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27)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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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미친 새끼…….”

“고상한 척은 관두기로 했나 봐.”

시답잖은 소리에 반응할 필요 없다는 듯, 이리트는 제 등허리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태연하게 대꾸하는 이리트는 안색 한 번 변하질 않았다. 분노를 못 이긴 듯 까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겨우 이런 말이나 하겠다고 그렇게……. 그리페, 그냥 다시 기절시켜 줘. 지금은 이능을 쓸 수 없다 한들, 악의로 가득 찬 이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더는 궁금하지 않다는 듯 미련 없이 이리트가 돌아선 순간, 레만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헤르데,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지? 욕망하는 대상이 다를 뿐, 우리의 본질은 다르지 않아!”

아주 잠깐 스친 침묵. 찰나, 그리페는 이리트가 저를 말리더라도 레만의 입을 막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마주한 이리트의 표정이 굳은 탓일까. 내내 차분하던 이리트가 흔들리는 순간을 목도한 그리페는 우선 레만의 목덜미를 후려갈겨 기절시켰다. 강한 타격을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지는 몸뚱이. 잠시간 눈치를 살피던 웨이드는 레만을 질질 끌어 한참 전에 열어둔 트렁크에 실었다. 그럼 하던 이야기 마저 해. 어색하게 문장을 끝마친 이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면, 그리페는 웨이드를 일별하고서 이리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이리트는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이질 않았다. 이리트의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운 건 늘 있는 일이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하지만 어째서? 도대체 레만이 던진 화두의 무엇이 이리트를 흔들어 놓았단 말인가. 그러나 길게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고보다 앞선 행동, 그리페는 우뚝 선 이리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나도 알아.”

“무슨 말이에요, 이리트.”

“레만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내가…… 내가 바란 건 너였어. 레만이 권력이며 명예를 원했듯이.”

“하지만,”

“네가, 내 목적이어서…… 동시에 유용한 수단이어서 널 이용했어. 알고 있었으면서 외면했어. 내 말이라면 조금 더 쉽게 따라주는 것도 알았는데.”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서, 짐작도 하지 못한 말.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리트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은 이용당한 게 아니었다. 이리트가 한참 경험이 적고, 묘한 부분에서 어리숙하다는 점을 새삼 체감한 그리페가 성큼 다가섰다. 시선을 피하는 이리트의 뺨을 감싼 그리페는 흔들리는 자색 눈을 응시했다.

“내가 정답을 알아요. 그건 내게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니까…….”

“……”

“사랑해, 이리트.”

동그랗게 뜬 눈이 깜박였다.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표정을 앞에 둔 채, 그리페는 이리트의 허리를 껴안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납득하지 못한 건지 굳어 있는 이리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리트가 다소 비인간적인 부분을 지녔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레만이 해온 일은 이리트가 고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당신과 레만은 달라.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도구가 될 수도, 충직한 사냥개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건, 그건…… 정말 이상해……”

“이리트, 당신도 나를 위해서 당신의 생각과 다른 판단을 내린 적 있잖아. 그러니 날 이용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그렇듯, 나도 당신에게 무엇이라도 더 해주고 싶어. 그뿐이에요.”

내가 어디까지 요구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외치고 싶었다.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가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올곧은 눈빛을 피할 수도 없이 마주하고서야 깨달은 건, 홀로 삼켰던 고민에 불안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쉬이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면서도, 좀처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리트, 당신은 내게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요구해도 좋아요.”

“만약 내가…… 언젠가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은 문제지, 이리트. 그래도 그런 말 말아요.”

“응. ……나도 사랑해.”

그리페의 입술이 그린 듯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손이 먼저 떨어지고, 그리페가 한 걸음 물러서면 그 잠깐 사이에 닿았던 몸에 한기가 스치는 것 같았다. 물러서는 그리페의 옷자락을 붙잡으면, 그가 손을 끌어당겨 마주 잡았다. 추위에 마디가 발긋하게 물든 손가락을 쓰다듬은 그리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면 현장 수습에 손을 보태고 싶어요.”

“그럼…… 같이 가.”

“위험해요.”

“네가 지켜 줘.”

어리광이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그냥 하는 말도 아닌 게 분명했다. 내부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상황이라 한들,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를 응시하던 이리트가 먼저 그리페를 잡아당겼다. 한 번도 이리트가 저를 당기는 데에 저항한 적 없던 그리페가 우뚝, 멈추었다. 입을 꾹 다물고 이리트를 바라보면, 이리트가 잡은 손을 토닥였다.

“네가 갈 거라면, 나도 현장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이리트.”

