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페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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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속아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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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4 작성



〈 익숙함에 속아 〉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균열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시작되어, 끝내 관계를 분질러 놓고야 말았다. 이별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 생명이 맥동하는 봄의 초입에 우리의 인연은 끊어졌다. 크게 싸우지도 않고 헤어지게 된 건 늘 안정적이었던 탓일까. 차라리 싸웠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까. 인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침대에서 잠드는 날이 줄고,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이 줄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도 그리페가 떠오르지 않음을 깨닫고서야 이리트는 인정했다. 우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걸. 그 이유가 무엇이든, 서로를 향한 몸에 익은 배려가 외려 서로의 목을 죄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만하자, 내뱉은 제 목소리는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랭했다. 그는 놀란 기색도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니, 아마 그리페는 알았을 터였다. 그는 한 번 자신을 붙잡으려 들지도 않고 수긍했으므로.

함께 살았던 집 안에는 어딜 가든 그리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분명 그리페의 물건은 그와 함께 이곳에서 사라졌음에도. 무채색의 집안, 곳곳에 놓인 장식물이며 자잘한 가재도구는 몇 안 되게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리페가 남기고 간 시간들. 먼저 이별을 고한 건 저였음에도 어째서 그걸 견딜 수가 없었는지. 제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리된 집안은 그저 낯설어서, 이리트는 하루를 통째로 투자해 추억을 폐기했다. 폐기물 봉투를 힘겹게 내놓고 온 그는 마지막으로 그리페의 연락처를 지웠다. 자다 일어나서도 입력할 수 있는 번호였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잊힐 터였다. 그래, 언젠가는.

살풍경한 집 안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리트는 차라리 만족했다. 기실 오래된 추억은 가구며 장식물 따위를 버린다고 휘발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이상 더 치울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차라리 이사를 가 버린다면 모를까. 그러나 새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준비하는 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져 이리트는 적당한 선에서 자신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최소한의 가구만을 남기고 짐을 모조리 처분한 이리트는 일을 늘려서라도 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페와 오래 함께하며 호전되었던 불면증은 다시금 이리트에게서 양질의 수면을 빼앗았다. 때때로 주변 사람이 괜찮으냐고 물어오면, 대답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괜찮아. 캐물을 여지조차 주지 않는 이리트의 태도는 단호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왼손 약지에 남은 반지 자국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함께한 시간은 퍽 끈질겼다. 일상 그 어떤 부분에도 그리페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엇을 먹어도 그다지 맛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건 그리페가 제 입맛을 길들여 놓은 탓이었다.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밤이면 온기를 찾아 침대 위를 더듬는 것 역시, 그리페의 빈자리를 체감하게 될 뿐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피부는 더욱 창백해졌다.

잘 입던 옷가지마저 조금씩 헐렁해질 즈음, 문득 서랍 속에 처박아놨던 담배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것마저 귀찮아 소파에 늘어진 채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던 이리트는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켰다. 책상 서랍을 의욕 없는 손짓으로 연 이가 우뚝 멈추었다. 꾹꾹 눌러 쓴 편지, 바보처럼 웃는 사진들. 그 위에 놓인 작은 케이스는 분명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차마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 이리트는 서랍을 닫아 버렸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려웠다. 어쩌다 그리페의 얼굴이 떠오르면 이리트는 한참이나 열지도 못할 서랍을 노려봤다. 온통 이상했다. 함께 있으면 숨이 막히던 이를 제 손으로 떨쳐냈건만, 왜 여전히 호흡은 녹록지 않고 일상은 삐거덕대는지. 그러나 이리트는 버거운 삶을 버텨내면서도 그리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쪽에 더 가까웠던가.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매한가지였다. 모양이 변해 버린 손가락의 흔적은 이전보다 조금은 옅어졌건만, 기억 속에 남은 그리페의 연락처는 숫자 하나 흐려지질 않았다.

감정은 결국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지금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때때로 물속에 잠긴 듯한 감각을 견뎌내며 이리트는 어떻게든 일상을 영위하려 애썼다. 종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음식물을 씹어 삼키고, 수면제를 삼키고 억지로 눈을 붙였다. 깨진 그릇을 이어 붙인다 한들, 예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아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저를 부르는 것 같은 다급한 목소리, 아득하게 뭉개지는 시야,

휘청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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