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22)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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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1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그래도 이리트,”

“네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늘 저보다 낮은 체온이 쉬이 멀어졌다. 내뻗은 손이 끝내 이리트를 다시금 붙잡지 못하고, 허공을 더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리트를 붙잡아 말리고 싶었다. 꼭 당신이어야만 하느냐고. 가이딩을 대체하는 약물이 불완전하지만 분명 존재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입술은 꾹 다물린 채 열리는 법이 없었다.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 점철된 머리로도 이리트가 물러서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니까, 이마저도 저 때문이었다. 십 년이 넘도록 온갖 현장에서 구르고도 사람의 피를 묻히는 일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하는 자신 탓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인명을 배제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리트는 때때로 저 스스로의 목까지도 조르는 그리페의 맹목적인 구명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멈춘 그리페는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이리트가 내보인 기이할 정도의 확신. 그쯤 되는 가이드에게는 저로서는 알 수 없는 감각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건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금 창을 들고, 이리트의 뒤를 지켜야만 했다.

전진하는 이리트의 양옆으로 공간이 갈라졌다. 균열의 양상으로 보였으나, 각각의 크기는 가장 낮은 등급의 괴수조차도 통과하지 못할 만큼 작았다. 갈라진 틈이 점점이 이어졌다. 꼭 길이라도 이루는 듯한, 아니, 길이라고밖에 칭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귀빈을 맞이하려 길 위에 카펫을 까는 것처럼.

폭주하는 센티넬이 가이드에게만큼은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건 예상외로 흔하게 보고되는 현상이었다. 일순간 어슴푸레한 협회 지하 공간의 풍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완전하지 않지만, 그 찰나의 감각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피아식별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제 앞에 다가오는 이가 유일한 구명줄이라는 기이한 확신이 뼛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으므로. 어쩌면 저 이름 모를 센티넬은 이런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것일까.

이리트가 지나가면 균열이 구겨지듯 닫혀 사라졌다. 두어 걸음이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하나처럼 울리던 두 명분의 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뒤이어 개방되는 이리트의 힘. 더없이 따듯한 기운은 제게도 닿아왔다. 이 순간만큼은 이곳이 다 무너진 적진의 심장부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따금 깜박이며 내내 허공을 응시하던 탁한 잿빛 눈에 빛이 깃들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초점이 제대로 잡힌 눈이 제 앞에 선 사람을 바라봤다. 상황을 인식하듯, 오랫동안.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흐렸으나 하나의 사실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남자가 기나긴 지옥을 부숴 버리고자 이곳에 당도했음을.

그는 한 박자 늦게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과 제게 연결된 기계의 신호음, 흑백이 묘하게 섞인 머리칼을 지닌 남자 뒤에 선 밀빛 금발을 지닌 또 다른 이를 인식했다. 한 걸음 뒤, 언제든 뛰쳐나올 태세로 저를 예의주시하는 새파란 눈에는 살기가 맴돌았다. 허튼짓을 시도하는 순간 그 손에 쥔 창이 심장에 꽂힐 테지. 경계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에게서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사선을 넘나드는 이에게서 흔히 스치는 서늘한 피 냄새가.

가슴 깊은 곳에서 의문이 치솟았다. 당신들은 누구며,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제게 또 다른 고통을 선사하고자 하는 이들은 아닌지 따위를 묻고 싶어서.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여전히 작동하는 장치가 더없이 익숙하고도 지독한 고통을 선사하는 탓이었다. 기껏 부여잡은 정신이 쉬이 흐려지고, 묶인 몸뚱이가 의지와 상관없이 버둥거렸다. 죽을 것 같다, 싶을 즈음 통증이 사라졌다. 기나긴 시달림으로 취약해진 육체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역치가 낮아진 것일까. 바닥에 이마를 부딪쳐 가며 차라리 정신을 놓게 해달라 빌고 싶었다.

“일단 떼 내야겠는데.”

“연결된 장치가 많아요, 이리트.”

“정신 돌아왔으니 유지장치는 괜찮을 거야. 나머지는 오히려 떼는 쪽이 나을 테고.”

