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페릿

산실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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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작성

*커미션


〈 산실 〉

긴장이 바람결에 섞였다.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적, 그로부터 파생될 피해를 막기 위해 모험가 부대를 주축으로 작전이 시행되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사지로 몰아넣는 꼴이 아니냐며 여럿이 반대했으나, 정체를 밝혀낼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갈레말 제국의 병기인가, 혹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힘을 잃지 않은 알라그 문명의 영향인가. 어쩌면 또 다른 야만신일지도 모르지. 그리페는 새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페.”

“아, 이리트. 바쁠 것 같았는데.” 

이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찌감치 출정 준비를 마치고 여유가 날 때 제 쪽으로 온 것이리라. 창을 벽에 기대 세우고, 마주한 이리트의 낯빛이 평소보다 조금 어두웠다. 조심해. 감이 안 좋아. 나쁜 꿈이라도 꾼 건 아닐까, 걱정되었으나 그리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끼고 선 그의 손을 붙잡아 이끌자 이리트는 조금의 저항 없이 제게 손을 내어주었다. 

손가락 끝 즈음에 닿은 입술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자연스레 내리깐 눈은 그림자가 드리워 짙푸른 색이었다. 온기가 달아 마냥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푸른 시선이 피할 틈도 없이 저를 얽어매었다. 긴장이며 불안감 따위는 뒷전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그의 얼굴에 약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기분이란. 잠시간 말을 잃었던 이리트는 짧게 끊어진 숨을 내뱉었다. 

“따로 싸우는 건 처음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이번엔 경우가 좀 다르니까.”

“도망칠 수도 없지.”

“……다치지 마.”

“이리트, 당신도.” 

이리트는 마디가 도드라진 그의 손을 한 번 힘주어 꼭 잡았다가 놓았다. 긴 인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적의 실체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꺾고 살아서 돌아가리라. 그리페는 굳게 다짐하며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에 아직 이리트가 꾹 쥐었던 힘이 남은 기분이었다. 그는 괜스레 제 손을 쓸었다가, 자신의 수족과 다름없는 창을 집어 들었다. 가벼이 허공을 가른 창이 손에 맞춘 듯 감겼다. 이리트의 감은 꽤 잘 들어맞는 구석이 있으므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출발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정체 모를 적이 나타난 곳 근방은 이미 일반인의 대피가 끝나 텅 비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장소마저도 인적이 없으니 낯설었다. 콧잔등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 그리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내 회백색으로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렸다. 늦겨울의 미련일까, 시기가 이미 지났음에도 내리는 눈은 꽤 굵다. 감상은 짧았다. 혹시라도 눈이 많이 내려 쌓이게 된다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페는 후방 부대에 연락을 마친 뒤, 우선 작전을 속행할 것을 지시했다. 

중심부로 갈수록 주위는 폐허와 거의 다름없는 꼴이었다. 부서진 건물 파편이 바닥을 아무렇게나 구르고, 잘 다듬어진 길은 뒤집혀 흉했다. 적이 가까워질 때마다 더 강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숨소리를 죽이고 발걸음 소리를 지운 채 걸었다. 도저히 생물이라 볼 수 없을 듯한 울부짖음이 지축을 울렸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 정신을 할퀴었으나, 그리페는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창을 고쳐 쥐었다. 동요를 내보일 순 없었다. 

오랜 시간 자라왔을 커다란 나무는 부서져 여린 속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채 다 성장하지 못한 나무는 거대한 괴수의 발아래 으스러져 원형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분명 울창한 숲이 자리했던 곳이건만. 실체를 마주하고서도 저것이 생명체인지, 혹은 기계 덩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압도적인 크기와, 그에 뒤따르는 파괴력이 여태 보아왔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을 뿐. 

연락과 그에 뒤이은 지시는 간결했다. 후방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할 것. 함박눈은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눈은 땅에 닿는 족족 녹아내려 흙을 축축하게 적셨다. 이런 날씨에는 집 안에서 이리트를 끌어안고 한껏 게으름을 피워야 하건만. 긴장감 사이로도 실없는 생각이 삐져나왔다. 금방 잡념을 지워낸 그는 괴수를 면밀히 살폈다. 정체조차 짐작할 수 없었으나 저것을 최소한 무력화 시켜야 했으므로. 

부대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모험가로 이루어진 부대인 만큼 자유로웠으나 작전을 가벼이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제 연인은 얼마나 눈에 띄는지. 자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고,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상한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힘들었다. 여럿이 상처를 입었고, 어쩌면 이미 사망자가 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페는 숨을 돌릴 겸, 한 걸음 물러서 전황을 살폈다. 창끝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져 흙바닥을 적신다. 진득한 액체를 떨쳐내려 휘두른 팔이 흔들림 없이 멈추고 그리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토록 피를 흘려 대니 적어도 생명체이긴 하겠거니, 막연히 생각했다. 

함성이며 비명,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까지, 모조리 귀를 쟁쟁 울렸다. 무기를 내지를 때마다 두꺼운 살갗이 갈라지며 체액이 튀었다. 갑주 사이로 피가 스미는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한결같이 불쾌했다. 큼지막하게 상처가 벌어지면, 이리트를 필두로 한 마도사의 공격이 적중했다. 그때마다 괴수는 괴성을 내지르고 다리며 굵은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가 스치고 지나간 땅이 깊숙이 파여 덜 마른 흙이 드러났다. 흙에 섞인 파편이 뺨을 스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다져진 땅이다. 사람이 제대로 맞았다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괴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귀기 서린 눈이 천천히 굴러 멈춘 끝에는 마도사 부대가 있었다. 이리트가 있는 곳. 어떤 직감이 머리를 스쳤으나 막을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괴수가 무엇을 하려는지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 않을 때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했다. 눈앞이 온통 붉은 것은 피가 튄 탓인가, 걱정으로 시야가 좁아진 탓인가. 

