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10)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느지막이 찾아온 장마는 꼭 그만큼 많은 비를 쏟아냈다. 예년보다 길어지는 적림, 종일 꾸물거리다가도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호우에 준비성이 좋은 이들조차 때때로 옷을 적셨다. 변덕스러운 날씨야 이미 다소간의 경험으로 잘 아는 바였으나, 하필 균열이 열리는 순간과 겹칠 건 뭐란 말인가. 요즘 같은 시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약간의 짜증까지 누를 수는 없었다. 급하게 세운 임시 천막 아래에서, 그리페는 회백색 구름을 배경으로 삼아 떠오른 천공을 응시했다.
작전 차량 안에 있을 이리트는 적어도 비를 맞을 일은 없을 터였다. 이리트야 원체 아침을 힘들어했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정도가 더했다. 근래 이리트의 말버릇은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이유나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긴 장마를 피하고 싶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리트가 하고자 하는 일마저 끝마친 뒤, 다음 해는 안식년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상을 벗어나 긴 여행을 떠나는 것도 한 번쯤은 해 볼 만한 경험일 테니. 날씨가 좋은 곳은 어디일지, 시기에 맞춰 여러 곳을 다니는 건 어떨지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회를 봐서 이리트의 의견을 묻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리페는 창을 쥔 채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헬멧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가까웠다. 빗속의 작전은 여러모로 기존에 비해 어려움이 있다지만, 적어도 그 불편함이 그리페에게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이곳저곳 물 고인 도로 위를 내디디는 곧은 걸음은 괴수의 착지 예정지 앞에서 멈추었다. 오늘은 그의 뒤를 발맞춰 따르는 이들이 없었다. 기실, 그들이 있든 없든 방식만이 달라질 뿐, 홀로 싸우는 것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이리트를 만난 것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쏟아지는 빗물은 발수 처리가 된 옷에 조금도 스미지 못하고, 그리페는 거친 빗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창을 들어 이제 막 나타난 적을 겨누었다. 예기를 흘리는 창은 분명 현대식 전투복과 보호장비를 갖춘 이에게 어울리지 않아야 할 테지만, 비 내리는 시가지에 홀로 선 그리페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전무했다. 괴수는 지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눈앞의 유일한 적을 경계했다.
가라앉은 벽안이 괴수를 탐색하듯 훑었다. 균열로부터 나타난 괴수는 진흙을 뭉친 것 같은 생김새였다. 멎을 줄 모르고 내리는 비가 그 흙더미를 씻어내릴 법도 하건만, 그것은 엄연히 괴수의 신체 일부임을 증명하듯 세찬 빗줄기에도 떠내려가는 법 없이 굳건했다. 상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페의 전투는 언제나 직관적이었으며, 그만큼 강력했다. 두껍고 질긴 가죽을 가르고, 그 안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것. 그러니 저런 부정형 괴수를 상대하는 데에는 더 적합한 인물이 있기 마련이었다. 안전을 생각하자면 지원을 불러야 했다. 지금이라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귓가에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원을 부를까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드럽고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한 그리페는 흔들림 없이 선 채로 괴수를 마주했다. 작달비는 멎을 줄 모르고, 옷 틈새로 차가운 빗물이 스미기 시작했다. 물론, 제가 조금 젖는 것 정도로 운신에 문제가 생길 만큼 체온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하나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는 이리트는 그것마저도 불만스러워할 게 분명했으니, 내의가 완전히 젖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지. 질척이는 흙더미 괴수는 생긴 그대로, 평소처럼 표피를 찢고 가르는 것만으로는 처치할 수 없었다. 흙뭉치 안 깊숙이 숨은 핵을 부숴 버려야만 했다.
깊숙이 숨을 들이켠 그리페가 창을 고쳐 쥐는 순간, 가만히 선 채 경계하던 괴수도 동시에 움직였다. 그 덩치와 생김새에 걸맞지 않도록 괴수는 기민하게 신체 일부를 움직여 그리페가 서 있던 위치를 내려쳤다. 훌쩍 뛰어오른 그리페는 창을 휘둘러 내뻗은 흙더미를 끊어내고, 본체와 분리된 덩어리는 나뒹굴며 힘을 잃고 젖은 땅 위에 퍼졌다. 그저 흙처럼 보일 뿐임을 증명하듯, 괴수의 신체였던 것은 여전히 뭉친 채였다. 창날에 들러붙은 살점은 유난히 끈덕져 잘 떨어지지 않았으나, 지금 필요한 건 날카로움이 아니었으므로 그리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창을 휘둘렀다.
