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26)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 강렬한 깨달음이 스쳤다. 그가 제 목소리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나마 한 가지 통할 만한 방법이 있었다.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리페가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으면 뭐든 해야지. 길게 심호흡한 이리트가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마저도 실패한다면, 그리페가 아군을 공격하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용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한들 성공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애초에 그리페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었으므로.
“그리페, 나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도와줘.”
크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작은 속삭임이면 충분했다. 다만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때아닌 엄살이라니, 꼭 바보라도 된 것 같았다. 웨이드가 다른 이들과의 통신으로 바빠 나지막한 목소리까지 들을 수 없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머쓱함과 불안함, 긴장까지 뒤섞여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왜 그래요, 이리트. ……아니, 잠시만…… 이건,”
[정신 차렸어?]
더없이 깊은 물 속에 빠졌다가 겨우 기어 나온 듯한 감각이 스몄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느껴지는 기분과 유사하기도 했던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가까이 다가와 있던 레만은 잠깐 사이 저 멀리 물러나 이쪽을 주시했다.
“이리트, 내가 혹시……”
[괜찮아, 잠깐이었어. 그냥 서 있기만 했으니까 다른 걱정 안 해도 돼. 미안,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내 부주의였지.”
[……정신 차렸으면 됐어.]
멀어진 레만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미 한 번 당한 이능은 더욱 주의해야 했다. 어떤 빈틈을 찾아내어 노려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당혹스러움과 초조함을 누르려 심호흡하면, 끊임없이 귓가에 울리던 이리트의 목소리가 얼핏 떠올랐다.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이리트,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분명 이리트는 안전한 곳에 있을 테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너 깨우려고 한 말이야. 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은 어쩐지 퉁명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없어, 그리페는 그저 다행이라는 말만 전했다.
레만은 또다시 이전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말을 속삭였다가, 소리쳐 제 아군을 북돋아 주기도 하며.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다시 뒤로. 그의 움직임을 살피며 타이밍을 재던 그리페의 근육이 수축했다가, 폭발적인 힘으로 바닥을 박찼다. 그리페가 딛고 섰던 타일 몇 개에 긴 실금이 새겨지고, 그는 레만의 멱을 붙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찰나 끼어든 이가 레만의 등 뒤에 붙어 충격을 받아냈다. 컥, 하고 신음한 이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람 하나의 완충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레만에게 다가가는 이의 모습이.
정신계 이능의 작용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나, 어째서 모욕당한 기분이 스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나 제 감정 따위를 깊게 고뇌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충격을 채 다 회복하지 못한 센티넬을 쓰러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급 자체가 차이 나는 상대였다. 죽일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이상, 그리페의 창끝은 더없이 예리해질 뿐이었다. 주변에 더 다가올 수 있는 센티넬은 없고, 있다고 한들 그리페를 이기는 건 요원했다. 그것을 레만 또한 아는지, 그는 채신머리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벽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하랄트, 네가 결국에는……!”
“배신이라도 했다고 주장할 셈입니까.”
“내가 네게 뭘 쥐여주었는지 알고 있지 않나?”
“쥐여주었다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금전적 보상 따위의 협회에 소속된 센티넬이 지니는 기본적인 권리를 이르는 건 아닐 터였다. 그건 보상으로서 쥐여주는 게 아니었다. 대개는 어떻게든 센티넬을 붙잡아 보려는 수단이었지. 흐르는 정적, 그 간극을 알아챈 레만이 이를 갈았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깊이 생각하려 들지도 않는 표정을 마주한 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소리쳤다. 헤르데! 스스로가 구차함을 알았는지, 레만의 표정이 전에 없이 일그러졌다.
이 순간, 그리페는 새삼 깨달았다. 그는 굳이 센티넬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쥐고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모조리 제멋대로 다루어도 되는 도구로 취급해 왔음을. 통신을 끊은 적 없으니, 분명 이리트도 레만이 떠들어대는 말을 들었을 텐데. 반쯤은 충동에 휩싸인 채 그리페가 레만의 허벅다리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한 번 참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는 꼴은 우스울 정도였다. 겨우 이 정도의 고통조차 견디지 못하는 이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협회의 꼭대기에서 군림했는지.
“이리트는 당신이 내게 쥐여준 게 아닙니다. 그가 날 선택한 거지.”
“아니,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너희는 절대로 공식적인 파트너 관계가 되지 못했을 거다.”
[개소리하고 있네.]
“……이리트,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채널 잠시 닫아 두는 건데.”
[어차피 별 타격도 없는데,]
“이리트 헤르데!”