“알았어.”

“약속해요.”

“알았대도.”

몇 번씩 되물은 그리페는 이리트의 대답에 약간의 짜증이 섞일 즈음이 되어서야 걸음을 옮겼다.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건, 사방으로 튄 핏자국이었다. 이리트가 이런 것에 일일이 반응할 만큼 심약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리페는 부러 진득하게 고인 피 웅덩이를 피해 이리트를 이끌었다. 제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트의 자색 눈은 주위를 훑기 바빴다.

“이 주변에는 딱히 특이 사항 없어요.”

“응, 그런 것 같네.”

지상층에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음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잠시간 느려졌던 걸음을 재촉한 이리트는 유난히 깊은 계단을 내려갔다. 내부에 온 뒤로 내내 코끝을 스치던 피 냄새가 이곳에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짙었다. 열린 문으로 다가선 이리트는 한 박자 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배수로도, 수전도 없는 공간이었건만 바닥에 물이 얕게 고인 채였다. 아직 채 수습되지 못한 시신에는 구멍마다 피를 흘린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그러잖아도 탁한 물에 피가 섞여 주홍빛을 띠었다.

잔혹한 광경이었으나 이리트는 길게 시선을 주지 않고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레만 쪽에 서서 싸웠던 이들의 최후는 적어도 제가 알 바는 아니었으므로. 그사이 내부에서 싸우던 이들이 누군가를 붙들어 맨 채 반대로 빠져나가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다시 안쪽으로 향하기도 했다. 다가갈수록 다 잦아들지 못한 소란이 조금씩 가까워지자, 제 손을 붙잡은 그리페의 손에 조금씩 힘이 더 들어갔다. 워낙 조심스러운 탓에 당장 아픈 건 아니었으나 손가락으로 그리페의 손등을 토닥이면, 그리페가 곧바로 힘을 뺐다.

길을 막는 적이 없는 만큼, 심부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 여전히 가득 차 있는 유리관. 내내 이끄는 대로 걷던 이리트가 이번에는 한 걸음 앞섰다. 이렇다 할 반응도 없이 주위를 살피는 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부 한 바퀴를 다 돌다시피 했을 때, 이리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수가 안 맞아.”

“……이미 죽었을 거예요.”

“아니, B급 이하로는 수가 꽤 많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상위 등급에 비해서 많은 거잖아. 어지간해서는 목숨을 붙여 뒀을 거야. 어쩌다 죽였다 한들 시체까지도 이용했을걸.”

담담한 말에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살아있을 가능성이 커졌음에 기뻐해야 하는지, 시신마저도 유린당했을 이들에게 애도를 표해야 하는지. 잠깐의 혼란이 스치고, 그리페가 마른세수했다. 분명 나쁘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 의식 없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으나, 가장 먼저 사라진 제 팀원은 찾을 수 없었다. 수조에 든 이들은 하나같이 삭발당한 채 같은 옷을 입고 눈을 감고 있었다. 개개인의 특징이 소거된 이들은 얼핏 헷갈릴 법도 했으나, 그리페는 확신했다.

제가 진정하기를 잠시간 기다린 이리트가 성큼성큼 걸었다. 이미 정답을 아는 것처럼 망설임이라고는 없는 걸음은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내부로 향할 줄 알았던 이리트는 곧바로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이리트의 걸음이 멈춘 건 핏물 섞인 물이 고여 진득한 비린내가 머무는 곳이었다. 이미 이곳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곧바로 한쪽 구석으로 걸어간 이리트는 곧 레버를 찾아냈다.

“혹시 모르니 물러나 있어요, 이리트.”

불만이 있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린 이리트는 잠시간의 대치 끝에 결국 그리페의 손을 놓고, 몇 걸음 물러섰다. 남은 잔당이 튀어나올 가능성을 만에 하나라도 배제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그리페는 이리트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덮개를 열고, 레버를 잡아 올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공간 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울릴 뿐,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질 않았다. 설령 지금 건든 것이 입구 개폐용 레버가 아니라 한들, 장식이 아니라면 무엇 하나라도 움직여야 했다.

“이쪽은 발전기와 연결이 안 됐나 봐.”

“전력 전부 다 끊어 버리지 않았어요?”

“아니, 연결하려면 할 수 있어. 잠깐만. 웨이드, 전력망 좀 복구해 줄래. ……알았어.”

“부수기라도 해야 하는 줄 알았지. 얼마나 걸려요?”

“삼 분. 늦어도 오 분 정도.”

