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 5
EP. 몰착락(03)
2022.03.05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입 다물어!”
발작적인 외침과 동시에 내내 주위를 맴돌던 하얀 결정이 긴 꼬리를 남기며 그리페 쪽으로 쏘아졌다. 그리페는 피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제게 다가오는 날카로운 파편을 응시했다. 저 스스로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와 놓고도 홧김에 내지른 공격에 그리페가 죽어버릴 게 무서워서. 날 선 결정은 그리페의 뺨을 스치고, 그의 뒤에 있던 벽에 박혔다. 한 박자 늦게 그의 뺨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꼴을 하고서도 그리페는 희게 웃었다.
차라리 울고 싶었다. 언젠가 저 스스로 사랑도, 제 목표에도 최선을 다할 거라고 했었던가.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보다 어처구니없는 말도 드물었다. 자신은 그저 공존할 수 없는 목표를 양손에 쥐고, 어느 쪽도 포기하지 못한 채 망설이는 머저리였다.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다른 곳과 달리 상황실의 공기는 여전히 아무 문제가 없었으므로, 이건 오로지 심리적인 문제였다.
그는 뺨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아무렇게나 닦아내었다. 비참한 심정으로, 이리트는 제게 다가오는 그리페를 마주했다. 막아야 할 게 분명한 상황이었으나 그 무엇으로도 그리페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갔으나, 그의 반응은 하나부터 열까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이리트는 기껏해야 제게 화를 내거나, 배신감에 치를 떠는 정도의 반응만을 염두에 두고 그를 제압할 방법을 준비해 두었다.
“왜 웃기만 해. 부대원들의 안위는 어쩌고.”
그들이 위험에 빠지도록 한 건 이리트였건만, 그들을 왜 걱정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 것도 이리트였다. 대강 묶어둔 사슬을 눈앞에서 풀고 있음에도 그는 말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외려 묻고 싶은 건 저였다. 왜 제게 이토록 무를 수 있느냐고. 그러나 제가 이 모든 행위에 그저 사랑의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처럼, 이리트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은 이유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침내 연인의 앞에 선 그리페는 창백한 손을 붙잡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차가운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부대원은 물론 소중한 전력이었다. 제 동료이기도 했지. 그리페는 시선을 돌려 상황실 모니터에 일부에 비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바닥을 굴렀다.
이리트의 말이 맞았다. 이 꼴을 봤다면 분명 자신은 그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어야 했다. 혹은 그 원인을 처리하던가.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토록 명정한가. 그리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는 이미 정답을 알았다. 그러나 이리트는 그런 대답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자리한 조금 더 이성적이며, 실제로도 제 판단에 영향을 미친 답이 필요했다.
수많은 전장을 직접 발로 뛰며, 때때로 그리페는 정부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 정도 이상의 학살극도, 사람을 도구처럼 부리는 것도.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곱씹어 생각해 보면 그건 반감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어렴풋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모하는 데에는 작은 불씨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리트가 이능을 지니고 있음을 처음 알았던 그 날, 그리페는 제게 열람이 허락된 자료를 뒤적였다. 대개 이능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았으나 대다수는 그 즈음이나 되는 사람에게도 열람 권한이 없었고, 남은 자료는 전부 알맹이가 빠진 쭉정이였다.
그들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1급 정보 권한을 요구하는지. 1급 정보 열람 권한을 가진 이들은 정부 인사 중에서도 기껏해야 세 명 정도였다. 군정부의 수장, 그리고 그를 위해 일생을 바친 노후한 수완가 둘. 그토록 철저히 숨겨 놓을만한 사건은 분명 떳떳하지 않은 종류일 게 분명했다. 더불어 정부가 내보이는 이능에 대한 거부감도 그들이 숨긴 사실과 대조하면 어느 정도는 테두리가 그려졌다. 직감적으로 그 뒤에 아주 역겨운 일이 엮여 있음을 알아챈 그리페가 마음을 돌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물며 바로 옆에 혁명이 목적인 이가 존재하는데 무엇을 더 망설이겠는가.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내게 알려주세요.”
미친 소리였다.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껏 보아 온 그리페는 때때로 정부와 군부가 내리는 명령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했으나 그럼에도 순응하던 사람이었다. 알파 구역의 인간이라는 게 대체로 그랬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거대한 권력을 마주했고, 그들 또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었으나 그만큼 더 큰 권력 앞에서는 숨을 죽였다. 뼛속 깊이 새겨진 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물론 그리페는 언제나 제 나름의 방식으로 가능한 한 희생을 덜 내는 쪽으로 길을 틀었다. 그러므로 그를 단순히 순응하는 이라 일축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어느 행성은 불공정한 계약을 맺어야 했고, 반란은 제압되어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이전보다 더욱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오로지 그리페의 어깨 위에 실려야 할 짐인가? 이리트는 무작정 긍정할 수 없었다.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분명 깨끗한 손을 지녔겠지만,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니 제게 그리페를 탓할 자격은 없었다. 이리트의 이능은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고, 그만큼 큰 전력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전투에 나서야 했다. 참모의 직책을 달고서도. 당장 함선 내에도 수십에 이르는 이들이 영문 모르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만큼 시간이 흘렀다면 어지간한 이들은 모두 죽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을 테다. 심지어는 이 공간 안에도 쓰러진 사람이 여섯이었다. 그들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이 온통 엉망이건만.
