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 6
EP. 귀착(01)
2022.03.19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혼란에 빠진 전장 위를 함선을 타고 누비는 건 꽤 색다른 경험이었다. 어느 때에는 광자포를 쏴 갈기고, 적절한 보호막이 동반될 때에는 미사일을 투하했다. 처음 전자폭탄을 투하했던 전투기와 전함의 지원에 힘입어 혁명군은 피해를 최소화한 채 군부의 외곽을 점령했다. 외곽을 점령하는 도중 혁명군에 합류한 이들도 제법 되었다. 부하를 버린 건 게오르기 하나가 아닌 탓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령부가 자리한 중앙이었다. 면적으로 따지자면 군부 내에서도 좁은 편에 속하나, 역사상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곳. 자본을 있는 대로 들이부어 온갖 방어 체계를 갖춘 이들에게는 어지간한 수단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무작정 들이박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재정비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한 병영에 모여들었다.
군복을 입은 이들과 자유로운 복장을 한 이들이 자연스레 뒤섞였다. 그들은 모두 혁명군에 가담하기로 한 이들로, 상관에게 버림받은 이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중에서도 그리페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시선이 제게 향하는 것을 알았으나 그리페는 침묵했다. 이럴 줄 알고도 이리트와 함께 하려 했고,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이리트는 무언가 거슬리는지, 늘어진 꼬리가 불만스레 흔들렸다.
“이리 와.”
그리페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자, 그는 저항도 하지 않고 제 뒤를 따랐다. 수군거림은 저를 향한 것도 아니건만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 그리페에게 무기를 들이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는 젊고 잘생긴 데다 능력까지 받쳐주는 장교였고, 그만큼 얼굴이 여기저기 팔렸다. 말단 병사마저도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알았다. 분명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는데. 이리트는 눈에 띄는 아무 문이나 열어젖혀 실내로 들어섰다. 주인을 잃은 집무실은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적당한 공간이었다.
손목을 놓아주면 그리페가 닫히다 만 문을 완전히 밀어 닫았다. 바깥의 소리가 차단되고, 집무실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페의 존재에 그들이 반감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군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부에 버림받아 뒤늦게 합류한 이들 또한. 아마도 그리페와 엮이지 않았다면 저 또한 그들과 그리 다를 바 없이 생각했을 테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리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쉬이 위로를 건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리트의 속을 어지럽히는 원인이 저 자신이었으므로. 동시에 그리페는 이제야 이리트가 그 나이대의 어린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기꺼웠다. 결국에는 별문제 없이 마음을 추스르겠지. 이리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엉뚱한 곳으로 화를 표출하지 않으며, 나아가야 할 곳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 하지만 그가 견디는 데에 익숙해지기 전에 제 위치며 입장이 바뀌면 좋을 텐데. 그리페는 느릿하게 다가가 연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리트, 나는 괜찮아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마주하고 나니 좀, 괜히 기분도 상하고 별로야.”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았다. 그를 앞에 두고 있자면 어리광이 느는 걸 얼핏 알고 있었으나 오늘은 유난히 더 그랬다. 그리페 또한 감내하고 있을 뿐일 텐데. 자연스레 몸을 기대면 따스한 체온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짧은 평화는 달았다. 기별도 없이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기 전까지는. 문을 열어젖힌 게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리페를 밀쳐내려 했으나, 그는 잠시간 머뭇거린 후에 뒤늦게 저를 놓아주었다.
“좋을 때구나.”
“에르마.”
“다른 사람들이 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더라. 너도 우리 사이에선 꽤 유명인사라는 걸 알고 있잖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주목받는 것이 싫어 그를 끌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간 동료들 사이를 떠나 있었던 탓에 잊었다면 차라리 변명이 되었을까. 저는 그저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에르마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가왔으나 그리페를 훑는 눈은 날카로웠다. 앞뒤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대뜸 그가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린 꼴이었다.
“소개할 사람이 있다더니…… 상상도 못 한 거물을 데려왔구나.”
“어쩌다 보니.”
“예까지 데려와서 이러는 걸 보니 보통 사이는 아닌 건 알겠다. 그래서 소개는 언제 해줄 거니?”
“대충 다 알잖아요.”
“내가 널 그렇게 예의를 모르는 아이로 키우지 않았는데.”
“제발, 에르마. 오해하겠어요.”
“하라지.”
그리페의 얼굴에 슬그머니 웃음이 떠올랐으나, 제 시선이 닿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이런 분위기가 된 걸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이리트는 제 마른세수를 했다. 중간에 끼어 버린 꼴이 되었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를 이런 식으로 소개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건만. 그리페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이리트는 새삼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은 그리페 하랄트, 이제는 우리 동료고, 동시에…… 내 연인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에르마. 대모님쯤 돼.”
“쯤 된다니. 나 정도면 네 대모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지.”
“에르마, 그만 놀려요.”
