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1)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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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유난히 길고 지난한 제5의 계절에도 끝은 찾아들었다. 수시로 쏟아지던 소낙비도 잦아들 무렵, 이리트는 올슨과 독대할 기회를 얻었다. 올슨이 내보인 의지는 당시에 일종의 신화처럼 여겨졌으나, 그는 신이 아니었고 흐르는 시간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여기저기 희끗희끗 물든 다갈색 머리칼은 잔머리 한 올 허용하지 않고 말끔하게 틀어 올려 단정했고, 마주 앉은 상대를 응시하는 눈은 맑았다.

“당신의 이름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헤르데.”

“올슨, 당신만 하겠습니까.”

“나를 놀리려는 건가요?”

“설마 그렇겠습니까.”

눈앞의 사내는 빈틈없이 올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옷차림이며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에 쉽사리 가려지기 마련이었으나,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분명 앳된 티가 났다. 동시에 올슨은 그에게서 젊은이 특유의 치기가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직접 대면한 것이 처음일 뿐, 이리트와는 이미 여러 수단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가 원하는 바 또한 명확했다. 이리트는 레만을 끌어내리는 게 목적이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굳이 대면하자고 한 건……”

올슨은 길게 뜸을 들였다. 이 순간 이리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올슨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한시적 동맹의 성립 여부를 판가름하게 되리라는 것을. 올슨은 제 손으로 부러 훤히 드러낸 의수를 매만졌다. 이리트의 시선은 잠시간 손에 머물렀다가, 금세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레만이 직접 수를 쓴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운을 뗀 올슨은 더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처음부터 레만과 반대되는 노선을 걸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그는 생각보다 제대로 된 인간이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지금처럼 뒤바뀌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사지 대부분을 잃은 심각한 부상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한동안 버거웠으므로. 그가 짧고 뭉툭해진 사지에 의지를 달고 돌아왔을 때, 레만은 이미 그가 익히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고.

그를 알아채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아온 올슨을 멋대로 협회의 상징으로 이용하려던 레만은, 무언가 바뀌었음을 눈치챈 올슨을 더욱 위험한 현장으로 파견했다. 그렇게 내몰리듯 나선 현장에서 기껏 길을 들인 의지가 부러지고, 잘 아물었던 사지가 다시금 짓물렀다. 별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사실을 나열한 올슨은 차분히 목을 축였다. 몇 번은 견뎌낼 수 있었다. 센티넬의 신체는 강인하고, 부상 후에 덧댄 의지는 부러졌을지언정 그의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므로. 그러나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연이은 부상의 진정한 연유를 아는 이들은 드물었고, 올슨은 그렇게 현장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때의 부상 덕에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런 날씨가 오면 몸이 좋지 않다며 웃었다. 그건 시간 속에, 혹은 레만의 의중 하에 파묻힌 진실이었다.

올슨은 협잡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겨우 사람의 악의 따위를 버텨내지 못할 정신이었다면, 두 다리와 팔 한 짝에 의족이며 의수를 주렁주렁 매달고 전장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터였다. 기어이 살아남은 올슨은 저와 같은 꼴을 당하는 센티넬이 없기를 바랐다. 그것이 올슨이 부상과 배신으로 점철된 협회를 떠나지 않고 남은 이유였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를 모으는 일은 순조로웠다. 어느 순간부터 변해 버린 상부의 태도를, 협회에 소속된 이들이라면 절절하게 체감했으므로. 협회 밖에서 레만은 훌륭한 리더의 표본이었으나, 안에서는 위선자로 더 많이 칭해졌다. 한때, 위선자라는 명칭은 레만을 대신하는 명사로 쓰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레만이 손을 쓰는 게 빨랐다고 해야 할까.

레만은 자신의 능력을 가감 없이 이용했다.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동료는, 실상 자아를 잃은 꼭두각시처럼 변해 있었다.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가, 레만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부터 변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비어 시체와 다를 바 없는 그 눈. 누군들 그것이 경고임을 모를까.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등을 돌리는 이들이 늘었고, 더 이상 함께할 세력을 늘릴 수도 없었다.

살아남고자 버틴 세월이 차라리 고되었다면 심적인 괴로움이 덜했을까. 레만은 숨죽인 제게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도 않은 채 웃으며 이곳저곳 얼굴을 팔고, 뒤로는 권력을 무도하게 휘둘렀다. 다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서서히 색이 빠지고 있었다. 흉터가 새겨진 얼굴이며 하나 남은 손에는 주름이 늘었고, 살갗은 조금씩 탄력을 잃었다. 올슨은 제 신체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숙원을 이루고자 하는 일은 이제 더 미룰 수 없었다.