“이…… 미친 새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기는 해? 그게 내게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
이리트는 참담한 기분으로 날 선 문장을 내뱉었다. 그가 제 예상을 벗어나서 움직이는 건 실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리페와 이런 관계가 될 때에도 비슷한 말을 삼켰던 기억이 있었다. 빌어먹게도, 붙잡힌 손에는 끊임없이 단단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의 앞에 서면 꾸며낸 표정도, 세워 두었던 벽도 간단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리트는 그저 제가 울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제 무른 부분을 그렇게나 쉽게 건드릴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실은 그를 앞에 둔 제가 물러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네 동료를 죽였어. 모성의 군 본부도 곧 습격을 받을 거야, 그리페.”
“이리트, 당신이 이능을 내게 보여줬던 그 날 군부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봤어요.”
이가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문장이 거칠게 마찰했다. 먼저 입을 다문 건 이리트였다. 그리페는 처음부터 제 이능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그 징글징글한 정글 속에서 외계 종족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건 우연히 약점을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입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페는 그저 저를 위로하려는 목적처럼 그 자신 또한 이능자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이건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은 간략했으나, 상상한 적 없는 범위의 정보를 품고 있었다. 정부가 숨기고 있는 것. 이능에 대한 거부감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통제까지.
“나를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이해해요. 하지만 이리트,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잘못 입을 놀렸다간 그의 부대원이 모두 그리페 때문에 죽은 것인 양 책임이 전가되고 말 것 같아서. 입을 열지도 못하고 눈앞에 선 마냥 바라보고 있자면 그리페는 마침내 제 손을 놓아주었다. 온기가 떨어지는 순간 스치는 찬 공기에 거부감이 스몄다.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너는 굳이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부도, 명예도, 심지어는 권력조차도 네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빌어먹을, 어쩌자고 나랑 같은 길을 가겠다고 해.”
“치기 어린 사랑에 눈멀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쭉 몰랐다면 그대로 살 수 있었겠지만, 이미 알아 버린 사실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어요.”
“착각하지 마.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생각으로 이 짓거리를 시작한 게 아니야. 내 이능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도, 이능을 바른 방식으로 발현해내는 것보다 완벽하게 숨기는 것을 더 먼저 배워야 했던 상황도 내겐 끔찍했어. 나는……”
“미안해요. 하지만 이리트, 우리의 목표가 다르더라도 수단은 같을 수 있어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몇 번을 곱씹어도 그냥 네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정말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네 말을 마냥 믿어 버리고 싶은 나 자신이야.”
“그럼 그냥 믿어요. 내가 그런 것처럼. 이리트,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에게 잡혀 있지도 않건만 허공에 떠 있던 손이 갈 곳을 잃었다. 그가 주워섬기는 말은 분명 그가 변심을 결정한 이유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이리트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서도 사랑에 빠졌던 이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그리페의 눈은 변함없이 올곧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바다색 눈동자에서는 일말의 혼란조차 스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처럼.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가 내보이는 의연함을 어떤 식으로도 수긍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여느 때처럼 도망갈 곳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죽든, 그리페가 죽든, 둘 중 누구 하나의 무덤이 될 곳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각본에서조차 우리가 한편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 자신은 그리페의 오점도 아니었고, 그의 수많은 훈장 중 하나가 되지도 않았다. 그는 제가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걸친 하얀 제복의 무게와 그 아래 자리한 흉 많은 육체를 알았다. 힘 풀린 주먹이 그리페의 가슴께를 툭, 쳤다.
“네가, 네가…… 했던 일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 너는 쉽게 신임을 얻기 어려울 거야. 여태껏 쌓아 왔던 공로가 이젠 네 발을 걸고넘어지고, 앞길을 막을 게 분명한데, 그걸 정말로 감당할 수 있어?”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래도 이리트, 걸림돌이 되진 않을 거예요.”
먼저 백기를 흔든 건 이리트였다. 별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리트는 아주 자주, 그리페가 모르는 사이에도 그에게 패배했다. 승부욕이 없는 편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만족스러운 패전은 없을 테지. 제게 익숙한 온기를 찾아 이리트가 손을 뻗었다. 뺨이 손 위를 가벼이 문지르면 그새 말라붙은 피딱지가 거칠었다. 보기보다 깊은 상처였건만, 그는 아픈 티를 내지도 않았다.
