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29)

laid back by Aeen
2
0
0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암막 커튼 틈으로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이리트는 고개만 돌려 탁상용 시계를 살폈다. 빛이 들어온다고는 해도 어둑한 탓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얼추 점심나절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래 잠든 모양이었다.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보낸 꼴이었다. 이불 속에서 기지개를 켜려던 이리트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치미는 뻐근함에 앓았다. 느릿느릿 몸을 모로 돌려 누운 이리트가 도로 눈을 감았다.

닫힌 문 너머로 미미한 기척이 전해졌다.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생활 소음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그야말로 평화로웠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칠 만큼. 그때,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창 너머로 바람이 불어오며 커튼이 흔들려 약간 걷혔다.

한층 밝아진 느낌에 눈을 뜨면, 조금 연 방문 새로 상체를 기울인 그리페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이 엉키는 순간부터 웃음을 띤 그리페가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그리페에게로 이리트가 팔을 뻗으면, 그는 익숙한 듯 허리를 숙이고 껴안아 일으켰다. 이리트가 일어나 앉아서도 껴안은 팔을 풀지 않은 탓에, 침대 한쪽에 걸터앉은 그리페는 이리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잘 잤어요?”

“응…… 오래 잤네.”

“목이 다 쉬었네. 괜찮아요?”

“괜찮아……. 깨우지 그랬어.”

“잘 자길래 안 깨웠지. 최근엔 계속 바쁘기도 했고…… 간밤에 힘들기도 했을 것 같아서.”

“그건 그렇지만.”

“그보다…… 점심은, 이리트.”

그럴 시간이긴 했지. 잠시간 말없이 그리페를 끌어안고만 있으면, 그리페가 조금 떨어져 눈을 맞춰 왔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건만, 그가 말하려는 바를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먹기 귀찮다고, 이기지도 못할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속이 허전한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이면 그리페가 그때에서야 다시 웃음을 내보였다.

“잘 생각했어요.”

“세수하고 갈게.”

몸이 축축 늘어졌다. 다리와 허리의 뻐근한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분명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지친 느낌이었다. 그리페의 얼굴은 반들반들하지 않았던가. 욕실에 들어가려다 슬쩍 뒤돌아보자, 제 옷가지를 꺼내놓던 그리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봤다. 피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 말끔한 얼굴이. 어쩐지 얄미워 획 돌아선 이리트가 욕실로 향했다.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저 체력이 제가 운동 좀 하는 것 정도로 따라붙을 수 있을 정도던가.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 온갖 생각을 곱씹으며 이리트는 칫솔질 했다.

푹 잔 탓에 까치집이 된 머리를 대충 털어내며 다가서면, 칼도 내려놓은 그리페가 식탁 의자를 빼 주었다. 제가 앉는 것에 맞추어 도로 의자를 넣어 주기까지 한 그리페는 당연한 듯 제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빨리 왔네. 양치하고 세수만 했어. 응. 필라프 할 건데, 괜찮아요? 좋아. 도와줄 건 없어? 아니야, 앉아 있어요. 다시 손을 씻은 그리페가 칼을 쥐고, 곧 칼이 도마에 일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한쪽에서 고기를 볶는 동시에 여러 채소를 썰었다.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에 뒤섞인 경쾌한 칼질 소리가. 한참이나 그리페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문득 그리페가 고개를 들었다.

“왜?”

대답 없던 그리페가 뒤돌아섰다. 눈가가 조금 젖어 있지 않나. 의문이 스치는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그리페의 뺨을 타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재료를 손질하던 이가 갑자기 왜. 몸 여기저기가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다가가면, 그리페가 눈을 깜박였다. 그리페의 뺨을 감싼 이리트가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하지만 이건 우는 것과 조금, 아니, 분명 다르지 않나. 의문이 스치고, 이리트는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건 도마 위에 놓인 다진 양파였다. 황당함에 헛웃음이 터지고, 그리페는 제 손에 뺨을 비볐다.

“눈이 따가워요.”

“우는 줄 알았잖아.”

애초에 그걸 원했던 듯, 그리페는 눈시울이 붉어진 그대로 웃었다. 알았어도 넘어갔을 수작, 그리페의 뺨을 잡아 옆으로 죽 당겼다 놓아 준 이리트가 그리페의 눈가를 닦아내었다. 고기 타겠다. 툭 뱉으면 그리페는 괜히 엄살을 부리는 것도 관두고, 웍을 잡아 흔들었다. 잠시간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리트가 그리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곧은 어깨에 턱을 대고 기대어도, 그리페는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움직였다. 잘게 다진 채소를 달궈진 웍 안으로 쏟아부은 그리페가 웍의 손잡이를 잡은 채 멈추었다. 그가 웍을 잡고 흔들어 재료를 뒤섞어가며 볶기 시작하면, 이리트는 왜 그리페가 잠시나마 멈추었는지를 깨달았다.