“네가 곤란해하는 걸 볼 일이 얼마나 드문 줄 아니? 아무튼 반가워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이리트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에르마는 서글서글하게 굴었으나 여전히 저를 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리페가 군부 출신인 탓에 향하는 경계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리트에게 보이는 신뢰는 단단했으므로. 그러니까 이건 꼭, 상견례 같지 않은가? 제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달은 그리페는 인상이라도 좋아 보이도록 웃기만 했다. 전선에 나서는 장교의 정보를 혁명군쯤이나 되는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한편, 이리트는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리페의 손을 붙잡았고, 그걸 에르마가 지긋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무엇이 그렇게 민망하고 어색한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결혼 상대라도 소개하는 꼴 같지 않으냐고, 스스로 물었다가 제풀에 놀라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기부정과 혼란 속에서 가까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떠올린 이리트는 여전히 그의 손을 동아줄처럼 붙잡은 채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기야 하지. 사람들을 모아 둘 테니 추스르고 나오려무나. 가능한 한 빨리.”
끝까지 실없는 농담을 덧붙인 에르마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내지 않고 집무실을 나섰다.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이리트는 그때서야 제가 그리페의 손을 세게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림을 숨기지 못한 시선이 그에게 가 닿으면, 그리페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렸어야지!”
“거기서 당신을 밀어냈다간 오히려 에르마가 화냈을걸요, 이리트.”
“제기랄……”
머리를 모아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자리의 분위기는 심각했으나,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순조로운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치솟은 사기는 곧장 활력이 되었다. 사령부는 더 이상 무적의 성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페가 아는 정보 덕분이었다. 사령부 방비 체계의 약점이며 한계 따위를 막힘없이 브리핑하는 그에게서는 망설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수립한 작전은 작전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단순했다. 약점을 공략하고 우선 빠져나와 정비할 것. 그러나 이쪽보다는 군부가 제 약점을 더 잘 알 테니, 국지적인 전투를 피할 수는 없으리라. 기존의 혁명군 인원들은 원체 게릴라전을 더 익숙하게 여기는 탓에 반발은 생기지 않았다. 정부군 측은 당장 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인적이 사라진 병영 내에 창백한 가로등의 빛이 드리웠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뒤에 오는 새벽, 조를 나누어 여러 곳을 동시에 공격해야 했다. 그 과정 중에 그리페와 다른 곳으로 진입하게 된 것은 꽤 아쉬웠으나, 힘의 균형을 생각하자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작전 돌입 전 짧은 휴식은 스치듯 사라졌다. 곤충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새벽, 혁명군은 예정대로 갈라져 감시망의 틈을 타고 몸을 숨겼다. 동쪽 하늘 끝자락이 어렴풋이 밝아오면, 숨죽인 채 대기하던 이들이 움직였다. 첫새벽의 고요함이 폭음에 휘말려 스러진다. 아직 짙은 하늘 위로 흙먼지 섞인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오늘 새벽이 고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그리페는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대열을 맞춘 채 달려 나온 이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흠 하나 없는 전투복을 차려입었고, 낯에 피로한 기색은 드리웠으나 지쳐 보이지는 않았다. 기실 그들은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으니 지쳤다면 외려 이상한 일이었다. 저런 컨디션으로, 저런 인원이라면 아무리 저라 한들 정면으로 맞붙고 싶진 않았다.
여러 타격 지점 중 이곳이 가장 급습 이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그만큼 해야 할 행동도 간단하긴 했지. 그는 고개를 돌려 대기하던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은 전투복을 입었고, 한 명은 사복 차림새였으나 그들의 눈은 똑같이 열의에 타올랐다. 그들은 시야가 비는 곳이며 복잡한 건물의 그늘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움직였다. 이런 침투 작전은 별로 취향이 아닌데. 군복을 입은 이가 속삭이듯 투덜거렸으나 팔자 좋은 투정 따위를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목표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방비 시스템의 동력을 차단하면 끝인 임무였다. 그러나 여기, A-1 섹터는 통과하기만 하면 사령부가 눈앞에 있는 곳이었다. 최후의 요새의 기조는 하나였다. 이곳을 넘으려는 이들을 모두 척살하는 것. 이곳의 방비 시스템은 단 한 번도 작동한 적 없었으나 말단 병사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 위용을 알았다. 철저하게 관리되는 시설은 실외에 있음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뭉뚱그려 방비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병기에는 두 가지 전원이 있다. 외부 공급 전원과 자체적인 동력원. 지금 노리는 건 전자였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데다 한계가 명확했다.
“셋을 세고 공격할 겁니다. 도망칠 준비해요.”
그리페는 숨을 고른 뒤에 숫자를 세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부군 인원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군용 대검을 쥔 채 두꺼운 철판을 가르면 스파크가 세차게 튀었다. 쇠를 긁는 소리, 경보음이며 수십에 이르는 군홧발 소리가 뒤엉켰다. 군용 대검이 이가 빠진 채 모습을 다시금 드러내는 순간, 눈이 부시도록 밝았던 조명탑이 일제히 꺼졌다.
“달려!”
