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05)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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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그리페는 나날이 강해졌다. 내내 억눌려 있던 이능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 기세를 펼쳤고, 그리페의 실적은 그만큼 좋아졌다. 이제 협회 내 같은 S급 중에서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이들이 없었다. 이리트를 만나고, 파트너가 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그리페 앞으로 배정되는 사건의 수는 줄었으나 위험도는 그만큼 증가했다. 게다가 그는 힘이 남아돌기라도 하는 건지, 긴급한 임무에도 수시로 자원했다. 그래도 큰 부상은 없었으므로 괜찮았다. 한동안은.

차라리 그리페가 좀 다치거나, 위기에 처했다면 좀 나았을까. 그랬다면 정부 쪽에서 그리페를 필두로 팔마의 뿌리를 뽑아 버리자는 제안 따위를 내놓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 말이 좋아 제안이지, 사실상 명령과 하나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모르는 멍청이는 없다. 이따위로 구니 팔마 같은 조직이 생기는 거라고, 이리트는 제 근처에 있는 이가 눈치를 보건 말건 이를 갈아댔다.

팔마를 발족시킨 건 사실상 정부였다. 이능의 소유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센티넬에게는 수많은 제약이 있었다. 협회의 역사가 길어지는 만큼 그러한 제약의 수도, 정도도 증가했다. 어떤 이들은 그 정도 제약은 센티넬이 아닌 이들의 안전을 위해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들은 정도가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목줄 채워진 개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며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게 팔마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그러나 악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그들에게도 이능은 보편적으로 발현했다. 어떠한 제약도 걸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표방하던 팔마가 그들의 손아귀 안에 떨어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처음 팔마를 창설한 이능자들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고, 지금 팔마의 주축은 대개 인간 말종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자유랍시고 이능자 등록을 하지 않는 탓에 팔마의 규모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중 알려진 이들은 이미 지명수배가 걸렸거나, 협회 소속이었다가 변절한 이들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미 죽어 한 줌 재가 되었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산발적인 전투나 벌이던 이들이 이제 와 팔마의 뿌리를 뽑자, 따위의 소리를 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팔마의 규모가 커진 것까지 정부 탓을 할 수는 없다고 한들, 안전한 곳에 앉아 떠드는 이들을 생각하면 열이 올랐다. 무엇보다 그리페는 조금도 불만이 없어 보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분히 한정적인 탓에 더욱. 계획을 완전히 뒤엎어 버릴 방법은 있었다. 제가 그리페를 가이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리페는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없을 테고, 주 전력을 잃은 협회는 센티넬 하나를 필두로 팔마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겠다는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지는 않겠지.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리페는 필연적으로 희생해야만 하고, 팔마를 상대하는 것보다 제대로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쪽이 그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전처럼 맞는 가이드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폭주했다는 말에 대뜸 파트너가 되겠노라 마음을 먹은 저 또한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결국 그리페가 눈에 밟혀 가이딩하게 될 거라고. 덫에 발이 묶인다면 이런 심정일까.

아니, 아니다. 어쩌면 제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제 생각이 어떻건 정부는 이미 팔마를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다. 여기까지 와서 그리페의 가이딩을 거부할 수도 없었고, 걱정으로 시간을 다 써 버릴 수도 없었다. 작전의 실행은 결국 센티넬의 몫이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실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리트는 지금도 센터의 정보부에 있는 동료의 얼굴을 오랜만에 떠올리고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팔마는 함부로 들쑤셨다간 이쪽이 더 큰 손해를 입고야 말 벌집이나 매한가지였다. 상부의 인간들이 꽤나 멍청하다고 한들 별 다른 이유도 없이 팔마를 토벌하자고 들 이유가 없었다.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냈거나, 토벌을 해야만 할 이유가 생겼거나. 어느 쪽이든 바람을 넣은 건 분명 정보부의 소행이었다.

그쪽에서도 지원에 최선을 다하리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핫라인이 있는 게 낫다. 겸사겸사 죄기도 해야지. 기기에서 알림음이 울리면, 이리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제 눈치를 보던 센티넬의 얼굴에 안도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가이딩을 위해 센터에 온 김에 생각난 일을 처리할 요량이었다.

“웨이드.”

“소문은 들었어. 네가 연락을 왜 했는지도…… 알 것 같더군.”

