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34)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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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협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내부보다는 협회 외부 세력이 자꾸만 협회를 넘보는 탓에,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균열의 수가 줄며 겨우 숨을 돌리나 싶던 이들은 곧장 협회를 노리는 범죄 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쉴 틈 없이 달려야 했다. 그건 제 고집으로 짧은 휴식기를 가졌다가 복귀한 그리페도 마찬가지였다. 실상 협회가 불안정한 틈을 노려야 할 정도의 조직은 대개 그리페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만큼 팀원 없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잦아졌다.

오늘 작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급습을 목적으로 하는 작전은 해가 다 진 뒤에야 시작되었다. 균열의 괴수를 상대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보통 저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협회나 집에서 대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제가 고집을 부려 현장까지 발을 들였다. 작전이 완료될 즈음에는 심야에 가까워질 테고, 그걸 고려하면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스며서. 차 문을 꼭 잠그고, 시동을 끈 채 차 내부 전등도 켜지 않는 게 좋겠다고 몇 번이나 당부한 끝에 그리페는 자리를 떴다.

이미 해가 저문 저녁, 골목길에 주차된 차는 일반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슬럼가라는 점이었지. 긁힌 흔적 하나 없이 말끔한 차는 이런 곳에서는 금세 눈에 띌 터였다. 하지만 차창마다 짙은 코팅을 입혀둔 탓에 앞 유리로 집요하게 응시하지 않는 이상 내부에 사람이 있음을 알아채긴 쉽지 않으리라. 창을 깨고 내부를 털어가는 이들이 요즘에도 있던가. 그 정도의 잡범은 크게 논란도 되지 않으니, 어렴풋이 그런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물론, 그 정도의 잡범을 처리하는 데에는 저 혼자여도 별문제가 없으니 이리트는 태연하기만 했다. 사실 바깥에서 보기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보단 차를 세워 둔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쪽이 덜 이상하게 느껴질 텐데. 시답잖은 생각이 자꾸만 스쳤으나, 그리페가 무슨 마음으로 제게 이런저런 당부를 해놓고 갔는지 알았다. 그리페가 신경을 기울일 줄 알면서도 현장까지 나온 제가 그렇듯이.

제가 나서서 싸울 수도 없으니, 그리페를 기다리는 중엔 별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등받이를 조절해 편히 기댄 이리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그리페와 약속한 장기 휴가는 목전에 와 있는 듯하면서도 날짜가 영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다. 예정보다 레만을 빨리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느릿하게 눈을 뜬 이리트는 어두운 창밖을 응시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시간이 괜찮냐는 물음에 한참이나 침묵하던 진은 목이 멘 듯 갈라진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겠다는 말을 덧붙여서. 카페에서 헤어지던 그 날처럼 어색하게 통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문자는 쉬이 잊을 수 없었다. 기회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진이 이런 사안으로 괜한 거짓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일이 고작 하루 남은 지금 시점이 되어서도. 한숨을 푹 내쉬는데, 누군가가 갑작스레 차창을 두드렸다. 이리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누군가 다가와 차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기색은 없었는데. 처음부터 뒷자리에 가 있을 걸 그랬나. 그러면 앞에서 들여다봐도 그림자가 드리워 제가 덜 눈에 띄었을 텐데. 창밖으로 보이는 이는 약이라도 했는지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주위가 어두운 탓이라기엔 지나친 수준이었다. 그리페가 단독으로 기습하려는 만큼, 따라붙은 현장직도 없었다. 작전을 보조하는 오퍼레이터에게라도 문자를 남긴 이리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대답이 없자, 유리를 두드리는 강도가 조금씩 강해졌다. 숫제 차체를 후려치는 수준에 이르면, 도저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런 뒷골목에서 약을 빨고 알지도 못하는 상대의 차를 두드려 대다간 언제 총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아니, 어쩌면 낯선 차라 이따위로 구는 걸지도 모르지. 언제든지 무기를 꺼낼 수 있도록 홀스터 위에 한 손을 얹은 이리트는 차창을 조금 내렸다. 손가락도 밀어 넣기 힘들 만큼 좁은 틈. 창문이 열리는 기색이 보이자 잠시간 멈췄던 이는 눈이나 겨우 마주칠 수 있도록 좁게 열린 틈새에 대뜸 욕을 내뱉었다.