“불편하지 않아요, 이리트?”

“……조금.”

“왜 계속 그러고 있어.”

“네가 좋아서.”

잠시간 침묵한 그리페는 주걱으로 잘 볶아지고 있는 내용물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호선을 그렸다는 것 정도는. 그리페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 잠시간 멈춰 있던 그리페가 레버를 돌려 불을 꺼졌다 싶을 정도로 약하게 낮추었다.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뒤돌아선 그리페와 시선이 뒤엉키고, 긴 엄지가 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새파란 눈,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움직이는 건 쉽고, 그리페는 저를 막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면, 그리페의 손이 덜 정리된 머리칼을 쓰다듬고 헤집었다.

다시 그리페를 안은 이리트의 손이 굴곡진 등을 버릇처럼 훑었다. 슬쩍 눈을 뜨면,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살짝 찌푸린 그리페가 보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듯한 만족감은 희열을 닮았던가. 입술 새로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가, 뚝 끊어졌다. 가쁜 호흡을 누르고 그리페를 보고 있자면, 돌연 그리페가 저를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발을 내디딘 이는 저를 도로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

“그렇게 보지 말고…… 앉아 있어. 금방 완성돼요.”

내 표정이 어때서. 불만을 표하기도 전에 제 시선을 피해 뒤돌아선 그리페가 다시금 불을 올리고, 웍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리페의 인내심은 언제나 길고, 이리트는 그것을 알면서도 제 충동에 따라 움직이곤 했다. 그렇게 어쩌다 한 번, 그리페의 인내심을 끊어먹는 데에 성공하면 제 입에서 더는 못 하겠다고 애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붙어먹었다. 지난밤에 그랬듯이. 여전히 제 몸에는 그 여파가 남아 있는데도 왜 그리페를 보면 살살 긁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답잖은 생각을 곱씹고 있자면, 어느새 그리페가 큼지막한 그릇 위에 완성된 요리를 소복하게 쌓아 올렸다. 밥이 무너지지 않게 그릇을 내려놓은 그리페는 수저까지 챙겨 자리를 잡았다. 김이 피어오르는 필라프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면, 그리페는 반응을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한 채 이쪽을 바라봤다. 제가 하는 반응이라고는 기껏해야 맛있다고 하는 것뿐인데도.

“맛있다. 그보다…… 왜 꼭 내 반응을 보고 있는 거야, 그리페.”

“나는 뭘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당신이 맛있게 먹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그리페가 딱히 무언가를 가리는 걸 본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작전이 길어질 때 가끔 먹게 되는, 맛이라고는 없이 퍽퍽하기만 한 비스킷도 별 불만 없이 먹지 않았던가. 그건 분기에 한 번씩은 꼭 누군가가 바꿔 달라고 건의하던 보급품이었는데. 아니, 언젠가 그리페가 열량만 채우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경우였을 테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움직임이 늦어지는 것을 알아챈 그리페가 제 이름을 불렀다.

“이리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가…… 정말 뭘 딱히 가리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생각. 그 맛없는 비스킷도 잘만 먹었던 것 같아서.”

“아, 그거. 움직이려면 어쩔 수 없으니 먹는 거죠. 작전 중에 뭘 제대로 차려 먹을 수도 없고.”

“그걸 다른 사람도 모를 리가 없는데…… 매번 바꿔 달라고 하거든.”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어쩌다가 귀에 들리는 거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따금 실없이 웃고 있자니, 금세 그릇이 반절이 넘도록 비었다. 슬슬 배가 찬 듯 수저를 내려놓은 이리트가 턱을 괴었다. 벌써 다 먹었어요? 응, 배불러. 얼마 안 먹지 않았어? 많이 먹었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아닌가. 의문스러워하면서도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양이 분명 예상한 것보다 많았으나, 배부르다는 이에게 억지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저보다 먼저 수저를 놓는 이리트가 저를 관찰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그렇지. 레만은 어떻게 할 거예요?”

“올슨에게 죄다 떠맡기려고 했는데.”

“……전부?”

“네게 붙여서 보냈던 그 카메라, 영상 녹화되고 있던 건 알지?”

“짐작은 했어요.”