올슨의 예민한 직감이 속삭였다. 이리트와의 동업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숨죽이고 버티던 나날은 과거에 지나지 않으며, 당장 지금부터라도 움직여야 한다고. 그건 눈앞에 앉은 가이드가 또한 원하는 일이라고. 그건 숫제 희열에 가까웠다. 그러나 동시에, 단단히 비끄러맨 이성은 아직 앳된 티도 다 가시지 않은 이를 그냥 끌어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요지는 위험하다는 겁니다, 헤르데.”

내내 저를 향하는 자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고 맑았음에도, 색이 짙은 눈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엿볼 수 없었다. 기척을 감추고, 가능한 한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활동하고 있는 와중에도 협회의 소식에는 귀를 열어 놓았었다. 열아홉, 성인이 되자마자 두각을 나타낸 가이드의 소식을 저라고 듣지 못했을까. 다소 비사교적인 성향을 지닌 가이드는 그와는 다른 의미로 유명세가 있던 센티넬과 짝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페는 지나치게 올곧은 면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사안에서는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

“레만은 당신의 파트너도 이용할 겁니다.”

“이미 겪은 바 있는 일입니다. 올슨,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짐작 가는 부분이 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에게 접근한 게 아닙니다.”

“……레만을 끌어내리는 것, 그 자체가 당신의 목적이라고 했지요.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죠.”

내내 진중한 표정을 푸는 법 없던 올슨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이리트는 곧바로 뒤따라 일어섰다. 마주 잡은 손은 현장에 나가지 않은 지 오래인 센티넬의 것임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그들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서로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누구 하나 먼저 시선을 돌리는 법 없이. 복잡하며 번잡스러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신의로서 구축한 한시적 동맹의 시작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이리트는 여유로운 태도로 올슨이 내어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올슨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맞춰지는 조각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지닌 강령에 비해 영세하기 그지없는 세력의 정체며, 한날 뚝 끊기듯 사라진 올슨의 행적 같은 사안들. 올슨은 곧바로 떠나가지 않는 것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으나, 이내 표정을 감추고 한층 더 올곧게 고쳐 앉았다. 한 번 더 미지근한 차를 머금은 이리트는 옆에 내버려뒀던 가방 한쪽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손도 잡았으니, 먼저 드리는 선물입니다.”

액세서리 따위가 들었을 법한 작은 상자였다. 의심스레 그것을 응시하던 올슨은 곧 상자를 손에 쥐었다. 이리트를 바라봐도, 일직선으로 곧은 입술은 열리는 법이 없었다. 제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듯. 손을 잡자마자 얻은 것도 없이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터였다. 제가 더는 괴수와 싸울 수 없는 센티넬이라 해도 가이드 하나를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건 저쪽도 알 게 분명했으므로, 올슨은 망설임을 접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잘 고정된 물건은 어떻게 봐도 메모리 카드였다.

“개인적으로 모은 정보입니다. 당신에게 꽤 도움이 될 테고…… 그건 곧 내게도 도움이 될 일이겠지.”

단정적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 안에 든 게 레만을 공격할 수단으로 모자람이 없을 거라고, 이리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전해줄 요량으로 만나자고 한 것일지도 몰랐다. 은밀한 폭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기어이 살아남은 올슨은 알았다. 저 어린 가이드가 지닌 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날카로운 칼임을. 하지만 그런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올 리 없었다. 이리트가 정보를 제공하고 저를 이용하는 꼴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끝에 가서는 둘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올 테니.

“헤르데, 당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조만간에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적절한 때에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올슨의 표정은 미미하게 변화했으나, 읽어내는 데에 큰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더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메모리 카드 안의 자료를 지금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하는 태세였으므로. 가볍게 묵례한 이리트는 미련 없이 뒤돌아 자리를 떴다.

