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13)
2023.04.21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이리트는 날이 밝자마자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날 하루를 통으로 쉰 이리트는 바로 다음 날, 조금 더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그리페의 걱정을 아무렇지 않게 밀어내며 복귀를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그리페의 짧은 휴식도 끝났다. 반쯤은 자의로, 반쯤은 타의로 미뤘던 일들. 실제로는 일주일 만에 협회에 들른 것이었으나 체감상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지난 사건의 여파가 다 가시지 않은 듯, 센터 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 사이에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팔마 토벌 작전은 자연히 미루어졌다.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인 탓이었다. 최전선에서 괴수와 맞서 싸워야 하는 만큼, 인원 충원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협회 소속이라면 B급 이하의 센티넬조차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금전적 지원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 그게 센티넬의 목숨값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협회 소속이 된 이들은 반년이 지나기 전에 칠 할이 나가떨어졌다. 일 년 이상 남는 이들의 수는 처음의 일 할에 겨우 미치는 수준이었다.
작전의 주축이자, 들이치는 용암을 막는 첫 번째 방파제가 되었던 그리페의 팀은 인력 손실이 가장 컸다. 사망자 셋, 부상의 여파로 다시 전장에 설 수 없는 이가 넷, 그 이하로 어떤 사유로든 당장 작전에 나갈 수 없는 이들 다수. 마지막으로 배신을 선택한 이 둘까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이 아홉이었다. 주 전력 오 분의 일가량을 작전 한 번 만에 잃은 꼴이었다.
작전 중 목숨을 잃은 이들은 대개 본부 내의 봉안당에 안치되고, 이번 작전의 전사자 또한 유족이 요청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 앞에 선 그리페는 한 팔에 들어올 만큼 작은 유골함을 눈에 담았다. 칸 안에는 아마도 친지가 가져다 두었을, 환히 웃는 얼굴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 휴식 중에나 드물게 볼 수 있었던 표정들. 함께 배치해 둔 인식표며 훈장 따위를 보고 있자면 속이 막힌 듯 답답해져 왔다. 그럼에도 담담한 표정의 그리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오랫동안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자신이 더 강했다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까. 덧없는 가정이 스치는 순간 그리페는 봉안당에서 벗어났다. 차고 건조한 공기가 머리칼을 흔들어 놓고 나서야 긴 숨을 삼킬 수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반복되는 실수를 교정할 수는 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과거에 매몰되면, 전장에서 위태로워지는 것은 저 하나가 아니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잃은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되, 동정해서는 안 됐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팀장님, 복귀하신 겁니까?”
“늦어서 미안합니다.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팀장님 반송장 됐던 걸 누가 모른다고.”
“하슬러.”
“어휴, 이 입이 방정이라.”
하슬러는 제 입을 과장되게 때리는 시늉을 해댔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그리페는 되레 씁쓸해졌다. 그는 그리페가 처음 팀을 이룰 때부터 함께한 동료였다. 봉안당 앞에서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있던 자신이 허슬러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그렇다고 주절주절 변명을 주워 삼길 생각은 없었다. 걸음을 옮기면, 허슬러는 익숙한 듯 따라붙었다.
“그보다 파트너분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성큼성큼 걷던 발걸음이 일순 멈추었다가, 곧 다시 움직였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반사적으로 내뱉은 대답, 그 끝에서 그리페는 이리트를 생각했다. 이리트는 괜찮았다.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늘 제게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속으로만 삼키는 이였다. 이번의 일도 그랬다. 이리트는 깨어난 이래,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몸에 남은 상흔만으로 어렴풋이 당시의 흔적을 되짚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저 이리트의 성향일 뿐이라고, 치미는 불안감을 누르려 했다. 이리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스치기 전까지는.
“저, 팀장님?”
“듣고 있습니다.”
“전화 오는 것 아닙니까?”
“아….”