“말 안 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번엔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도망 못 치게 되어 있어. 정 안 되면 자살하려 들 수도 있기는 한데, 그건 뭐, 구류한 쪽이 알아서 막을 일이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리트는 레만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의 앞날에 몰락이 예정되어 있다지만, 그건 분명 이리트가 선호하는 방식의 앙갚음은 아닐 터였다. 조금 더 직접적인 방식을 원하리라 생각했건만.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이리트는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도, 원망도 찾아볼 수 없이.

“왜. 내가 다른 방법을 쓸 것 같았어?”

“조금……. 당신 손으로 직접 해내려 할 줄 알았어요.”

“그러려고 했어, 나도.”

변명할 바 없는 사실이었다. 하나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굳이 그를 제 손으로 괴롭힐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제 생각이 바뀐 이유는 어쩌면 기억을 되찾은 탓일지도 몰랐다. 기억의 공백, 메울 길 없는 빈틈으로부터 끊임없이 스미던 갈증이 해소되었으므로. 다 해소되지 못한, 어쩌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트라우마까지 되살아났다고 해도. 그게 아니라면 레만을 붙잡고 보니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스친 탓이거나.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였는지는 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이리트는 이 이상 손을 쓰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레만이 홀로 쥐고 있을 정보는 저보다 올슨에게 더 필요했다.

여기까지 몰락한 레만을 죽여 버리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며, 원한다면 해낼 수도 있었다. 그의 목 자체를 원하던 올슨이 조금 불만스러워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건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애초에 그와 한 계약은 레만을 무너트리는 것 하나뿐이었으므로. 레만의 충실한 종복들이 여전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고 한들, 그들이 하던 일이 그들의 목까지 조를 수 있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들은 쉬이 등을 돌릴 터였다.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아마도 올슨은 그들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으려 할 테지만. 어쨌거나 레만과 그 떨거지들 따위에게 신경을 더 기울이느니, 그리페와 종일 뒹굴고 싶었다. 침대 위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저 하루 내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한 번은 보러 갈 건데……. 지금은 그냥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온종일.”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리트.”

 


 

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을 치웠을 뿐,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절차며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언제나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이들이 이를 드러내기 마련이었으므로 더욱. 당장 현장조차 제대로 수습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나 어차피 저나 그리페는 현장 수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하다는 핑계로, 이리트는 제가 원했던 그대로 며칠 내내 그리페와 함께 붙어 있었다.

하나 협회에 소속된 이들이란 원래부터가 사고를 수습하는 데에 이골이 난 이들이었다. 고작 사흘 만에 현장을 수습했으며, 남아 있던 자료를 얼추 긁어모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리트는 그리페를 더는 붙잡고 늘어질 수 없음에 아쉬워했다. 말로는 모조리 다 떠넘겨 버리겠다고 했지만, 정말로 그럴 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복수는 레만을 무너트리는 것으로 마무리했으나, 협회는 앞으로도 저와 그리페가 소속되어 있을 조직이었다. 대충 내버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제가 이런 자리에 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그리페를 기어이 끌고 들어온 이리트는 똑바르게 앉은 그의 몸에 대충 기대었다. 다소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기댄 이리트는 자꾸만 새는 하품을 누르며 서류를 훑었다. 방만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느슨하게 구는 탓에 그리페가 이리트를 말리려는 때, 그들이 하는 양을 보던 웨이드와 올슨이 되레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그리페를 말렸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리트는 태연하게 서류만 팔락팔락 넘겼다. 빠르게 내용을 훑는 시선은 느슨한 자세와 달리 매서웠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조금씩 굳어지는 표정, 이리트가 마침내 서류를 내려놓을 즈음에는 이리트의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그건 그저 반인륜적인 실험 보고서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했으니 팔마의 것보다도 못하다고 해야 할까. 레만에게 주어진 시간은 팔마가 보낸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았으니, 여기까지 해낸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어느 쪽이 더 들어맞는 말이던 이 보고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폐기될 터였다. 괄목할 만한 결과를 냈더라도,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 넣었으니 널리 떠벌리지 못할 내용이었다.

“그냥 폐기할 줄 알았는데.”

“한 번쯤 확인은 해 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서류철 너머로 웨이드를 힐끗 본 이리트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건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분위기를 잡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리의 누구라도 해당 보고서를 폐기하지 않을 생각으로 가져오진 않았을 터였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믿지 못했겠지. 덮어둔 서류를 웨이드 쪽으로 밀어 놓으면, 그는 곧장 벽난로 안에 파일을 던져 넣었다. 불길이 찰나 위로 치솟아 오르고, 타오르는 불이 쉬이 종이를 사르는 모습을 보던 이리트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레만의 처분은 공권력에 맡길 겁니까.”