얼이 빠진 채 그리페가 벌인 일을 바라보던 이들은 매서운 채찍질에 정신을 차렸다. 큼직하게 갈라진 철판 너머, 내장을 토하듯 끊긴 전선이 쏟아져 있던 광경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달리고, 또 달렸다. 사방에서 울리는 폭음이며 총성이 거친 발걸음 소리를 숨겨 주었다. 심장이 거칠게 맥동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그들은 겨우 멈추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달려 도착한 곳은 웬 숲이었다. 병영을 살짝 빗겨 난 곳.
그리페는 함께 움직인 것이 맞긴 한 건지 의심될 만큼 안정된 호흡을 보였다. 그리페는 이쪽을 돌아볼 생각도 않고 어디론가 통신을 보내고 있었다. 상황 보고의 뒤를 잇는 짧은 사담. 그를 바라보던 두 명의 시선이 마주쳤다. 병사는 사용한 적 없는 군용 대검을 꺼내 단단히 쥐었다. 검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마주 잡은 채, 그들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페는 통신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인이어 안에서 들려오는 이리트의 목소리에. 뒤로 다가오는 발걸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함께 왔던 이들의 것이었다. 그 찰나의 방심. 익숙하지 않은 손이 제 어깨 위에 얹히면 그리페는 뒤로 돌아섰고, 동시에 복부에 날붙이가 파고들었다. 사고가 다시 작동하기도 전에 칼을 잡은 손을 으스러뜨릴 듯 감싸 쥐었다. 겁 없이 칼을 휘두른 이는 손이 뭉그러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리페가 더 빨랐다. 목을 붙잡힌 이의 벌어진 입에서는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리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이리트의 목소리에 의문이 서렸다. 고통은 뒤늦게 찾아들어 정신을 할퀴었다. 눈이 까무룩 뒤집히는 것을 보고서야 던지듯 남자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차라리 협공을 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배신을 당한 적 없다 한들 그리페는 수십 번을 생사를 걸고 싸워 왔으며, 매번 살아 돌아왔다. 칼을 맞았다고 쓰러질 만큼 나약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다리에 힘이라도 풀렸는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기는 이에게 다가가며, 그리페는 한숨처럼 사과를 건넸다.
“이리트, 미안해요.”
[어디야, 지금.]
“돌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어디냐고 물었어.]
“아…… A-1 섹터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있는 인공 숲이에요.”
약간의 소란과 함께 이리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제 목소리에 통증이 티가 난 건 아니었는지. 그리페는 숨을 깊게 삼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어설프게 무너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기질적이었다.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눈동자 앞에 혁명군의 일원은 몸을 웅크린 채 떨었다. 차가운 눈길에 닿는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듯.
작전이 시작되기 전, 그리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두 사람은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주고받기 마련인 이야기는 전형적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고, 어쩌다 혁명군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따위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흐름은 자연스레 군부와 관련된 것으로 흘렀다. 그들의 처사와 일반 병사의 처우에 대해 성토하던 이들은 서로의 설움을 달래 주었다. 그 과정 중에서 그리페의 이름이 언급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그들이 그와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분노에 잠식된 이들은 때때로 눈앞밖에 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들끓던 감정이 꺾인 이는 두려움에 떨었다. 한순간 저지른 실수가 눈앞에 있었다. 차라리 그리페가 죽어 버렸다면 이토록 무섭지는 않았을까. 그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바닥을 긁었다. 그리페는 저 스스로를 방어한 후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페의 앞에 의식을 잃은 이가 처절하게 나뒹굴었다. 통신기를 통해 뜻 모를 사과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심지어는 다정했다. 자신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기색이 섞였어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이리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페는 여느 때처럼 뒤돌아 그를 환영할 수 없었다. 복부에 깊숙이 박힌 날붙이를 대뜸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페. 속삭임처럼 불리는 이름이 들리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자색 눈동자가 몸을 훑다가, 중간 즈음에서 멈추었다. 스치듯 마주친 시선은 주위를 훑었다.
그리페는 홀로 A-1 섹터에 가고 싶어 했다. 사령부 중심과 가장 가깝고, 그만큼 위험한 곳을. 물론 그쯤 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이 짐이 될 수도 있었다. 제가 그러하듯. 그렇기에 이리트는 더더욱 단독 행동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긴 설득 끝에, 그리페는 최소 인원만을 데리고 가게 되었다. 제 판단이 처음부터 틀렸던 모양이다. 그래, 자신과 그리페는 다르건만. 제 걱정만으로 밀어붙인 결과가 이런 꼴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아찔했다.
동행인을 붙인 건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그가 홀로 고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이제 막 전향한 병사는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리페의 뒤에 있는 이, 마르셀은 그래선 안 됐다. 해묵은 분노가 그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좀먹었는가. 그러나 마르셀의 사정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고, 들을 상황도 아니었다. 자책과 사과는 나중 문제였다.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서는 본진까지 직접 가야 했다.
“의료반이 올 수 없어. 우리가 가야 해.”
“문제없어요.”
“일단 앉아봐.”
