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23)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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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주요 시설이 지하에 있을 거라던 이리트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적막하던 상층과 달리 이곳은 1층임에도 몇 명씩 뭉친 이들이 돌아다녔다. 은신에 특화된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자신에게는 이들을 모두 피할 방법이 없었다. 내부 구조는 대강 머리에 넣어 두었으나, 닫힌 방 안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는 이리트도 알지 못했다.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긴 그리페는 상황을 가늠했다.

“이리트.”

[듣고 있어.]

“최대한 피해 보겠지만, 전면전도 염두에 두어야 할 거예요.”

[응. 특히 강해 보이는 센티넬은 없어 보였는데, 맞아?]

“네, 아직은요. 이런 이들만 있으면 혼자서도 밀고 나갈 수는 있겠지만……”

[안 돼.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레만도 여기 있을 거야. ……웨이드, 외부에서 시선 끄는 건 관둬. 밀고 들어가라고 해.]

“신호해요. 시선 끌린 틈을 타서 더 내려갈 테니까.”

잡음과 함께 통신이 끊어지고, 그리페는 숨죽인 채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언제까지고 그들이 시선을 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는 건 거의 힘을 낭비하는 꼴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리트는 당장 이곳에 진입할 수 없으며, 그건 곧 이능의 반동이 거칠게 들이친대도 자신을 붙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가만히 때를 기다리고 있자면 불안감이 조금씩 스몄다. 누군가는 오늘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많아 봐야 두세 번쯤 본 얼굴인데도, 그들이 죽지 않았으면 했다.

“이리트.”

[왜.]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런 때에 꺼내기 적절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 말끝을 흐리면, 짧고 희미한 웃음소리가 스쳤다. 이미 말을 꺼낸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초조해? 게다가 이리트는 제가 말을 얼버무릴 새도 주지 않고 정곡을 찔러 왔으므로. ……조금. 상대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내리감은 그리페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잠시간 말이 없던 이리트는 곧 바깥의 상황을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타인을 향할 때면 늘 열의가 없는, 싱겁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담백한 목소리로. 아직은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며, 몇 분 내로 그들이 내부로 진입할 것 같다고 했다. 저들이 움직이는 꼴을 보아하니 차라리 본거지로 끌어들여 싸우려는 게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어투까지 차분해서, 그리페는 잠시간의 불안과 초조도 잊고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대놓고 싸운다면…… 자료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치우지 않을까요.”

[괜찮아, 아직은. 저들이 본진 내에서도 밀린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건 결국……”

[응. 그런데 그것들이 자료를 다 지워 버리려고 들어도 상관없어. 아무리 레만이라고 해도 이런 시설을 쉽게 포기하진 못할 테니까.]

‘이런 시설’이 무엇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게 어떤 종류이건, 팔마가 했던 일과 결이 다르지 않음을 직감한 탓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하고 있자면, 이리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그들이 내부로 진입할 테니, 움직일 준비를 하라고. 통신이 끊어질 때 특유의 잡음과 동시에, 내부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내부 인원의 대다수가 순식간에 한곳으로 이동했다. 외부에서 시선을 끌던 이들 중에는 몇 안 되는 S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센티넬에게 메겨지는 등급, 그에 따른 격차는 기실 어지간해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나 S급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인간이었으며,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이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극도로 비효율적인 전투였으나, 그것 외에 수단이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간과한 것은 이번 작전에 동원된 S급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레만이 나선다면 그토록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을 테지만, 아마도 그가 먼저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으리라. 단순히 명령에 따르는 이들이 대다수인 저들과 달리, 레만은 이리트와 제가 분명 이곳에 있음을 확신했을 테니. 레만의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지금 바깥에서 맞붙어 싸우고 있는 이들도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라고 떠들건 레만이 귀담을 리도 없거니와, 애초에 저들 대다수가 범죄자임을 생각하면 더욱 제 알 바가 아니었지. 끊임없이 이어지려던 생각의 고리를 잘라낸 그리페가 걸음을 옮겼다.