샷을 다섯 개 추가한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웨이드의 앞에 무성의하게 내려놓은 이리트가 팔짱을 꼈다. 정보부가 다루는 건 비단 외부의 정보만이 아니다. 소문으로 들었을 리가 없지. 저 능청은 웨이드의 그리 좋지 못한 버릇 중 하나였다. 그러나 느물거리는 것만으로 거리를 두기에는 성능이 지나치게 좋은 편이었다. 몇 년 사이에 정보부의 꼭대기에 올라서는 건 보통 능력이 좋아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제가 가이드로 각성하며 끝내 소속을 옮길 때 가장 아쉬워했던 인물이기도 했으니 포섭하기에 이만한 이가 없었다.

“필요할 때만 찾다니, 좀 너무하지 않나?”

“이러니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한다고는 생각 안 해?”

“이리트.”

“이름 불러도 된다고 한 적 없어, 웨이드.”

“아쉬운 건 네 쪽 아닌가, 이리트?”

“입 다물어.”

이리트는 잠시간 제 선택이 옳았는지 후회했으나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도 아까웠다. 웃는 낯으로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켠 웨이드의 곧은 눈썹이 떨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나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과는 별개로, 이리트의 목적은 명확했다.

“무슨 생각으로 팔마를 건드리자고 했어.”

“언젠가는 잡아 족쳐야 할 것들이었잖아.”

“웨이드, 삐딱하게 굴지 마.”

“……나는 네가 이럴 때마다 좋더라.”

“대화할 준비도 안 된 줄은 몰랐는데.”

“벌써 가려고? 선물은 받아 가.”

두툼한 서류철을 내민 웨이드는 어느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채였다. 누구에게 보일 것을 걱정하기라도 했는지, 제목조차 붙지 않은 서류철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제 연락을 받고 준비하기엔 시간이 빠듯했을 게 분명했다. 제게 질척거리지만 않으면 정말 완벽할 텐데. 이리트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하얀 종이 위, 빼곡한 내용은 얼핏 보기에도 심상찮았다. 진위를 확인하듯 날카로운 자색 눈이 저를 향하면, 웨이드는 으쓱였다. 쉬이 믿기 어려운 사실일 터였다.

“또 연락할 거지?”

“지원이나 똑바로 해. 중요한 정보지만…… 이걸로는 안 돼. 이건 팔마를 치는 데 도움이 못 돼.”

그는 언제 진지한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다시 능청스레 웃었다. 빤질거리는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리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잘 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이리트는 뒤돌아 정보부를 떠났다. 정보부가 이미 이 정도의 정보를 쥐고 있다면, 팔마의 주요 인사들을 캐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팔마에 첩자를 심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제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도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건만.


이리트가 분통을 터트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팔마 토벌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페와 그의 팀을 중심으로, 센터 내 다른 S급과 그 휘하의 팀, 현장에서의 작전을 도울 정보부, 협회 소속 가이드까지 누구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목적이 얼마나 거창하건, 적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시작은 오래전에 파악해 두었던 팔마의 은신처 중 하나를 습격하는 것부터였다.

평범한 음식점으로 보이는 건물은 오가는 이 없이 한적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인기 없는 매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나 총면적에 비해 손님을 받는 공간은 교묘하게 작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장사도 되지 않는데 음식점을 유지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이 돈 많은 부자가 취미로 하는 식당이라는 소문이 난 적도 있었으므로. 심지어 상가 위의 건축물은 일반 주거 목적으로 알려졌으나, 실소유주는 명의만 존재하는 가짜였다.

음식점을 중심으로 건물의 그림자마다 자리 잡은 제 팀원들에게 그리페의 시선이 잠시간 머물렀다. 이곳은 10시면 문을 닫는다. 공식적으로는.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어지간한 상점들이 슬슬 문을 닫을 시간.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이들이 슬그머니 모여들고, 그즈음부터 건물 상부 주거지의 창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팔마를 상대하는 건 늘 피곤한 일이었다. 괴수가 나타났을 때는 근방을 통제하면 그만이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 가끔 문제가 되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팔마는 경우 달랐다. 팔마는 그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민간인을 대놓고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안위를 위해서라면 민간인이라도 공격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협회 측 센티넬과 충돌이 있을 때면, 때때로 팔마 소속 이능자가 살아 도망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날이 흐려 달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는 밤, 인이어가 약간의 잡음과 함께 작동했다. 근방의 큰 도로로 향하는 길목을 막았다는 소식이었다. 지금부터는 현장에 있는 이들의 몫이다. 조용히 건물 한쪽에 자리한 입구의 잠금을 해제한 이들이 숨을 죽인 채 계단을 통해 진입했다. 병장기로 무장한 이들은 요령껏 발소리를 죽였다. 건물 내부의 구조는 특이했다. 계단은 아래부터 위로 한 번에 이어지지 않고, 층마다 다른 위치에 계단이 자리했다. 상층부까지 단번에 진입해 기습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 층씩 진압할 수밖에 없지.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제 팀 외에 다른 팀까지 붙여서 온 거였다.

