 샌드위치 하나를 쥐여주었다.
“연고라도 사 올 테니, 먼저 먹고 있어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가. 확신하기 어려웠다. 아파서 못 견디겠다는 것보다는 은근한 통증이 거슬린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상태였으므로. 밴드라도 붙여 두면 괜찮지 않을까. 비상 상황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별달리 나갈 일도 없으니, 차라리 상의를 벗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린 채 고민하는 사이, 그리페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비었던 손으로 그리페의 옷자락을 대충 쥔 이리트는 눈을 맞춘 채 고개를 저었다. 억세지도 않은 손아귀에 붙잡힌 그리페의 눈썹이 아래로 기울었다. 손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이를 보고 있자면 괜히 그를 탓하려던 생각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냥 좀 거슬리는 거야.”
“그래도, 이리트.”
“……일단 먹고 다녀와, 그럼.”
막았다가는 그리페가 종일, 아니, 붓고 따가운 유두가 평소처럼 돌아올 때까지 신경을 기울일 터였다. 그게 싫은 건 분명 아니었지만. 제 말을 듣고서도 머뭇거리던 그리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게나 쥐어 잡았던 셔츠를 놓아주면, 그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페가 만든 샌드위치는 늘 그렇듯 맛있었다. 각종 채소와 햄이 가득 든 샌드위치는 하나를 먹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적당히 식어 마시기 딱 좋은 커피를 느릿하게 홀짝이는 이리트가 그리페를 바라보았다.
“협회 분위기는 대충 정리되고 있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는 안 났는데, 내부적으로는 레만이 벌인 짓거리가 알려지기도 했고.”
“외부로도 소문이 금방 새어 나갈 텐데요.”
“그러길 바라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더라도 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이번 주 내로 레만의 행보를 밝히고, 동시에 협회의 공식 입장도 성명할 테니.”
“당분간 여러모로 시끄럽겠네요.”
“아무래도. 일반 센테넬이나 가이드에게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당분간 기자 같은 건 조심해. 너도 그렇고, S급쯤 되는 센티넬은 얼굴이며 이름이 다 알려져 있으니, 뭐라도 건져 보려는 것들이 들러붙을 거야.”
“괜찮아요. 그런 건.”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있다면 내게 알려 달란 뜻이야. 괜찮다고 넘기지 말고.”
이렇게 말한들 그리페는 누가 어떤 소리를 늘어놓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리라. 제대로 대답은 않고 사람 좋게 웃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작전 중에는 애초에 일반인이 접촉할 수 없도록 막아두니 상관없지만, 일상생활 중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게다가 그리페는 호인이라는 평까지 따라붙곤 했다. 물론 월등히 큰 키며, 차려입은 옷 위로도 티 나는 단단한 몸, 오랫동안 사선을 넘나든 이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 덕에 보통 사람들은 쉬이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은 대개 물불을 가리지 않기 마련이었다.
협회 내부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하잘것없는 말은 그리페에게 제대로 스치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제가 본 그리페는 그런 악의에는 더없이 강한 사람이었다. 더러운 꼴을 수없이 보고서도 구명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상처로 남지 않는다 한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이들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한낱 욕심이라 해도. 말없이 샌드위치만 먹는 이를 불만스레 바라보면, 그리페는 굳이 제 손에 들린 커피를 당겨 목을 축였다.
“당신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요.”
“죽이겠다고는 안 했어.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야. 그저 알아두려는 거지.”
