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30)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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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내내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던 이가 말허리를 끊었다. 이리트는 태연한 낯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듯 당혹스러워하는 웨이드를 일별했다. 제 옆에 앉은 그리페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은 탓이었다. 서늘하게 식은 벽안은 드물게만 볼 수 있어서, 분명 저와 관련된 일임을 알면서도 이리트는 상황을 관망했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대치,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하던 웨이드가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의 제안은 영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정보부에 소속된 이들 중 대다수가 레만의 수족이었으며, 심지어 몇몇은 현장에서 붙잡혀 구금되어 있었다. 부서로 따지면 정보부만큼 큰 피해를 본 곳이 없었다. 새로운 인원을 추가로 뽑아야 하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일 테지. 웨이드는 자꾸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저를 바라보고, 그리페는 여차하면 제 앞을 가로막을 태세였다. 그리페의 허벅지를 토닥이면, 그가 저를 바라보았다. 뭐가 됐든 말리고 싶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서.

“장기 휴가를 보내겠다고 한 말을 듣긴 했어?”

“들었지, 헤르데. 하지만 나중에라도 와줄 수는 없냐는 거야.”

“내가 정보부 일에 손 뗀 지가 몇 년인데.”

“그쯤 손 뗐다고 제 몫도 못 할 인재였으면 레만이 네게 그런 짓은 안 했겠지.”

“뭘 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웨이드. 그 자식이 사라진 이상 정보부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돌아갈 순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알지…….”

정적이 대화의 빈틈을 메웠다. 웨이드의 느린 대답은 거의 한숨처럼 작았고, 이리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상대를 주시했다. 협회 휘하 보육원은 더는 정보부 소속 인원을 육성하기 위한 시설로 작동하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다는 것부터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고, 상황을 지켜보던 그리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제게 묻고 싶은 것 같았다.

“적어도 일 년은 쉴 거야.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그쯤 지나면 어지간한 교통 정리는 끝나 있을 텐데?”

“그래, 신입을 뽑아도 그 정도면 제 몫은 할 테지. 하지만…… 일 년 차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네 능력을 대체하긴 어려워.”

“이 정도면 처음부터 날 설득하려고 꺼낸 말 같은데, 웨이드.”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너만 한 사람이 없어.”

“조건이 있어.”

“이리트.”

“……잠시 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저기 안쪽 방이 있어요. 다녀와요.”

그리페의 손을 붙잡은 채 일어서면, 그는 쉬이 제 뒤를 따라나섰다. 올슨이 알려준 공간은 일종의 자료 보관실인 듯, 벽면이 온통 서류철이 꽂힌 선반으로 가득했다. 자연스레 문을 닫으며 들어서는 그리페를 보던 이리트가 선반 하나에 등을 기대고 섰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라도 한 걸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리페가 성큼 다가왔다. 서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걱정을 잔뜩 머금은 채였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말릴 수는 없겠지만……. 당신이 걱정돼요. 레만이 사라졌으니 정보부가 이전처럼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잖아, 이리트.”

“현장에는 안 나가. 예전에도 거의…… 나간 적 없어. 어렸으니까.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 게다가 파트너를 두고 나 혼자 훌쩍 이적할 수도 없고, 고문직 정도만 수락하려 했어. 올슨에겐 보통의 가이드로 남고 싶다고 했지만, 기회가 되어서 정보부에 발 걸쳐 두는 건 여러모로 나쁘지 않겠다 싶기도 했고.”