내부 인테리어를 싹 뜯어고쳤다고 한들, 기본 골조는 가정집 구조 그대로였다. 거실을 기준으로 달린 방 여러 개. 각각의 입구는 하나였으며,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드물게 이어진 공간이 있다 한들 그건 방 안에 딸린 작은 공간으로 보는 게 더 나았다. 게다가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은 큰 가구도 없이 그저 텅 비어있었다. 여러모로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공간은 아니었으나, 제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나마 몸을 숨길만 한 공간은 여기저기 붙은 방이었으나, 바깥에서 안의 기척을 살피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만큼 더욱.

이리트가 제게 바라는 것 역시 제대로 된 첩보 작전이 아닐 터였다. 애초에 제가 그런 일에 어울리는 인재가 아니었으므로. 들킨다면 피할 곳이 없었다. 아예 건물 바깥으로 나가 우회한다면 모를까. 건물 주변에 설치된 카메라에 사각이 없으니, 실상 그마저도 좋은 대처방안은 아니었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틈을 타 그리페는 들어오기 전에 본 창고 같은 방으로 숨어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들이치는 바람, 이전과 달리 불이 훤히 켜진 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넓은 시야각 끝에 스치는 사람의 형태. 상대가 급히 무기를 꺼내는 순간, 그리페는 거의 한 걸음 만에 상대의 앞에 당도했다. 창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손목을 강하게 쳐내면, 팔이 뒤로 휙 꺾이며 쇳덩어리가 바닥을 굴렀다. 턱을 올려 치면 입술 새로 선혈이 튀어 선반 위에 놓인 물건을 더럽혔다. 선반을 쓰러트릴 듯 뒤로 넘어가는 몸, 멱을 붙잡아 당기면 목이 졸린 상대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터트렸다.

혀라도 깨물었는지, 사방으로 피가 튀어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그리페가 상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컥, 하는 짧은 신음을 끝으로 의식을 잃은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몸을 느릿하게 내려놓고, 뒤늦게 그리페는 피가 튄 제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비교적 안전할 걸 알고 들어선 곳이었으나, 역시 방에 들르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한 명 정도라면 큰 소란 없이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셋만 넘어가더라도 불가능해지는 일이었다. 가라앉은 벽안이 바닥에 널브러진 이를 향했다. 벌어진 입안에 고인 피는 금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위층에서 맞닥뜨린 이와 달리 묶어둘 필요는 없으리라.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문가에 접근하던 그가 일순 걸음을 멈추었다. 찰나 스친 직감, 그리페는 상대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한 차례 피격당한 부위가 밟혀 고통스러운 듯 펄떡인 몸, 벌벌 떨리는 손이 제 발목을 붙잡았다. 분명 의식이 없어야 할 상대였다.

“크윽, 헉…… 저리, 저리 꺼져……!”

가까스로 내뱉는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엉망이었다. 신체 능력은 일반인에 가깝던 연구원과 달리, 전투에 익숙한 센티넬은 의식을 잃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죽여야 하나? 고민이 스치는 순간, 귓가에서 익숙한 잡음이 울렸다. [정확히 2분 뒤에 근방 전기를 차단할 거야.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테니, 바깥에서 폭약도 터트릴 거야. 건물 내부에는 영향 없을 수준이니 알아두기만 하고…… 그때 움직여, 그리페.] 제 발목을 쥐어뜯으려 애쓰는 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리페는 시선을 돌려 손목 안쪽으로 착용한 시계를 확인했다.

기절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죽이는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한 그리페는 한숨을 삼켰다. 그를 지르밟은 다리에 조금 더 무게를 싣자,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다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치뜬 눈은 실핏줄이 죄 터져 시뻘게졌다. 벌어진 입술 새로는 신음조차 새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린 그리페가 창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움찔거림을 끝으로 절명한 이의 팔이 맥없이 늘어졌다. 창을 빼내면 구멍이 뚫린 목을 중심으로 피가 새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 핏물을 털어내고 무기를 도로 거치하는 순간, 바깥에서 굉음이 울리는 동시에 희부연 빛을 발하던 형광등이 픽 꺼졌다.