피 흘리지 않는 괴수는 고통도 알지 못했다. 고통에 움츠릴 줄 모르는 생명체는 제 일부가 몇 번이나 잘려 나가든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떨어진 덩어리와 괴수의 본체가 맞닿으면 처음부터 잘린 적 없는 듯 자연스레 들러붙어 융화되었다. 그렇다고 한들 괴수의 살점이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유인하며 전투를 지속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팔이라고 불러야 적합할, 공격을 위해 내뻗는 덩어리를 몇 번이나 잘라냈다. 거의 움직임이 없는 본체도 틈이 날 때마다 깊숙이 찔러 갈라낸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답을 알아채는 데에는 그 이상의 기회가 필요하지 않았다. 괴수는 몸 안에서 제 핵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공격을 위해 내뻗는 팔은 허울이었다. 괴수는 기민하게 움직였으나, 그리페보다는 느렸다. 시야를 흐리게 할 만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리페는 희게 웃었다. 핵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결국 괴수의 신체 내부가 전부였다. 죽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제 핵을 스스로 바깥으로 끄집어내지는 않을 테니. 몇 번을 잘라내도 다시 가져다 대기만 하면 신체가 도로 수복되는 탓에 핵을 찌르지 않는 이상 공격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였으나, 그것을 얼마든지 역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는 조금 더 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회백색 하늘, 질리지도 않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서슬 퍼런 창날은 빛을 반사해 이따금 번득였다. 이리저리 튀는 살점, 점액 덩어리, 끈적이는 체액들. 발아래 고인 웅덩이가 쉴 새 없이 물결을 일으키고, 빗줄기와는 대비되도록 솟아올랐다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반복적인 전투는 지난했다. 괴수의 부피가 줄었다가 부풀기를 반복했으나 신체가 수복되는 과정 중에는 틈이 생겼다. 찰나의 순간, 그리페는 이제 막 들러붙기 시작한 부분보다 더 깊은 곳을 단번에 할퀴어냈다.
짐승을 한구석으로 모는 듯이. 끝내 남은 본체보다 잘려 나가는 부분이 더 많아지는 때가 오면, 그리페의 창이 진흙 덩어리 복판을 관통했다. 괴수의 몸 뒤로 빠져나오는 창끝에 새빨간 체액이 묻어났으나, 쏟아지는 빗물에 쉽사리 씻겨나갔다. 반고체에 가까운 몸뚱이가 느리게 무너지고, 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주위로 퍼졌다. 어지간해서는 그칠 것 같지 않은 비가 옷을 적시면, 거친 움직임으로 열 오른 몸이 빠르게 식었다. 가만히 연원 모를 체액을 흘려대는 괴수를 내려다보던 그리페가 뒤돌아섰다.
곧바로 이리트가 있는 쪽으로 향한 그리페는 차의 뒷문을 열었다. 평소와 다른 기기를 손에 든 이리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겼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심드렁한 대답에 보란 듯 입꼬리를 내리면, 내뻗은 손이 저를 단번에 붙잡아 당겼다. 옷이며 장비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닥을 적시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리트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그의 옷이 젖기라도 할까, 어정쩡하게 멈춘 저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옷이 젖었어요, 이리트.”
“겉만 젖은 건데 뭐. 이 정도는 금방 말라. 네가 문제지.”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보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있었어. 여기서 할 게 뭐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이리트는 낯선 기기에 뜬 화면을 보여주었다. 빛나는 화면 위에 문자 기록이 떠 있었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 자연스레 대답하며 기기를 받아 든 그리페가 천천히 내용을 읽어내렸다. 얼핏 보기에는 직장 동료 혹은 친구 사이에서 나눈 평범한 대화처럼 보였다. 가벼운 말투나, 상대 쪽의 우스갯소리 따위가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레만의 뒷조사를 의뢰하는 것이었다. 이리트는 이곳이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으므로, 그리페는 치미는 의문을 삼켰다.
“아무튼, 다 끝났으니…… 얼른 돌아가요.”
“그런데 이번엔 왜 단독 작전이야.”
“당신에게 가이딩 받은 뒤로는 종종 단독으로 행동했어요.”
“그건 아는데, 팔마 건으로 바쁠 때나 그랬잖아.”
