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12)
2023.04.14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대로 더 잠들고 싶었다가도, 침구의 촉감이 낯설어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얀 천장, 코끝을 스치는 싸하고 차가운 냄새. 몇 번이나 신세를 진 적이 있었던 협회 내의 병원이었다. 분명 몇 군데쯤 부목을 덧대 놓았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이었으나, 사지는 자유로웠다. 치유계 센티넬이 어지간히 힘을 쓴 게 분명했다. 느껴지는 이능의 반동은 미미한 정도로, 의식이 없는 동안 대체 약물을 쓴 것일 터였다. 평소 같았다면 굳이 의료진을 부르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그는 침대 근처 벽에 붙은 버튼을 눌렀다.
작은 움직임에도 통증이 뒤따랐다. 큰 부상이 이능 덕에 거의 회복되었다 한들 뒤따르는 통증이 가시는 데에는 적어도 사나흘은 걸릴 거라고, 그리페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가 말했다. 의식을 잃은 지 이틀 만에 눈을 뜬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으나, 그리페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퇴원할 겁니다.”
“조금 더 상태를 지켜보시는 게 나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쪽으로 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고개만 끄덕이지 마시고.”
의사는 하루라도 더 빨리 퇴원하고 싶어 몸이 단 센티넬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치유계 센티넬의 이능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었다면 세상에 의사 같은 게 존재하기나 했겠냐만, 그걸 알아주는 센티넬은 드물었다. 센티넬, 특히 물리계열들은 하나같이 제 몸이 강철쯤이나 되는 줄 아는 게 분명했다.
강철조차 긴 시간 갈아내면 결국 본래 모습을 잃건만, 하물며 인간의 몸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굳은 심지까지 지닌 탓에, 의사는 더 입원해 상태를 지켜볼 것을 종용하는 대신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병원에 올 것을 당부했다. 눈앞의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더 얹어 봤자 듣지 않을 게 뻔했으므로, 의사는 적당히 묵례를 건네고 병실을 나섰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쇼핑백 안에는 깨끗한 제복이 들어 있었다. 눈 뜨자마자 뛰쳐나오실 거 압니다, 따위의 말이 적힌 쪽지와 함께. 얼핏 짐작 가는 얼굴이 있어, 그리페의 낯에 일순간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제게 장비를 전달해 둔 것을 보니 괴수에게 패배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친 건 저 하나뿐만이 아닐 터였다. 최소 이틀, 넉넉잡아 일주일간 제 팀원들은 작전에 투입할 수 없으리라.
“웨이드.”
[그렇게 다쳐 놓고 벌써,]
“이리트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 간단하게 말해두자면 위치는 확보했고, 헤르데의 안위는 아직 확인이 안 됐다.]
“……”
[이쪽 팀원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니 무작정 현장으로 나갈 생각 말고 대기해.]
“확인했습니다.”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페는 그 길로 차를 몰아 이리트의 집으로 향했다. 근래 들어 제집보다 이리트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던 만큼, 제 옷가지며 세면도구 따위가 슬금슬금 늘어나 있었다. 욕실, 차가운 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그리페는 우뚝 서 있었다. 젖어 늘어지는 머리칼을 대충 넘긴 이가 제 얼굴을 문질렀다. 신경이 곤두서 머리가 아팠다.
겨우 사흘쯤 사람이 없었다고 실내에 냉기가 감돌았다. 자신에게는 애초에 추위며 더위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리트는 따듯한 걸 좋아했는데. 이리트의 집으로 온 건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시선이 닿는 곳, 떠오르는 기억마다 이리트가 있어 숨이 막혔다. 이리트에게는 분명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동시에, 이리트라면 팔마의 인사들을 들이받고도 남았을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돌리기 위해 그리페는 실내를 정리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처음부터 집안이 깔끔했으므로, 어떻게든 할 일을 찾아 정리한 지 삼십 분이 되었을 즈음 실내에는 정말로 더 할 것이 없었다.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그는 자꾸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깨끗한 창틀을 문질러 닦던 그리페의 손이 서서히 멈추었다.