 


올슨과 손을 잡았다고 상황이 격변하지는 않았다. 외려 지루할 만큼 일상적이었지. 올슨에게 아주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은 이미 레만에게 패배한 적 있었으므로. 그러나 레만 쪽으로 돌아서지도 않고 이때까지 그냥 살아남지는 않았을 터였다. 뭐든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었다. 하루아침에 끝날 만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자면 이따금 지루함이 밀려왔다.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은 쉬이 흘렀다. 날이 갈수록 더위는 더해져, 한낮의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찌는 듯한 더위를 맞이하여, 협회에 속한 이들도 하나둘씩 하계휴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여름의 절정 언저리, 주말을 낀 딱 한 주짜리 휴가를 받은 두 사람은 산속에 자리한 별장을 통째로 빌리는 데 성공했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산은 장거리 이동의 피로함을 잊게 할 만큼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산 특유의 맑은 공기, 눈을 감으면 어렴풋이 들려오는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는 정취를 더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긴 숨을 들이켜 피로감을 떨쳐낸 이리트가 짐을 꺼내는 그리페의 옆에 붙어 섰다. 물론, 그리페는 늘 그렇듯 묵직한 짐을 제게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짐은 얼핏 보기에도 한 번에 옮길 만한 양이 아니었으므로, 이리트는 그가 막 내려두려던 캐리어를 빼앗듯 들었다.

“내가 옮겨도 되는데, 이리트.”

“여러 번 오가느니 한 번에 옮기는 게 낫지.”

이어지는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한 손에 캐리어를 든 이리트가 금세 멀어졌다. 그리페 또한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능을 발하지 않고도 제가 지닌 힘이 일반적인 성인 남성 평균치를 훨씬 웃돌 뿐이지, 이리트가 어디 가서 힘이 모자라 곤란을 겪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도 이리트가 괜히 힘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리트는 때때로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냐며 투덜대곤 했다. 같이 가요. 멀어지는 등 뒤로 말을 흘리면, 이리트는 곧바로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트렁크를 닫고, 양손에 짐을 든 그리페는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이리트의 옆에 섰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

“사람 몰리는 곳은 나부터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당신은 내내 밖으로 나다니는 것도 귀찮아할 테니,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어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빌렸어요.”

이리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굳이 여기를 고른 건 정말이지 잘한 선택이었다고, 그리페는 주위를 살피는 이리트의 옆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가져온 짐을 대충 내려놓고, 직전에 장을 봐 온 물품들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면 이리트가 그 뒤를 따라왔다. 이런저런 재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은 그리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안을 휘둘러보고 몸을 일으켰다.

“너무 많이 산 거 아냐?”

“닷새는 있을 건데, 이 정도는 있어야 해요.”

“그래도 많은 것 같은데.”

“당신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그래.”

이리트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진의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면, 그리페는 짐짓 뻔뻔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여느 때처럼 예쁘게 웃어 보였다. 저 얼굴을 보니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볍게 건넨 저 말에 진심이 절반 이상 섞여 있음을. 삽시간에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제가 그리페의 체력을 따라붙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실이었으나, 그건 제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제 정신을 쏙 빼놓는 게 누구란 말인가. 이리트는 그리페의 양 뺨을 꼬집어 죽, 당겼다.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그리페의 얼굴을 이리트는 몇 번쯤 아무렇게나 찌그러트렸다. 그리페의 매끄러운 뺨은 꼬집힌 티도 나지 않아서, 대충 뺨을 문질러 주었다.

“정리할 것 더 없지?”

“냉장고 넣어야 할 건 다 넣었으니까…… 네, 대충은요.”

제 뺨을 쥔 그대로, 이리트는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이리트의 고민이라고 해 봐도 이대로 누워서 게으름을 부릴지, 바깥을 조금이라도 둘러볼지 정도일 게 분명했다. 무엇을 고르든 함께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리페는 재촉도 않고 얌전히 얼굴을 내맡겼다. 그러나 금세 결정을 내릴 거라는 제 예상과 달리 이리트는 꽤 오래 침묵했다. 이리트의 손목을 붙잡아 손바닥 안에 입을 맞추면, 잠시간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이 돌아왔다.

말끄러미 저를 쳐다보는 시선, 이리트는 문득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태세였으나, 무엇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어 쳐다보고 있자면 이리트의 손이 제 바지 주머니로 향했다. 이리트의 손끝에 걸려 나온 건 제 휴대전화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잠금을 해제하더니, 곧바로 전원을 끄고 돌려줄 생각도 없다는 듯 뒤돌아 멀어졌다. 잠금 패턴을 알려준 적이 있던가. 아니, 애초에 이리트는 여태 제 기기엔 관심 한 톨 보이지 않았는데.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서 있던 그리페가 얼른 이리트에게로 다가갔다.

“이리트? 왜 그래요.”

“여기 있는 내내 센터 쪽 연락은 받을 생각도 말라는 뜻이지.”

“하지만……”

“거기 S급이라곤 너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들 하라고 해.”