“팀원 없이 단독으로 활동하는 건 어떨지 제안해 보려고 하는 일이겠죠. 실제로 그게 조금 더 효율이 날지도 모르고요.”
그리페와 그 휘하의 전투 방식을 몇 번쯤 본 적이 있었다. 괴수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기본은 늘 비슷했다. 공격을 분산시키고 괴수의 발을 붙잡는 수비조와 그리페를 중심으로 하는 공격조. 기실 그리페는 공방 어느 쪽이든 능수능란했으나 전투 시 맡는 역할로만 납작하게 분류하자면 그랬다. 팀의 첫 번째 공격수, 압도적으로 날카로운 무기. 때문에 알파 팀의 작전은 철저하게 그리페를 위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기 전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으며, 지금에 와서는 외려 그리페가 그들에게 발을 맞춰야 할 때가 드물지 않게 되었다. 그러느니 그리페의 능력을 완전히 활용하자면, 그 혼자 쓰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긴 했겠지. 그러나 그건 센티넬을 도구처럼 부리려는 상부의 입장이었다. 그들이 때때로 그리페의 능력에 도움을 받는다고 한들, 다수가 지닐 수 있는 이점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리페의 팀에는 기본적인 것 외에도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과거, 불안정하던 그리페가 폭주하면, 언제가 되었건 그를 빠르게 제압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제가 파트너가 된 이후로는 흐려진 목적이었으나 이리트는 기억했다. 얼마 전, 그가 한동안 제 가이딩을 거부하다 결국 폭주했을 때 그리페의 몸에 남겨진 상흔을. 그건 분명 사람에 의한 부상이었다. 이제는 상황이 전과 같지 않으니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는 않을 터였으나, 득실을 비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이리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사이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 그리페가 손을 붙잡아 왔다.
“이리트.”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팀 자체는 유지하고 싶어요. 이전보다 단독으로 더 많이 움직이게 되더라도.”
“그래…….”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요.”
“네가 내 첫 번째여서 그래. 아무튼…… 돌아가자. 혼자니 상황 정리할 것 없이 간단해서 좋긴 하네.”
이리트는 이따금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한 말을 했다. 지금처럼.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속내를 내보이기 싫어 괜히 말을 돌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뒷문을 열고 내린 그리페는 우산을 펴 들었다. 한발 늦게 내리는 이리트에게 손을 내밀면, 이리트는 잠시간 멈칫했다가 제 손을 붙잡고 맨바닥 위로 내려섰다. 이런저런 말을 꺼내는 대신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한 우산에 나란히 어깨를 붙인 채 걸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눈치인 그리페를 욕실에 밀어 넣고, 이리트는 실내를 빠르게 훑었다. 침입의 흔적을 찾듯. 서재를 한바탕 뒤엎은 그날을 기점으로, 집 내외부에 추가 방범 장치를 설치했다. 책을 정리할 때 남겼던 표식도 지웠으니 집안을 턴다 한들 아무것도 찾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누가 보면 편집증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리트는 제가 나설 때와 바뀐 점이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 옷을 갈아입었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있자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리페가 소파의 빈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부러 그리페의 허벅지 위로 올리고 누우면, 그리페의 손이 다리 위에 얹혔다. 말없이 누워 있자면, 그리페가 제 다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막 씻고 나온 그리페의 손은 평소보다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연락하던 건, 예전부터 알던 정보원이야.”
“레만의 동향을 쫓으려고?”
“응. 혼자 움직이는 건 효율도 안 나고…… 혼자 하려면 못 할 것도 없긴 한데, 널 가이딩하는 게 먼저니까.”
“레만이 알게 되면 어떡하려고.”
“그 자식 요즘 하는 걸 보면 내게 별로 관심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협회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원도 아니고, 그쪽도 레만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 상관없어.”
“그런 사람을 대체 어쩌다 알게 된 거예요? 사람 사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런 게 있어. 그리고 이런 건 친분을 쌓는 문제랑은 별개지.”
“그렇기는 하지만.”
이리트는 괜히 제 다리로 그리페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가, 몸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이리트를 향해 있던 그리페의 바다처럼 푸른 눈은 오랜 침묵에도 유순한 빛을 띠었다. 그리페에게 반드시 물어야만 할 사안이 있었으나, 어쩐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협회는 그 목적이 균열을 닫고 사람을 구하는 데 있는 거대한 단체였으며, 그에 따르는 이권이 분명 존재했다. 막대한 자금, 알량한 권력과 명예 같은 것들.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려 알력싸움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레만의 세력은 승리를 쟁취한 지 오래였다.