걱정으로 온통 점철되어 있던 생각은 자연스레 이리트를 위기에 빠트린 원인으로 향했다. 협회 내에 배신자가 존재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불신한단 말인가. 협회 소속 인원들에게는 제각각의 계약과 금제가 걸려 있었으나 금제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모르는 이보다 아는 이가 더 많을 테다.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마주해야만 했던 배신자들. 그들은 상처 하나만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혼자 있는 게 아니니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고 했던 이리트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배치된 이는 제 몫을 다 했을까. B급이라고 한들 꽤 오랫동안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얼간이 A급보다는 훨씬 나은 인사였지. 협회를 배신한 게 아니라면, 그 또한 함께 납치되었을 테다. 아니면 반항하는 중에 죽음을 맞이했거나. 입이 썼다.
그리페의 시선은 오랫동안 방치된 듯 보이는 뒷마당을 향했다. 마구잡이로 자라난 잡초는 한겨울의 추위에도 쌩쌩했다. 당연한 듯 목장갑이며 필요한 도구를 꺼낸 그리페는 본격적으로 뒷마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팔을 걷어붙인 채 질긴 잡초를 뿌리째 뽑고, 뒤집어진 흙을 눌러 다듬는 손길이 꽤 빨랐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생각을 잊고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좋은 것도 없었다. 비록 부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아 순간마다 짧은 통증이 스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해가 저물고, 새벽이 찾아들 때까지 웨이드에게서 새로운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날밤을 새우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겨우 쪽잠에 들었을 즈음,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번호를 확인조차 않고 받은 전화는 제 안부를 묻는 팀원의 연락이었다. 제가 전해준 옷은 잘 받았느냐고 너스레를 떨던 이는, 다친 사람이 없냐는 제 물음엔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누구 하나쯤은 죽었거나 더 이상은 활동할 수 없게 된 게 분명했으므로, 그리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굳이 그에게 다시 전장에 설 수 없는 동료를 상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대형 작전에서 터진 비상사태, 난장판 속에서 부상자 하나 없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괴수는 하나하나가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였으며, 그들은 모두 목숨조차 내던질 각오를 다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에는 제가 자꾸 미련이 남는다고, 자꾸 이기적으로 굴게 된다고, 그리페는 끊어진 전화에 대고 푸념했다. 더 소중한 목숨도, 덜 소중한 목숨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한낱 인간에 그칠 뿐이어서. 독한 술이라도 목구멍에 들이붓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언제 웨이드에게서 연락이 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이리트를 구출해냈다는 연락이 온 건, 무려 나흘이 더 지난 후였다.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싶을 즈음에서야.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냐는 말에 웨이드는 침묵했다. 물론, 그건 그리페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만의 방식을 썼거나, 부상의 후유증이 남은 자신을 쓸 수 없었으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저를 부를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존재했겠지. 대다수의 가이드는 신체접촉을 통해 가이딩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리트는. 감정은 일을 그르친다. 경험으로 깨달아야만 했던 사실. 제 손이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음을 깨달은 그리페는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닫힌 문 앞에 선 채 그리페는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미닫이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고요가 내려앉은 병실, 입구를 가리는 하얀 커튼 틈 사이로 비친 손목은 묶여 있었는지 온통 파이고 긁혀 엉망이었다. 그리페는 품었던 생각 따위를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고, 성큼성큼 다가가 이리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리트는 눈을 감고 있음에도 피로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늘 하얗던 뺨은 부어오른 채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고, 다문 입술은 찢어지기라도 했던 건지 피딱지가 앉았다. 환자복 틈 사이 드러난 살갗에도 피멍 자국이 선명해서.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적어도 당신을 이 꼴로 만든 이들만큼은 다시는 이 세상에 두 발 딛고 서게 두지 않을 거라고. 이리트가 혹시 깨어나기라도 할까, 그리페는 숨죽인 채 분노를 억눌렀다. 겨우 들끓는 감정을 밟은 그리페가 흐트러진 이리트의 머리칼을 쓸어 정리하는 사이,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킨 이는 커튼을 잘 닫아 병상을 완전히 가리고 그 앞에 섰다. 이곳에 오는 이라고 해 봤자 의사거나 치유계 센티넬, 혹은 웨이드 정도임을 알면서도. 문을 열고 나타난 이들의 얼굴은 익숙했다. 그 또한 몇 번쯤 신세를 진 적 있는 센티넬, 로레타와 웨이드였다.