닫힌 철문 너머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 옆 벽에 등을 기댄 채, 수신호를 보내는 이. 그리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가 군홧발로 문을 걷어차면 큰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부서지며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불 꺼진 공간은 일반적인 사무실과 다를 바 없이 꾸며져 있었다.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잠깐.”

인이어의 잡음이 끊어지는 때, 한쪽에 자리한 작은 방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듯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붓기가 남은 얼굴, 그 와중에도 그는 총 끈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벨트에서 대거를 빼든 그리페는 망설일 것 없이 남자를 향해 투척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해 주춤거렸던 남자의 무릎이 꺾이며 뒤로 쓰러졌다. 머리를 통째로 관통할 것처럼 깊숙이 박힌 대거를 꺼낸 그리페의 낯은 무감하기만 했다.

잠을 자던 인간이 튀어나온 꼴을 보아하니 다른 이들이 없을 게 뻔했으나, 만일을 위해 그들은 내부를 살폈다. 샅샅이 살펴보니 보통의 사무실과는 다소 차이가 났다. 이를테면 여기저기 일상적인 물건처럼 굴러다니는 온갖 형태의 나이프 같은 것들. 일반적인 서류철처럼 보이는 파일 안에는 의뢰서 따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성공 여부가 찍힌 도장까지. 팔마의 돈벌이 수단 중에 의뢰가 있다는 건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런 정보를 이렇게 허술하게 둔 건 팔마가 내보이는 자신감인가, 혹은 이런 것은 중요하지도 않다는 뜻인가. 보란 듯 내놓은 정보를 제외하고는 2층에는 더 이상 찾아볼 것이 없었다.

“2층 클리어. 4조를 남길 테니 외부 대기 인력 올려보내세요.”

[확인했습니다.]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남자가 튀어나온 작은 방 안에 있었다. 시체는 진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옆으로 치워 놓았으나, 피까지 닦고 있을 시간은 없다. 남자가 흘린 진득한 피를 밟고 위층으로 향하는 길에 수많은 핏자국이 찍혔다. 그들 중 누구 하나 피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들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 끝에는 2층과 똑같은 철문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문 틈새로 미약하게 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

“…는 왜 …… 안 돼? 조금 …다가 ……잖아.”

“퍼질러…… 거겠…”

“……래도 …한데. 가 봐야겠어.”

얼핏얼핏 들리던 목소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대기하던 이들 사이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2층까지 침입한 건 요행이었고, 3층부터는 전면전을 벌여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던 듯,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도 없이 열렸다. 어둠 속에 숨죽인 이들을 마주한 이의 눈이 떨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리페가 당혹감으로 멈춘 이를 습격했다. 단단한 손이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이는 순간, 그리페의 대거가 목을 그었다. 쩍 벌어진 목덜미에서 피가 세차게 튀었다. 열린 철문에 튄 피가 이내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억센 팔을 쥐었던 손끝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 씨팔, 뭐야! 아마도 그와 대화를 나눴을 이가 소리를 질렀다.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동시에 닮은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가 단검을 빼 들고 대뜸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여기 있는 건 하나같이 조무래기들뿐인가. 여느 조직이 그렇듯, 팔마 또한 아래로 갈수록 뒷골목 양아치 수준의 오합지졸들이 대다수였다. 지금까지 마주친 세 명은 딱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능 이전에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는 이,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이, 그리고 제 수준도 모르고 오만한 애송이. 이곳이 그나마 구색을 갖춘 은신처인 탓에 습격한 것 아니었던가. 짜증을 누르는 그리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문 옆에 섰던 그는 한 걸음 물러섰고, 뛰어든 이는 제 앞에 겨눠진 새카만 총구 여럿을 마주하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무작정 달려드는 수준이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새카만 총구가 일시에 불을 뿜는다. 기세 좋게 달려든 것에 비해 시체는 맥없이 뒤로 넘어간다. 팀원 중 하나가 발을 붙잡고 당겨 시체를 출입구에서 치우면, 약속이나 한 듯 건물 내부에 쩌렁쩌렁 경보가 울렸다. 적어도 눈앞에 바로 적이 보이지는 않고, 이곳은 2층과는 달리 일종의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리페의 수신호에 따라, 팀원들은 사무실 내의 가구를 이용해 엄폐했다. 큼지막하고 무거운 탁자를 걷어차 세우고 자리를 잡으면, 한쪽에서 각자의 무기를 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쏴!”