매끈한 얼굴, 깨끗한 뺨 위로 긴 흉터가 남을 것 같았다. 이제는 꽤나 멀게 느껴지는 시기에 그의 얼굴을 보고 이 사람은 얼굴을 지키며 싸우나,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낯에 처음 흉을 새기는 게 제가 될 줄은 몰랐다. 오랫동안 뺨을 감싸 쥐고 있자면, 그리페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반사적으로 감은 눈을 다시 뜨고 싶지 않았다. 당장 제 옆에 피 웅덩이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진득한 입맞춤에 내리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즈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마주하다가, 미뤄 놓았던 것들이 뒤늦게 떠올라 그리페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중앙 기판의 조작법은 직관적이었다. 다만 너무 많은 것들이 집약된 탓에 필요한 기능을 찾아내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에 알 수 없는 버튼을 눌러 보자, 큼지막한 화면에 뜬 풍경이 바뀌었다. 선명한 화면 너머, 얼굴이 익숙한 이들 대다수가 죽어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조차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거리가 있는 탓에 그들의 표정까지 보이지 않았으나 얼핏 보기에도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들을 살려 둘 순 없었다. 제겐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와 손에 피를 묻힌 일로 정신이 무너질 만큼 나약하지도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원하지 않았으나 익숙해진 일이었다. 이리트는 힐끗, 제 옆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원망 안 해, 이리트.”
“왜?”
“냉정하게 들릴 테지만…… 이들 모두를 설득할 순 없어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여유가 없는 상황이니 당신이 이런 방법을 썼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 그건 당신을 원망할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처음부터.”
“……”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쟁에는 필연적인 희생이 뒤따른다는 이야기에요.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리트, 그들의 목숨값을 당신 자신에게 지우지 말아요.”
내내 화면을 응시하던 그리페가 고개를 돌려 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분한 어투와 달리 그의 낯빛은 어두웠다. 태연하게 말해 놓고는 죄책감을 치워내지 못할 이였다. 그리페는 때때로 취기를 빌려 괴로워했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이름을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취했을 때의 기억을 잊는 사람도 아니면서. 그러나 굳이 그리페가 되새기도록 할 필요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리트는 입을 다물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리트는 계획을 축약해 들려주며 함선의 머리를 돌렸다. 고작 며칠 전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선내에 멀쩡하게 살아 숨 쉬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앞으로 약 삼십 분 뒤면 폐쇄되었던 출입구가 모두 평시로 돌아간다. 화면 너머 비치는 시체는 출입구 쪽에 몰려 있었다. 여러 위기를 대비해 훈련을 받은 이들은 금세 사태를 알아채고 꽤 오랫동안 버텼으나,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출입구가 개방되더라도 잠깐은 여기 있어. 조금 전부터 가스 누출은 멈췄으니까 곧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유지 시스템도.”
일순간 아연해진 정신을 애써 붙잡은 그리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트가 한 일임을 알았으나 그 방식을 짐작하진 못한 탓이었다. 한계까지 이끌어낸 효율에 등 뒤가 서늘해졌다. 언젠가, 사람을 살려두는 게 더 좋을 이유를 물었을 때 이리트가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적당히 이유를 꾸며낸 대답이 아니라는 건 그때도 어렴풋이 짐작했었음에도, 직접 마주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리페는 제 옆에 선 이를 보았다. 뒤늦게 이리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제가 걸어온 길마다 시체가 나뒹굴었음을 모르지 않는 탓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리페는 짧은 심호흡으로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끊겼던 통신을 복구했다. 함선이 떠오른 지 나흘, 아직 모성 쪽에는 공습이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하루 이틀 내에 혁명군이 군 본부를 공격할 테니 그전까지 이쪽에서 연락이 끊겨서는 안 됐다. 실시간으로 보고할 필요는 없더라도 오는 연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함선의 목적지까지 바꾸고 나면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이리트는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아 적셨다. 적어도 나흘간은 선내에 머물러야 했다. 항상성 유지 시스템이 언제나 적절한 온도를 유지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인간을 위한 거였다. 사흘이면 시체의 부패가 시작되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설정을 바꿔 함선을 거대한 냉장고 꼴로 만들 수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시체 처리 문제를 생각한 건 이리트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주위를 대강 둘러보고 온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함선 내부는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시체는, ……함선 내의 소각로에 집어넣거나 우주에 내던져버리려고 했지. 썩어가는 것들과 함께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페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문질렀다. 이리트의 입장과 그를 탓할 수 없는 제가 여기 존재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함께한 이들의 최후를 그렇게 일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죽음 앞에 태연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버거웠다. 그러나 이리트의 계획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함선은 존재만으로도 큰 전력이 되며, 동시에 어떤 상징성을 지닐 수도 있었다. 혁명군, 그중에서도 단 한 명이 가장 강력한 여단을 꺾어 손안에 쥐었다는 것.
“모아서 소각하는 게 낫겠어요. 전투 로봇들은 멀쩡하니, 그쪽을 쓰면 될 거예요.”
구태여 괜찮은지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제가 위로를 건네 봤자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함선의 장거리 이동 도중, 전투 로봇은 모두 전원을 끈 채로 한곳에 모아두었다. 익숙하게 패널을 조작하고 명령을 입력하는 중에 그의 이름을 부르면 길게 뻗은 손가락이 멈추었다.
“……의식만 잃고 살아있는 이들이 있을 거야.”
일순간 떨린 손끝을 이리트가 목격하지 못했길 바라며, 그리페는 패널 위에서 손을 내렸다. 얼핏 생각했던 지점이었으나 모른 척하고 싶었던 사실이었다. 이리트는 들이마시자마자 생명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종류의 가스를 쓴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결론은 하나, 확인사살이었다. 산 채로 소각로에 던져 넣거나, 목숨을 빼앗은 뒤에 소각하거나.