“저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대강 눈인사를 건네자 하슬러는 재빠르게 멀어졌다. 켜진 화면 위, 반짝이는 이름은 이리트의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침 그를 생각하는 와중에 기다렸다는 듯 연락이 오다니. 분명 건물 밖에 서 있는데도 기합 소리며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샜다. 훈련 구역 근방은 늘 그렇긴 했다. 조금이라도 이리트의 목소리를 잘 듣고 싶어, 그리페는 수신하자마자 뒤돌아 훈련 구역에서 멀어졌다.
[바빠?]
“아니요. 왜?”
[보고 싶어서.]
“어디예요.”
[잠깐 정보부 쪽 왔어.]
“그쪽으로 갈까요?”
[음, 아니.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어.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어.]
“알았어요. 먹고 싶은 건?”
[생각나는 건 따로 없는데. 너는.]
“지금은 나도 그다지. 집에 식료품도 없는데, 피곤하지 않으면 장 봐서 들어가는 건 어때요.”
[그것도 괜찮겠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이따 봐요, 이리트.”
[나중에 봐.]
이리트의 이름이 사라진 화면에 제 얼굴이 비쳤다. 검은 화면에 자각하지도 못한 새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얼핏 비치면,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이리트의 마음이 제게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불안은 이리트를 향한 불신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가 조금 더 제게 의지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기인하였다는 것 또한.
이리트 헤르데, 정보부 소속이었던 가이드. 키는 저보다 십오 센티미터쯤 더 크고, 나이는 무려 아홉 살이나 어린. 이리트의 정보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던 그리페는 제 얼굴을 큼지막한 손으로 덮었다. 이제 와 나이 차이를 이유로 관둘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불안은 이리트가 들었다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말했을 법한 고뇌로 끝이 났다. 한숨을 삼킨 이는 훈련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훈련장 한쪽, 훈련에 임하는 이들을 때때로 살펴 가며 그리페는 새로이 지급받은 창을 느리게 휘둘렀다. 기존의 것보다 개선되었다며 쏟아내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낸 이는 창을 쥐고서야 비로소 이질감을 잡아챘다. 기본적인 형태는 바뀐 것이 없었음에도 손에 잡히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무기는 신체의 연장이며, 그 끝자락까지도 통제하에 있어야 했다. 몇십번이고 반복되는 동작, 짙푸르게 가라앉은 시선은 창끝을 향했다.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이유는 처음부터 하나, 이리트였다. 일주일쯤 내내 이리트의 옆에 붙어살다 못해 종일 그를 생각하던 게 그새 버릇이라도 된 건 아니었는지. 무엇보다 스피커 너머 제가 보고 싶었다 말하던 목소리가 어쩐지 가라앉은 것 같아서. 그는 버릇처럼 창을 크게 돌려 어깨에 걸치고, 긴 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부재는 이미 길었다. 그러나 일주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동료를 잊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고, 제가 부재한 사이 새로이 배속된 이들은 아직 기존에 있던 이들과 제대로 동화되지도 못했다. 그 외에도 책임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은 착실하게 쌓이고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몸을 써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페는 주변을 정리한 후 걸음을 옮겼다.
“이것도.”
“간식거리만 사고 있잖아요, 이리트.”
두 사람의 시선이 카트를 향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식사로 쳐줄 수는 없을 과자며 초콜릿 바 따위가 가득했다. 혼자 사는 데다, 가뜩이나 귀찮음을 타는 제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그리페는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함께 밤을 보내고 난 후면 그는 없는 재료를 사 와 가면서까지 아침을 꼭 차려 주었으므로. 그게 아니더라도 그리페는 몸을 쓰는 만큼 식사를 잘 챙겼고, 먹는 양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다 한들 그건 그리페의 얘기였지. 제게는 끼니를 꼬박꼬박 채우는 것도 보통 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혼자 있을 땐 잘 안 먹어. 그런 재료는 금방 상하니까……”
몇 번쯤 제 냉장고 상태를 보지 않았던가. 물론, 그리페는 제가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변명이 통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제 식생활이 바뀔 리가 있나. 이리트는 그리페와 눈을 마주친 채, 손만 움직여 슬그머니 들고 있던 군것질거리를 카트에 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벌어졌던 그리페의 입술이 다물렸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해 줄게요. 각자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한들, 매번 식사를 챙기러 올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꿋꿋하게 마주하던 눈을 돌리고 먼저 걸음을 옮기면, 그리페는 잠시간 멈췄다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같이 살자는 소리를 이렇게 할 줄은 몰랐는데.”