“남의 차를 그렇게 두드려 댔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미친놈이었네. 내려!”

“싫은데.”

“곱게 말할 때 따르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걸.”

“계속해 봐. 너 같은 놈 머리에 총 한 발 꽂아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

찔끔 입을 다문 남자는 이내 차 주위를 배회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차 자체를 빼앗는 게 목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이리트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없으려니 이런 식으로 더러운 꼴을 보게 된단 말인가. 몇 걸음 떨어진 이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녹슨 쇠 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잘못 만졌다간 외려 쥔 사람이 파상풍이 걸릴 것 같은 낡고 더러운 물건이었으나, 차체를 망가트리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남자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직감한 이리트가 잇새로 욕을 씹어 뱉었다. 현장을 다니다 보면 차가 상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이건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이리트의 시선이 빠르게 차 바깥을 비추는 거울을 훑었다.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저 미치광이가 정말로 혼자일까. 게다가 골목이 좁아 차로 상대를 들이받아 버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손을 끼워 넣을 수 없을 만한 틈 사이로는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정신없이 차 주변을 맴도는 이를 깔끔하게 적중시키기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 시간이 없었다. 몇 걸음 더 물러선 남자가 쇠 파이프를 높이 치켜든 채 달려왔으므로. 오퍼레이터에게도 연락했고, 바로 근처에 그리페가 있으니 큰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이능을 지닌 이라 해도 약에 취했을 때는 제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성난 소처럼 무턱대고 달려드는 타이밍을 맞춰 문을 힘껏 열어젖히면,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상대가 차 문에 부딪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리트는 웅크린 남자를 그대로 걷어찼다. 부딪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그저 그런 양아치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총을 쏴 갈기는 건 보류해야 했다. 이런 시답잖은 약쟁이를 상대로 발포했다간 뒤처리가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몸싸움을 하고 싶은 건 아닌데. 하지만 제게 주어진 건 선택지가 아니었다. 지금, 바로 여기에 그리페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해결책은 하나뿐이었으므로.

이능조차 지니지 않은 이를 상대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제가 최근 현장에서 구를 필요가 없어 실력에 녹이 슬었다고 해도. 비틀거리는 이, 묵직한 파이프를 쥔 남자의 손목을 쥐어 당긴 이리트가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저를 붙잡은 손을 뿌리치려는 듯, 남자는 붙잡힌 손을 마구잡이로 당겼다. 차라리 상대가 좀 덜 멍청하게 굴었다면 기분이 조금 덜 상했을까. 손목을 당겨 상대를 제 쪽으로 끌어온 이리트가 벌써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다시 가격했다. 남자의 잇새로 튄 핏방울이 이리트의 창백한 뺨에 묻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가로등도 이따금 몇 분씩 켜지지 않을 만큼 외진 골목에 주차된 대형 세단은 낯설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정성스레 가꾸었는지, 손으로 문질러도 먼지 한 톨 묻어날 것 같지 않은 차를 보고 있자면 흥미가 일었다. 애초에 제법 값이 나가는 물건인 데다, 외관이 이 정도라면 내부 기관도 관리가 잘 되었을 게 분명하니 더욱. 사각지대에 숨어 살핀 세단의 탑승자는 고작 한 명이었다. 이런 곳에 차를 세워 둔 채 앉아 있을 이라면 적어도 이 근방의 생리를 모르는 뜨내기일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위기감이라고는 없이 차창을 마구잡이로 두드렸는데.

