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온 끝자락
2021.02.14 작성
* 커미션
〈 발렌티온 끝자락 〉
턱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간질간질, 신경을 긁었다. 짜증이 그득히 담긴 손길로 닦아내고 힐끗 보니 손등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빌어먹을. 그는 남이 듣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욕지거리를 짓씹어 뱉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이전에 탐사한 적 있는 곳이었고, 크게 위험한 것도 없었거니와 이 정도로 규모가 크지도 않았건만.
이변은 쉬이 일어난다지만, 이번의 상황은 이상했다. 이리트는 위협적인 소리로 울부짖는 괴수를 노려보았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탓에 찝찝함이 몇 배로 치솟았다. 덩치 탓일까, 주위를 피바다로 만들고서도 기세가 전혀 줄어들질 않았다. 오히려 흥분해 더 날뛰는 쪽에 가까웠지.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그저 시끄럽고 덩치가 클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무기 끝에 마력이 뭉치기 시작했다. 주술봉 끝의 보석을 중심으로 거칠게 회전하는 마력 덩어리는 그 자체로 사나운 기색을 내뿜는다. 자색 눈이 똑바로 괴수를 향하고, 무기를 휘두르는 가벼운 동작이 끝나는 순간 전장이 붉게 타올랐다. 살점이며 피가 타는 냄새는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괴수의 비명은 숫제 귀가 아플 정도에 이르렀다. 곧 그리 크지 않은 불꽃이 괴수의 입속으로 떨어져 내장을 불사른다.
마침내 괴수가 그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을 때, 주변은 온통 탄내가 진동했다. 꺼지지 않은 불꽃이 시체를 좀먹었다. 이리트는 그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피에 젖어 끈적이는 머리칼을 대강 쓸어 넘겼다. 크게 다친 이는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쉰 이리트가 근처의 물가로 걸음을 옮겼다. 정비한 후 다시 이동할 테니, 그 틈을 타 머리카락이라도 씻어내고 싶었다.
졸졸 흐르는 물은 깨끗하고 차가웠다. 몸을 씻어내기는 어려울 정도의 작은 물가, 이리트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그새 피가 말라붙은 손을 씻었다. 고개를 숙여 물로 머리칼을 적시면 분명 투명했던 물이 붉게 물들었다. 물을 퍼 담을 바가지 비슷한 물건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했으나 이미 머리를 물에 적신 이후였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 어떤 것보다 짜증을 유발하는 것은 예상보다 길어진 탐사였다. 당장 이곳을 벗어난다고 해도 돌아가면 이미 해가 지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변을 발견한 이상 도중에 돌아가기도 어려웠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일은 수도 없이 겪었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당장 오늘이 발렌티온 당일이었다. 그리페도, 자신도 기념일을 따져 가며 챙기지는 않았다. 서로가 바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면 선물을 건네곤 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기껏 날짜를 맞추어 준비를 마쳐 놓았는데. 이리트는 물이 붉은색에서 주홍빛으로, 주홍빛에서 다시 투명한 빛을 띨 때까지 머리칼을 헹궈낸 후에 일어섰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대충 털어내고 불꽃을 제 주위에 둘렀다. 짐 가방을 더듬어 링크펄을 꺼낸 이리트가 어딘가로 연락했다.
[이리트.]
“돌아가는 게 늦을 것 같아서 연락했어. 여기, 좀 이상하게 변해서.”
[위험한 거 아니에요?]
“괜찮아, 이 정도는.”
[같이 갈 걸 그랬어.]
“……얼른 끝마치고 갈게. 빨라도 밤이나 되어야 할 거야.”
[알았어요.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응.”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그리페가 더 보고 싶어졌다. 지금처럼 머리를 덜 말린 채 있으면 늘 젖은 머리를 말려 주던 손길이며 단단하고 따듯한 품이. 이리트는 터벅터벅 걸어 일행과 합류했다. 그 사이 주변 정리를 대강 마친 이들은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리트는 어긋난 계획과, 그로 인해 불편한 심기를 억눌러 감추었다. 짜증을 내 봤자 변하는 건 없다. 그 시간에 주변을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가는 수밖에.
애초부터 큰 지역이 아니었던 탓에, 규모가 커졌다고 해도 아주 큰 것은 아니었다. 이리트는 머릿속에서 찬찬히 지도를 그려나갔다. 지형 자체에 비틀림이 발생한 게 아님을 가정하면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비틀림이 발생했다면 소규모 인원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빠져나가 새로이 팀을 꾸려 와야 한다. 어느 쪽이든 발렌티온을 핑계 삼아 초콜릿을 선물하겠다는 제 계획은 무산되고 말 테지만.
이변의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꼬인 에테르의 흔적을 좇은 끝에는 그 원흉이 있었다. 눈이 뒤집어진 괴수는 이쪽을 알아채자마자 앞뒤 잴 것 없이 달려들었다. 거의 같은 순간에, 비산하는 불꽃이 괴수에게 들러붙어 단단한 살을 불태웠다.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일행이 괴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탄내는 조금도 익숙해지질 않고, 외려 괴수의 체액이 풍기는 냄새와 합쳐져 더욱 기분을 망칠 뿐이었다. 다만 첫 번째의 그놈처럼 덩치가 크지 않아 온통 피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다. 이리트는 마지막 괴수를 쓰러트리고,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막 넘은 시간. 이리트는 의미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시계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큼지막한 돌에 걸터앉아 그는 길게 탄식했다. 이전에 연락했을 때 말이라도 해둘걸.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돌아가면 그리페는 아마도 잠들었을 테지. 긴 이동과 다수의 전투로 피곤함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수고했다고, 동료들에게 인사한 이리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 왔어.”
대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 버릇처럼 한 인사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쪽으로 다가오는 이. 당연히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탓에 반가움이 더 컸다. 안 잤어? 어쩐지 당신이 올 것 같았어요. 그게 뭐야. 부러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섞였다. 한달음에 다가가 그를 끌어안으려다 멈칫, 팔을 내리자 그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피 많이 묻었어. 씻고 올게.”
그리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낮에 떠올렸던 것만큼이나 따듯하고 단단한 품이었다. 짜증이 치솟을 때면 가장 먼저 그리워지는 체온. 마주 끌어안아 몸을 가벼이 기대자 하루 내도록 쌓였던 긴장이 풀린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이리트가 입을 열었다.
“봤을 것 같지만…… 초콜릿을 만들어 뒀거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네. 발렌티온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고 싶었는데.”
“아, 이리트.”
짧게 탄성을 내지른 그리페가 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목덜미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간지러운 동시에, 핏자국이 남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심려하면서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이리트는 그냥 그를 내버려 두었다. 문득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보는 눈이 짙푸르다.
“아직 ‘오늘’이 지나지 않았어요.”
그리페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았다. 그 또한 이 시간이면 피곤할 텐데도. 이리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부딪쳤다. 한참이나 서로의 숨을 탐하다가, 입술이 떨어지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떡하지, 그리페. 네게도 피가 묻은 것 같은데.”
“이렇게 됐으니… 같이 씻을까요?”
누구도 이런 유혹은 거절할 수 없으리라. 이리트는 웃는 낯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티온이 조금쯤 지났어도 상관없었다. 한없이 다정한 연인이 제 눈앞에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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