거의라니. 분명 나간 적은 있다는 뜻일 터였다. 제가 모르는 어린 시절에. 하나 레만이 구속된 지금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한들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으나,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드물었다. 속으로 삼킨 문장 대다수는 걱정이었으며, 일부는 알량한 투기였다. 지난 일을 기점으로 웨이드는 분명 이리트를 포기하겠다고 했음에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가 조금 더 어리거나, 적어도 지금과 같은 요직에 있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하지만 뭐가 됐든 이리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리트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괜히 자각하게 하는 꼴이 될 테니.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고 있으면, 느슨하게 기댔던 이리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창백하도록 하얀 손이 그리페의 손을 붙잡아 감싸 쥐고, 담담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따로 덧붙인 말이 없는데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울림. 손을 움직여 긴 손가락을 얽고, 이리트가 아파하지 않을 만큼만 힘주어 잡은 그리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지만 이리트, 정말 위험한 일은 피해야 해.”

“약속할게. 애초에 그다지 위험한 일도 없을 거야.”

붙잡은 손 위로 입 맞춘 그리페가 이번에는 먼저 문을 열었다. 이리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두 사람은 나란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올슨과 웨이드의 대화가 끊어지며 시선이 모였다. 어쩐지 부담스러운 시선이었으나, 하던 대화까지 끊고 제 할 말부터 쏟아낼 생각은 없었다. 하던 얘기 계속해요. 가벼이 말하면, 웨이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 왔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저이가 그렇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무슨……”

“농담이에요. 그저 잡담이었으니, 중요한 이야기부터 끝마치세요.”

“그래, 헤르데, 그 조건이라는 게 뭔데?”

“하나, 고문직 이상은 안 해. 어떤 식으로든 정보부 업무로 현장에 나갈 생각 없어. 둘, 이유를 불문하고 그리페의 가이딩이 우선이야.”

“처음부터 현장까지 나가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어. 두 번째 조건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한 번도 뜻을 쉬이 읽어낼 수 없었던 자색 눈이 웨이드를 똑바로 응시해 왔다. 진의를 가늠하려는 것이거나, 순순한 대답에 의문스러움을 느낀 것이거나.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를 테지만, 어느 쪽이든 괜찮았다. 처음부터 이리트를 설득하기 위해 내밀 조건이었으므로. 잠시간 저를 뚫어지라 살피던 이리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는.”

옆에 쌓여 있던 서류철 더미 속에서 웨이드가 새것같이 말끔하고 얇은 파일 하나를 꺼내 이리트에게 건넸다. 익숙한 형식의 문서는 이름이 이미 인쇄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누구에게 내밀지 정해둔 것처럼. 내용을 읽다 말고 웨이드에게 다시금 시선을 돌리면, 그는 태연한 낯으로 으쓱였다. 아마도 그가 미리 기재해 둔 게 분명한 계약서에는 정말로 제가 내건 조건이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말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빼야 할 조항도 더 추가할 조항도 없이 말끔한 계약서. 단출하다고 말해도 모자라지 않을 문서는 굳이 찬찬히 살펴 검토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이리트는 길게 망설이지 않고 하단에 서명했다. 파일을 돌려받은 웨이드 또한 서명하고, 사본을 만들어 오겠다며 잠시간 자리를 비웠다.

“평범한 가이드는 아니게 된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쪽이 성격에 더 맞기는 합니다.”

“휴식기가 끝나자마자 바빠지겠군요.”

“전보다는 그렇겠죠.”

잔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금세 돌아온 웨이드가 파일을 내밀었다. 내용물을 다시 한번 확인한 이리트가 서류철을 챙겼다. 이후로 오가는 이야기는 기실 영양가는 없는 편이었다. 애초에 논의가 필요한 일은 초반에 끝내 버렸으므로. 그다지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에 대충 듣는 척이나 하고 있음을 알아챈 그리페는 그즈음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은근슬쩍 입을 다물고 대화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하품을 누른 이리트가 슬슬 일어나려 할 즈음 웨이드가 그렇지, 하고 운을 떼었다.

”그때 겨우 목숨 부지했던 이들 말인데……”

“……”

“표정이 왜 그래, 헤르데.”

“아니, 아무것도.”

“대부분 상태가 호전되어 협력 병원으로 이송했다.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사망자가 더 늘진 않을 가능성이 커.”