바로 앞에 둔 사람이 고통으로 신음하건 말건 가면 같은 무표정에는 실금 하나 새겨지는 법이 없었다. 이 순간에도 제게 쏟아지듯 닿는 힘이 가진 온기와는 다르게. 흔들림 없는 자색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고, 기기의 몇몇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느릿하게 운을 뗀 이가 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입가를 가린 하얀 손 너머,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고 싶었다. 동시에 뭐든 좋으니 이 모든 일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리페는 아래쪽부터 천천히 몸을 구속한 장치를 풀어내고, 이리트는 그의 몸뚱이에 연결된 온갖 관이며 장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저 몸에 굵직한 관을 꽂았는지, 뚫린 채 아물어 버린 상처는 기이한 모양새였다. 얇은 관이 빠져나간 살갗에서 피가 비치고, 몇몇 개는 끝내 분리하지 못해 관 자체를 끊어 버리면 알 수 없는 액체가 쏟아졌다. 맥없이 무너지는 사람을 그리페가 받아 벽에 기대 앉혔다. 척추에 박힌 장치에 무슨 짓거리를 해둔 건지, 분리할 방도가 없는 탓에 그를 편히 눕힐 수도 없었다.

고통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지 헐떡이는 사람의 꼴은 처참했다. 만신창이가 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몸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이. 그리페는 제 상의를 벗으려다가, 상처를 보일 때 벗어둔 전투복을 그대로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안에 받쳐 입는 셔츠만 챙기고 이리트를 살피는 새 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걸 다시 걸쳐 입었다 한들 등 한가운데가 찢어졌으니 몸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는 적절하지 못했을 터였다. 힐끗 시선을 준 이리트가 어느 한구석에서 천을 가져와 몸을 덮었다. 홑겹 천은 약간 뻣뻣했으며, 짙은 초록빛이었다. 수술실에서나 볼 법한 물건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곳에서 하나하나 의도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의 호흡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이리트도 서서히 힘을 거두었다. 상태는 여전히 농담으로도 좋다고 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적어도 곧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오래 침묵하던 이리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 죽어가는 센티넬이 엉뚱한 생각이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리페는 이리트의 등 뒤에 선 채 자리를 지켰다. 한참이나 널브러진 센티넬을 주시하던 이리트가 제 다리에 몸을 기대 왔다.

“이름과 소속.”

“이름, 나의……”

탁한 머릿속에서는 산산이 조각난 파편만이 떠돌았다. 드물게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이 있었으나, 그것의 주인을 알 수 없어 그는 입을 다물었다. 보란 듯 방만하게 앉은 자안의 남자는 목록을 뽑아두기라도 했는지, 대답이 늦어지면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온 질문이 열 개라면, 대답할 수 있는 건 고작 두세 개 정도였다. 오랫동안 망가져 있던 정신이 단기간에 멀쩡하게 돌아오지는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망가진 스스로를 직시하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팔마는, 나를 이 꼴로 만든 놈들은 어떻게 됐나?”

“우두머리는 이미 죽었고, 나머지 잔당도 죽거나…… 살아있더라도 적절한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겠지.”

절박하게 물어온 것치고는 반응이 시원찮았다. 체감되지 않는 쪽이거나, 이쪽을 불신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제 몸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지금 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저 센티넬에게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이곳을 멀쩡히 걸어 나가더라도 남은 생은 기껏해야 반년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이능의 제어를 잃은 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이었다.

이능의 부작용은 대개 사람의 육체가 주어진 이능을 견디지 못해 발생했으며, 자연히 폭주는 그를 막아야 하는 주변인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무리한 일이었다. 비록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을 뿐, 제 이름마저 잊은 저 센티넬 또한 알고 있으리라.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오래 침묵했다. 천이 온통 구겨지도록 붙잡은 마른 손등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곳 어딘가에 기록지가…… 분명히 숨겨져 있어. 여기, 이곳에.”

먹먹하니 잠긴 음성에 이 가는 소리가 섞였다. 제 상황을 잊은 듯 몸을 일으키려다가, 휘청이며 넘어지려는 이를 그리페가 붙잡았다. 내내 기대 있던 이리트도 소란한 틈에 일어서서는 바지를 툭툭 털었다. 붉게 물든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이를 천천히 앉히면, 그가 그리페의 바지를 부여잡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누구에게 빌어야 통할지 본능처럼 알아채는 건 꽤 신기했다. 금방이라도 애원할 듯 달싹이는 입술. 무기력이 학습된 듯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를 바로 세우려는 그리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페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트는 발치에 무릎을 꿇는 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 번,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내뱉는 목소리가 온갖 감정으로 점철되어 떨렸다. 도대체 왜 이러냐는 듯, 그리페가 입 모양으로만 제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숙인 고개가 끝내 맨바닥으로 떨어지려 할 즈음, 단단히 잡았던 그리페의 어깨를 놓았다.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것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의 이유를 묻는 대신, 그리페는 얼른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붙잡아 말렸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어디에 숨겨져 있지?”