“알아두기만 해. 해결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페가 제 표정을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저 또한 그리페의 표정을 읽어내는 데에 익숙했다. 힘주어 쥔 탓에 힘줄이 도드라진 주먹이나, 일순간 망설임이 서렸던 눈빛 따위를 보고 나서야 스친 감정은 후회를 닮아 있었던가. 그럼에도 그리페를 살피는 자색 눈은 한없이 냉정하기만 했다. 이미 엎지른 물이었고,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믿고 싶은 제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겨우 목숨을 부지한 수준에 그친다고, 이리트는 뒤늦게 덧붙이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페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건 그런 사소한 점보다 그들의 생존 여부일 터였다.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리페는 이미 어느 정도 고려했을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입 밖으로 꺼낸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자신은 저열한 방식으로 그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부대원을 버릴 수 있겠냐는, 그에게는 잔혹하기만 할 말로써.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리트는 내면의 갈등을 짓씹어 으깨었다.
그리페는 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서 입력하다 만 명령어를 완성했다. 예외를 저와 그리페 두 사람으로 둔 간단한 명령이었으며, 그리페가 선택한 길의 증명이었다. 온갖 모순된 생각과 상황이 짧은 사이에 머릿속을 할퀴고, 이리트는 마침내 그리페를 무력화할 계획을 완전히 폐기했다. 명령이 전송되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계 병사가 깨어나 함선 곳곳에 자리한 시체나 반쯤 송장이 된 이들을 모두 치울 테다.
“소각로에 다녀올게.”
“……”
“내가 손대는 게 훨씬 더 빨라.”
무엇이 빠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소각로가 그리 작은 크기가 아니라 한들, 인간을 다수 밀어 넣으면 원래의 성능을 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죽지 못한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했다. 다녀와요. 통신기를 쥐여주며 겨우 대답한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이리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입을 다물고 패널을 조작했다.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나는 손길, 화면을 훑는 이리트의 눈길은 매서웠다.
“금방 올 거야.”
이제는 듣기만 해도 주인을 알 수 있는 걸음이 미련 없이 멀어졌다. 그리페는 상황실의 문이 여닫힌 이후에야 고개를 들어 이리트가 무엇을 조작했는지 확인했다. 함선 내부를 비추던 화면이 모두 바뀌어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가득히 띄운 채였다. 자각하기도 전에 탄식이 샜다. 저만 그의 감정을 알아채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페는 화면 너머 광활한 우주를 보며 다시금 자각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전투 로봇을 피해 폐기물 처리실에 도착한 이리트는 소각로 내부를 살폈다. 소각로의 열기는 제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잠깐 사이 제법 많은 수가 소각로 안에 자리를 잡았으나 아직 내부 공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당분간은 전력이 남아돌겠다고, 그리페가 들었다면 당장 기겁할 말을 냉소적으로 지껄였다. 애초에 두 사람만이 탄 전함에 전력 따위가 부족할 상황은 생기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때, 통신기에서 짧은 신호가 울렸다. 마치 그를 떠올린 것을 아는 듯이.
[이리트.]
“응.”
[당신에게 권한을 부여했어요. 직접 명령할 수 있게.]
“알았어.”
타이밍이 좋았다. 내부가 반 이상 차올라 있는 때였다. 이리트는 남은 시체를 근처에 적당히 쌓아 두라고 명령한 후에, 소각로 안으로 제 이능을 담은 화염 덩어리를 몇 개 던져 넣었다. 열린 소각로에서는 열풍과 함께 단백질이 타는 냄새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익숙한 일이었으나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므로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안에 든 것들이 모조리 제 원래 형태를 잃어갈 즈음에 다시 문을 열고 쌓인 시체를 밀어 넣었다.
그 짓거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면 주위에는 유난히 덩치가 좋은 이들만 남아 있었다. 통째로 소각로에 쑤셔 넣을 수 없는 것들. 벽 한쪽에 걸려 있던 도끼를 꺼내든 이리트는 소각로의 입구 크기를 가늠했다. 날이 무딘 도끼는 별로 좋은 도구는 아니었지만, 뼈를 부수고 관절을 끊어내는 데에는 유용했다. 치켜들었던 도끼를 내리찍으면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각로의 열기로 달아오른 피부 위에 튄 피는 외려 차갑게 느껴졌다.
선내가 어떤 풍경이건, 바깥은 평화로웠다. 기계 병사가 오퍼레이터의 시신을 수습하고, 이제 막 굳기 시작한 피 웅덩이를 닦아낼 때까지 그리페는 상황실의 패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버튼 몇 개만 조작하면 텅 비어 버린 전함 내부를 비롯해 이리트가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그가 굳이 익숙하지도 않은 패널을 조작해 화면을 바꿔 놓은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망설임 끝에 손을 움직이려 할 때, 상황실의 문이 열렸다. 멀끔한 낯은 이곳을 떠나갈 때와 하나 다른 점이 없었다. 이리트는 여전히 우주를 비추는 화면을 힐끗 보았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미약한 탄내가 퍼졌다. 이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냄새였다. 그러나 이번엔 씁쓸한 탄내에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검은 제복은 핏자국을 숨기는 데 유용했으나 피비린내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처리’했는지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제겐 어지간히 버거운 일이었고, 묻는다 한들 이리트는 이리트는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페는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했고, 그 시도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제 뺨을 시원하게 긁어내린 얼음 같은 결정 따위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리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거 말인데.”