“입 닫아.”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뻔뻔하게 이리트의 말을 끊어내며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가 무슨 말을 떠들어 대려 했건, 내용을 들어서 좋을 것 없음을 직감한 그리페가 레만의 허벅지 위에 놓인 발에 무게를 실었다. 살덩이가 뭉개지는 감촉, 금방이라도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압박감을 견뎌내려 악문 잇새로 눌린 비명이 샜다. 제 발아래 밟힌 이가 악을 지르거나 말거나 그리페는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레만은 죽여서는 안 됐다. 그렇다면 그가 더 떠들어 대기 전에 입을 막아야 했다. 그에게 재활이 어려울 정도의 부상을 남긴다 한들 저와는 상관없는 일 아니던가. 게다가 일이 정상적으로 처리된다면 레만은 다시는 사회로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어지간한 부상은 원상복구가 가능하며, 저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질 뿐 레만 역시도 센티넬 특유의 강건한 육체를 지녔다. 그리페가 창을 다시금 들면, 레만의 손이 맨바닥을 할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기척이 등 뒤를 노리는 순간, 그리페는 창을 틀어 공격을 막아냈다. 한 박자 늦게 공격이 다가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 앞에 선 것은 또 다른 레만이었다. 어쩐지 이목구비가 흐릿하고, 옷차림도 달랐으나 그리페는 확신했다. 분명 지금도 그가 빠져나가려 꿈틀거리는 감각이 선연하건만. 생각을 길게 거듭할 새가 없었다. 어디선가 똑 닮은 이가 하나 더 나타난 탓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하, 능력을 여태 다 내보인 게 아니었군. 귓가에서 울리는 이리트의 목소리는 예상 밖의 사태에도 태연하기만 했다. 외려 조롱에 가까운 어투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레만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센티넬 중 하나였으며, 몇십 년에 이르는 기나긴 활동 기간 내내 정신계 외의 이능이 밝혀진 적 없었다.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계통의 이능 여럿을 갖는 건 극히 드문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는 이리트에게 레만을 공격할 한 가지 명분이 더 생겼음을 의미하며, 또한 레만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다.
이리트가 진작 예상했듯, 큰 위협이 되는 사안은 아니었다. 수가 많다 한들, 새로이 나타나는 이들의 근간은 레만이었다. 그가 근접전에 대응하기 적절한 이능까지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수가 어지간히 많아도 처리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들 자체가 일종의 확성기처럼 레만의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하나 그게 저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조리 레만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이를 가르면, 상대는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하나 제대로 된 실체까지는 가지지 못한 듯, 쓰러진 육체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내 재로 화해 사라졌다.
[발악하는 꼴이 제법……]
“기분이 풀려요?”
[그렇다고 하면, 조금 별론가?]
“설마 그렇겠어요.”
희미한 웃음소리가 스치고, 이리트는 이내 저 하잘것없는 꼭두각시를 죄 없애 달라고 말했다. 그래, 지금 제게 달려드는 것들은 모조리 인간의 모양새를 한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창에 실린 무게가 한층 가벼워지는 순간. 그리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망령된 가짜들을 쉬이 찌르고, 베고, 갈랐다. 어떻게든 뒤로 몸을 빼려 드는 레만에게 이따금 경고성 공격을 날리면서도. 어느 순간, 새로이 나타나는 인형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잘 만든 조각을 실수로 떨어트린 것처럼 신체 일부가 뭉개지고, 움직임이 둔한 개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레만은 끊임없이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개중에는 단순히 저를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무엇도 할 수 없을 거라며 어떻게든 영향을 끼쳐보려는 발악도 있었다.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박혔으나, 자각하지 못한 사이 신경이 쏠릴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챈 이리트가 제 이름을 불렀다. 순간순간 제가 지닌 힘이 약해졌다는 생각이 스미면, 그리페는 저 자신을 세뇌했다. 그건 오로지 레만의 술수일 뿐이며, 근접전에서 싸우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는 이능까지 쓰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신체 능력만으로 압살할 수 있다고.
전투능력이 없는 인형은 두 번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제게도 기나긴 전투로 인한 부담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으므로. 새로이 나타나는 가짜의 절반 이상이 한낱 더미에 지나지 않을 때, 그리페는 다시금 비척비척 도망치는 레만의 발목을 그었다. 살갗이 갈라지고, 그 아래 자리한 힘줄이 끊어지는 감각. 세차게 튀어 바닥을 더럽히는 피, 레만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앞으로 엎어졌다.