이곳이 전장임을 잊어서는 안 됐다. 이제 와 피를 한 번 더 묻힌들 제 손이 별달리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단번에 경추가 꿰뚫려 즉사한 이를 뒤로하고, 그리페는 바깥으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외부의 빛이 새어 들어왔으나, 먹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하늘은 실내를 밝히기에는 광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겨울의 해는 빠르게 저물기 마련이었으므로 더욱. 방을 나서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마친 그리페는 망설임이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귓가에 다시금 이리트의 목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주요 설비가 있는 곳에는 비상용 발전기를 설치했을 거야. 그러니 팀원과 합류해.]

요컨대, 급작스러운 정전이며 폭음으로 혼란에 빠진 이들을 쓰러트리라는 뜻이었다. 어설픈 밀정 흉내보다는 쉬운 일이었으므로, 그리페는 입구 쪽을 둘러싼 이들의 뒤를 쳤다. 창을 길게 휘두르면, 이변을 눈치채지도 못한 이들의 몸뚱이가 갈라졌다.

나름의 대비로 방탄복 따위를 걸쳤으나, 기실 센티넬이란 현대 화기가 통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싸우는 존재였다. 그러한 사실은 상대라고 다르지 않을진대. 어쩌면 이들은 주로 급이 낮은 센티넬을 상대하거나, 보통 사람과 싸우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무용함을 알면서도 보호구를 착용하는 건 저 또한 매한가지이지 않은가. 하잘것없는 의문은 빠르게 스러졌다. 등허리를 베인 이들이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그리페는 다시 한번 창을 내질렀다. 잘 벼려진 날, 단숨에 몇몇 이들의 몸뚱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포탄에 꿰뚫리기라도 한 듯 거친 단면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찰나 스친 정적, 직후에 이어지는 비명은 누구의 것이었는지. 누가 내지른 비명이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잠시 후에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제 발로 서 있지 못할 테니. 문이 있는 쪽을 향했던 이들이 뒤돌아 자신을 응시했다. 그들의 등 뒤에서 새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 여러 감정이 뒤섞여 반들거리는 눈이며 그들이 손에 쥔 무기만이 희미한 빛을 이따금 반사했다.

그들의 뒤에서는 여전히 기합이며 비명, 신음 따위가 들려왔다. 저와 자신의 동료 사이에 낀 꼴이 되었음을 그들이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핏 훑은 바로는 이들 중에 자신과 맞먹을 만한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욱 여유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긴 창이 희미한 빛을 반사하여 번득이는 궤적마다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기백에 밀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이들에게로 다가서면, 더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은 이들이 마구잡이로 무기를 내질렀다. 힘조차 제대로 실리지 않은 날붙이 따위를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타일 바닥 위로 날붙이가 떨어져 구르고, 뒤이어 사람의 몸뚱이가 무너져 내렸다. 제 발로 서 있는 이들보다 너부러진 이들이 더 많아진 시점, 바깥에서 들어온 이들과 눈이 마주친 그리페가 눈으로만 인사를 건넸다.

“내려가시죠. 너, 그리고 거기 두 사람은 남아서 이곳을 정리한 뒤에 합류해라.”

이곳에 남은 이들은 이미 체념한 채였다. 그러나 올슨의 동료인 또 다른 S급 센티넬, 모건은 당연한 듯 다른 이들에게 잔당을 처리하라 일렀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삼킨 그리페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설핏 본 그들은 흙먼지며 피 따위를 뒤집어쓰긴 했어도 크게 다친 듯 보이지는 않았다. 몇몇은 후방으로 빠진 듯했으나, 이 정도 인력 손실이라면 예상 이상으로 좋은 결과였다.

중요한 건 아래에 버티고 선 레만을 마주치고 난 이후에 일어날 일이었으나, 아군의 수 또한 무시 못 할 사항 중 하나였다. 회색 타일 위에 진득한 발자국을 새기며 걷고 있자면 몇 번의 울먹임과 신음, 숨죽인 비명을 마지막으로 등 뒤가 고요해졌다. 아마 그들은 죽었을 테지. 부러 뒤돌아보지 않은 그리페가 계단이 있는 문 앞에 멈추었다.

“이 아래는 위험할 겁니다.”

“압니다.”