악을 지르는 목소리, 멍청하게 서 있었다면 그대로 벌집이 될 법한 양의 총탄이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대충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원목 가구며 중후한 가죽 소파 따위가 부서지고 찢어지는 데도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다. 건물 내부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마구잡이로 튀는 탄환에 벽이 깨지고, 장식물이 떨어져 부서졌다. 눈먼 탄환에 맞은 형광등이 펑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자 주위가 어둠에 잠겼다. 언제까지고 총만 쏴 갈길 수는 없을 테다. 더군다나 이쪽에 큰 피해가 없다면 더욱.

포화가 멎는 순간, 그리페를 비롯한 근접전투계 센티넬들이 엄폐물에서 뛰쳐나왔다. 약속이나 한 듯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수많은 실전과 훈련의 산물이었다.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듯 움직이는 이들은 포식자 같았다. 오로지 적을 섬멸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에게 상대가 인간인지, 괴수인지는 첫 번째로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리페가 주로 사용하는 장창은 실내에서 쓰기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다. 사람보다 긴 창을 이런 곳에서 자유로이 휘두르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다간 아군까지도 휩쓸릴 가능성이 있는 탓이었다. 짧은 창대를 잡고 돌리는 움직임은 어디 하나 모자란 곳 없이 자연스럽다. 상대는 총신을 내밀어 가며 필사적으로 창을 막아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단창이 내질러질 때마다 손목이 어긋나는 듯한 감각이 엄습하고, 단단하게 디뎠다고 생각한 발이 뒤로 밀렸다. 총이라는 게 애초에 이런 식으로 쓰라고 있는 물건은 아니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자유자재로 단창을 휘두르는 그는 호흡조차 안정된 상태였다. 애초에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있는 듯. 저 또한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센티넬이었건만. 억울함을 가득 담아 허리춤에 찼던 단검을 내질렀으나, 새파란 날은 허공을 갈랐다. 판단은 순간이었으나 후회는 길었다.

날카로운 창날은 자비 없이 상체를 찌르고 빠져나간다. 그리페의 시선은 날이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이미 다른 이들을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한 번이라도 걸림돌이 될 생각으로, 그는 제 피가 묻어나는 창대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한 번 떠나간 시선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리페가 창대를 횡으로 휘두르면 몸이 딸려 가는 듯한 느낌도 없이 이전까지 붙어 있던 팔이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인지한 후에야 뒤늦게 고통이 따라붙었다.

데굴데굴 구르며 바닥을 더럽힌 팔은 이내 누군가에게 짓밟혀 뭉개졌다. 일순간 팔을 잃은 이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 누구의 귓가에도 닿지 않았다. 실핏줄이 터져 붉은 눈, 그는 한 손으로나마 소총을 들고 갈기려 했으나 한 팔 사격은 낯설었다. 게다가 모두가 엉망으로 뒤섞여 싸우는 가운데, 불안한 영점으로 아군을 피해 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조차 흐렸다. 지원은 언제, 죽겠네, 씨발…… 누구도 듣지 못한 유언을 남기고, 그는 제가 만들어낸 피 웅덩이 위로 무너졌다.

“3층 클리어. 중상 하나, 경상 다수.”

[인원 충원 필요하십니까.]

“필요 없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여기저기 남은 총알 자국 위로 튄 피는 아군의 것이기도 했고, 적의 것이기도 했다. 중상을 입은 이는 후방으로 물러나고, 경상을 입은 게 전부인 이들은 아픔을 티도 내지 않았다. 생포한 이들마저 끌려 나가면,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위층에서 선명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층에서 난장판이 벌어지는 동안 전투를 대비하며 계단 위를 선점했겠지. 이들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미끼였던 셈이다.