피를 줄줄 흘리는 발목을 붙잡아 당기면, 레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듯 내뻗은 손이 악착같이 바닥을 짚고 긁어내렸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즈음 잡았던 발목을 내친 그리페가 레만의 등허리를 짓누르고, 양손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센티넬 범죄자를 사로잡으려는 목적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물건이었으니, 레만도 더는 이능을 발휘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레만은 말로써 타인을 쥐고 흔들었다. 이미 그의 능력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제 별달리 이상한 행동은 못 할 거예요.”
[고생했어. 내부 상황은?]
“좋진 않아요. 가능하면 레만을 먼저 넘기고 싶은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안 되네.”
[지원 인력 보낼게. 오래 안 걸릴 거야.]
잠시 상황을 전달하는 사이, 통신기 너머로 이리트가 있음을 아는 레만이 무언가 소리치려 했다. 그의 머리를 짓눌러 입을 틀어막고, 그리페는 잠시간 통신을 차단했다. 이제 다 끝났어.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싶었다면, 아군을 소모품처럼 내버리진 말았어야지. 차분하게 말하면, 손에 머리통이 눌린 채로도 레만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본인이 인정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죄질이 나쁜 범죄자로 전락한 이의 인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으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또다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일 게 뻔해서, 그리페는 레만의 목덜미를 강하게 후려쳤다. 번들거리던 눈이 뒤집히고, 끅 하는 짧은 신음을 마지막으로 상대의 몸이 맥없이 늘어졌다.
의식을 잃은 이라 한들, 바닥을 구르게 둘 수는 없었다. 비교적 몸이 약한 정신계 센티넬이라 해도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강건했으므로. 그렇다고 싸우는 데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맡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리페는 축 늘어진 몸뚱이를 어깨에 둘러멨다. 멀쩡히 정신을 차린 이들에게 소식이 전해질 즈음에는 바깥에서 대기하던 인원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이미 여러모로 힘을 소진한 이들이 내내 힘을 아낀 이들에게 제대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분명 좋은 일이건만, 어딘가 허무함이 느껴질 만큼 쉬이.
수조 안에 갇힌 이들을 수습하는 건 제 몫은 아니었다.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임을 알면서도, 미련이 남아 그리페는 수조 속에서 잠든 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드물지 않게 눈에 띄는 아는 얼굴들. 그러나 무작정 유리관을 깨트리고 그들을 구해낼 수도 없었다. 그들의 몸에는 알 수 없는 관이 연결되어 있었을뿐더러, 일전에 이미 관이 깨지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목격하지 않았던가. 상황만 따라준다면, 의식을 잃고 늘어진 레만을 깨워 따져 묻고 싶었다. 이 많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가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목표가 대체 무엇이었느냐고.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자신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음을 아는 그리페는 서늘한 낯빛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 걸려 돌아온 작전의 시작점, 주위는 온통 눈이 쌓여 희었다. 분명 내부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음은 자명한데, 발이 푹 빠질 만큼 쌓여 있었다. 한참 더 내릴 것처럼 짙은 구름이 꾸물거리고, 굵은 눈발이 사납게 휘날렸다.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리페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두른 담장, 그 밖에서 대기하는 이리트를 향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선 인영. 담장의 용도를 무색하게 만드는 장신이 시야에 들어서자, 그리페의 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작전 차량을 옆에 두고 선 이리트는 추운 듯 팔짱을 낀 채였다. 날 듯이 달려 이리트의 앞에 도달한 그리페는 내내 짐짝처럼 지고 있던 레만을 대충 내버렸다. 볼품없이 바닥을 구르는 이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이리트가 성큼 다가와 제 뺨을 감싸 쥐었다.
“손이 왜 이렇게 차, 이리트.”
“네가 중간에 통신을 끊었잖아. 카메라도 저 자식 때문에 가렸고.”
“레만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서 그랬어요. 뺨이랑 코가 다 빨갛게……. 안에서 기다리지.”
“……”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얼굴을 한 채로, 겨우 찬바람이나 조금 맞은 저를 먼저 걱정하는 이가. 안에서 기다리게 생겼냐고 투덜거리려던 이리트가 애써 말을 삼켰다. 사소한 사안으로 실랑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리페는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싸움을 업으로 삼은 만큼, 어느 정도의 부상은 필연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럴 때면 속이 쓰렸다. 약간의 불만을 담아 그리페의 멱을 붙잡아 당기면, 그는 저항 한 번 않고 제게 끌려왔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부딪히자마자 비릿한 피 냄새가 스쳤다.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태연하게 구는 이는 열까지 나는 게 분명해서, 인상을 찌푸린 이리트가 그리페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밀착했다. 자연스레 허리에 팔을 감은 그리페가 이리트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진정된 이의 뺨을 다시금 붙잡고 살피던 이리트가 보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페의 눈은 아직도 핏발이 서 있는 데다, 목소리에도 희미하게 쇳소리가 섞였다.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속이 상했으나, 다소 무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그게 그리페의 최선임을 알았다. 그러니 그리페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정리해 준 이리트가 저 멀리 돌아오는 이들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지금 안에서 한창 피랍된 사람 수습하고 있어. 갈 거야?”