“나도 당신이 입 좀 잘못 놀렸다고 상대를 죽이려 들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줄 거잖아요. 그러지 마, 이리트.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리페가 이렇게 말한 이상, 고집을 부려 봐야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 한참이나 그리페의 얼굴을 응시하던 이리트는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답을 듣고서 어쩐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물론 그리페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까지 그런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그리페와 동행할 때 걱정한 일이 터진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까지는 그리페도 말리지 못할 테지. 멋대로 절반의 타협을 본 이리트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잠깐 사이 샌드위치를 말끔하게 해치운 그리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올게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고민하는 사이 그리페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느슨한 일상생활 중에는 거의 볼 일 없는 큼직하고 빠른 보폭으로. 어설프게 뻗으려다 멈춘 손을 도로 거두어들인 이리트는 미약한 온기가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하지만 이런 곳에 바르는 용도로 나온 연고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애초에 피가 난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피부 겉면이 조금 벗겨진 정도이지 않은가. 금세 고민하기를 관둔 이리트는 빈 잔을 협탁에 대충 올려두었다. 약국에 간 이가 알아서 하겠거니, 무책임한 생각을 삼키고서.
“……트, 이리트.”
머리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나지막한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 느릿하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그리페의 얼굴이었다. 외투도 벗지 않은 이에게서는 겨울의 냄새가 났다. 한 박자 늦게 제가 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었음을 깨달은 이리트가 입을 가린 채 길게 하품했다. 편하게 자지 그랬어요.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어. 느릿하게 대답하면, 그리페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불 위에 작은 종이 상자를 내려놓은 그리페는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쳤다. 그가 하는 양을 보던 이리트는 작은 상자를 살폈다. 인쇄된 이름은 그저 낯설었다. 하나 작은 글씨로 새겨진 효능은 저와 비슷한 사례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제게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그치질 않아서.
“이런 데 쓰는 연고가 다 있네……”
“수유하는 중에 상처가 나는 경우가 흔한 모양이에요.”
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유였다. 그리페가 약사에게 무어라 얘기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라리 상상이라도 안 가면 좋을 텐데. 모르긴 몰라도 그 약국에는 둘이 나란히 가진 않아야겠다. 생각을 거듭하고 있자면 새삼 어처구니가 없었다. 젖먹이들이야 제대로 힘 조절을 하는 법을 모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그리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황당함을 감추지 않은 채로 그를 쳐다봐도, 그리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던 그리페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저 정도로 당당하지 외려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제 쪽이어서, 이리트는 괜히 입을 열지 않고 건네받은 상자를 열었다. 사용법이야 뻔했으므로, 작은 튜브와 함께 떨어진 종이를 대충 한쪽으로 치워 둔 이리트가 미적미적 뚜껑을 돌려 열었다. 발라줄까요? 그리페의 손에 덜 닦인 물방울이 반짝였다. 건드릴 때마다 불쾌한 통증이 스쳐서 망설이고 있던 건 맞지만, 그리페의 손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더 닿고 싶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찰나의 고민 끝에 고개를 저으면, 그는 순순히 알겠다며 자리를 비워 주었다. 협탁 위에 둔 빈 잔을 챙기고서.
그로부터 나흘, 올슨이 새로운 협회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딱 스물네 시간이 지난 시점에, 올슨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급작스러운 협회장 교체 사실을 의문스러워하던 이들은 더없이 많았고, 그만큼 많은 기자가 몰려들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질문을 눌러 참는 이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 앞에서도 그는 차분했다. 한 모금,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인 올슨이 정면을 올곧게 응시했다.
“많이들 궁금해하실 줄 압니다. 제가 누군지 기억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올슨은 오늘도 인공사지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한 번 서두를 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올슨은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어째서 레만이 인사 한번 올리지 못한 채 협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설명을 마친 순간, 넓은 회견장이 통째로 정적에 휩싸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수군거리던 이들도 모자이크한 채 밝힌 사진과 영상을 본 뒤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도 섣불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수없이 번쩍이던 플래시도 멎고, 올슨의 말을 기록하던 이들의 손도 멈추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사이로, 젊은 기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삽시간에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주춤거리면서도, 기자는 올슨이 발언을 허락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현재 전 협회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협회 측에서 구류 중입니다.”