건물 내부가 온통 침묵에 잠긴 것 같았다. 그리페는 그 누구보다 이 침울한 분위기의 이유를 잘 알았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재정비에는 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위쪽에 적이 얼마나 있는지 당장 확인하기 어려웠다.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유난히 좁았다. 건장한 성인 두 명이면 꽉 차버릴 좁은 공간. 이쪽에서 인원수로 뚫고 나갈 수 있을 만한 구조는 아니었다.

“전원 대기. 계단을 뚫은 후 신호를 보낼 겁니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에 걱정이 어렸으나,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대책인 탓이었다. 단일 전투력으로는 그들 중 누구도 그리페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리페가 이러한 작전을 제안했을 때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몸을 사리지 않던 이였다. 이제 와 새삼 망설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팀장님. 저…… 방어막을 감아 드리겠습니다.”

제 주위로 파르스름한 방벽이 생기면, 그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총탄이 와르르 쏟아졌다. 피해를 흡수하는 보호막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면, 그리페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 그들에게로 돌진했다. 총은 센티넬 간의 싸움에서도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였으나, 그건 맞출 수 있을 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찰나지간 계단 끝까지 도달한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건물 내부라는 자각이 정말로 있긴 한 건가 싶었다. 기관총을 누가 이런 곳에서 쏴 갈길 생각을 한단 말인가. 기관총 앞에 앉았던 이의 등 뒤에 창을 찔러 넣는 순간, 그의 옆을 지키던 이가 짧은 단검을 들고 달려든다. 다리를 걷어차고, 칼을 휘두르는 손목을 쳐내면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페의 서슬 퍼런 창끝에 단숨에 폐가 꿰뚫린 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계단을 온몸으로 굴러 내려갔다.

열린 문 너머 굳은 표정을 한 팔마 놈들이 보였으나, 그리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뒤엉키는 건 제정신으로 할 만한 짓거리는 아니었다. 더불어 그 안에 지킬 게 있다면. 아직 숨이 붙은 반송장이 기관총과 함께 계단 아래로 떨어진 순간, 대기하던 이들이 총을 멀리 걷어차고 위층으로 진입했다. 그와 거의 같은 타이밍에 그리페는 제게 들러붙는 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머릿속이 진탕이 되었을 이가 비틀거리면, 그리페는 팔다리를 깊숙이 베어내고 멱살을 잡아 제 앞에 방패처럼 들었다.

승패의 조짐이 명확해지자마자, 그들은 망설임도 없이 이쪽을 향해 총을 쐈다. 힘줄이 잘려 늘어진 팔다리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제 바로 뒤에 따라붙은 팀원의 기척이 느껴지면, 그는 여전히 묵직한 남자를 든 채 4층 실내로 돌입했다. 문 바로 양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쇄도하는 이들은 그리페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이들이 각각 막아섰다.

가장 먼저 진입에 내부를 헤집어 놓는 건 그리페의 몫이었다. 좁은 입구로 들어서는 이들에게 포화가 집중되지 않도록. 자신을 막아서는 적은 아래에 있던 이들에 비하면 더 강하고, 더 필사적이었다. 한 번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스러지던 이들과는 달랐다. A급으로 분류될 법한 이들이 중간중간 끼어 있는 탓이었다. 일 대 일 상황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테지만, 다수와 싸울 때는 경우가 달랐다. 잠깐 사이에 탄환이며 칼날 따위가 살갗을 스치며 상처를 남겼다. 이 정도로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페는 피가 묻어 미끄러운 창대를 고쳐 쥐었다.

다시금 난전이다. 제가 이목을 끄는 사이 성공적으로 진입한 이들이 합류하고, 여기저기서 욕지거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시시때때로 울리는 총성에 귀가 먹먹했다. 아군의 피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행태는 그들 특유의 생존 본능인가, 혹은 팔마 내에 만연한 분위기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주위는 온통 쓰러진 이들로 엉망이었다. 의식을 잃은 이들과 아직 굳지도 않은 시체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구른다. 그들을 밟고 나아가는 것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페가 지나가는 곳마다 피가 튀고,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거기까지.”