말 잘 듣는 개라도 된 마냥, 그리페는 둥치에 등을 기대앉았다. 옷 위로 박혀 든 칼을 뽑아내는 손길은 세심했다. 군용 대검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이리트가 피가 스며들어 축축한 옷을 헤집었다. 칼날의 모양대로 벌어진 상처가 피를 토해냈다. 당장 제대로 소독 따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상처에 덧대고, 붕대로 허리께를 단단히 묶는 손길은 이리트의 심정을 대변하듯 거칠었다.
“이리트, 아파요.”
“참아. ……됐어, 본부로 가자.”
아직까지도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동료를 응시하는 이리트의 눈길이. 창백한 손을 부러 고쳐 잡으면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었다. 이리트의 뒤를 따라 조금 늦게 현장에 나타난 이들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둘러 이동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통증이 스몄으나 이 정도가 최선임을 모르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며 어스름한 새벽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기껏해야 몇 시간도 되지 않는 사이, 사령부의 방비 시스템 중 절반 이상이 무너졌다. 이 정도면 완벽한 작전이라 말하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일찍이 복귀한 이들의 분위기는 밝았다. 그리페가 아군에게 칼을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렸다. 상황을 전해 들은 에르마는 다른 이들의 눈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페의 손을 붙잡은 채 임시 본부의 문을 열어젖힌 이리트의 얼굴은 짐짓 무감해 보였으나, 그를 오래 본 이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굳은 표정 아래 숨어 타오르는 분노를. 그는 다른 곳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이제는 혁명군의 것이 된 의무실로 향했다. 그리페가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피 냄새가 끼쳐왔다. 걷는 속도며 움직임만으로는 상흔을 입었다는 사실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이가.
그리페의 부상은 깊지 않았다. 급소를 빗겨 난 덕이었다. 그가 상처를 치료받는 사이, 이리트는 전함에서 그리페의 여분 옷을 가져와 건넸다. 단단하게 묶인 붕대가 셔츠 아래로 가려지면, 그제야 침상 옆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셔츠 단추를 모조리 채우고 난 후에도 이리트는 침묵했다. 설핏 보기에도 심각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그리페의 상처를 돌봐준 이는 가볍게 묵례하곤 자리를 떴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이리트.”
“……사과는 왜 했어.”
“당신의 동료를 공격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
“그 상황에 그딴 게 중요해?”
“중요해요. 그들이 나를 공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말문이 막혔다. 그리페의 이름이 지녔던 위상은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무차별적인 날것의 분노와 오랜 설움이 만나 나쁜 쪽으로 증폭된 것뿐이라고, 그리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제 발로 걷어찬 안정적인 미래가 도리어 걸림돌이 될 거라고, 저와 함께하겠다는 그리페에게 섧게 토로하지 않았던가. 분을 삭이고 있자면 누군가 의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레 다가와 두 사람이 조금 전에 복귀했고, 나머지 하나도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전해 왔다. 전령의 역할을 맡은 이가 의무실의 문을 닫고 나서면, 자색 시선이 다시 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 게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네들은 어차피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내부 문제로 시간을 끌 만한 상황이 못돼.”
“그렇기야 하지. 이리트, 미리 말해두는데 나도 함께할 거예요.”
“……너 정도 되는 전력이 빠질 수 없는 걸 알고 하는 말이지, 그리페.”
“손 하나라도 아쉬운 시기인 걸 어떻게 모르겠어요. 내가 죽을 뻔한 것도 아니고.”
“네가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치명상을 입고도 남았어.”
“중요한 건 그렇지 않다는 거 아니겠어요.”
“빌어먹을……. 따라오기나 해. 우리도 이제 가야 하니까.”
이리트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으나 그리페는 웃기만 했다. 침상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대강 정리하는 꼴을 보던 이리트는 휙 소리가 날 것처럼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일이 다 끝나기만 해 봐라.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말, 그리페는 짧게 웃고는 보폭을 넓혀 이리트를 따라잡았다.
동트기 직전의 한기가 가시기도 전에 혁명군은 패스파인더의 문양이 새겨진 함선에 속속들이 올라탔다. 기껏 탈취해 온 함선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기계 병정까지 합류하면 그들은 기존 패스파인더보다 더 규모가 큰 부대가 되었다. 규모가 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기가 치솟는 데에는 큰 몫을 했다. 함선은 그 크기에 걸맞지 않게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군부 쪽에서도 이변을 알아채고 맞서듯 함선을 떠올려 보냈으나, 함선 자체의 성능도 패스파인더의 것이 가장 좋았다. 광자포를 조준해 최초로 전투기 하나를 박살 낸 혁명군 한 명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런 건 꿈에서나 만져 봤는데! 경박한 외침이었으나 누가 그를 탓하겠는가. 한 대에 수억 원을 호가하는 군부의 자산이 강력한 화력 앞에 하루살이처럼 스러졌다.
함선과 함선의 충돌은 그 여파만으로도 아래 자리한 건물에 다소간의 타격을 입혔다. 함선을 빗겨나간 미사일은 아래로 떨어졌다. 정부는 제 살을 깎아 먹는 걸 알면서도 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사령부까지 점령당하면 전부 끝이었다.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된 건지. 사령탑에 앉은 이들의 가슴팍이며 어깨에 붙은 장식물들은 모조리 휘황찬란했고, 그들은 모여앉아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데에 바빴다.