그들의 득세가 오래된 일이라 하나, 언제나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존재했다. 지금에 와서는 기이할 정도로 존재감이 옅다고 하더라도. 욕망에 취한 이들은 이미 레만의 세력에 가담했고, 남은 이들의 성향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하나의 진영을 이루고 있는 이들이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센티넬은 한낱 도구가 아니며, 반드시 사람으로 대할 것. 한때 협회 소속의 전투계 센티넬이었으나 오른쪽 팔 일부와 다리 양쪽을 잃고 사라졌다가, 고난 속에 재활을 끝마치고 다시금 돌아온 로진 올슨을 필두로 하며.
거창한 강령에 비해 그들의 세력은 보잘것없이 영세했다. 이리트는 버릇처럼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뭇 센티넬에게 매력적인 표어일 텐데도 그들의 세력이 그토록 작다는 건, 분명 어딘가 문제가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 문제가 그들의 내부에 존재하는지, 외부에 존재하는지는 따로 알아봐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리트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다를지언정, 레만을 끌어내리겠다는 목적만큼은 같았으므로. 게다가 그들이 지닌 약점을 명확히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임시로나마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협회장 자리가 비게 된다면, 그리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난해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이리트는 날씨를 묻듯 여상히 건네 왔다. 아니, 어쩌면 으레 나누는 일상의 대화와 지금의 물음이 적어도 이리트에게는 큰 차이가 없는 걸지도 모르지. 레만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큰 파란을 일으킬 터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상부의 일이었다. 그 여파는 저를 비롯하여 협회 소속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실무자들에게는 와 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기껏해야 센티넬의 취급이나 조금 바뀔까.
그리페는 영문 모를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유예한 채, 느슨하게 앉은 이를 살폈다. 아침이면 일어나기를 힘들어하고, 이렇다 할 일이 없을 때면 종일 게으름을 부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즐기는 이리트는 이따금 불가해했다. 제 나이답지 않게 굴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으며, 사고방식은 근간부터 저와 달랐다. 사람을 거의 믿지 않고,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치고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철저한 무관심을 기저에 지닌 이는, 그럼에도 쉬이 사람의 속내를 꿰뚫고는 했다.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거야.”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그리페는 고개를 내저었다.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제게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자리도 드물 터였다. 차라리 레만을 밀어낸 이리트가 그를 대신하는 위치에 올라선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리트의 성정이라면 그런 건 번거롭다고만 생각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페는 한 박자 늦게 이리트의 입술이 그린 호선을 발견했다. 이리트는 처음부터 자신의 거절을 원했을지도 모른다고, 머릿속에 전등이라도 켜진 것 같았다.
“이리트, 왜 웃어요.”
“알면서 묻기는.”
“뭘 하려고 그래.”
“말했잖아, 나 혼자 움직이는 건 효율이 안 난다고. 로진 올슨, 알아?”
“아, 그 사람.”
모를 수가 없었다. 이능이 상처를 낫게 할지언정, 한계는 명확했다. 그러니까, 완전히 곤죽이 된 신체를 복원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괴수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뭉개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의지는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결국 그건 자신의 사지를 다루는 것과는 다르기 마련이었다. 팔다리를 잃은 센티넬이 끝내 의지를 착용하고 전투를 지속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은퇴하는 일은 일 년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올슨은 사지 중 세 곳에 의지를 착용하고도 기어이 전선에 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강인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러한 행보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올슨은 몇 번의 연이은 부상 끝에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고, 강제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아집 따위로 격하할 수는 없었다. 외려 그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부상으로 은퇴한 전투계 센티넬 중에서는 드물게 협회 간부의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가 한 번 무너진 뒤로 새로이 지닌 신념은 당시 현역이었던 센티넬이라면 대부분이 알 터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일이긴 해도…… 지지를 꽤 받았을 텐데, 딱히 관련된 얘기를 들은 게 없네요.”
“그게 이상하긴 해. 그것도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레만을 끌어내리려는 건 저쪽이나 나나 똑같으니 동업해 볼 만하지.”
“그쪽에서 거절할 가능성은요?”