허스키한 목소리가 난장판 위를 관통하면, 한순간에 싸움의 흐름이 끊겼다. 팔마 측 인원들은 새로이 나타난 이에게 복종하듯 무기를 거두고 물러섰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페는 실내 한 가운데 서서, 단창을 늘어트린 채 이미 아는 얼굴을 응시했다. 일리나, 한때 협회 소속이었던 S급 근접전투계 센티넬. 배신한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무슨 수를 써도 일리나가 다시 협회 소속이 될 리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 너를 볼 줄 몰랐는데, 반쪽짜리 S급.”

“……”

“왜, 호칭이 마음에 안 들어? 하긴, 파트너가 생겼다고 했던가. 이제 반쪽짜리라고 부르긴 좀 그렇지.”

센터 내에서만 소문이 난 게 아니었나. 그리페는 여유로운 듯 웃는 낯짝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게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이야 알려진대도 상관없었다. S급쯤 되는 이들이라면 대개 파트너가 있기 마련이었고, 여태 홀로 활동하던 제가 특이한 사례였다. 하지만 그 파트너가 누구인지 알려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가이드는 센티넬에게 필연적인 약점이었으므로. 제게는 특히 더.

어쩌면 센터 내에 팔마의 끄나풀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협회 관련 종사자는 간부부터 말단까지 필수적으로 협회 소속의 센티넬과 가이드 간의 관계에 대해 비밀 유지서약서를 쓴다. 이는 단순한 계약이 아니며, 이능을 이용한 속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금제를 파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탓이었다. 오늘도 이런저런 걱정을 담아 제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던 이리트의 목소리를 떠올린 그리페의 낯에 그림자가 졌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일리나를 반드시 꺾어야 했다.

“이젠 인사도 안 받아주네?”

입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괜히 휘말릴 게 분명했으며, 더군다나 말싸움은 그리페의 특기가 아니었다. 그는 입을 놀리느니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창대까지 흘러내린 피가 말라가는 탓에 손안이 온통 끈적거렸다. 완전히 젖어 미끄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은 일이다. 창을 고쳐 쥐고 상대를 겨누면, 일리나의 웃는 낯이 일순간 일그러졌다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내내 여유로운 듯 굴었으나, 그리페와는 별로 상성이 좋지 않았다. 제 주 무장이 너클인 탓이었다. 근접해서 싸운다는 것 외에는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을 정도인 상대였다. 지금이야 실내이니 그나마 그리페가 짧은 창을 들었지, 평소라면 그 자신의 키보다 더 긴 창을 주로 썼다. 피를 보지 않고서는 저쪽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다. 정신을 흔들어 놓기라도 해 보려 입을 놀렸건만, 외려 그의 낯은 더 싸늘해지기만 했다. 쌍욕을 짓씹어 뱉은 일리나가 먼저 그에게 돌격했다.

금속이 부딪칠 때마다 불티가 튄다. 창날이며 너클이 휘둘러지는 순간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두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근방에 접근하지 못한다. 공방이 오갈수록 상처도 늘어난다. 그러나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는 없고, 외려 살기를 흘려 가며 서로를 물어뜯는다. 잿빛 타일 위로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혈흔이 튄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격한 싸움은 지독하며, 승패의 추는 빠르게 기운다.

그리페에게 밀리는 건 이미 예상한 바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이 정도로 빠르게 밀릴 줄이야 알았겠느냐고. 일리나는 이를 악문 채 속으로만 뇌까렸다. 이건 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에 본 그리페 또한 강했지만,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다. 파트너와 꽤 잘 맞았나 보지. 힘든 기색을 숨기며 비아냥거리면, 단정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도발 또한 기술의 일종이라 할 수 있지만…… 일리나, 그런 건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낮은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제 성질만 긁힌 일리나는 거의 신경질에 가깝게 그리페의 얼굴을 후려쳤다. 쇳덩이에 얼굴을 얻어맞고도 그리페는 인상조차 크게 구기지 않았다. 반반한 낯 위로 삽시간에 새겨진 피멍, 그것을 대가로 일리나는 제 옆구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복부를 향해 파고드는 창날은 매서웠고, 위기를 직감하고 다급히 회피해 그 정도 부상에 그쳤다.