상반되는 두 사람의 태도. 어쩌면 이전에 느낀 기운의 주인이 금발의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지금 제게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사실이 아니었다. 차가운 자안은 저를 비참한 곳으로 내몰았으나, 인제 와 자존심 따위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를 지키고 선 센티넬의 행동을 막지 않았음이 중요했다. 센티넬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잡혀 온 뒤로 의식은 아주 드물게 돌아왔고, 그마저도 흐릿했다.

그들이 빈 벽 어딘가를 두드리면 벽으로 위장했던 공간이 열리고, 그들은 휘갈겨 쓴 일지를 들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금방 돌아 나왔으며, 그때는 손이 비어 있었다. 그 위치는 제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선 채로 이야기를 듣던 이는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금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벽을 두드리는 모양새는 분명 숨겨진 공간을 찾는 움직임이었다.

“미안합니다.”

크게 치뜬 눈이 그리페를 향했으나 찰나였다. 쉬이 센티넬을 기절시킨 그리페는 그의 몸이 잘못 넘어지지 않도록 모로 눕혔다. 흘러내린 천을 고쳐 덮어준 이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벽을 두드리고 있는 이리트에게. 이리트.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벽 한쪽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곳의 빛이 다 닿지 않는 내부가 어두웠다. 그러나 내부를 뒤지는 것보다 먼저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왜 이런 식이어야 했어요.”

“저 센티넬이 우리를 못 믿으니까.”

“이리트……”

“감정이 격해지면,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어도 티가 나기 마련이야. 아닌 말로, 저자가 작정하고 함정에 빠뜨리려 하면 못할 것도 없어.”

그리페가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미리 설명하기에는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고,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쓰기에는 번거로웠다. 열린 통로 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 ……화났어? 침묵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입을 열면, 그리페가 고개를 저었다.

“탓하려고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그러면?”

“당신이 여전히 정보부에 속해 있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

“일단…… 저 사람은 말한 대로 기절시켰는데, 언제 정신을 차릴지 모르니 빠르게 훑어보고 나가요.”

실망했을까. 그리페의 감정은 종종 읽어내기 어려웠다. 지금처럼. 시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괜한 변명을 덧붙이는 대신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틈 사이로 스미는 빛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체격 좋은 성인 남성 두 명이 들어서니 꽉 차게 느껴질 만큼 좁은 공간에는 컴퓨터 한 대와 파쇄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사용한 듯 먼지가 앉은 곳이 없는 공간, 책상 아래 자리한 본체는 전원이 들어와 있음을 알리듯 붉은빛이 깜박였다.

현장에서 얻은 자료는 종류를 불문하고 모두 정보부 측에서 수거했다. 그러니 이번 것도 매한가지였다. 내부의 디스크를 회수하면 끝날 일이었으나, 불 꺼진 모니터를 노려보던 이리트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가 파르스름한 빛을 내고, 내부의 팬이 돌아가며 작은 소음이 일었다. 그 소리에 파쇄기 덮개를 열려던 그리페가 다가왔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몇 겹에 이르는 보안 장치를 설치해 둔 탓일까, 컴퓨터는 간단한 암호조차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설정해 두지 않은 초기 화면, 기본 요소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새로이 생성된 폴더 하나. 이름조차 붙여두지 않은 폴더를 열면 숫자가 적힌 문서 파일들이 죽 나열되었다. 숫자는 파일이 작성된 해의 연도였으며, 그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이십삼 년 전이었다.

오랫동안 큰 변동 없던 균열과 관련된 통계 수치는 분명 팔 년 전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리트는 가장 오래된 파일부터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처음 시작은 일기나 다름없었다.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아무렇게나 써 두었는가 하면, 온갖 가정을 마구잡이로 증명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때때로 사고실험을 진행했고, 어느 때에는 동물, 심지어는 인간까지도 이용했노라 당당히 적혀 있었다.

온갖 갈래로 남은 기록은 분명 처음에는 그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았음이 뚜렷했다. 십삼 년 전, 특정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센티넬의 피를 이용하면 이능을 폭발적으로 강화할 수 있음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쯤 자료를 읽어내리던 이리트는 의식적으로 눈을 떼고 자료를 닫았다.

이리트가 자료를 읽는 속도를 다 따라가지 못한 채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면 단편적인 파편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어렴풋한 뉘앙스만으로도 비숍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너끈히 짐작한 그리페의 낯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한참 집중하던 눈앞에서 글자가 사라지고, 그리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이리트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건, 모니터가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기 때문인가.