“처분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확정한 바 없습니다. 하지만 협회 내에서 처리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 사태로 인해 협회의 신뢰도가 손상될 게 분명한데,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무턱대고 믿어 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협회로부터 기인한 악인을 확실히 처단하고, 비슷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한 명이 물꼬를 트면, 이후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여러 사람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올슨은 쏟아지는 질문에 한 번 막히는 법 없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다른 듯 비슷한 질문만이 반복되며 같은 자리를 맴돌 즈음 올슨은 회견을 마무리했다. 직후부터 레만과 관련된 뉴스며 기사가 온갖 곳을 점령했다. 폭로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올슨을 필두로 한 협회의 성명이 밝혀진 날, 협회 사무실의 회선은 부서를 가리지 않고 마비되어 일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 문제는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올슨이 이런 식으로 모조리 밝혀 버리리라 예상하지 못한 간부, 즉 이번 사태에 크게 관여하지 않아 아직 명맥을 유지했을 뿐인 레만의 수족이 거세게 반발했다. 오랫동안 유명무실했던 간부 회의가 열렸다. 굳게 닫힌 문 너머,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오갔다. 분을 참지 못한 듯 내지르는 고성이며 차분한 음성이 뒤섞였다. 장장 네 시간 이십 분에 걸친 회의 시간 중 대부분은 기록될 가치조차 없는 간부의 일방적인 분노 표출이었다. 그들이 제풀에 지쳐갈 즈음, 올슨은 처음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어투로 그들을 협박했다.
올슨이 표현하기를 설득이라 했으나, 그건 분명 협박이었다. 하나 누구도 섣불리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못했다. 그들은 지닌 게 너무나도 많았고, 온 세상에 레만의 몰락이 떠벌려진 이상 가진 것이라도 지키려면 숨을 죽이는 수밖에 없음을 알았으므로. 약간의 굴욕은 참을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레만의 밑에 있는 것도 마냥 영광된 일은 아니었으므로. 배신감을 삼킨 이들은 우선 꼬리를 내렸다.
이건 그냥 시간을 번 셈이었다. 레만의 뒤를 닦아주며 부와 명예를 얻은 이들은 하나같이 음습하기 그지없는 작자들이었다. 올슨이 하고자 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세간의 시선이 지나칠 정도로 모인 시점이니, 합의하는 척이라도 했을 뿐일 터였다. 하나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들에게 시간이 필요한 만큼, 올슨 역시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올슨은 그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레만 건을 확실하게 해결하고 나서 그들을 치워 버려도 늦지 않았다.
이어지는 일상은 놀라울 만큼 평화로웠다. 여전히 균열은 경고 없이 열리고, 냄새를 맡은 각종 질 낮은 범죄 조직들이 활개를 치고 있음에도. 아마도 그건 마음가짐의 차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레만이 지닌 무형의 힘이 한 차례 크게 무너진 이후, 하루하루 조금씩 더 쇠락해 가고 있는 덕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은 없었다. 여느 때처럼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올 그리페를 기다리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기기가 울렸다. 화면에 뜬 건, 저장되지 않았으나 익숙한 번호였다. 한 번도 이쪽으로는 연락하지 않았던 이.
“……”
[……여보세요, 헤르데?]
전화를 받기 전부터 알았다. 수화기 너머 상대가 다행히도 멀쩡하게 살아남았음을. 그가 사라지던 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살아만 있다면 레만의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에 그 스스로 나타날 걸 알았으므로 나서서 찾지 않았던 이였다. 물론 제가 찾으려 했다 한들, 작정하고 모습을 감춘 진을 찾는 건 적어도 제 선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진. 의아한 목소리가 한 번 더 저를 부를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이리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는 상황이 좀 안 좋았지. 레만 쪽 소식은 진작 들었는데, 미안해서 바로 연락 못 했어.]
“살아있을 줄 알았어.”
[많이 걱정했어?]
“그래.”
[미안해. 헤르데, 요즘도 바빠?]
“사과는 됐어. 최근에는 그다지.”
[한번 만나고 싶은데. 괜찮아?]
“한 달 안이라면.”
[음…… 오는 토요일은 어때.]