그리페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건 피가 말라붙은 상처였다. 호기심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그에게 대놓고 보여줬던 건 불꽃이었으므로. 지금 물어볼 만한 것 중에는 가장 답을 꺼내 놓기 쉬운 질문이었다. 제때 치료하지 않아 그대로 피딱지가 앉은 상처가 아플 텐데도 그리페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이쪽은 불에 비하면 약해서 잘 쓰진 않는데……”
이리트는 제 손 가져가더니 그 위에 큼지막한 얼음덩어리를 얹어 주었다. 그건 꼭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닿은 구체는 다른 얼음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차갑고 투명했다. 차이점이라면 체온에도 순식간에 녹아내리지 않는다는 거였지. 다시금 이리트의 손이 그 위를 스치면, 동그란 얼음은 이전에 보았던 화살촉 같은 형태로 변해 있었다. 오퍼레이터 여섯을 제압하고도 약하다는 건 파괴력을 이르는 건지. 이리트는 점점 더 가늠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함선이 모성에 도착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나흘에 조금 못 미쳤다. 지금만큼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적절한 시기는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모성에 도착하면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야 할 테고, 그 결과가 어떻건 바빠질 게 분명했다. 그리페는 얼음에서 시선을 돌려 이리트를 보았다. 부대원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실의에 빠져 있다간 기껏 도움이 되겠다 말해 놓고도 짐이 될 뿐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이리트의 얼굴에선 아직도 앳된 티가 났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이리트는 여전히 제 연인이었다.
“왜.”
“당신이 새삼 좋아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뱉는 문장이 제게 꽂히면 실없는 웃음이 샜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그 모든 고뇌와 시름 따위가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혹시나 그가 제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뒤늦게라도 함께하고 싶지 않아졌다고 하면 어떡하지, 따위의 걱정들. 꼭 바보라도 된 것 같았다. 사랑이 대체 뭔지.
페스파인더가 지구를 떠난 지 딱 일주일이 된 날, 사령부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귀가 아프도록 울리는 경고음 틈새로 낭랑한 기계음이 군 본부를 공격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렸다. 마치 그리페 휘하의 여단이 이곳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는 습격이었다. 반란군이 모습을 감추고, 정세가 안정되며 군의 분위기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경계가 풀린 틈을 타 반란군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가장 바깥에 자리한 병영 건물 하나를 차지했다. 그 안에 있던 군사의 생사를 알 수가 없다고, 보고서 말미에 덧붙여진 문장을 읽은 남자는 격분하며 서류철을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짙은 연기가 허공에서 뒤섞였다. 모든 것이 짜 맞춘 것처럼 돌아갔다. 반란군과의 실질적 전투를 경험한 부대, 패스파인더는 이 순간 부재했다.
진급 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제껏 해온 노력이 모조리 물거품이 되고 만다. 감히 이 게오르기의 앞길을 막은 시건방진 반란군 놈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꽉 쥔 주먹 안에서 두꺼운 시가의 옆구리가 터져 담뱃잎을 흘렸다. 그리페를 휘하에 둔 건 저였으나 상부에서는 자신의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반란군을 격퇴한다면 누구도 저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 손에 묻어나는 내용물을 아무렇게나 털어낸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전투는 생각한 만큼 쉬운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군부의 건물이었다. 무작정 화력을 위시한 공격을 감행했다간 주위에 피해가 미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가만 떨어졌다면 미사일부터 쏴 갈겼을 테지만, 상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게오르기는 이를 득득 갈며 건물을 노려보았다. 반란군은 보란 듯 빼앗은 군복을 창밖에 깃발처럼 내걸었다.
반란군의 행태는 이상했다. 기껏 건물 하나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라면 왜 굳이 적의 본진에 머리를 들이미는가. 한참 뒤늦은 의문이 떠오를 때쯤, 본부 내에 다시금 경보가 울렸다. 또 다른 침입자였다. 이들은 어쩌면 미끼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지 않다면. 게오르기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창 너머로 대담하게 고개를 내미는 이들은 제각각의 행색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총을 쏴 갈겼지만, 건물에 설치된 방어 시스템이 작동해 피해를 본 이들이 없었다.
이렇다 할 전조도 없이 낯선 공격이 쏟아진다. 어느 쪽에서는 누군가가 착란을 일으켜 아군을 사격했으며 심지어는 어디선가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오와 열을 맞춰 선 군사를 쓸어 버렸다. 이능을 지닌 이들이었다. 도대체 어떤 수를 써서 모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적은 수로 병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지. 게오르기는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스피커를 찢을 듯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어디서 기다렸던 건지도 알 수 없는 반란군이 속속들이 나타나 본부 여기저기에 혼란을 일으켰다. 하늘 위에 떠오른 전투기는 분명 군부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으나 움직임이 수상했다. 전투기가 뜰 법한 상황이라면 미사일 발포 허가가 났어야 했다. 상부에서는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는데. 판단을 유보하는 사이, 전투기에서 쏘아져 나온 미사일은 점령된 건물을 피해 떨어졌다.