긴급호출이 온다 한들 갈 수 없는 거리임을 이리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제 기기를 가져가 전원까지 꺼 버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이리트는 현장에서 내내 마음 졸이며 저를 기다리고는 했다. 여기까지 와서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 슬금슬금 멀어지는 이리트의 허리를 껴안고, 셔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어차피 못 간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내내 당신과 있을 작정이었지. 어르듯 속삭이면 이리트가 한발 늦게 뒤돌아섰다.

“정말이지.”

“정말이에요. 그보다 패턴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외웠어.”

“신기하네.”

“기분 나쁘진 않고?”

“내가 당신에게 숨길 게 뭐가 있다고.”

숨 쉬듯 자연스러운 말이 더없이 달아서, 이리트는 그리페를 마주 껴안았다. 등허리를 감은 손이 느릿하게 등을 토닥였다. 말없이 한참을 포옹한 채 있던 이리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계곡이 근처에 있는 것 같던데.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둘러보고 싶다면 나갈 준비를 하자며 품을 빠져나갔다. 저나 그리페나 계곡물에 들어가서 물놀이할 것도 아닌데 별달리 챙길 게 있나 싶었다.

창고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간 그리페가 다시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바리바리 싸 넣은 짐 안에는 저런 물건이 없었으므로, 분명 이곳에 원래 있던 것이리라. 그걸 알고 있음에도 저런 물건들을 챙겨나오는 그리페는 작정하고 휴가를 알차게 보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색 옅은 반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걸친 탓에 더욱. 양손에 든 짐을 현관 옆에 내려둔 그는 주방 식탁 위에 얹어두었던 수박을 옆구리에 꼈다.

“의자만 좀 들어줘요.”

“밀짚모자 하나만 있으면 딱 좋겠는데.”

“그건 갑자기 왜?”

“지금 네게 씌우면 딱 좋을 것 같아서.”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나란히 걷던 이들은 금세 물가에 도착했다. 바닥에 깔린 잔돌을 고르는 사이, 그리페는 한 손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접이식 테이블을 펼쳤다. 바로 앞에 의자를 나란히 두면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제법 났다. 물가 주변을 이리저리 살핀 그리페는 적당한 위치에 큼지막한 수박을 담갔다. 그래도 혹시 어디론가 굴러가지는 않을까, 손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직한 돌까지 괴어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는 거 아냐?”

“이건 이것 나름대로 정취 같은 게 있는 법이니까……”

손에 남은 물기를 대충 털어낸 그리페가 이리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기온이 연일 금년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지만, 숲속 물가의 바람은 꽤 선선한 편이었다. 습기를 머금었으나 달구어지지 않은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어 놓을 때마다 저 멀리서 잎사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도심과 달리, 이곳은 내내 고요했다. 간혹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마저 신경에 거슬리곤 하는 소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있자면, 이따금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로 맑은 볕이 비쳤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정적인 분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의 침묵은 대개 익숙한 것이었으며, 또한 굳이 깰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서로의 기척은 선명하고도 안온했으므로. 이리트는 느리게 손을 뻗어, 허벅지 위에 얹힌 그리페의 손을 감싸 쥐었다. 더없이 평온한 분위기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늘 괴수의 울부짖음이며 사람의 기합 소리 따위가 뒤섞인 현장에서 끝없이 대기하거나, 기껏 맞이한 휴일에도 긴급 호출에 몇 번이고 불려 간 탓일지도 모르지.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질릴 때까지 정지된 듯한 세상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리트.”

“응.”

“당신이 하려는 일까지 전부 끝나면, 일 년 정도 휴직하는 건 어때요.”

“쉬는 거야 어렵진 않지만, 왜?”

이리트는 그 이유를 전연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잡혔던 손을 움직여 이리트의 손을 감싸 쥔 그리페는 때마침 햇빛이 비치는 자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리트는 기억하지 못하는 때, 협회의 일을 관두겠다는 저를 말리던 순간이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굳은살 박인 엄지로 부드러운 손등을 느릿하게 문질러도, 이리트는 제게 손을 내맡긴 채 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 손을 잡고 온 세상을 여행이라도 다니는 건 어떨까 해서. 장마 내내 떠나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이럴 때면 그리페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시선을 붙잡아 이끌었다. 그렇다 한들 그냥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짧은 휴가를 보내는 것과 일 년 내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건 다른 문제였다. 밖에 나돌아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는 제 성정은 차치하더라도, 그리페는 정말 일 년 내도록 균열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까.

“알아요. 비 오는 날이 싫어서 했던 말인 거. 그래도 한 번쯤은 좋을 것 같아서.”