“왜 그래, 이리트.”

“잠깐만.”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그러나 무작정 운을 떼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으며, 마침 제게 주어진 자료는 다소 쓸모없는 사담마저도 그대로 적혀 있었다. 이리트는 가장 최근 파일을 열었다. 숫자로 남은 파일이 품은 기록은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은 그 글을 써 내려간 이의 정신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비숍은 이능을 강화하는 시술을 그 자신에게도 행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완벽한 성공을 일구어냈다 한들 정신이 점점 더 무너졌으리라. 정신계 이능은 그 존재만으로도 소유자를 갉아먹기 마련이었으므로. 쌓인 정보가 하나의 확신으로 화할 때, 이리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정보는…… 세상에 남지 않는 게 더 나을 때가 있어. 그게 개인의 기억 같은, 다소 불완전하고 왜곡되기 쉬운 매체라고 하더라도.”

기록된 조건은 우연히 발견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난해했지만, 작정하고 재현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균열은 여전히 극복해 내지 못한 재앙이고, 센티넬의 수는 언제나 부족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대놓고 협회에 반목하며 센티넬 간의 소모적인 전투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이니 협회는 이러한 정보를 알게 되는 순간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 것이었다. 어쩌면 협회 소속의 센티넬조차 알지 못하는 새.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였다. 협회는 이 기록을 극비에 부치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협회처럼 거대한 기관이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새어나간 비밀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터였다. 비숍은 피를 이용할 뿐이라고 간단히 기록했지만, 본질은 센티넬이 센티넬을 잡아먹는 것에 가까웠으므로. 그러니 이 기록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건 분명 여러 방면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될 테지만, 방식이 한참 잘못됐어. 다행히 딱 두 명의 입만 봉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밖의 저 센티넬도 있고, 비숍의 기억을 뒤지는 이들도 기록이 있다는 것 자체는 알게 될 텐데요.”

“바깥의 센티넬도, 협회도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비숍의 기억 속에 더 많은 정보가 남아 있다면?”

“그 자식 뇌는 손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졌어. 죽은 사람 기억을 빼내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고, 그게 나사가 수십 개쯤 빠진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지.”

“다른 연구원은요, 이리트.”

“비숍의 행적 중에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사안인데…… 핵심 정보는 아무에게도 공유하지 않았어. 내부 반발을 의식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만한 능력을 독점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이리트는 한 번 망설이지도 않고 답을 쏟아냈다. 이미 제 질문 정도는 예상한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더 강한 무력을 지닐 수 있음을 알게 된 이들은 분명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테다. 그 대가로 타인의 피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매한가지였다. 탐욕스러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 이미 익히 알고 있지 않았던가.

“발견 못 했다는 말만으로는 안 돼요. 정보부가 모조리 털어볼 테니까.”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좀 위험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리트.”

“모조리 불사르면 돼.”

그리페의 입이 벌어졌다가 그대로 다물렸다. 시설 내에 이런저런 공을 들였던 것이 얼핏 보기에도 선명했으니 모조리 불타버리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테지만, 지나치게 위험했다. 불은 위로 치솟기 마련이었으며, 이곳은 지반 아래로 파고들어 세워진 건물의 최심부였다. 고작 환기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는 곳.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삼십 분 정도가 흘렀다. 의료팀은 이미 이곳을 빠져나갔거나, 늦더라도 입구에 다다랐을 터였다.

“나가서 저 센티넬 챙겨.”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흔적이 남으면 곤란했다. 파일을 삭제한 자리에 무작위 더미 데이터를 덮어씌우고, 시스템을 초기화하면 혹여 다 타지 않은 잔재가 발견되더라도 데이터를 복구할 수 없을 테다. 이리트의 손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시스템 초기화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 이리트는 콘센트에 꽂힌 전선을 뽑아 조작한 뒤에 아무 일 없던 양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먼지를 툭툭 턴 이리트가 좁은 방 밖으로 나왔을 때, 입구 근처에는 센티넬이 기대 앉혀져 있고 그리페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기기를 되는대로 파손하고 있었다. 내부를 채우고 있던 알 수 없는 액체가 쏟아져 바닥을 어지럽히고, 큼직하게 갈라진 기계 틈새로 스파크가 튀었다. 웬만큼 부서진 것만으로는 전력이 끊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전기 흐르는데, 그리페.”

“괜찮아요.”