그 순간, 저 멀리 출입구 쪽에 소란이 일었다. 이 타이밍이라면 분명 제 쪽의 지원군이리라. 일리나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그리페를 공격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리의 상처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그렇다고 한들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는 주위의 일을 모두 제 부하들에게 맡긴 채, 오로지 자신만을 상대했다. 평소처럼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통수였다.

잘 단련된 S급의 몸뚱이는 이 정도의 타격으로 죽지 않는다. 고통만이 쌓여갈 뿐. 일리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붙여 협회로 보내야 했다. 협회를 배신하며 뱉은 정보의 대가를 뒤늦게 치르는 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제게 가까이 붙으려 애를 썼다. 이전이라면 고전했을지도 모를 상대였으나, 인제 와서는 무의미한 얘기였다.

그리페의 이능은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 그 자체였다. 창은 그저 쓰기 편해 애용할 뿐이었고, 박투를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능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그 사실만으로 이미 상대보다 조금 더 유리한 지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리페는 자만하지 않았다. 발악하는 이들을 상대할 때에 방심보다 치명적인 건 없는 탓이다. 일리나의 주먹이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벗겨지고, 정타를 맞는다면 자신이라 한들 뼈가 부러지고도 남는다. 그저 자신과 지독하리만치 상성이 맞지 않는 것뿐이지. 일리나를 처리한 후에는 남은 떨거지들도 처리해야 한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피곤함이 선명했다. 얼굴을 얻어맞은 탓에 입 안에 온통 비린 맛이 감돌았다.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는 상대였다. 창은 사람을 제압하기에 적당한 무기가 아니었다. 부러 틈을 내보이면, 여유가 없는 일리나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복부를 걷어차는 순간, 옆구리에 남은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일리나의 서슬 퍼런 눈이 굴러 저를 응시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는 손길,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은 이미 쓰러진 적을 응시했다. 상대는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더 싸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창을 크게 휘둘러 거치하면, 이미 널브러진 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육체는 바닥을 기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저를 노려보는 표정만은 살벌했다. 헛된 발악은 그리페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고 이내 스러졌다.

제게 쌓인 피해도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쪽의 상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머리를 잃은 이들의 기세가 삽시간에 내려앉고, 공격하기는커녕 도망치려는 이들이 속출했다. 손이 남는 이가 다가와 일리나를 잡아 묶는 것까지 확인한 그리페는 직전의 전투로 날뛰는 이능을 억눌렀다. 그가 층계참을 지날 즈음, 아래층에서 튀어나온 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문제없습니다. 아래층은?”

“정리 끝냈습니다.”

끝이다. 대원의 말에 긴장이 풀리고, 두통이 치솟았다. 그래도 아직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리페는 그에게 위쪽에도 소식을 알릴 것을 명령했다. 이능의 부작용도 부작용이었지만, 그보다도 여기저기가 아팠다. 옅게 앓는 소리를 낸 그리페는 벽에 기댄 채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삐딱한 자세와는 달리,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낮았다.

[오전 1시 13분, 작전 완료. …차량 대기 중입니다.]

센터로 돌아온 이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상관이며 관련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한 그리페의 보고는 형식적이기 그지없다. 기본적인 사항은 정보부 측에서 이미 전달한 탓이었다. 새벽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던 이들의 낯 여기저기에 피로함이 가득했다. 몇 마디 말로 끝날 거라면 차라리 내일로 미루는 게 낫지 않나. 어울리지 않게 나태한 생각을 하며, 제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알림음이 울렸다. 이리트의 문자였다. 신기할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그리페는 답장 대신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신호 한 번이 채 다 가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끝났어?]

“네, 방금. 안 자고 있었어요?”

[원래 좀 늦게 자. 상태는 괜찮아?]

“으음……”

[내 집으로 와.]

“지금 새벽 두 시, ……이리트?”

대답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 전화가 끊어졌다. 이렇게 끊어 버리면 안 갈 수도 없는데. 이리트는 간혹 묘한 부분에서 단호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페는 잠시간 이리트의 연락처가 뜨다가, 꺼진 화면을 응시했다. 검은 화면 위로 제 얼굴이 비쳤다. 붓기가 남은 뺨이 보기 흉하게 불그죽죽했다. 피를 닦아내는 것만으로는 다 지울 수 없는 전투의 흔적. [빨리 와.] 이리트의 재촉이 담긴 메시지가 잠시간 반짝이면, 그리페는 결국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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