창 틈새로 대거리를 할 때부터 남자는 일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놀란 기색이 없는 건 물론이고, 희미한 불쾌감까지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 좁은 틈새로 바라본 상대는 분명 앳되어 보였으나, 동시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안전한 곳에서 입을 터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온갖 물건 중에 가장 쓸만한 것을 주워 든 남자는 창을 깨 버릴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일순간 차 문을 열어젖히고 일어선 이는 저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컸다. 하나 체격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충격으로 떠밀렸다. 거기서부터는 일어난 일을 하나씩 나열하고 있을 만큼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뺨, 입안에 온통 비릿하고 찝찌름한 피 맛이 번졌다. 욕지거리 한 마디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무언가 걸렸나 싶더니, 곧바로 등과 머리에 강한 충격이 번졌다. 일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저를 때려눕힌 상대의 얼굴이었다. 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어슴푸레한 가로등 빛 아래 그림자가 진, 표정이 없는 창백한 얼굴은 이런 상황에서도 제법 반반해 보였다. 그러나 외모에 속았음을 아는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방심한 것뿐이었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지는 맥없이 버둥거렸다. 한 박자 늦게 제 몸통 위에 구둣발이 얹혀 있음을 깨달은 남자는 발목이라도 쥐어뜯을 작정으로 저를 짓밟은 이를 붙잡았다. 철컥, 하는 익히 들어본 적 있는 금속성이 울리기 전까지는. 짐짓 방만한 자세로 총을 겨눈 이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기색이었다. 저 같은 건 상대도 안 된다는 듯이. 남자가 씨근덕거렸으나, 누구든 눈앞에 시커먼 총구가 자리한다면 쉬이 움직이지 못하리라.

“목적.”

“씹, 뭐 이딴 게……”

꼴에 자존심은 센 모양이지. 하지만 이쪽은 시답잖은 허세 따위에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만 누르고 있던 발에 조금 더 체중을 실으면, 남자는 금세 컥 소리를 냈다. 죽이지 않으면 뒤처리가 번거로워질 일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도 눈을 부라리는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제 기분까지도 더없이 불쾌해지는 게 문제였으나, 피할 수도 없었다. 발아래 느껴지는 남자의 몸은 불쾌하게 움찔거리고 꿈틀거리길 반복했다. 벌레를 짓밟듯 힘을 주면, 남자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윽, 빨리……!”

앞뒤가 모조리 잘려 나간 문장이었으나,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생각을 두 번 거듭할 필요는 없었다.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은 이들의 본거지였다. 몇 명이 더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이목이며 뒤처리를 걱정하기에는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곧장 남자의 어깻죽지에 총탄 하나를 쑤셔 박아 준 이리트는 비명을 지르며 웅크리는 남자를 힘껏 걷어찼다. 색 바랜 아스팔트 위에 핏자국이 튀고,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바닥을 구르는 이의 종아리에도 한 발 쏴 갈긴 이리트는 제 차를 등 뒤에 둔 채 주위를 살폈다.

내내 저를 걱정하던 그리페가 옳았다. 하지만 이런 곳인 줄 알면서도 따라온 건 저였으니, 상황을 수습하는 것 역시도 제 몫이었다. 이 정도는 해야 단독 작전이 증가한 그리페가 제 걱정을 좀 덜 하겠지.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건 오른쪽, 이 골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십 초가량. 권총을 단단히 쥔 이리트는 그림자로 반쯤 가려진 골목에 총을 겨누었다. 어깨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남자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최소 둘, 많아도 셋을 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성인의 몸통 위치보다 조금 아래를 조준한 이리트는 차분하게 초를 세었다. 그들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찰나 불을 내뿜고, 알싸한 화약 냄새가 퍼졌다. 달려 나오던 이가 순식간에 넘어지며 바닥을 구르고, 나란히 뛰어오던 이는 당황한 듯 제 동료를 힐끗거리면서도 총을 꺼내 들었다. 적어도 이 약쟁이보다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총구를 겨눈 지금, 그나마 멀쩡한 대화가 될 것 같았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일단 몸을 사리고 보자고 생각했는지 상대가 입을 열었다.

“너, 어디서 나왔어?”

“그런 게 중요하진 않지.”

“……원하는 게 뭐야.”

“너희가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좋겠는데.”

“네가 끼친 피해가 얼마인 줄 알아?”

“말 똑바로 해. 그쪽이 먼저 날 건드렸잖아. 지켜보다가 위급해지니 튀어나온 것 아닌가.”