힐끗 본 그리페의 뾰족한 귀 끝이 익은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담담한 표정과는 다르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까지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평소보다 거칠게 뛰는 맥박을 무시한 이리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매대를 살피는 척했다. 센티넬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겠다던 제 기조야 그를 만난 이후로 무너진 지 오래였으나, 두려움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리페는 이미 몇 번이나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제가 팔마에 납치당하던 그날, 작전지에 나타난 2급 괴수를 몸으로 막아낸 그리페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고 했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부상에 무뎌지고, 그러다가 운이 나쁜 어느 날 목숨을 잃었다. 하물며 그리페는 제 목숨을 보전하는 것보다 남을 구하기에 더 바쁜 종류의 인간이었다. 차라리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적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이였다면.
이리트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그리페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의 얼굴이며 몸이 얼마나 제 취향으로 생겼든 관심이 가지 않았을 터였다. 애초에 그와 같은 얼굴이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취향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겠지. 그래서 자꾸만 두려웠다. 그리페와 함께하는 일상이 익숙해지기라도 할까 봐. 그리페를 먼저 붙잡은 건 자신이었음에도.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감각을 잊을 수는 없었다.
“내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절해도 괜찮아요.”
“……”
“그보다 이리트, 아직도 먹고 싶은 게 없어요?”
이런 게 문제였다. 몸에 밴 배려와 다정함, 그가 지닌 온기에서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때때로 그의 끝을 상상하면서도 그리페를 쥔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리페가 온전히 제 것이었으면 했다. 자신은 그리페에게 있어서 독이었다. 혹은 그 반대거나.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은 없었다. 적어도 그리페가 센티넬로서 활동하는 한, 서로의 존재를 멀리한 채 살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된 탓이었다. 그 때문일까, 이리트는 기이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그리페를 거절하지 않는 이상 그는 제 옆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네가 먹고 싶은 걸로 해.”
“그걸로 괜찮아요?”
“네가 해준 건 다 맛있더라.”
그리페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도. 별것 아닌 그 변화가 대체 무엇이라고 두려움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흔들리는지. 한 걸음 뒤처졌던 그리페는 자연스레 이리트의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여럿이었으나, 이런 곳에서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리트는 다만 카트 한구석에 술 한 병을 실었다.
“술?”
“음, 오늘은 좀 당겨서.”
“그제 퇴원했잖아요.”
“어디 아파서 앓아누웠던 것도 아니고. 상처도 다 나았는데.”
파란 눈이 불만을 담은 채 이쪽을 향했으나, 어깨를 으쓱이면 한숨과 함께 그리페의 시선이 조금 느리게 매대로 향했다.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 건지, 요리에 익숙하기 때문인지 그는 크게 망설이지도 않고 다양한 재료를 담았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이며 눈길이 닿는 곳을 좇는 일은 그 자체로도 꽤 재미있었다. 그리페는 별 고민 없이 물건을 고르는 것 같다가도, 때때로 라벨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대충 비슷비슷하지 않나, 요즘은.”
“그래도 당신에게, ……아니, 아니에요.”
갈 곳을 잃은 듯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는 눈. 일순간 제 입을 가렸던 손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내 그리페를 살피던 이리트는 일련의 행동을 목도하였으며, 당혹감 내지는 부끄러움 너머 삼킨 말의 내용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어린애를 대하듯 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가도, 그가 그런 사소한 것마저 신경을 쓴다는 데에 생각이 가 닿으면.