“왜 그러고 서 있는 거예요? 아니,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봐줄 테니 비켜 봐요.”
로레타는 그리페가 굳은 낯으로 서 있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리페를 옆으로 밀어내려 했다. 버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버텼겠지만, 그리페는 한숨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할 말이 있는 듯 웨이드가 이쪽에 눈치를 주는 것을 꿋꿋하게 무시하며. 커튼이 걷히고, 여전히 잠들어 있는 이리트를 본 로레타가 혀를 끌끌 찼다.
“어이구…… 공주님 얼굴이 엉망이 되셨네, 아주.”
“……공주?”
“처음 들어봐요? 본부 센티넬 사이에선 이래저래 유명한데, 얼음공주라고. 왜 그, 있잖아요, 보통 도도하게 구는 게 아닌 데다가, 이렇게 말하자니 좀 그런데… 싸가지도 좀 없고. 센티넬에게는 말도 거의 안 붙여서 몇 년 동안 목소리도 제대로 못 들어본 센티넬이 몇 트럭이거든요.”
다소 착잡한 기분으로 이리트를 다시금 살피던 그리페의 고개가 로레타를 향했다. 그리페의 표정이 우습기라도 한 건지, 그녀는 퍽 재미있다는 듯 으쓱였다. 헤르데가 꽤나 잘 대해준 모양이에요. 그런…… 상상도 못 해 본 것 같은 얼굴을 다 하고. 실없는 너스레 뒤로 이리트의 행동이 스치면, 그리페는 뭐라 말도 못 하고 마른세수나 해야만 했다. 옆에 선 사람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로레타는 태연하게 이능을 발했다.
부드럽고 따듯한 힘이 깃들면 빠르게 부기가 가라앉고, 흉한 피멍이 사라진다. 보는 사람마저 아프도록 파여 나간 손목에 새살이 돋고, 피가 고인 손톱이며 자잘한 상처가 말끔해진다. 모든 상흔이 사라지고 나면, 이리트는 그저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잠든 것처럼 보여서. 그리페는 별달리 흐트러지지도 않은 이불을 고쳐 덮어 주고, 희미한 흉이 남은 손등을 쓸었다.
“사나흘 정도는 못 일어나지 싶어요. 후유증이 남을 만큼 심하게 다친 곳은 없는데, 음…… 깨어나면 잘 보듬어주기나 해요.”
“알겠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말고요. 어쨌거나 살아남았잖아요. 흉터는…… 이 정도면 그리 오래 안 걸려서 사라질 거예요. 배신자는 찾아내서 죽여 버려야 할 테지만. 아무튼, 이제 가볼게요. 고생해요.”
로레타는 끝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전하고는 병실을 떠났다. 병실 한쪽 벽 쪽에 붙어 배치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웨이드에게, 그리페는 그제야 시선을 주었다. 웨이드의 낯은 꺼멓게 죽어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처럼. 근래 정보팀은 죄다 죽어가는 낯이긴 했다고, 냉정하게 생각을 끊어 낸 그리페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하, 이런 데서 헤르데를 닮아가는 모양이지.”
“그런 게 지금 중요합니까?”
“그래, 그렇지는 않지. 어쨌거나 나는… 배신자 때문에 왔다. 끄나풀을 여기저기 많이도 심어 뒀더군. 혈연이나 돈 같은 문제로 협박당한 이들도 있었고. 미리 말해 두자면, 네 휘하에도 있었어.”
“……그랬습니까.”