아니, 조금 전의 생각은 제 오산이었다. 이쪽도 만만찮게 멍청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에게 눈짓하는 것 따위가. 이쪽이 눈치를 못 챌 줄 아는 건지. 아니면 상대를 작살내 놓는 모습을 보고서도 뜨내기 따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총구 앞에서 한눈을 팔았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망설임 없는 격발. 총성이 울리는 동시에 남자가 비틀거렸다. 당연히 적중할 줄 알았다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은 이리트는 꿈틀거리는 남자를 서둘러 일으켰다. 그새 피를 제법 흘렸는지, 남자가 꾸물거리던 바닥이 젖은 채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를 제 앞에 세운 이리트는 목에 팔을 감아 남자를 지탱했다. 이래서야 영락없이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잡범 같지 않나. 물론 이 남자는 그들의 생리를 고려하면 이미 인질로서의 가치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남자의 생존 가능성은 그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만큼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으므로. 이건 제게도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남자가 제 손안에서 죽기 전에 결론이 나야 했다. 오로지 자신의 승리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도, 옷이 피로 더럽혀지는 것도 불쾌했다. 하지만 남자를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인질 이전에 방패로 쓰기에 이만한 대체제가 없었으므로. 뒤늦게 남자의 동료 둘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총을 다시금 겨누었으나, 저울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음은 그도 알 터였다. 최소한의 정신머리가 있다면. 어설프게 다 죽어가는 이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대신, 이리트는 다시금 눈앞의 이들에게 총구를 돌렸다.

“총 내려놔. 살려줄 테니까.”

“이 새끼가…!”

“자신 있으면 쏴도 돼. 그런데……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 좋게 말할 때 총 내려놓고 양손 들어. 그러면 이 자식 두고 내가 먼저 자리를 뜨지.”

“……”

섣불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다면, 제가 조금 도와줄 순 있었다. 두 사람이 이리트를 향해 총을 디밀고 있었으나, 이리트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대화에 끼지 않고 벽에 기대선 채 총을 겨눈 이에게 총구를 돌린 이리트는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팔 옆면을 길게 스치고 지나간 탄환, 삽시간에 팔 옆면이 깎여 나간 이가 이를 악물었다. 시간 없다고 말했어. 이미 제 옷이 온통 피범벅이 된 데다, 오퍼레이터에게 보고까지 해 두었으니 그리페도 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리라. 그래도 상황을 다 마무리 짓고 말로 일어난 일을 전하는 것과 이 꼴을 그대로 목격하는 건 경우가 달랐다.

그가 피를 보는 데 익숙하리라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싸우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페가 작전을 완료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아마도 지금 즈음이면 상황을 대충 마무리 짓고 있을 터였다. 그리페가 돌아오기 전에 우선 차를 옮겨 두고, 협회 측에 대강 보고하면 되겠지. 그들이 대치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어서.”

낮은 목소리는 유난히 명확하게 귓가에 꽂혔다. 차라리 그가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에 미약하게나마 흥분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좀 나았을까. 하나 가면이라도 쓴 듯 차가운 표정이며 형형한 광망이 이는 자색 눈은 불쾌감만을 희미하게 내비칠 뿐이었다. 어쩌면 센티넬일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적어도 뭘 모르고 이곳에 발을 들인 얼뜨기일 리가 없었다. 싸움을 이어간들 승기를 잡기는 어렵겠다고, 남자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지원을 더 부르면 달라질까. 하지만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 자리의 모두가 죽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입안으로 욕을 짓씹어 삼킨 이는 총을 버리려 했다.

일순간 스친 빛살, 파공음이 뒤늦게 울렸다. 팔 전체에 강렬한 충격이 퍼지고, 어찌할 새도 없이 힘 풀린 손아귀에서 총이 빠져나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 총을 다시 주워들 수도 없었다. 굳어 버린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급작스레 나타난 건 핏자국이 남은 기다란 창이었다. 웬만한 사람보다 더 긴 창은 담벼락에 큼직한 금을 새기며 박히고서도 힘이 남은 듯 진동했다. 창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반짝이는 금발을 지닌 이가 보였다.

검은 전투복이 눈에 익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같은 장비를 입고 다니는 집단은 하나뿐이었다. 협회에 소속된 센티넬이란 의미였다. 뒤늦게 나타난 금발 쪽이 협회의 센티넬이라면. 여태까지 저와 대치하던 쪽은. 남자의 떨리는 눈이 사복을 입은 이를 향했다. 센티넬이 싸고돌 법한 존재는 대개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저런 게, 다수에게 기세조차 한 번 밀리지 않고 태연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놈이 가이드라고. 차라리 센티넬끼리 연애를 한다는 게 더 믿음직스러울 지경이었다. 저와 제 동료는 안중에도 없는 듯, 날 듯이 빠르게 다가온 금발의 센티넬은 상처조차 입지 않은 이의 안위를 살폈다.