무언가 하기에는 짧고, 가만히 서 있기에는 긴 시간. 주위를 대강 살피고 돌아온 이리트가 제게 슬그머니 몸을 기대면, 그리페가 자연스레 이리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은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지고, 이리트의 작은 숨소리는 더없이 가까웠다. 말이 그리 많지 않은 이들 사이의 침묵은 더없이 익숙한 것 중 하나였다. 바쁘고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으로부터 유리된 듯한 착각은 무방비하게 기대 오는 이의 체온 탓일까. 지금 이 기분은 이상한 것 같다고, 말을 꺼내려던 차에 전력이 돌아왔다. 곧이어 울리는 낮은 소음,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불이 켜지지 않아 내부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그 안에 짙게 그림자가 드리웠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표정이 굳은 두 사람이 걸음을 어둑한 공간 안으로 발을 디뎠다. 문 근처 벽을 더듬으면, 손끝에 스위치가 걸렸다. 차가울 정도로 새하얀 빛이 내부를 밝히는 순간 마주하게 된 참상. 온갖 약품과 소독약 따위가 뒤섞인 싸늘한 향 넘어, 피고름이 썩는 냄새가 진득하게 깔렸다.

곳곳에 놓인 침대 위에 누운 이들은 누구 하나 의식이 있는 이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 이리트는 반사적으로 그리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는 그리페의 눈을 마주한 이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 박자 늦게 꺼낸 대답, 가만히 저를 살피던 그리페는 제 손을 한 번 힘주어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침상에 누운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숨이 끊어진 채였다. 개인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나, 누구 하나 각막이 혼탁한 이가 없었으며 몸이 전부 굳지도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었을 이들. 온갖 기기에 의존해 가까스로 생이 연장된 이들이 전력이 끊어지며 그 모든 것이 멈추었을 때 살아남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들을 수습하는 건 나중 문제였다. 아직 살아남은 이들마저 곧 숨이 끊어질 듯한 상태였으므로.

“지하로 의료팀 보내.”

[몇 명 정도 필,]

“모조리 다. 빨리!”

대답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은 이리트가 성큼성큼 움직였다. 기실, 그리페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곧 숨이 넘어갈 듯 깔딱거리는 이의 호흡기를 재기동하고, 제대로 끼워 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몇몇 기기를 다시 가동했을 즈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제가 반응하기도 전에 뛰어나간 그리페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이리저리 섞이는 발소리,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들을 본 이리트가 한 걸음 물러서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어차피 긴 대화는 필요하지 않은 상대였다. 내부 상황을 목도한 이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치는 것도 잠시, 빠르게 정신을 다잡은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이 여기 온 이상 제가 더 할 일은 없었다. 떨리는 손끝을 주먹을 쥐어 감추면, 그 기색을 알아챈 그리페가 내부 한구석에 자리한 빈 침상 쪽으로 저를 이끌었다. 그조차 평소보다 표정이 굳어 있으면서도. 단단한 손에 이끌려 제가 자리에 앉고, 그리페는 당연한 듯 커튼을 둘러 시야를 차단했다.

“왜 그래, 이리트.”

더없이 부드러운 물음에도 쉬이 답을 꺼낼 수가 없었다. 참상을 마주하고 놀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느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동요한 것도, 공황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곳의 전력을 끊은 게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모르고 한 일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건 팔마가 지녔던 힘이며, 레만은 그 힘의 근원이 사람임을 아는 이들 중 하나였다. 레만이 사람으로 갖가지 악랄한 실험을 자행하고 있으리라 예상했고, 그러한 시설은 필연적으로 다소간의 전력을 필요로 함을 알았다.

말아쥔 손이 축축하게 젖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고개를 숙인 저와 시선을 맞추려 올려다보는 이의 다정한 눈빛이 돌변할까 두려웠다. 그래, 지금 죽어 나간 저들보다 당장 그리페의 반응이 제게는 더 중요했다. 그래서 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저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겨우 생을 유지하게 된 데까지는 레만과 그 떨거지들의 책임이 심대하다 해도,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게 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전력을 끊자고 했어.”

“……이리트.”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는 안 해. 하지만 그리페, 나는…… 되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당신 탓 안 해요.”

부러 단호하게 말해도 이리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리트의 손을 당기면, 그는 저항하지 않고 제게 손을 내어주었다. 감싸 쥔 손이 평소보다도 더 차가웠다. 마르고 긴 손을 한참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자, 곧바로 시선이 얽혔다. 여유가 없을 때면, 이리트의 얼굴에는 감정이 잘 드러나는 편이었다. 적어도 제 앞에서는. 기대와 불안감이 뒤섞여, 얼굴을 구겼다기에도, 무표정하다기에도 애매모호한 표정.