반란군의 짓임이 분명했다. 이쪽에선 대응할 수 없었다. 북동부 4 섹터……. 미사일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읊던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끊겼다. 신호음과 전황을 읽어내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로 시끄럽던 통신기가 한순간에 침묵했다. 거의 뜯어내듯 통신기를 손에 든 게오르기가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으나 기기는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바닥에 내쳐진 통신기는 분리되며 튀어 올랐다가, 서글프게 바닥을 굴렀다.
주위는 온통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이상을 알아챈 게오르기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임시 상황실 내부의 화면은 모조리 꺼져 그 앞에 앉은 오퍼레이터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될 만한 원인은 한 가지였다. 전자폭탄. 중앙 사령부에는 이러한 테러에 대한 방비가 되어 있지만, 거기에 드는 품과 비용은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즉, 일반 병사의 숙소 따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외곽 병영에까지 그런 방비 시스템이 구축되었을 리 없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군부가 가진, 그 누가 군 본부에 전자폭탄으로 테러를 가하겠느냐는 오만한 생각도 큰 몫을 차지했다.
악다구니를 내지르고 싶었다. 멍청한 것들, 사령부에 앉아 있는 놈들은 전장을 모른다! 중앙 사령부가 멀쩡하면 뭘 어쩌란 말인가, 거기서 연락을 해 봐야 닿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게오르기는 드물게 똑바른 생각을 했지만, 외곽 병영에 방비를 갖추는 것을 크게 반대한 이들 중 하나가 그였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줄도 모르는 지휘관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전군, 공격하라!”
이능은 결국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발하는 능력이었다.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언젠가는 지칠 것이고, 그들의 힘을 빼놓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인원수에서 반란군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유리하니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하면 된다. 그사이 앞서 출격한 병사가 죽어 나자빠질 테지만, 일반 사병이란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존재였다. 어차피 간부급이 아닌 이들은 선발을 거쳤다 한들 거기서 거기였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소리를 지르는 게오르기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무모한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이들은 총을 생명 줄처럼 부여잡고 줄 맞춰 앞으로 나섰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병사는 볼품없이 떨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게오르기는 심사가 뒤틀리면 주먹을 휘두르기로 유명한 인사였다. 그의 손속 아래 반쯤 송장이 되어 강제로 퇴역하게 된 이들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괴담처럼 퍼져 있었다. 그의 손에 죽는 것만 못한 꼴이 되는 것과 반란군의 손속 아래 죽음을 맞이하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도 알 수 없었다. 진작 퇴역했어야 하는 건데. 먹고 사는 게 뭐 대수여서, X발. 병사는 절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총을 쏴 갈겼다.
병영에 설치된 방어 시스템의 성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에 이르는 이들이 쏘아대는 돌격소총만으로도 방어 시스템을 파훼하는 건 가능했다. 투명한 보호막이 깨지는 순간, 반란군은 건물 안으로 머리를 숨겼다. 그러나 기계 병사며 온갖 병기가 모조리 고철 덩어리가 되어 전력을 다수 상실한 정부군과 달리, 그들은 처음부터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지금까지 겪어온 전투와는 근본부터 달랐다. 무작정 화력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외부의 지원이 끊긴 지금, 정부군은 오래전 소실된 구시대의 전쟁을 겪어야 했다. 알아보기 어려운 수신호와 목이 쉬도록 외치는 지휘관의 목소리 따위들. 어디서 나오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물은 파도처럼 몰아쳤다가, 작달비처럼 쏟아지기도 했다. 거친 물보라에 휩쓸린 이들은 넘어지고, 넘어진 이들은 군홧발에 짓밟혀 상처를 입었다.
직전까지도 멀쩡했던 이가 급작스레 아군에게 총을 겨누면, 병사는 지옥이 먼 곳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그들은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아군을 제압해야 했다. 실전을 처음 겪는 건 아니었다. 쏟아지는 인공강우 탓에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건만 이지를 잃은 전우의 시선은 왜 그렇게나 선명하게 느껴졌는지.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젖어 버린 군복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아팠다.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이 굳기라도 한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제게 겨눠진 새카만 총구가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아찔한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다. 방탄복으로 덮인 상체 대신 허벅지를 쏴 갈긴 건 의도된 일이었는지, 우연의 일치였는지. 한쪽 다리가 온통 불타는 것 같았고, 상처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한순간 몰려든 고통에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끔찍한 통증을 감내하는 중에도, 한때의 전우는 뻣뻣하게 제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눈에 서린 일말의 비참함을 읽어내지 못했다면 이토록 서럽진 않았을까.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다 할 지원조차 없이 반란군 앞에 내던져진 이유를 어떻게 모르겠는가. 주위에 선 이들 중에는 알파 구역 출신의 인사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꿋꿋하게 버텨왔건만, 제가 겪어온 것들이 마침내 최악의 형태로 목을 죄었다. 한낱 고기 방패가 되고자 이날, 이때껏 군부에 발붙이고 서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사소한 훈련을 시작으로, 실전에서조차 은근한 차별을 겪지 않았던가.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먹여 살릴 입이 많아 관둬 버릴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이조차 자기합리화였다. 거대한 조직의 부품이 되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편안했다. 외면했던 사실은 어느새 묵직한 쇠고랑이 되어 발목을 묶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돌아왔는지, 소총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동료는 다급히 지혈대를 꺼내 피가 줄줄 새는 제 다리 위쪽을 아프도록 묶었다. 속이 메스껍도록 회의감이 스민다. 부품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조차 어중간했다. 순응하며 살아왔다 한들, 다 닳아 버리거나 고장 나면 바꿔야 할 소모품으로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물줄기가 얼마나 거칠게 쏟아지건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맑았다.