어제를 기점으로 연락이 닿지 않는 장교가 너무나도 많았다. 일반 사병의 대다수는 충돌 속에 죽거나, 심지어는 반란군에 합류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패스파인더의 함선을 가진 채 돌아선 그리페였다. 작전지에서 무단으로 복귀했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반란군과 싸우는 데 급급한 탓에 의문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 터무니없는 통신과 뒤이어 벌어진 명령불복종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혼란 속에서 들려왔던 이리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드물게 외곽 지역 출신인데도 훈련 수료자 중 수석을 차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리페가 직접 데려간 인재가 아니었던가. 그 신병이 실은 반란군의 끄나풀이었으며 그리페를 꾀어낸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패스파인더는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무기였으므로. 남은 의문점은 하나였다. 그리페를 제외한 소속 인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마저 반란군 측에 합류했다면 이 전투는 이제 승산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괜히 대령쯤이나 되는 이가 직접 통신을 했겠습니까! 나머지는 다 억류되어 있거나……”
장교의 목소리는 끝내 흐려졌다. 그들을 다 죽였다면 더 큰 문제였다. 그런 일이 가능할 정도의 지략과 실력을 지닌 인물이 반란군 측에 적어도 두 명은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므로. 심지어 반란군 중 다수가 이능을 지니고 있었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이능자를 모조리 다 모아둔 것 같았다. 이능자와의 전투 경험이 일천한 장교들은 침음했다.
그들이 탁상공론을 하는 동안, 상공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청명한 하늘 위로 희뿌연 연기가 덧그려지고, 시시때때로 폭발이 일어났다. 적기가 힘을 잃고 낙하하면 흙먼지가 고공으로 치솟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음,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맞은 충격이 선내에 전해졌다. 이런 곳에서 무너질 순 없었다. 함선이 무용지물이 되면 이곳에 실린 무기도 대개는 쓸 수 없게 된다. 무기고를 모조리 털어 버리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패스파인더의 전함도 손상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적기까지 격추하고 나면 전함은 숫제 너덜거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장 추락할 상황은 아니라 한들, 지속적인 전투는 거의 불가능했다. 어차피 사령부는 좁았고, 그 안에 출전할 수 있는 함선과 전투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바깥의 상황을 비추는 카메라 중 몇몇은 충격으로 부서져 전원조차 들어오질 않았다. 함선을 버려야 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공중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전함은 당당하게 사령부 앞의 이착륙장에 내려앉았다. 다소 남루한 꼴이 되었다 하더라도 군부에 속한 이들이라면 패스파인더를 나타내는 문양을 모를 수가 없었다. 군부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하루아침에 반란군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포탄에 긁혀 버린 영광의 표상은 빛을 잃고, 이제는 불온한 귀기를 흘렸다. 무기를 쥔 병사들이 함선의 주위를 포위했다. 함선의 출입구가 열리는 풍경이 유난히도 느렸다.
서서히 열려 바깥으로 향하는 경사로가 된 입구 너머 자리한 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선 이들은 모두 심장이 없는 존재였다.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패스파인더의 구조는 특이한 편으로, 여단이라 치기에는 인원수가 적었다. 그러나 부대원의 수에 필적하는 전투용 로봇이 존재했다. 다른 어떤 부대도 기계 병정을 그만큼 채용하지는 않았다. 외계 행성을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필요성이 높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이유였다. 중요한 건, 그리페가 돌아서며 그 많은 수의 전투용 로봇도 반란군의 전력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초소형 카메라가 심긴 인공 안구는 이리저리 회전해 전황을 읽어냈다. 인간의 홍채를 흉내 내어 빛나는 테두리가 몇 개에 이르렀는지. 대열을 맞춘 채 전진하는 기계 병정은 그 존재만으로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그들이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군홧발과는 다른 묵직함으로 지축을 울렸다.
상황을 살피던 이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러나 방법이 없진 않았다. 결국 저 로봇들 또한 군부에 적을 둔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정보부에 속한 이들은 발 빠르게 해킹을 준비했다. 전선에 나선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며. 물러설 곳이 없는 이들은 이를 악물고 응전했다. 기계 병정이라 한들 무적은 아니었다. 핵심이 되는 코어는 몇 겹의 보호 아래 존재하므로 쉬이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인공 안구를 파괴해 무력화하거나, 드러난 관절을 부수어 발을 묶어야 했다.
무릎 관절이 박살 나 균형을 잃을 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부러진 다리를 끌고 무기를 겨누며 전진했다. 그나마도 불가능하여 바닥을 구르면 그 뒤에 있던 기계 병정이 쓰러진 몸체를 걸림돌이라도 된 듯 밟아 지나쳤다. 밟힌 자국이 남은 몸체는 여전히 전원이 꺼지지 않고, 목표를 상실하지도 않은 채 기어서라도 전진했다. 심장이 없는 전투용 로봇은 아군에게 짓밟히면서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통각은 구현되지 않았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인간과는 그 근간부터 차이가 있었으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가슴 한구석을 선득하게 했다.