“잘잘못에 정도를 따지는 게 큰 의미는 없겠지만, 이건 레만이 지고 가야 할 무게예요. 당신이 아니라. 게다가 당신이 전력을 끊자는 의견을 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면…… 이리트, 그건 대다수가 생각하기에 옳은 방향이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레만을 처리하겠노라 마음먹은 순간부터 제삼자의 희생이 발생하게 될 것을 알았다. 아니, 레만은 언제나 저와는 큰 관련 없는 타인을 희생해 왔으므로 그건 새삼스레 예상이라 부를 만한 것도 못 되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은 거북하기 마련이어서.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상대의 얼굴만을 바라보던 이리트가 힘을 풀고, 그리페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 두꺼운 옷 너머로도 전해지는 체온을 계속 붙잡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한없이 멈춰 있기에는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다.

여기서 저나 그리페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의식이 없는 이들을 옮기는 것 정도나 도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곳에도 그리페가 가장 찾고 싶어 했던 이는 없었다. 그가 사라졌던 시기를 고려하면 발견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올라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내려는 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리저리 뒤섞여 각각 내용을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좋은 일이 아니리라는 직감만은 명확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리트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혼란스러운 상황 탓에 상세히 살피지 못했다 한들, 그저 평범한 벽이라 생각했던 곳이 문처럼 열린 채였다. 열린 공간으로부터 한기가 쏟아졌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비치는 윤곽. 이런 곳에 자리한, 창고에 가까운 크기를 지닌 냉동고가 의미하는 바를 누가 모를까. 누구도 쉬이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는 때, 그리페가 빠르게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페를 말리려던 이리트도 덩달아 뒤따라 들어가면, 근처에서 머뭇거리던 이들이 애써 고개를 돌렸다.

“조심해요.”

“이런 데 숨어 있기야 하겠어.”

“그래도.”

이런 곳에 누군가 몸을 숨기려거든, 시신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는 선반의 칸 안에 들어가야만 할 터였다. 그래도 그리페가 왜 걱정을 놓지 못하는지 아는 이리트는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 비상 발전기가 연결되지 않았던 만큼, 이곳 역시 잠시간 정전이 되었으리라. 아무도 입구를 열지 않아 냉기가 빠져나가지 않았던 것일 테지. 상념을 흘려보낸 이리트는 닫힌 선반 앞에서 멈췄다. 선반 앞, 작게 표시된 숫자를 응시하던 이리트가 눈을 돌렸다.

“신원 확인. ……할 거야?”

망설임이 묻어나는 나직한 목소리, 그리페는 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안치된 이를 제 눈으로 확인한들, 이미 죽은 이들이 바뀔 리 없었다. 그를 알면서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었다. 어쩌면 죄책감일지도 모르지. 여러 생각을 곱씹으며 다가선 그리페가 손잡이를 붙잡아 당겼다. 묵직하게 딸려 나오는 칸, 반투명한 가방 안에 담긴 시신. 지퍼를 열면 곧바로 파르라니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가장 찾고 싶은, 그러나 동시에 차라리 이곳에도 없길 바라는 이는 아니었다. 눈을 감고, 짧게 묵념한 그리페가 다시금 선반을 닫았다.

차갑게 식은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선반이 쉬이 딸려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람은 번번이 빗나가고, 그리페는 매번 신원을 확인하고 짧게 묵념하고 다시 선반을 닫았다. 어쩌다 한 번씩 그리페가 알지 못하는 이가 나타났고, 그런 때에는 이리트가 조용히 이름을 불러 주었다. 개중에는 두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건 딱 한 명뿐이었다. 이곳에 잠든 이들의 성분을 생각하면, 그들 또한 센티넬일 터였다.

대부분을 확인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서도 그리페는 쉬이 선반을 열지 못했다. 근거 없이 스친 직감, 그보다 앞선 참담함을 도무지 눌러 삼킬 수가 없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이들이었다. 한 해에도 더없이 많은 목숨이 전장에서 스러진다지만, 이 상황은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개인의 욕심으로 희생된 이들.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 인재.