“가 봤자 별달리 할 수 있는 일 없는 거 알아요. 레만도 지켜야 하고.”
이리트는 뒤늦게 벽에 기댄 채 앉혀 둔 레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보듯 무감한 시선은 어쩐지 복수하겠다던 사람의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유를 물으면,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깊숙이 베어낸 레만의 발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와 하얀 눈을 더럽혔다. 여기까지 와서 과다 출혈로 죽게 둘 수는 없으니, 마뜩잖은 티를 내면서도 그리페는 제가 아로새긴 레만의 상처 속으로 지혈대를 대충 쑤셔 넣고 붕대를 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아서 별 감흥이 없나 봐.”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널 믿었고, 날 믿었지.”
“이리트, 그런데 기분이 왜 별로예요.”
“별거 아냐. 그냥…… 좀 그렇네. 레만이 이렇게까지 내 예상대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너무 순조로워서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지 마. 레만은 이제 정말 끝났어요.”
“그건…… 그렇지.”
레만이 무슨 수를 쓰든 협회장직에 다시 올라설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니, 실상은 협회의 말단조차 되지 못하고 제명되리라. 센티넬을 납치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본인의 능력을 수십 년째 숨기고 거짓으로 활동해 왔으므로. 그건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누군들 알았을까. 처음부터 제대로 이능을 신고하지 않는 기존 범죄 조직의 양상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다. 그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던 이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테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하겠지. 생각에 깊이 빠져들면, 그리페가 제 뺨에 입을 맞추었다. 뒤늦게 시선을 돌려 바라본 그리페는 늘 그렇듯 부드럽게 웃는 채였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해요. 조금 쉬고, 머리도 좀 식히고.”
그리페의 말이 옳았다. 이렇게 고민한들, 레만이 제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그즈음 작전 차량에서 내린 웨이드가 양팔을 주욱 늘려 기지개를 켰다. 오로지 그리페 쪽의 통신을 맡았던 저와 달리, 웨이드는 그 외의 모든 인원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피로한 기색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이는 느릿느릿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바닥을 구르는 레만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정말 되네.”
“불가능했다면 현장에 그리페를 밀어 넣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글쎄.”
막상 붙잡고 보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실 이번 작전의 수립자이자 현장 오퍼레이터로서는 일이 큰 변수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분명 기뻐해야 마땅할 터였다. 아니, 거창한 수식어 없는 개인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지녀 온 해묵은 반감은 격렬하지는 않을지언정 깊었고, 최근의 일은 기폭제가 되었으므로. 어쩌면 당장 그리페의 상태가 더 걱정되는 탓일지도 모르지. 금세 시선을 돌린 이리트는 그리페의 얼굴을 살폈다. 이능으로 인한 반동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슬슬 작전에 참여했던 센티넬이 퇴각하여 모습을 드러낼 시점이었다. 레만은 붙잡혔고 남은 적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으며, 후발대가 진입했으므로. 레만이 의식을 잃었다 하나, 그들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레만을 치워 놓아야 했다. 웨이드, 트렁크 열어. 곧바로 제가 원하는 바를 알아챈 그리페가 레만을 다시 둘러메려는데, 내내 의식이 없던 레만이 번쩍 눈을 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깨어난 이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들썩였다.
“네가, 으읍…!”
“그리페, 잠깐만.”
레만이 말문을 떼자마자 그리페는 예상이라도 한 듯 빠르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도주하기는커녕 입부터 열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 그의 입을 틀어막은 그리페의 옷깃을 잡아당겨 말리면, 그리페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다. 큰 변화 없는 표정이었으나, 어딘가 억울하게 보이는 건 분명 착각이 아닐 터였다. 궁금해서. 짧게 덧붙이자, 그리페가 잔소리라도 하려는 듯하다가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하, 이거야 완전히 헤르데의 개 꼴이로군.”
“그래, 그리페는 내 거야. 그런데 그게 네가 업신여길 사안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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