새파란 눈이 망설임조차 없이 대답하는 모건의 얼굴을 향했다. 안다니. 무엇을 안단 말인가. 올슨의 동료 중에서도 정신계 이능에 당한 이들이 존재하며, 저와 이리트가 겪은 일은 상대적으로 그리 심한 수준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대의 태도를 마주하면 그저 의문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정신계 이능을 지닌 센티넬의 취급이 그리 좋지 않은 이유를 알면서도 그런 반응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페의 표정은 그를 잘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그저 건조할 뿐이었다. 잘 정돈되어 차분한 낯은 기실 직전까지 피가 튀는 싸움을 한 사람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말끔했다. 전투로 인한 일말의 흥분조차 느껴지지 않는 표정, 그의 얼굴에 점점이 튄 핏자국이 아니었다면 앞선 전투에 참여했는지조차 의심되었으리라. 먼저 고개를 돌린 모건이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했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면, 계단 저 아래에서부터 창백한 빛이 스며 나왔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비롯해 발걸음 소리 따위가 뒤섞여 일으키는 소음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들의 진짜 전력이 이 아래에 존재했다. 제각각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위로 올려보내진 이들은 실상 버림받은 것과 다름이 없음을. 단체의 성향은 우두머리를 따라가기 마련이라지만, 이들에게는 동료애라는 것이 존재하지조차 않는 걸까. 하나 의문을 곱씹을 시간은 없었다.

상대는 이미 위쪽의 상황을 알았다. 무작정 돌입하는 건 실상 죽으려 드는 꼴이었다. 위쪽의 내부 구조를 이미 들어가 본 적 있는 듯이 꿰고 있던 이리트조차 저 아래 숨은 장소의 구조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래에서 대기하는 이들의 존재는 이미 상정했던 사안이었으므로, 그리페는 팀원에게 수신호를 보낸 뒤 섬광탄 두 개를 까 아래로 던져 넣었다. 눈가를 가리는 동시에, 제가 착용한 카메라 렌즈 앞을 가렸다. 이미 작전을 알고 있는 데다, 화면 너머로 보는 이리트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닥을 구르는 물체의 정체를 찰나 깨달은 이들이 무어라 소리를 질렀으나, 온 시야가 새하얗게 물드는 것이 먼저였다. 계단 틈새로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새고, 폭음이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내부에 태양이 떠오른 듯 찬란한 빛이 일었다가, 일순 사라졌다. 하나 섬광탄의 효과는 겨우 몇 초면 끝이 났다. 계단 난간을 뛰어넘고 내려선 그리페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폭발의 여파로 입구 근처의 형광등이 모조리 터져 나가 유리 조각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불길의 흔적이 남은 서류가 팔랑팔랑 날리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에 유리 조각이 바작바작 밟혔다. 누군가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겨우 서 있었으나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지만 섬광탄 따위에 당하는 이들을 처리하는 건 제 몫이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 때 이르게 찾아온 어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리페가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이들에게 창을 내질렀다.

살갗을 가르는 감각이 선연하고, 소매와 장갑 틈새로 체온을 품은 피가 스몄다. 언제가 되었든 달갑지 않은 일이며, 동시에 멈출 수도 없는 일. 언제고 은퇴를 생각하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였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만큼은 스스로 발을 들였으므로. 잡념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적을 겨누는 그리페의 창끝은 무뎌지는 법이 없었다. 짧은 순간 무력화되었던 이들이 차차 정신을 차리고, 등 뒤에서 냉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그리페의 앞을 제대로 가로막지 못했다. 비명과 신음이 뒤섞이는 난장판은 원치 않게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일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는지, 입구 정 반대에 자리한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광원을 등 뒤에 두고 선 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판에 상대의 안면 여부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지. 정보부의 절반쯤이 레만의 수족이며, 그들의 존재가 레만에게 있어 도구와 다름이 없음을 아는 탓에 자꾸만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난 이는 얼핏 보기에도 잔챙이들과는 달랐다. 짐짓 여유로운 듯 선 자세, 수라장에도 한 번 당혹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걸음을 옮기는 이. 내내 멈추는 법 없던 그리페가 무기를 느슨하게 쥔 채 다가오는 상대를 응시했다. 상대는 분명 편안하게 걸어왔으나, 그 와중에도 빈틈이 없었다.

“안녕.”