끊임없이 전해지는 통증 탓일까, 사고는 기이할 정도로 가속되어 있었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았다면 반란군 따위가 생길 일도 없었을 테지. 의식 아래에서 필사적으로 부정해 왔던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외려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의 시선은 전원이 꺼진 전투 로봇을 향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 살고자 하는 인간은 희망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어떤 이유에서든 근방의 전자기기는 모두 박살이 났다. 중앙 사령부와 연락 또한 마찬가지로 끊어졌으리라. 사방에서 반란군이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지원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완전히 고립된 전장이었다. 이 전장의 총지휘관, 게오르기는 손버릇이 좋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로비의 귀재로 더 유명했다. 패스파인더가 그의 휘하에 배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진작 잘려 나갔을 무능한 이. 제 손에 쥐어진 총은 이런 상황에서도 작동에 문제가 없었다.
이 사태의 첫 시작은 반란군이었으나 나를, 우리들을 사지로 내몬 건 게오르기였다. 이미 버린 패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거기서 거기인 일반 병사라 한들, 그 수는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며 그들 하나하나가 훈련된 전사였다. 그는 뒤돌아 소총을 치켜들었다.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걸 읽어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쏟아지던 인공강우가 멎었다. 한 걸음, 느린 걸음을 내디디면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총탄이 박힌 다리의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졌음에도.
“너희들은, 우리를 버려선 안 됐다!”
그럴듯하게 정제된 말을 내뱉을 여력 같은 건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하늘을 향했던 총구는 정확히 게오르기가 있는 막사를 겨누었다. 피가 씻겨나가다 만 손으로 총을 쥔 제 전우는 보란 듯 제 옆에 서서 같은 곳으로 총구를 돌렸다. 당황한 이들이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누었으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을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목소리는 쉬어 엉망이었음에도 묵직한 힘을 지녔다. 그가 말을 마칠 때마다, 더 많은 수의 동료가 임시 상황실 역할을 하는 막사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격분한 게오르기는 책상을 걷어찼다. 그는 거의 책상을 통째로 뒤엎어 버릴 것처럼 굴었다. 사령부로 상황을 전달할 수도, 전달받을 수도 없게 된 오퍼레이터들은 타들어 가는 속으로 게오르기의 행태를 견뎠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으나, 게오르기는 그러한 일반론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 불똥이 튈지 알 수 없었다. 더불어 병사들이 한 발씩만 발포해도 이곳은 통째로 벌집이 되고도 남았다.
막사 바깥에 서 있던 지휘관급 인사들은 사병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으나, 그 수가 현저히 밀리고 있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들을 자극해선 안 됐다. 막사 내부에서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외치는 게오르기의 고함이 들렸으나,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즉결처분이라니, 그것도 쪽수가 어지간히 차이 날 때 이야기였다. 보호막 없이 화력 좋은 무기를 쏴 갈겼다간 이쪽까지 피해를 보고, 그냥 한 명씩 머리를 쏘아 버리기엔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외려 그들이 먼저 사격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건만.
숨조차 함부로 내쉬기 어려운 대치 상황, 푸르른 하늘 위에 급작스레 거대한 함선이 위용을 드러냈다.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함선으로 향하고, 두 무리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듯 일그러졌다. 패스파인더의 함선이었다. 패스파인더는 365C-B0에 있어야 했다. 거리가 상당했던 만큼 무슨 수를 써도 지금, 이 순간 패스파인더는 이곳에 존재할 수 없었다. 총을 겨누었던 지휘관 중 하나가 다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패스파인더가 복귀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모르겠습니다. 상공에 함선이 갑작스레 나타났습니다만, 분명 패스파인더의 표식이 박혀 있습니다.”
하필 통신용 장비가 모조리 먹통이 되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급한 복귀를 할 만한 이유에 무엇이 있는지, 잔뜩 열 오른 머리로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365C-B0의 상황이 급변했음을 중간에 전달받았거나, 함선이 공격받아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함선에 실린 장비라면 중앙 사령부와도 문제없이 통신이 가능할 테고, 패스파인더라면 덩달아 반기를 든 잡졸들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스텔스 기능을 켜두었다 한들 군부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군부의 전반적인 시설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덕에 함선은 발각되지 않은 채 대기권에 자리했다. 두 사람은 상공에서 양상을 살폈다. 동쪽에서 보이는 국소적인 빗줄기는 분명 에르마의 힘이었다. 통신기를 든 이리트는 언젠가 그녀에게 쥐여 주었던 통신기 채널을 기억했다.