“……잘됐네. 아무튼, 이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으니 일어나보겠습니다.”

“시간이 꽤 지나긴 했군요. 추가로 알려줄 만한 사항이 생기면 연락하겠습니다. 잘 들어가요, 두 사람 모두.”

“네, 그럼.”

문고리에 손을 얹었을 때, 등 뒤에서 올슨이 이리트를 불렀다.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서면, 그가 잠시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레만을 한번 만나 보겠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나요? 망설일 만한 내용이었던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 탓이었나. 의문이 스쳤으나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돌아서려다 만 이리트가 올슨의 호박색 눈을 바로 응시했다.

“가능하다면…… 그가 죽기 직전이었으면 합니다. 그 전날이나.”

“기억해둘게요.”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웨이드가 손을 흔들었다. 대강 묵례만 건네고 방을 나선 이리트는 자연스레 그리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협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드문드문 여럿이 모여 속닥거리는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두웠고, 드물게는 기뻐 보였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인적사항. 그들은 모두 센티넬이며, 레만을 필두로 하는 상부에 시달리던 이들이거나 올슨의 편에 선 이들일 터였다. 아직은 레만이 왜 구속되어 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반응이 갈리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리트,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응.”

일단 운을 뗐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 자체는 명확했다. 왜 꼭 레만이 죽기 직전이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울 뿐이었으므로. 이리트는 레만을 심문하거나,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말문을 열어놓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자, 천천히 걷던 이리트가 멈춰 서서 그리페를 바라보았다.

“뭔데, 말해 봐.”

“……시기를 콕 집은 이유가 있어요?”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여럿인 곳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단어를 죄 뺀 질문에도 빠르게 요지를 파악한 이리트가 아,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저를 바라보던 자색 눈이 느릿하게 주위를 휘 훑고,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선 말고, 나중에 말해줄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확실히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물었던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지하주차장에 세워 두었던 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부터 이리트는 말을 골랐다. 시동을 걸고, 엔진에 적당히 열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잠깐이면 충분했다.

“거창한 이유 같은 거 없어. 그냥 그 자식의 생애에 방점을 찍고 싶은 거지. 내 삶을 말할 때 레만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게 기분이 나빠서. 길어 봐야 하루면 죽을 목숨이니 별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하루를 초연하게 보내도록 두고 싶진 않아서.”

“……”

얼굴을 바로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창에 얼굴이 비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이리트는 고개를 바깥으로 돌린 채 말했다. 읊조리듯 말하는 목소리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득한 담담함을 앞에 두고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차창에 비치는 이리트의 표정조차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 찌푸려지지도 않은 눈은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이리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 왔다.

“……이상하게 들렸어?”

“아니, 이리트. 그런 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서.”

“아무렇지도 않아. 그 자식 일이 대단히 특별한 것도 아니고. 어릴 적이야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니 돌이킬 방법은 없지만, 기억은 되찾았잖아.”

“하지만 이리트, 그러면 왜……”

“그냥 마음을 좀 나쁘게 먹은 것뿐이야. 실망해도 돼.”

이리트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때때로 궁금했다. 타인을 구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았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도록 살아왔음은 부정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는 성인이 아니었다. 선하다고 자신하지도 못했다. 함에도 이리트가 이따금 내보이는 굳건한 신뢰는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연원을 알 수 없는 맹목은 무겁고 부담스러워야 마땅하건만, 이상하게도 이리트의 믿음은 의문스러우면서도 되레 의지가 되었다. 혹시라도 상대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매번 신경을 기울이는 건 이리트가 아니라 저였다. 이리트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저 스스로 밝히지 않을 사실이었다.