매서운 눈빛에 망설임이 서리고, 총구의 끝이 흔들렸다. 감정을 읽어낼 능력이 없는 전투 로봇은 그럼에도 좋은 타이밍에 적진으로 파고들어 대열을 흩트리고 망설이는 이들을 쓰러트린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게 뒤섞여 버린 진형, 마구잡이로 불을 뿜는 쇳덩이는 아군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바닥재 위로 이리저리 핏자국이 그려지고, 웅덩이가 생겼다. 코끝이 아리도록 독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전투용 로봇의 홍채가 한시에 붉은빛을 뿜고, 짧은 비프음을 울리더니 가동이 멈추었다.
순간의 틈새마다 부상병의 신음이 스몄다. 지금이다. 이제야 우리는 함선을 공격할 수 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함선은 다시금 문이 닫히고 있었다. 마치 전투용 로봇이 가동을 멈출 때를 알았던 것처럼. 틈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 투박하게 묶인 고폭탄이 이리저리 흩뿌려졌다. 함선의 출입구가 완전히 봉쇄되고, 먼저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겨우 뒤돌아 도망치려 하는 때에 시계가 빛으로 물들었다.
폭발에 직격당한 이들은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진원지에서 조금 떨어진 이들은 그 파편과 폭음의 충격으로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함의 겉이 찌그러지고 그을렸으며, 유리창에 큼직한 금이 가고 깨졌으나 맨몸으로 폭발을 받아낸 이들보다는 피해가 확연히 적었다. 주위를 얼추 정리한 이들이 함선 밖으로 몸을 드러냈으나, 승리에 도취한 얼굴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즈음이면, 더는 일반 전투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내내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에 바빴던 이들은 본격적인 수성에 돌입해야 했다. 사령부는 애초에 일종의 요새로써 세워졌다. 현재 군부의 구조는 기본이 되었던 사령부 건물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확장된 영역에 시설을 증축하고, 관리해 왔다. 모든 주위 기관을 잃은 지금, 군부는 역사 속의 첫 시작점에 선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때와 달리 사령부 건물은 끊임없는 개조로 최신식 무기를 유치했다. 그러나 주위의 방비를 믿었던 만큼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외벽에서 끓는 기름을 붓고, 묵직한 돌을 떨어트리는 것 따위의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전략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수성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했다.
군부의 중심에 자리한 시설은 그 오만함을 의미하듯 드높았다. 끊임없는 개축과 신축으로 건물은 유행이 지난 건축 양식과 근래에 유행한 양식을 모두 갖춘 채였다. 그러나 그만큼 돈을 쏟아부은 탓인지, 어느 한 곳에도 낡거나 구식으로 보이는 곳이 없었다. 차라리 고아해 보였을 뿐. 혁명의 깃발을 드높인 이들은 가라앉은 눈으로 시설을 훑었다.
이곳의 저층부에는 창문이 없었고, 그나마 높은 곳에 자리한 창문조차 건장한 성인이 출입하기에는 작았다. 뚫을 수 있는 곳은 정문뿐이었다. 숨겨진 통로 따위가 존재할 소지가 다분했으나, 그것까지 탐색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 크지도 않은 창문에선 병기가 고개를 디밀었다. 함선에 설치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자포가 자리하면, 그리페가 큰소리로 외쳤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전투는 지난했다. 거칠게 부는 바람에마저 진득한 피 냄새가 섞였다. 군부의 자랑이던 무기가 다수 망가지고, 혁명군 측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멈춰 서지 못했다. 그들의 생은 이곳에서 져 버렸으나, 그들의 뜻은 여전히 그들의 동료와 함께 명백히 살아 숨 쉬고 있었으므로. 혁명군이 이날까지 걸어온 길은 그들 자신의 피와 적의 피로 덧그려졌다. 동료의 죽음이 한낱 개죽음 따위가 되지 않도록, 혁명을 자처한 이들은 지쳐 감각조차 멀어진 사지를 움직이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던 신무기는 진작 부서져 수명이 다했다. 몇몇 신체 강화가 가능한 이들이 건물의 벽을 그야말로 땅을 걷듯 타고 오르면, 그들은 어디서 났는지도 알 수 없는 끓는 기름을 부어댔다. 아주 오래전, 제대로 된 화기조차 개발되지 않았던 시절의 전쟁처럼. 기름이 끼얹어진 살갗이 익어 뭉그러지고, 수포가 끓어오른다. 끔찍한 화상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이들의 상처 위로 차가운 물이 뭉쳤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이리트의 눈 안에 다시 한번 광망이 타올랐다. 고풍스러운 건물 외벽은 기름을 잔뜩 먹었고, 이리트는 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리트의 손을 떠난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냘프게 날아 달궈진 기름 위에 안착했다. 그들 스스로가 흩뿌린 기름을 연료 삼아 불꽃은 거의 폭발을 일으키듯 그 기세를 키웠다. 광폭한 불길은 위로 치솟는 성질을 가졌다. 사람이 타고 오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로 퍼진 화염이 끝끝내 기름을 흩뿌리던 이들에게 옮겨붙었다. 언젠가 나무를 닮은 외계종의 핵을 끓여 터트렸던 것처럼. 처절한 비명이 울렸으나 이리트는 건물 상부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타오르는 건물의 상층을 통해서는 아군 역시 침입할 수 없다. 적이 혼란에 빠진 사이, 그들은 건물의 한쪽 벽면을 무너트렸다. 혁명군은 기나긴 전투를 치르고서야 사령부에 최초로 발을 들였다. 이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남은 것은 적어도 장교급의 인사들이었다. 길게 늘어지는 전투로 혁명군의 대다수는 지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효율적으로 갈라져 건물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였다.