이리트의 집으로 돌아온 그리페는 당연한 듯 사 온 식료품을 정리했다. 제가 손댈 것도 없이 끝난 뒷정리, 따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재료로 요리를 시작하는 과정이 매끄러웠다. 턱을 괸 이리트의 눈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리페를 좇았다. 이제는 정말로 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센티넬의 등을. 테이블 위에 둔 재료를 가지러 올 때마다 그리페는 굳이 시선을 마주쳤다. 바다를 조각내 담아둔 것만 같은 눈,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밀 빛 금발. 시선이 세 번쯤 뒤엉켰을 때, 이리트가 그리페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약속이나 한 듯 맞닿은 입술, 더없이 가까운 숨소리. 그리페의 등 뒤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그리페가 먼저 제게서 떨어졌다. ……밥부터 먹어요, 이리트. 미약하게 찌푸려진 눈썹은 무언가 억눌러 참는 것처럼 보였던가. 이리트는 테이블 아래 숨긴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진득한 입맞춤 이후로 그는 이쪽을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달궈진 기름에 재료가 익어가는 지글지글 소리,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도는 맛있는 냄새. 그리 오래 걸린 것 같지도 않은데 테이블 위로 놓이는 그릇마다 음식이 가득했다. 그리페는 일어나려던 이리트를 말리고, 수저와 잔까지 놓은 후에 자리를 잡았다.
“요리를 배웠어?”
“열량만 채우고 싶지는 않아서……. 하다 보니 재미도 붙인 셈이에요.”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면, 식사 자리는 조용했다. 애초에 식사 중에 활발히 대화를 나누는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리페의 말이 자꾸 맴돌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약간의 심란함이며 입을 맞추고서야 자각한 욕망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이리트는 잔의 절반쯤에서 찰랑이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이리트, 술 안 마시지 않았어요?”
물론, 타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리트의 정보는 한정적이기 그지없었으므로 확신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잔을 채우려는 이리트를 말리고 술을 부어 주면, 뜻을 읽어낼 수 없는 자색 눈이 그리페를 길게 훑었다. 안 마시지, 보통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이골이 났다고 할 만큼 익숙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나, 이리트를 앞에 두고 있자면 하나도 의미 없는 일 같았다. 이리트는 침묵할지언정 제게 거짓말을 한 적 없었고, 먼저 말을 꺼내면 수많은 생각이 우습도록 선선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왜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지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리트가 고른 술은 달았다. 제게는 음료수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질 정도로. 이런 것을 네 잔쯤 연거푸 마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힘이 빠진 듯 느슨하게 뜬 눈, 앳된 얼굴은 쉬이 취기가 오른 티가 났다. 더 내놓으라는 듯 내민 잔을 빼앗으면, 이리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급하게 마셔요.”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쉬이 말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마시지도 않던 술을 사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더 마시면 금방 꽐라가 될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영문을 모르는 이에게 되는대로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어지러웠다. 열이 오른 것 같아, 이리트는 제 손등을 뺨에 대 봤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를 바라보는 그리페의 시선은 단단하고 곧았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페.”
“왜, 이리트.”
“내가 네 약점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어. 하지만…… 얘기를 들었어. 웨이드가 널 붙잡았다고. 게다가 팔마에도 이미 정보가 팔렸지.”
“……”
“너도 생각했을 거잖아. 이번에는 네가 아닌 누군가가 나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지만… 혹시나, 만약에, 또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정말로 움직일 수 있는 게 너 하나뿐이라면.”
숨이 막혔다. 애써 외면했던 가정이 더는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리는 말이 제게는 꼭 칼날 같아서. 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 그러나 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말은 쉬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력의 주축인 제가 이리트의 옆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투가 벌어질 때면 언제나 자신은 최전선에, 이리트는 최후방에 있어야 했다.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를 포기해.”
애써 유지하던 담담한 표정이 완전히 무너진다. 벌린 입술 새로는 완성하지 못한 문장조차 내뱉어지지 않고, 그리페의 손에 쥐어진 유리잔에 긴 실금이 새겨진다. 그리페, 손 다쳐. 단단한 손목을 붙잡으면, 그는 이 상황에서도 반사적으로 힘을 뺀다. 저항이라고는 하지 않는 손을 끌어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으면, 투명한 유리잔은 새겨진 흰 줄의 모양대로 깨져 날카로운 파편이 테이블 위를 구른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다. 그리페의 가슴 속에도 저런 금이 새겨진 건 아닌지.
“이리트 헤르데.”
“……”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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