쉽사리 답을 꺼내놓지 못하는 와중에 그리페가 덧붙인 말이었다. 싫은 건 아니었다. 그리페와 함께하면 어딜 가더라도 꽤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지금의 편안한 분위기가 더없이 즐겁듯이. 처음부터 일 년짜리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테니 더욱. 이런저런 고민으로 눈을 굴리면, 그리페가 손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유난히 푸르른 눈은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곱게 휘어졌다.

“무조건 가자는 얘기는 아니에요. 당신이 어디 나가기 싫어하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 말도 틀린 건 아닌데, 일 년 동안 쉴 수 있어?”

“나 정도 되는 센티넬은 늘 부족해서…… 일 년쯤 쉰답시고 은퇴하게 되진 않을걸, 이리트. 당신이 그렇듯이.”

“그게 아니라, 기간이야 어떻든 네가 내내 균열을 외면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지.”

이리트가 대답을 망설인 이유를 한 박자 늦게 알아챈 그리페가 낮게 침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휴일도 가리지 않고 오는 긴급호출에 급히 뛰쳐나갈 때면 매번 이리트가 따라붙지 않았던가. 영원토록 잊지 못할 순간, 드물게 술에 취했던 이리트의 말을 기억했다. 그 자신에게 이변이 생긴다면 저를 포기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이리트를. 분명 지금의 이리트에게는 그 순간의 기억이 없을 터였으나 그의 말이 지닌 맥락은 그때와 비슷했다. 제 얼굴을 문지른 그리페가 다시 이리트의 손을 붙잡았다. 잡힌 손이 아프지는 않을까, 힘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로 매달리듯.

하지만 무슨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팔마의 영향이 줄어들며 균열 수도 줄었으니 괜찮다는 말?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이리트는 내내 제 일이 줄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했으나,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했던 건 저였다. 기실, 그때도 지금도 제 근간은 바뀌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무리 낯선 여행지라고 한들, 가까운 곳에서 균열이 열렸을 때 여느 이들처럼 도망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그리페는 저 자신을 속이기를 관뒀다. 그런 상황이라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나서게 될 테고, 그건 아마 이리트가 가장 바라지 않을 일이었다.

“미안해요.”

“왜 사과해.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

“하지만……”

“여행 중에 균열이 앞길을 막는 것도, 그걸 네가 해결하겠다고 싸우는 것도 괜찮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리트는 온전한 진심을 말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결국 마지막에는 제게 돌아올 테니 상관없었다. 그리페에게 괜한 고민거리를 쥐여줄 생각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다면 그냥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걸. 그러나 동시에, 기껏 떠난 여행지에서 생각한 바도 없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겠다고도 생각했다. 이리트는 툭, 밀어내면 멀어질 듯 가벼운 힘으로 닿은 그리페의 손을 힘주어 당겼다.

“그만 걱정해. 네 등 뒤에서 기다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당신이 위험에 처한 적 있으니까, 나는,”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그리페.”

이리트는 잡은 손을 제 목에 대어주었다. 창백하고 얇은 피부 너머, 일정하게 맥동하는 삶의 증거가 지나치게 선연했다. 이리트의 얼굴 위로 그림자와 볕이 번갈아 비쳤다. 더없이 밝은 빛이 스칠 때마다 저를 향해 고정된 자색 눈이 보석처럼 보였다. 이렇게 살아있잖아. 이리트가 입을 열 때면, 목에 닿은 손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문득 손을 움직인 그리페가 무의식적으로 이리트의 목을 감싸 쥐었다. 매끄러운 비늘을 문지르고, 긴장한 듯 울렁이는 울대를 더듬듯 손의 끝마디로 스쳤다. 살갗 아래 느껴지는 맥박, 매 순간의 움직임은 하나같이 미약하기 그지없어 두려웠다. 불에 덴 듯 손을 뗀 그리페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만약, 만에 하나라도…… 너무 늦으면 어떡해요, 이리트.”

“가망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 나를 두고.”

이리트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도 묻고 싶었다. 당신은 하나도 두렵지 않으냐고, 나의 첫 번째가 당신이 아님이 밉지도 않은 거냐고. 도대체 어떻게 그때와 지금의 대답이 하나도 다르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이리트가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제 어깨에 실린 짐의 무게가 줄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느긋하게 꺼낸 여행 이야기가 이렇게 되돌아올 줄 몰랐다. 그러나 언제 묻더라도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으리라. 이리트의 말을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속이 상했던 그 날처럼.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먼저 구하는 내가 밉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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