“차기 협회장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라면, 그럴 일 없다고 봐도 돼. 네가 그걸 원했더라도 지금 당장 그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어쩌겠나 싶지만……”
“내가 그 자리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지 않을 줄 알면서도 물었다. 사람의 마음은 겉으로는 알기 어려워서, 제가 모르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저야 애초에 권력 뒤에 따르는 온갖 의무도 권리도 귀찮아 싫을 뿐이었으나, 모를 수도 없었다. 올슨이 그러하듯, 올곧은 목적을 이루는 데에도 권력은 얼마든지 유용한 도구임을. 그러니 그리페 역시 그러한 유용함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을 때도 있으리라.
기실, 그리페라면 중책을 맡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책임감부터 능력까지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었다. 그게 최선이며, 그리페의 의지까지 더불어 존재한다면 저는 어떻게든 레만을 끌어내리고 빈자리에 그리페를 앉히려 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행하지는 못했으리라. 팔마 토벌에 나서던 그리페를 볼 때처럼. 하지만 그리페는 그런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이리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레만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으리라.
“너는 권력조차도 한낱 도구로 삼아, 사람을 불행하지 않게 하는 데 쓰겠지만…… 나는 네가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왜, 이리트?”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었다. 그리페가 아무리 올곧고 선하다고 한들, 그 옆에 존재하는 이들조차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옆에서 어떤 시커먼 의지가 뻗쳐 오더라도 그리페는 결국 제대로 된 답을 내릴 터였으나, 그리페는 끊임없이 고뇌하게 되리라.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보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될 테지. 어쩌면 환멸을 느낄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그리페는 그 자신을 살라 길을 낼 테고, 이리트로서는 그다지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논리적인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지만, 사실 답은 하나뿐이야. 네가 네 손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로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해.”
“나는…… 오히려 그런 건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귀찮아하긴 하더라도.”
사실상 저는 레만에게 다소간의 유감이 있을 뿐이지 협회의 존속이나 나아가야 할 향방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센티넬의 처우가 나아지면 그리페에게도 좋은 일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할 뿐, 그게 저를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할 동기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페가 자주 목을 매는 구명에도 매한가지였다. 자랑스레 내세울 만한 대의 따위 제게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다. 저를 움직이는 동인은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그리페 하나였다. 타고난 기질로 레만에게 반목했을 뿐, 내내 부평초처럼 살아오던 저를 붙잡아 끌어당긴 이가 그리페였으므로.
“그런 자리는 누군가 쥐여준대도 거절할 거야. 아무튼, 그렇게 알아 둬. 상황이 변하면 다시 알려줄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페는 처음과 같이 유순한 얼굴을 한 그대로였다. 어느 때에는 각 잡힌 군견 같다가도 이럴 때면 리트리버 같았다. 순한 데다, 제 말이라면 일단 끄덕이고 보는. 아마 이대로 팔을 뻗어 덜 마른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흩트리며 쓰다듬어도 그리페는 제 손을 밀어내지 않을 테다. 잠시간 고민하던 이리트는 슬금슬금 그리페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괜히 그리페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쓰다듬고 싶어서.
“내가 협회장직이든, 그 비슷한 것이든 원한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물어봤어요.”
“그럼 널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안 먹히면…… 몰라, 뭐 어떻게 했겠지.”
대충 대답하고는 그리페를 꼭 끌어안았다. 당연한 듯 마주 안아오는 팔, 잠시간 얌전하던 이리트는 슬그머니 손을 올려 그리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색 옅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새에 걸렸다가 빠져나가고, 그리페는 웃는 낯으로 제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러려고 가까이 온 거지, 이리트. 대답 없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보는 이리트의 입술이 미묘한 호선을 그렸다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제 머리칼을 굳이 정리하지 않고 내버려둔 그리페는 미온한 체온을 조금 더 단단히 고쳐 안았다. 이리트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답을 내는 대신 대강 얼버무렸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정말로 권좌 따위를 원한다고, 욕심이 난다고 끝내 의견을 피력했다면. 설득마저도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리트는 분명 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안배된 자리를 제게 내어주었으리라. 어떤 수를 쓰고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어이. 비록 이리트, 그 자신은 못내 불만족스러워했을지언정. 이리트는 그런 식으로 사랑을 하는 이였다. 이미 한 번의 상실을 겪고도. 견고하며 무작스러운 사랑을 끌어안은 채, 그리페는 차라리 숨통이 트이는 감각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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