“이리트, 괜찮아요?”

“어떻게 벌써 왔어.”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요. 이리트, 피가……”

“……내 피 아니야.”

조금만 더 늦게 오지. 그리페보다 먼저 날아온 창을 알아본 이리트는 목을 휘감아서 들고 있던 남자부터 내버렸다. 잠깐 사이 의식을 잃고 발치를 구르는 이를 슬쩍 밀어내고, 내내 겨누고 있던 총을 거두었다. 정말로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페는 쓰러진 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저를 살폈다. 가죽 장갑을 벗은 그리페가 엄지로 뺨을 쓸었다. 굳어버린 핏자국을 닦아내려는 듯.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한 파란 눈을 마주하면, 당연한 수순처럼 긴장이 풀렸다. 잊었던 추위가 뒤늦게 성큼 다가와, 이리트는 그리페의 따듯한 손을 감싸 쥐었다.

“저것들은 됐으니까, 집에 가자.”

“당신을 말릴 걸 그랬어.”

“내가 굳이 오겠다고 한 거잖아. 안 다쳤어, 괜찮아. 가자, 어서.”

“하지만 이 사람들이 아직,”

“협회 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야.”

“위험할 것 같지만…… 알겠어요. 운전은 내가 할 테니, 얼른 타요.”

“너 태워 가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아무 일도 없을 때의 이야기지, 이리트.”

잠시간 저를 빤히 쳐다보던 이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뜻을 꺾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조수석 문을 열어준 그리페는 이리트의 안전벨트까지 매어준 후에 문을 닫았다.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탄 그리페는 거울 너머로 바깥을 살폈다. 쓰러진 이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이리트와 대치하고 있던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쫓아올 기색은 아니었으나, 정말 이대로 자리를 떠도 되는 걸까.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챈 듯, 이리트가 한쪽 손을 슬쩍 붙잡아 왔다.

적진 내에서 보고받았을 때부터 이리트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겨우 한숨 돌리고, 뒤늦게 제대로 살핀 이리트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전의 좋지 않은 기억 탓일까. 작전지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말할 걸 그랬지. 그대로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리트의 눈앞에서 티 낼 수도 없는 사안이었다. 애써 한숨을 삼킨 그리페가 액셀을 밟았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네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어.”

“오퍼레이터가 당신에게 연락을 받은 직후에 알려줬어요.”

“어쩐지.”

“정말 다친 곳 없는 거 맞지, 이리트. 옷이 온통 피범벅인데.”

“안 다쳤대도. 집에 가면 벗겨 봐.”

가벼운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분명한 의도를 담고 하는 말인지. 어쨌거나 이 정도로 당당하니, 정말로 다친 곳은 없을 터였다. 힐끗 곁눈질한 이리트는 이전보다는 조금 편안한 기색이었다. 일단 한시름 놓으면,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정보부에 소속된 이들 중 일부는 현장에도 심심찮게 파견되곤 했다. 개중에 이능을 지닌 이들도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리트는 가이드였다. 게다가 정보부 소속으로서 명령을 따라 현장에 파견될 때라면 성인조차 되지 않은 시기였으리라.

총을 겨눈 이들을 본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창을 던졌다. 그들이 쥔 총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바라본 이리트는 온통 피로 범벅된 옷을 입고서도 차분한 모양새였다. 곧잘 현장에서 가이딩하는 이였으니 피를 보는 것 자체는 익숙할 테지만, 제 옷이 피로 젖는 건 다른 문제였다. 눈이 마주친 이리트는 조금 놀란 것처럼 보였고, 분명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리트의 발치에서 구르던 이의 몸에는 총상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어떤 경위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이리트의 옷을 적신 피는 그 사람의 것이리라.

이리트가 총기를 다루는 데 익숙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거나 허세를 부리는 이가 아니었으니, 웬만큼 싸움에 능숙하다는 것도 더하거나 뺄 부분 없이 담백한 사실일 터였다. 이리트가 저를 구하러 왔던 날 이후, 러셀하르트가 했던 말이 이 순간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리페의 손끝이 핸들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제가 목격한 단편적인 상황만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리트가 협회 아래에서 험한 꼴을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보았을 것 같다는 확신만은 강렬해졌다. 이제는 이리트의 손에 굳은살이 없음이 기적처럼 느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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