얼핏 듣기에는 여상히 말을 건네는 듯한 투였다. 지금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자면, 여전히 그림자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 역시 S급에 준하는 센티넬일 테지. 그런데 그에게 드리운 어둠은 어딘가 이상했다. 애초에 지금 여기에 광원이 없다고 한들, 이 너머의 공간도 지하인 건 매한가지였다. 일반적인 천장 조명이 이런 식으로, 이만큼 환히 쏟아질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가 지닌 이능은. 생각이 가닿는 순간, 그의 얼굴을 덮은 어둠이 꿈틀거린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기실 센티넬의 이능이란 온갖 방식으로 발현되고는 했으므로, 불가능을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강렬한 광원을 등지고 선 이가 지녔을 힘의 정체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림자. 나지막한 읊조림이었으나 이리트에게 전달되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터였다. 상대 역시 말을 들었는지, 여유만만한 작태로 다가오던 이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 순간, 발목 언저리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할 그림자가 새카만 덩어리가 되어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창을 휘둘러 덩어리처럼 보이는 물체를 갈랐으나, 창날에는 무엇 하나 스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듯 가벼운 움직임. 이능이라는 것 자체가 타당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라 하지만,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분명 제 그림자일 덩어리는 제 발목을 붙잡고 있건만, 자신은 그걸 건드려 봤자 무의미하다니.

물론, 상대가 무슨 이능을 지녔든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존재했다. 힘을 발휘하는 주체는 언제나 센티넬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런 이능을 지닌 이들의 육체 능력은 저 같은 센티넬에 미치지 못하는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런 경향일 뿐, 부딪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상대의 몸이 제법 단단해 보였으므로 더욱. 하나 언제까지고 머리만 굴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붙잡힌 발을 억지로 떼어내는 데에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힘이 필요했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훈련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묵직함이었으나, 그리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움직일 수 없는 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실체 없는 힘을 떨쳐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희망을 놓아야 했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괜찮았다. 비록 내딛는 걸음마다 쇠로 된 추가 달린 듯 무겁고, 손가락 틈새에 드리운 그림자가 창을 쥔 손을 압박해 오더라도.

옷 아래 가려진 근육이 힘을 받아 부풀어 오르고, 핏줄이 불거졌다. 그럼에도 얼굴만은 담담한 채로, 그리페가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손대지 못할 뿐 분명한 실체는 발을 붙잡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몸을 타고 올라왔다. 무엇을 닮았다고도 하기 어려운 기묘한 감촉이 서늘하게 등골을 훑었다. 탄탄한 허리, 곧게 뻗어 긴 근육 위를 스치는 움직임은 분명.

곧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상대의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었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는 웃고 있었다. 이능을 수단 삼아 제 몸을 희롱하며. 평시도 아니거니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상대의 악질적인 움직임 따위는 그저 신경을 긁어 놓을 뿐이었다. 전투 중에 대놓고 상대를 더듬는 이가 제게 무엇을 기대할지는 뻔했다. 하나하나 반응하는 것조차 적을 즐겁게 할 뿐이리라.

전투 중에 제가 할 일은 언제나 더없이 명확했다. 언제나 침착할 것, 그리하여 적을 섬멸할 것.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었다. 몸에 닿은 건 그저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무게감을 떨쳐내고 다시금 다가서면,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 끝자락이 제게 닿았다. 여태 가만히 서 있던 건 그저 제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는 듯, 그가 큼지막한 보폭으로 다가왔다.

등 뒤, 낮은 곳에서 비치는 빛은 그림자의 크기를 더없이 큼직하게 부풀렸다. 등 뒤를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던 제 그림자와 달리, 그의 그림자는 그가 다가오는 만큼 덩치를 키우고 제 몸을 옭아맸다. 조금만 긴장을 풀었다가는 금방이라도 무릎이 꺾일 듯한 착각이. 창을 조금 더 단단하게 부여잡으면 가죽이 마찰하며 빠드득,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공간을 울리는 순간, 멋대로 몸을 훑던 덩어리가 목을 감싸 쥐었다. 조금씩 더해지는 압박감. 아무리 저라고 한들 목이 졸려 호흡이 불가능해지거나, 혈류가 막혀 버린다면 손을 쓸 수 없었다. 속으로만 욕설을 짓씹은 그리페가 필사적으로 힘을 쥐어짜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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