실내는 규모에 걸맞지 않게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내부에 숨어 있던 이들의 대다수는 저 밖, 널찍한 공터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테지. 결벽적으로 관리된 시설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선두에 선 두 사람은 기척을 숨기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앞을 막는 이들이 종종 나타났으나 그 수는 확연히 적었다. 대체로 그리페가 그들을 기절시켰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이리트가 불덩이를 던져 버리기도 했다. 이리트에게 당한 이들은 대개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짓쳐드는 검은 그림자에 그리페는 생각할 새도 없이 무기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충격을 받아낸 손목이 찌르르, 울렸다. 한 번의 공방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저와 거의 같은 존재였다.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이. 이곳은 건물 안의 광장이라도 되는 듯 층고가 높고 전반적으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페에게는 이점이 되는 곳이었다. 제 키만 한 창을 꺼내든 그리페가 위협하듯 창대를 휘둘렀다.
“조심해요, 이리트.”
군부 내에 신체 강화가 가능한 이들은 적지 않을 테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더라도 유별나게 전과가 좋은 이들 몇몇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상대하는 이의 얼굴은 낯설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아는 얼굴을 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몰랐다. 숨을 한 번 쉴 정도의 짧은 순간 몇 번의 공방이 오갔던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는 적당히 봐주며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 번 창을 휘두르면 그 틈을 타고 뱀처럼 말려 들어 온 손이 급소를 노렸다.
그들이 펼치는 전투의 여파로 주변의 장식물 따위가 박살 나 떨어지고, 바닥이며 벽엔 무기에 긁힌 상흔이 몇 겹씩 새겨졌다. 한 치만 어긋나도 무게추가 기울 상황이었다. 그리페가 입었던 부상의 영향이었다. 그는 몇 번 공격을 주고받은 끝에 그리페가 어딘가 다쳤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손을 쓸 수도 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광경에 이리트가 이를 갈았다. 사령부 점령을 끝마치면 그 개자식들의 낯짝을 한 대라도 갈겨야겠다고, 이리트는 약간의 원한을 담아 다짐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싸우게 둘 수도 없었다. 아주 잠깐, 약간의 틈새만 만들면 그 뒤는 그리페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이리트는 이능을 발하는 대신 총을 고쳐 잡았다. 사격으로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다. 저 상황에서는 노려지는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으리라. 미세한 균열을 노릴 뿐이었다. 그리페가 그러하듯, 신체강화가 가능한 이들은 언제나 무거운 장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하고도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를 내보였으므로.
그렇다고 이 주변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수는 없잖은가. 그런 짓을 했다간 그리페까지 휩쓸리고 만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밀착한 채 숨을 골랐다. 손끝이 차게 식는 감각이 선연했다. 호흡할 때마다 총구의 끝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길게 들이마시어 잡은 숨, 저격수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가 불을 뿜고, 단단히 견착한 개머리판을 통해 반동이 전해졌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뒤를 돌아볼 여유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단 한 번의 격발, 뒤쪽에서 날아든 탄이 노리는 목표는 명확했다. 탄환은 정확하게 날아가 적의 허벅지 위에 꽂혔다. 방탄복을 꿰뚫을 수는 없었으나 충격마저 모두 상쇄되지는 않는다. 망설임의 대가는 컸다. 서슬 퍼런 창날 끝엔 보호 장비마저 무력하게 찢기고 벌어졌다. 상체가 길게 갈라지고 피가 그야말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적은 한 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피거품을 뿜으며 절명했다.
창날을 타고 흐르는 피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리페는 멈춰 서 있었다. 날에 들러붙은 전투의 흔적을 태워 버리고 그리페의 손을 세게 잡아당기면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걸음을 옮겼다.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페의 부상은 그저 당장 죽을 상처가 아닌 것뿐이었다. 이렇다 할 보호 장비 없이 맨몸으로 칼을 받아냈으니 당연했다. 옷 아래 숨은 상처가 벌어져 또다시 피를 흘리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상처는?”
“괜찮아요.”
“매번 괜찮다고만 하지.”
“정말인데.”
“그래.”
“이리트, 믿는 거 맞아요?”
“내가 어떻게 널 안 믿어.”
“얼굴 쓰지 말아요.”