그리페는 보란 듯 장갑 낀 손을 들어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맨손이지 않았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 이리트가 손짓했다. 때마침 기계 아래쪽으로 새어 나온, 기름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컴퓨터가 자리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열린 벽을 닫으면, 한 번 더 크게 흔적을 남긴 그리페가 의식 잃은 센티넬을 주워 들고 걸음을 옮겼다.

열린 벽으로 빠져나오면, 비숍의 시체가 너부러져 있던 곳에는 굳어가는 피 웅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당장 불길이 등 뒤를 쫓는 건 아니지만, 일단 화재가 일어나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의료반이며 부상자는 이미 빠져나가 적막이 감도는 곳. 그리페도 저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므로 침묵은 익숙한 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저 깊은 곳에서의 일 때문일 터였다. 자신을 향하던 그리페의 시선 안에 스친 당혹감. 그 찰나가 자꾸만 떠올라서.

그냥 잘못했다고 말해 버릴까 싶었다가도 반발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곳에서 서둘러 탈출해야 했으며, 내내 잡혀 있어 제정신도 아닌 센티넬을 공들여 설득할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불안 요소를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니었던가. 그리페가 저를 살피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이리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토록 변명을 덧붙이고 싶은 건, 적어도 그리페의 기준에서는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이리트, 무슨 생각 해요.”

그리페는 신기할 정도로 제 표정을 잘 읽어냈다. 그게 아니라면, 그리페를 옆에 두고 제가 풀어지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제게 있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리페는 괜찮다고 했지만, 자신은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 없다고? 이미 지나간 일을 저 스스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다른 선택을 할 자신도 없었다.

“응? 이리트.”

그의 목소리는 꼭 저를 달래는 것 같았다. 입 밖으로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건만 이미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달리다시피 걷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다가, 끝내 멈춰 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상에서는 괴수와의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팔마가 벌인 일을 수습하고 있었으며, 등 뒤에서는 언제 치솟아 오를지 모를 불길이 두 사람을 쫓았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투정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린애처럼.

“네가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한 일로 네가 실망한 건 아닐까 싶어서. 너는 괜찮다고 했지만, 자꾸만 다시 확인받고 싶어. 머저리라도 된 것처럼.”

그래서 스스로가 우습다고, 말을 덧붙이려던 이리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짐짝처럼 들었던 사람을 내려놓은 그리페가 다가왔다. 시리도록 푸른 눈은 오롯이 저를 향했다. 그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피하면, 힘없이 늘어트렸던 손이 붙잡혔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분명 단단히 붙잡은 손. 여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 텐데도 그리페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야 했다.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일단 나가자고 말하기 위해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리페가 저를 꼭 끌어안았다. 주위 상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꾹 다물린 입술이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비죽였다. 삽시간에 복받치는 감정을 안도감이라 불러야 하는지.

“이리트, 내게 당신 스스로를 끼워 맞추지 말아요. 당신이 정보부의 영향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건 단순히 도덕적으로 옳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

“당신이 당신 자신을 더 아꼈으면 해서. 그래서 그래, 이리트.”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맞닿은 몸이 의도치 않게 떨리고 있는 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온통 이상했다. 맥없이 휘둘리는 것도, 삽시간에 묘한 감정이 복받치는 것도. 늘어트렸던 팔을 들어 마주 껴안으면, 그리페의 손이 제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도대체 무엇이 서러운지도 모르는 채 위로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부러 깊숙이 숨을 삼킨 이리트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미약한 움직임만으로 의도를 알아챈 그리페가 팔을 풀고, 다시금 올곧게 눈을 맞춰 왔다. 확신하건대, 이리트, 나는 당신에게 실망 안 해. 이번 일도. 이다음에도.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지독할 정도로 달았다.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이리트는 직감했다.

“알겠으니까…… 얼른 나가자.”

“지금 딱 키스하기 좋은 분위기 아니었어요?”

“놀리는 거지.”

“아주 그런 건 아닌데.”

“……나가서 해, 뭘 하든.”

너부러진 센티넬을 다시 둘러메는 것을 확인한 이리트가 걸음을 서둘렀다. 뒤늦게 스치는 머쓱함을 잊어 보려는 듯. 옷깃 위로 드러난 이리트의 목덜미가 온통 붉었다. 무겁도록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내뱉은 말이긴 했으나, 완전히 실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저런 반응이 돌아온다면 더더욱. 같이 가요, 이리트. 걸음이 더욱 빨라지나 싶더니, 뒤따르는 발소리가 없자 금방 멈추었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뒤돌아보지 않는 이는 드물게 그 나이대의 어린애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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