집중이 제대로 되질 않는다.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전장이건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잘 벼려진 날이 다시 한번 괴수의 단단한 가죽을 가르는 그 찰나. 괴수를 중심으로 에테르의 파장이 흔들렸다. 비교적 둔한 제게 그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라면 괴수가 목표로 한 곳은 도대체. 다수의 마법이 허공에서 사그라졌다. 그리페는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입을 틀어막은 이리트의 자세가 흔들렸다. 그는 제 무기를 땅에 박아 넣듯 짚은 채 가까스로 버텼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쓰러질 법한 모습으로. 하얀 손가락 틈 사이로 발간 꽃이 피었다. 나누어 낀 반지의 투명한 보석이 붉게 빛이 났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짙은 얼룩은 착각일 터였다. 거리가 멀어 이리트의 검은 비늘이 번져 보이는 탓이다. 그리페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거두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었다. 

차가운 눈이 끊임없이 내려 머리칼이 축축했다. 손끝이 떨려와 그리페는 몇 번이고 창을 고쳐 쥐었다. 괴수가 끝끝내 힘을 잃고 무력화될 때까지. 괴수의 거대한 몸체는 쓰러지면서도 커다란 피해를 입혔으나, 여태까지의 공격에 비하면 형편없이 느렸다. 젖은 눈이며 괴수와 사람의 피로 땅이 젖어 붉었다. 이미 마비된 코는 피비린내를 느끼지도 못했다. 손등으로 제 얼굴을 쓸었으나 외려 피가 더 묻는 꼴이 되었다. 

이거면 됐다. 더 움직이지 않는 괴수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그리페는 연인이 있을 쪽으로 향했다. 질척한 땅이 발목을 잡았다. 아니다. 정말로 발을 잡아 묶는 것은 지독한 불안이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그는 긴 주술봉에 간신히 기대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리트. 이름을 내어 부르려 했으나 목이 메어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제 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이리트는 제 기척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는 사람이었다. 

“이리트!” 

서러움이 담긴 목소리를 들은 그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이리트의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이 영원 같았다. 눈물처럼 흐른 핏줄기며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입가의 핏자국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달려 허물어지는 몸을 받아 안았다. 내쉬는 숨소리마저 불안정했다. 시야가 잔뜩 일렁여 이리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이 다가와 제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체온은 언제나 저보다 낮았으나, 이토록 차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미안……” 

짤막하게 사과한 이리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백지가 된 것 같았다. 다가오는 이가 치유사임을 알면서도 이리트를 놓아주지 못했다. 치유사는 저를 제지하지 않고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건 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치유사의 손이 끊임없이 따스하게 빛났으나 이리트의 안색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가 치유사의 손을 막을 때까지도. 이리트는 치유사와 시선을 마주친 채 고개를 저었다. 미약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내부가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괴수가 어떠한 수를 쓰고, 에테르가 몇 배로 증폭되어 역류했다. 피해를 입은 이는 그 하나가 아니었으나 이리트는 강한 만큼 타격이 컸다. 

이리트는 오랜 기간 익숙해진 반지를 빼 그리페의 손에 올려 주었다.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이 허전했고, 펼친 손이 꼴사납게 떨렸다. 감이 좋지 않았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뺨 위로 떨어지는 물기는 아직 그치지 않은 눈인가, 연인의 눈물인가. 시선을 올리자 잔뜩 젖은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를 보면 아픔이 잊히고, 자꾸만 웃음이 샜다. 그리페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중에도 화난 표정이었다. 

“인상, 찌푸리지… 마.” 

말을 하려 입을 열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새어 나왔다. 겨우겨우 내뱉은 문장은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까.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런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아프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는 그냥 입을 다물고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페의 뺨에 못 보던 생채기가 남았다. 흉 지면, 안 되는데……. 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으나 이리트는 다시 웃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랑해.”

속삭이는 목소리가 겨우 귓가에 닿았다. 자청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가려졌다. 미약한 숨이 스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손 위에 얹은 손에 힘이 풀렸다. 그리페는 빠져나가려는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리트는 잠에 빠져든 듯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아직 답을 돌려주지 못했건만, 그는 걸음을 서둘러 이곳을 떠났다. 

괴수가 쓰러지며 우리는 승리했다. 그런데도 무력감이 숨통을 조여 버거운 숨을 삼켰다. 품 안에 가득히 안은 몸에 아직 온기가 남았다. 뺨의 상처가 뒤늦게 쓰라렸다. 제 뺨에 남은 상처 따위가 무엇이라고. 이리트를 원망스레 바라보았으나 그가 다시 눈을 뜨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무며 질척하게 젖은 땅이며 할 것 없이 눈이 쌓여 세상이 희끗희끗하게 물들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끊임없이 귓가에 울렸다. 살아야 했다. 하지만. 품에 안은 몸이 슬픔의 무게만큼 무거웠다. 이곳에서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페는 미동조차 없는 시신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절에 맞지 않는 추위가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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