“놀라지도 않는군.”
“협회가 존재한 이래로 배신을 꿈꾸는 이들이 사라진 적 없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배신자는 모조리 다 찾아낸 것, 맞습니까.”
“백 퍼센트라고는 말 못 하지. 알다시피.”
그리페는 의식 없는 이리트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폈다. 팔마는 어떤 식으로든 협회의 전력을 깎아 먹으려 들었고, 반인륜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협회의 더없이 많은 규약과 규제에 숨통이 막힌 센티넬이 한 걸음, 선 너머로 발을 내딛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저와 손발을 맞추던 이가 어떤 이유에서든 팔마의 손을 잡은 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제 팀원이었다는 건, 들끓는 화를 누구에게도 표출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책임이 따르는 위치라는 게 늘 그랬다. 제게 남았던 부상의 후유증도 이제는 사라졌고, 어떤 모습으로든 이리트가 돌아왔으니 자신의 짧은 휴식도 끝이었다. 전투에서 희생된 이들과 배신한 이들이 빈자리로 남은 제 팀을 마주해야만 할 때였다.
“이 외에 전달 사항 있습니까?”
“없어. 복귀는…… 헤르데가 깨어날 때까진 미루지 그래.”
“……”
“아니, 그래. 생각난 김에 확언해 두겠는데, 헤르데를 어떻게 해 볼 마음 같은 건 접었거든. 누가 진하게 키스하는 꼴을 보여준 덕분에.”
부러 짜증스레 뇌까린 말, 그 속에 밀어 넣어 털어내는 미련. 이리트는 단 한 번도 제게 틈을 내어준 적 없다는 것도, 제게 관심을 보인 적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이리트가 여전히 온전하게 정보부 소속이었거나, 이전처럼 방사 가이딩만을 했다면 미약한 가능성이나마 붙잡고 매달렸을 터였다.물론, 어느 쪽이든 제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웨이드는 꿋꿋하게 병상 옆을 지키듯 서 있는 이를 응시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뭡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가보지.”
이리트가 깨어날 때까지, 그리페는 하루 대부분을 병실에서 보냈다. 보호자를 위해 준비된 간이침대도, 벽면 한쪽을 차지한 소파도 잠을 자기에는 다소 불편했으나 그리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때때로 이리트에게 병문안을 온 이들은 대다수가 가이드거나 정보부 소속, 혹은 현장지원팀 소속이었다. 센티넬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는다더니, 그게 정말 과장된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페는 새로이 알게 된 이리트의 별명을 몇 번쯤 곱씹었다. 제집에 고이 모셔 둔 우산이 이 순간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누가 보면 그리페가 입원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긴 시간을 병실에서 보낸 지 사흘째로 넘어가는 깊은 새벽, 이리트가 깨어났다. 창을 덮은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빛, 이리트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풍경은 낯설었다. 제게 연결된 링거며 익숙하지 않은 촉감의 침대, 누가 봐도 환자복인 게 분명한 옷가지.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몸이 뻐근했으나,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크흠, ……그리페.”
잠긴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작기만 했는데, 그리페는 잠든 적도 없는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잠긴 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 좀 켜 봐, 얼굴 보고 싶어. 그리페는 여느 때처럼 불평 한 번 않고 침대 위, 머리맡에 자리한 보조 등을 켰다. 따스한 빛깔의 조명, 그 아래 여지없이 드러나고 마는 얼굴. 그렇지 않아도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이가 며칠 사이 더 살이 내린 것 같았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는 벽안에 수만 가지 감정이 들끓었다.
그리페를 다시 만나면 갇혔던 곳은 끔찍했다고, 농담처럼 말하려 했다. 어쩌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라고, 다시는 빛을 마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는 데에는 그만큼 효과적인 바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막상 그리페를 눈앞에 두니 말문이 막혀 입을 뗄 수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긴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그리페였다. 목이 멘 듯 서러운 목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뻗으면, 그가 허리를 숙여 몸을 끌어안아 왔다.