“안 해요. 당신이 겪은 일이 있는데, 이리트.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망설일 것조차 없는 대답을 꺼내면, 이리트는 아닌 척하면서도 안도한 것 같았다. 이리트가 오해하는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한편, 제가 그를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니었는지. 문이 스치면 속이 쓰라렸다. 무작정 이리트에게 나를 믿어 달라 말할 수는 없었다. 이리트의 사고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리트와 자신의 윤리관은 유년 시절부터 쌓아 올려진 방식이 달랐고, 이제 와 뜯어고친들 근본적인 차이는 해결되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기준으로 이리트를 평가한 적 없음은 자신할 수 있었다. 하나 그건 단지 제 입장일 뿐이었지.

곧바로 떠오르는 일. 저를 욕보인 이에게 복수하려던 이리트를 말린 적 있었다. 끝내 함께 비숍을 죽였다고 한들, 한 번 말렸다는 사실이 이리트에게 어떻게 느껴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을까. 단지 그때 한 번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이리트는 차이점을 느꼈을 터였다. 제가 알듯이. 자연스레 페달을 밟아 침침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도 그리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리페?”

“왜, 이리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도착한 줄도 모르고.”

이리트의 말을 듣고서야 이미 집 앞까지 도착했음을 깨달은 그리페가 탄식을 흘렸다. 정신을 다잡고 열린 차고 안으로 차를 밀어 넣으면, 시동을 끄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푼 이리트가 그리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물어오는 이리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제 불안을 꺼내놓는 일은 더없이 낯설었으나,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입조차 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스쳤다. 착각이라 해도 좋았다.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관계를 유지해나가며 생기는 불안은 필연적이었으며, 무작정 묻어두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알았다.

“내가…… 당신을 불안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의 기준과 잣대가 당신에게 부담이 되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페의 표정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걱정이 섞인 것 같기도 했으며 또한 망설임이 묻어나왔다.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 그리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일순간 깨달음이 스쳤다. 그러니까, 그리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을 숨기지도 못하는 이가 제게는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찰나 치민 충동을 누른 이리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부담된 적 없어. 네 시각이…… 조금 더 보편적이라는 걸 알 뿐이지.”

“하지만 이리트, 당신은 분명 불안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랬지. 네가 지금 초조한 것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냥……”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문 이리트가 눈을 굴렸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던 눈이 이내 아래를 향했다.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듯 내리깐 자색 눈. 평소에는 말하기 어렵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터였으나, 지금은 이리트가 무슨 말을 삼키려 하는 건지 궁금했다.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이리트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는 결심이라도 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잘 보이고 싶은 것뿐이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나 그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나머지 쉬이 잊게 되고는 하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연인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을 터였다.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고, 좋은 게 있다면 나누고 싶으며 언제나 같이 웃고 싶은 상대였다. 그래, 그런 이유로도 불안은 쉬이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건 분명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답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이리트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리트가 한참 만에 시선을 맞춰 왔다. 희미하나 분명 평소보다 상기된 뺨.

“키스하고 싶어요, 이리트.”

“……그런 건 허락 안 맡아도 돼.”

짐짓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답한 이리트가 곧바로 그리페의 옷깃을 붙잡아 당기고, 입술을 맞부딪쳐왔다. 한참이나 혀를 얽다 보면, 이리트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왜, 이리트. 자세가 좀……. 집에 가서 해. 한 번쯤 차에서 해보는 것도 좋지 않나, 따위의 생각이 스쳤으나 그리페는 얌전히 시동을 껐다. 이리트가 불편을 감수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정면으로 밀어 넣은 차에서 내린 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둘러 집 안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닫기 무섭게 다시금 입술을 부딪치고,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리트의 허리에 감긴 손이 자연스레 등을 더듬으며 올라가 목덜미를 스치면 이리트가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진 그리페가 이리트를 안은 그대로 조금씩 걸었다. 제가 슬슬 밀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이리트는 아예 눈을 감고 몸을 내맡긴 채였다.

“이리트, 내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 줄 알고.”

“……어디가 됐든 집 안일 텐데, 무슨 상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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