“그 말을 네게서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실없는 웃음이 샜다. 그들은 등 뒤에 새하얀 뼈를 드러내고 죽은 이를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때때로 길을 막는 이들이 나타났으나 그 수는 이상할 정도로 적었다. 단순히 전장이 여러 곳으로 나뉘었기 때문이었는지. 위의 상황을 모르는 만큼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의 태도마저도 의심에 큰 몫을 했다. 손을 섞기도 전에 지친 티가 나거나, 누가 봐도 조금 전에 새겨진 생채기를 달고 있는 이들은 크게 저항을 하지도 않고 항복했다.
뒤따라오는 동료에게 그들의 인도를 맡기고, 두 사람은 거의 날듯이 움직여 목적한 곳으로 향했다. 비대하게 몸집을 불린 국가의 수장의 앞에 자리한 마지막 관문으로. 광자포 따위를 사용하고, 기계 병정을 상용화한 시대이건만 사령부의 심장부로 가는 길목에는 흔한 승강기조차 설치되지 않았다. 부러 그 어떤 설비조차 갖추지 않았을 긴 계단은 그야말로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그들의 오만함을 역할 정도로 투명하게 비치는 장치였다.
계단 위,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었다. 그들은 기척을 감추고 내부를 살폈다. 두 사람보다 앞선 이는 동료 중엔 없었다. 덜 닫힌 문 틈새로 들리는 소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 있던 이들이 일으키는 것이리라. 누군가는 앓는 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고함을 질러댔다. 무능한 장교의 특기란 대개 타인에게 윽박지르고, 제 분을 못 이겨 패악을 부리는 것이던가? 문득 떠오른 게오르기의 낯짝에 이리트는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부의 풍경은 엉망이었다. 바닥 위에는 여기저기 피가 튀어 엉망이었고, 서 있는 사람보다 쓰러진 이들이 더 많았다. 열 맞춰 선 군인의 수는 한눈에 보기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팍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계급장이 실내등 아래 반짝였다.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뭉치지는 못할망정, 내분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리트는 오는 길에 항복하던 이들의 꼴을 떠올렸다.
“죄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군부의 장교쯤 되는 것들은 다 이 꼴인 모양이지.”
이리트는 이제 숨길 것도 없이 비아냥거렸다. 여태 그들에게 큰 악감정이나 편견 따위를 가지지 않았던 그리페조차 이 아수라장을 눈앞에 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때때로 그들이 내보였던 권력욕이나 제 주머니를 더 불리려던 수작질 따위를 모르지 않았던 탓에 충격이 배로 컸다. 제 살을 깎아 먹는 이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귀다툼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오랜 평화와 압도적인 강자의 위치에 취해 버린 그들은 스스로가 처한 현실마저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이따위 걸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는데. 이리트의 자색 눈에는 일말의 온기조차 서리지 않았다. 그는 낡았음에도 선명하기 그지없는 기억의 끝자락을 더듬었다. 어린 시절, 이능을 각성하던 순간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손을 뻗으면 불길이 일었다. 제어할 수 없는 불꽃은 낡은 건물을 불태우고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끼쳤다. 마침내 제 의지 아래 이능을 복속시켰을 때, 남은 것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잿더미였다. 아직 어렸던 이리트에게 세상은 가혹했으며, 어떻게든 그 풍파로부터 아이를 지키던 그의 부모는 그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사고로 곁을 떠나 버렸다.
“이리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고작 저런 것들에게 휘둘렸던 내 삶을 연민하는 중이었지.”
“……”
“농담이었어.”
지독한 거짓말이었다. 그런 표정을 한 채로 농담이라고 한들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페는 이리트의 말을 믿어야만 했다. 이럴 때의 이리트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으므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꽃이 진화된 후의 풍경처럼. 불안을 삼킨 채, 그리페는 체온이 낮은 손을 감싸 쥐었다.
“상황이 정리되면, 이리트,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런 말 하지 마. 뭐가 잘못될 것 같잖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그런 말을 해요.”
“……일단 저 미친 새끼들이나 처리하자. 그다음에 얘기해.”
“저기 봐요, 이리트.”
그리페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이 난장판에도 굳건하게 닫힌 문이 자리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 안에 숨은 게 사람이든, 정보이든 확보해야 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필요한 건 딱 한 명이다. 1급 열람 권한을 가진 사람. 열 맞춰 선 군인 중에는 분명 익숙한 얼굴들이 존재했으나 그들의 수장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권한이 있는 이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저들을 해치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태껏 꺾어 온 적의 수에 비하면 저들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리트는 내부에 불을 놓으려다, 그대로 멈춰 섰다.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했던 온갖 감정과 목적의식이 사그라졌다면 거짓일 테지만, 그가 멈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금, 선봉에 선 두 사람의 뒤를 쫓아 이곳으로 오고 있을 이들. 혁명의 이름 아래 뜻을 모은 이들은 제각각의 사정이 존재했으며, 개중에는 군부에 원한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전투는 분명 그들의 몫이었다.
느지막이 도착한 이들에게 상황을 전하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대는 제각각이기 마련이라 한들, 이들 중 누구도 이런 허무하고 맥없는 끝을 상상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드문드문 누군가가 윽박지르는 소리가 문 틈새로 샜다. 결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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