따듯한 체온, 언제 기대도 저를 지탱해줄 것 같은 단단한 육체. 의식이 돌아온 순간부터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던 불안감은 그리페를 손안에 쥐고 나서야 확신으로, 안도로 화했다. 확인하듯 그리페의 등을 훑으면, 전부 괜찮은 것 같았다. 고작 며칠, 그러나 동시에 영원 같았던, 차라리 정신이 망가지기를 바랐던 고통도, 의식 없는 사이 말끔하게 치료된 상처에서 느껴지는 거짓된 통증조차도. 맞닿은 신체로 전해지는 숨, 미약하게 느껴지는 고동은 무엇 하나 빠짐없이 생의 증거였다.
“거기 있는 동안 계속 생각했어.”
“뭘 생각했어요?”
“너를. 예전에 네가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무엇이어서 이러냐고 물었잖아.”
“그랬죠.”
“이득 같은 건 생각한 적 없어. 단지 네가 죽지 않으면 했어. 실은, 상처조차 입지 않기를 바라.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사이가 되면 좋겠어. 계속 네 옆에 내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여태껏 자신은 효율을 위시하여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겨 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뒤흔들지 못했다. 제 판단에 감정이 섞일 여지가 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 목숨보다 남의 목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전략 병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 거였다. 제게 돌아올 이득 같은 게 있든 없든 조금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리페를 놓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계산 따위는 손톱만큼도 포함되지 않은 오롯한 바람. 뒤늦게 깨닫고 만 감정은 늪을 닮았다. 정아차 하는 사이 어디까지 잠겼는지도 알 수 없게 빠져 버리고 마는 늪. 어떻게든 몸을 빼내더라도 한 번도 그러한 일을 겪지 못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가끔, 네 체질이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미안해, 숨을 뱉는 듯 미약하게 속삭인 말.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지, 하지 못하는 건지 이리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 등허리에 매달렸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이리트는 제게 안겨 상체가 허공에 뜬 채로도 고개를 모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길게 생각을 거칠 것도 없었다. 껴안은 몸을 놓아준 그리페는 그대로 침대에 올라타 이리트의 위를 점했다. 방어적으로 몸을 움츠린 이의 자색 눈이 금방 자신을 향했다. 동그랗게 뜬 눈 탓일까, 이리트에게서는 평소보다 더 어린 티가 났다.
움찔거린 손은 제게 닿지 못한 채 침대 위를 짚었다. 당연한 듯 이리트의 손가락에 제 손을 얽은 그리페는 웃는 낯으로 제 가이드를 살폈다. 다른 누군가 자신의 체질을 언급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이리트에게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저조차 이리트를 붙잡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 생각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자신은 이리트의 견고한 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려 왔던 건지도 모른다. 여러 생각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 그만큼 침묵하는 이에게 말을 걸러낼 틈조차 주지 않고 싶었다. 이리트가 지닌 날것의 감정이 궁금했다. 제 속내를 알면 제게도 한 마디 욕지거리 정도는 던져 줄까. 늘 욕심내는 것 없이 살아왔음에도 이리트의 앞에 서면 치솟는 욕망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당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 누구도, 어떤 무엇도. 먼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왜, 네가……”
“내 옆자리는 오롯이 당신 거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리트. 원한다면 새로운 계약으로 날 묶어도 좋아요.”
“……계약서는 이제 지긋지긋해.”
“확실한 쪽을 좀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백지에 지장 찍으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얼마든지.”
뭐라 한마디 하고 싶은지 이리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렸을 시절도 아니고, 지금의 제가 계약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있겠느냐고 해명하는 대신 그리페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튀어나오는 잔소리를 눌러 참으려 다물었던 이리트의 입술이 이내 허락하듯 벌어졌다. 입맞춤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행위였으나 이상하게도 혀가 아릴 만큼 달았다.
“이리트.”
“응.”
“당신이 없는 동안 뒷마당을 정리했어요.”
“엉망이었을 텐데.”
“봄이 오면 같이 잔디를 새로 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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