“에르마.”
[살아 있었구나.]
“살아남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동쪽부터 지원할 테니, 모조리 엎어 버리죠.”
[여긴 지휘부만 처리하면 될 것 같아. 사병들이 갑자기 지휘관을 공격하던데,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 같구나.]
“잘 된 거지. 신호하면 병영 보호 시스템을 켜요. 일반 사병들은…… 알아서 해요.”
[알았다.]
“소개할 사람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보고.”
의문을 품은 채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이리트는 그대로 통신을 끊어 버렸다. 제게 향하는 그리페의 시선을 꿋꿋하게 외면하며 스텔스 기능을 해제했다. 도중에 문제가 생겨 귀환했을 거라고 짐작할 테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한 손이라도 시급한 지금 패스파인더는 더없이 유용한 전력이므로 무단 귀환을 책하기 전에 지원을 부탁할 게 분명했다. 그래, 지금처럼.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울리는 통신에 그리페는 늘 그러하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디가 가장 급합니까?”
[통신이 두절되어 정확한 상황 파악은 어렵습니다. 다만 남서쪽 전투가 사령부와 가장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 주십시오.]
“그렇다는데, 이리트.”
“끊고 말해.”
“뭐 어때요.”
[무슨……]
굳이 제게 말을 붙이는 그리페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통신을 중단하고, 단단한 손을 괜히 한 번 꼭 쥐었다가 놓아 주었다. 당황한 통신병의 목소리 사이로 어렴풋이 들리는 사령부 인사들의 목소리는 자못 급박해 보였다. 이러한 사태는 예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이들처럼. 간략한 상황 보고는 동료들이 얼마나 군부를 잘 헤집고 다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들이 바라는 지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함선의 머리를 동쪽으로 돌리면 다시금 통신이 울렸다.
분명하게 들렸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대화와 이리트의 이름. 개중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리페의 배신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신 못 차리고 그리페에게 희망을 좀 더 걸어 주면 좋을 텐데. 상대하는 이들이 그토록 멍청하다면 외려 이쪽이 김이 샌다. 상념을 털어낸 이리트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지상을 훑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이들은 같은 전투복 차림이었다.
패스파인더의 함선은 분명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동향을 살피던 이들 중 하나는 얼른 막사 안으로 달려가 보고를 올렸다. 내심 두려움을 삼키던 게오르기는 묵직한 원목 책상을 두드리며 기뻐했다. 제 상관이 있는 위치를 알아본 모양이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그는 막사의 입구를 열어젖혔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분명 깨졌던 보호 시스템이 다시 가동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총구가 마주 보는 지점을 기준으로 물로 이루어진 벽이 세워졌다.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물로 이루어진 장벽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탓에 바로 뒤에 선 이들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전함의 아랫면이 열리고 미사일이 사출되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탄두는 더 볼 것도 없이 이쪽을 향했다. 몇몇은 총을 내던져 버리고 물로 이루어진 벽을 뚫어 보려 애를 썼으나 벽은 한없이 단단했다. 물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장벽을 두드리면 철벅이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비산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도망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달려도 사정권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리페 하랄트! 전함에 탄 이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게오르기의 얼굴과 목이 시뻘겋게 물들고,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탓에 핏줄이 불거졌다. 자신을 배신한 이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짖던 지휘관의 목소리가 폭음에 묻혀 사라졌다.
반투명한 벽 너머, 화려한 불이 피어오른 직후에 새카만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한쪽 다리를 동여멘 병사가 절뚝절뚝 다가와 장벽 위에 손을 얹었다.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물은 차가웠고, 병사의 손에 묻었던 피와 흙먼지를 씻어내고도 맑았다. 이능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 두렵고 불길한 존재였다. 하지만 반란군 중에 이런 이능을 지닌 사람이 없었다면 그들은 모조리 바깥에 있던 상관들처럼 죽어 나자빠졌으리라.
“투항해라. 살려줄 테니.”
장벽을 살피느라 병영 안에서 사람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함선이 이동하며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혔다. 물을 통과해 산란하는 일광이 반백의 머리를 올린 이를 비추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큼직한 흉터나, 짙게 깔린 피로의 그늘 따위는 그녀의 자태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으나 이유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과 동료들을 살린 이능의 주인이었다. 병사는 걸쳤던 끈을 벗어 총을 내려놓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 그녀의 앞에 섰다. 그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정부는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새로운 상관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혁명군이라 부르지만, 정부군과 같은 종류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면……”
“동료가 되겠다면 받아주지. 상처를 치료받고 살아남도록. 에르마다.”
“이안입니다.”
전우의 시선이 제게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한 점 후회는 없었다. 박쥐 같은 이라 뒷말을 들어도 괜찮았다. 뒤늦게 다친 다리가 아파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면 에르마의 동료로 보이는 이가 저를 부축했다. 부축을 받으며 병영 안으로 들어서면, 등 뒤에서 총기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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