“짐작하고 있는 사안일 텐데요.”

“확실히 들어 두고 싶어서.”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경우에는 레만이 협회로 가져온 재량권이 제법 도움이 되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공권력에 맡기기에는, 글쎄, 그들은 사형을 선고한들 집행하지는 못할 게 분명하니.”

사형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어쨌건 레만 또한 말만 사형일 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리라. 그건 자신도 바라지 않는 사안이었다. 레만이 지닌 이능의 특수성 덕에 여전히 그의 영향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그걸 거둬들이라는 명목으로 레만의 능력을 묶어둔 족쇄를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근원을 죽여 능력의 잔재 또한 기능을 잃게 만드는 게 가장 간단하고 깨끗한 처리법이었다.

협회가 지닌 재량권이란 실상 협회에 속한 구성원을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을 멋대로 휘두르다 필요치 않게 되거나, 제 뜻에 반하는 이들에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고자 만들어진 제도였다. 물론 즉결처분은 사안이 중대한 만큼 함부로 이용할 수도 없으며, 그 대상은 A급 이상 센티넬로 한정되었다. 제가 대놓고 반기를 들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였으며, 올슨의 생존이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레만은 쉬이 사용할 수 없는 제도 대신 현장을 이용한 살해를 더 많이 저질렀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가 필요로 하여 얻어낸 권한이 이제는 그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레만과 손을 잡은 이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모두 잘라낼 겁니다. 어차피 이곳에 존재한들 협회의 존재 의의에 도움이라고는 하등 되지 않는 이들이니.”

그게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분간 협회는 무너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을 맞이하리라. 비록 레만이 알량한 욕망에 찌든 지 오래라 한들, 그는 그보다 더 긴 시간 협회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와 손을 잡은 이들 또한 처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크고 작은 책임이며 권력을 나누어 가졌던 이들이었다. 그들을 모조리 갈아치우는 건, 올슨이 당장 아무런 반대에도 부딪히지 않고 차기 협회장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감투 하나 뒤집어쓴다고 한순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닐 수는 없었다. 레만조차도 아주 긴 시간 공들여 서서히 협회의 구성원을 제 편으로 만들고서야 겨우 지금에 이르렀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올슨은 뜻을 굽히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고서 손을 잡은 것이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고 살아남은 이의 시선은 올곧고 단단했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리페는 언제나 저런 눈빛을 해 보이곤 했으므로. 사선을 넘나드는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닮아가는 걸지도 모르지. 입을 다문 채 굳은 것처럼 미동 없이 앉은 그리페를 괜히 툭, 건드린 이리트가 늘어졌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 치들이야 내게 별 상관없는 일이고…… 이 이상 크게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협회에 소속된 일개 센티넬과 가이드로 남고 싶고.”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 돌아갈 상황 정도는 알아두면 좋겠다 싶었어요. 무엇보다…… 당분간 협회가 불안정할 건 기정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불안을 감당할 필요는 없지요. 그런 탓에 굳이 불러낸 겁니다.”

“당분간 장기 휴가를 보낼 생각이라고 한 건 기억하십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협회의 큰 전력이 오랫동안 쉬겠다는 건 책임자의 입장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올슨이 설득하려 들어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사안임을 모르지 않았다. 균열은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재난이었으며 동시에 공존하는데 익숙해진 사건이었다. 힘을 지닌 이들은 제 잇속을 채우려 드는 이들이 협회의 수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끌어 내려지는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협회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더욱 날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안식년은 더없이 멀기만 한,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협회 소식은 들려올 것 아니에요?”

날 세워 반응한 게 무의미하게도, 맥이 탁 풀리는 말이었다. 당분간 쉬겠다던 제 말을 잊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외려 미루겠다고 해도 등을 떠밀어줄 것처럼.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이리트가 고개를 끄덕여도, 올슨은 태연한 낯이었다. 레만의 떨거지들까지 털어 낼 확실한 방법을 분명 지니고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 데서 온 당혹스러움은 잠깐이었다. 어쨌거나 제겐 잘된 일이었으므로. 잠시간 올슨을 보던 이리트는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머뭇거리는 웨이드에게 눈을 돌렸다.

“헤르데. 그 건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데……. 그, 다시 정보부에 들어올 생각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웨이드.”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커플링
#리페릿
추가태그
#센티넬버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