“좋아. 장소는?”
[그때 그 서점.]
“서점에서 만나자고.”
[그건 아니지.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더라. 회의실 용도일 테지만, 예약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이야기도 새어나갈 일 없을 것 같고.]
“그래, 그럼. 시간은 한 시 정도로.”
[좋아. 아, 그래, 너만 괜찮다면 네 파트너도 소개해 줘.]
때마침 저 멀리서 그리페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이 먼저 자리를 깔아준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도 한 번은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었으므로. 그리페의 의사를 물어봐야 할 테지만, 그는 제가 목적지조차 말하지 않고 같이 가자고 해도 승낙할 게 분명했다. 알겠다고, 그때 보자는 인사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이리트는 성큼성큼 걸어 그리페에게 다가갔다. 그의 뺨에 튄 작은 핏자국을 문질러 닦은 이리트가 입을 열었다.
“토요일에 시간 되지.”
“응. 갑자기 왜, 이리트?”
“방금 진이 연락 왔어. 기억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불안감조차 감추지 못하는 이리트는 처음 봤으므로. 이리트의 친구이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정보원이라 했던가. 떠오르는 순간마다 신경이 쓰였으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이의 근황을 물어볼 수 없어 속으로 삭인 물음이 많았다. 고개를 끄덕이면, 이리트는 당연한 듯 저를 끌어안았다. 애초에 심하지도 않았던 이능의 반동이 흔적마저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나 기꺼웠다.
“토요일에 만나자고 하네. 너도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서.”
“기억해 둘게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정리하는 이리트의 손길이 좋았다. 저를 소개하고 싶다는 말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리트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그리페는 힘 빠진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응. 마지막 마무리만 하고 올게요. 얼른 다녀와. 올 때처럼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그리페는 걸어가는 와중에 걸친 장비를 벗었다. 묵직한 장비를 한 손에 든 채 제 팀원이 모인 곳에 합류했다. 빠진 인원이 없음을 확인한 그리페가 먼저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건네면, 제각각 다른 인사말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쓰러진 괴수 여럿을 한곳에 모아둔 더미에 힐끗 시선을 준 그리페가 걸음을 옮겼다. 협회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장비를 맡기고 돌아서면, 멀지 않은 곳에 이리트의 차가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가도 짙게 코팅되어 내부가 보이지 않는 차창은 내려갈 기색이 없었다. 다른 일이라도 하는 걸까. 앞쪽으로 돌아가면 보일 테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똑똑, 장난을 치듯 유리를 두드리고서야 창이 내려가며 이리트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타지.”
“뭐 하고 있었어요?”
“아니, 생각 좀 하느라. 일단 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지,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리트는 도착할 때가 되어서도 말이 없었다. 표정으로 봐선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진 않았으나, 또 모를 일이었다. 이리트는 이따금 태연한 낯으로 폭탄을 던지곤 했으므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신호에 걸려 멈춘 틈을 타 이리트가 저를 힐끗 바라봤다. 여느 때처럼 감정 변화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얼굴 너머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러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리트는 시동을 끌 즈음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레만을 조금 더 일찍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진도 연락이 되었으니…… 함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
“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난 그냥 레만을 긁고 싶은 것뿐이야. 어차피 정보 캐내는 건 내겐 중요한 일도 아니고.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는 모습을 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물론 그것도 진이 승낙했을 때 이야기지만……”
“상부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무언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이리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진은 이리트와 같은 기관 출신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웨이드와도 안면이 있으리라. 그는 진의 생사를 알까. 어쩌면 레만 이전에 웨이드부터 기절할 듯 놀라는 건 아닌가. 의문이 스쳤으나, 적어도 이리트는 웨이드가 놀라고 말고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입을 닫은 이리트는 자연스레 제 옆에 붙어 섰다. 가만히 멈춰 이리트를 보고 있으면, 의아한 표정의 이리트가 가만히 서서 뭘 하고 있냐는 듯 손을 잡아 가볍게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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