“레만을…… 진작 처리했다면 좋았을 텐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짓씹어 내뱉는 말을 듣고서도, 이리트는 아무런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레만을 죽이는 것 자체는 언제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어야만 레만이 지닌 무형적 자산까지 무너트릴 수 있을 뿐이었지. 굳이 그러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이리트는 그리페를 살폈다. 처음부터 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듯, 고개 숙인 그리페의 눈이 형형하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페가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본 건 분명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참이나 먼 곳을 노려보던 그리페가 눈을 내리감았다. 길고 무거운 한숨이 내려앉고, 마침내 마지막 선반을 당겨 열었다. 망설임을 다 떨쳐내지 못한 손이 지퍼를 내리면, 드러난 얼굴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협회 소속 센티넬 실종 사건의 서막을 알린 첫 번째 피해자이자, 자신의 팀원. 더없이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수습되어 눈을 감고 있음에도 얼굴이 상한 티가 났다. 기억 속 모습보다 더 야위고 피폐해진 낯. 그리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상처가 남은 뺨을 쓸었다. 단단하게 얼어 차갑고 딱딱한 피부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목이 메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나 여전히 그리페의 눈가는 건조했다. 울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제게 애초에 울 자격이나 주어졌던가. 이전보다 조금 더 길게 명복을 빈 그리페가 다시 선반을 닫고, 마지막으로 남은 칸 앞에 섰다. 내내 말이 없던 이리트가 갑작스레 저를 물리더니 먼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빠르게 지퍼를 열어 내부를 확인한 이리트가 말릴 새도 없이 칸을 도로 밀어 닫았다.

“안 보는 게 좋겠어.”

“무슨……”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랬어. 아무튼, 네가 찾던 사람 맞아.”

“왜 그래요, 이리트.”

“보지 마. 얼굴만 조금 성한 상태니까.”

앞서 마주했던 시신 중에도 유난히 훼손 정도가 심한 경우가 있었다. 이리트가 저를 말리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애써 덧붙이려던 말에 이리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보지 않았으면 해. 너를 위해서라도. 차분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혔다. 내내 저를 말리고 싶어 하면서도 참던 게 눈에 보이던 이였다. 그런 이가 끝내 저를 붙잡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그리페는 저 자신을 잘 알았다. 정신적인 부담감이 조금씩 정도를 넘어서고 있음을.

그리페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치는 허무할 정도로 짧게 끝났다. 일단 제가 붙잡으면 그리페는 반사적으로 힘을 빼니, 몸으로라도 막아보려던 이리트는 남몰래 안도했다. 기실, 이 안은 굳이 저나 그리페가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떻게 봐도 시신을 보관하고자 만들어 둔 공간이었으므로. 내부를 굳이 직접 확인한 것이 그리페에게 있어 좋은지 나쁜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페를 잡아 이끌고 바깥으로 나서면, 위급한 상황을 한 차례 넘긴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별달리 덧붙일 말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도 알고는 있을 터였다. 믿고 싶지 않을 뿐임을 누가 모를까. 호기심과 불안이 섞인 시선을 알아챈 그리페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협회 측 13인, 신원 미상 1인으로, 총사망자 14명 확인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정적, 기계가 작동하며 울리는 비프음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누군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며, 누군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페는 잠시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한 차례 혼란함이 지나가고 난 뒤, 정돈된 풍경. 의료팀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을 뿐이며, 협회와 연계된 병원까지 이송하는 것조차 부담임을. 당분간은 이곳을 사용해야 할 터였다.

 


 

“헤르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외부가 아닌 협회 내의 공간에서 저를 맞이하는 이의 표정이 얼핏 보기에도 밝았다. 내부로 완전히 발을 들이면, 앉아 있던 올슨이 일어나 제게 다가왔다. 늘 한 발 거리를 둔 듯 거리감을 유지하던 올슨이었으나, 오늘은 반응이 조금 달랐다. 레만을 생포했음을 전달받은 탓일 테지. 대충 고개를 까닥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올슨이 이쪽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당신과 하랄트의 활약은 빠짐없이 잘 전해 들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공치사는 됐습니다.”

“아하, 내가 하랄트와 함께 할 시간을 방해했군요.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의 얼개 정도는 전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피곤하고 귀찮은 일은 올슨에게 대충 떠넘긴 채, 일단 그리페를 끌어안고 잠부터 잘 생각이나 하고 있었건만. 짐짓 차분한 척 올슨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가 목을 축였다. 잠시간 뜸을 들이는 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면,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정리되어 나열된 문장은 간결했다. 그 모든 절차는 레만을 바닥 아래, 다시는 기어 올라오지 못할 더 깊은 곳에 처박으려는 의도였으며 동시에 올슨의 해묵은 원한의 발로였다. 거기에 대해 제가 입을 댈 사안은 없었다. 딱 한 가지, 나중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레만을 반드시 독대할 거라는 선언을 제외하고서는.

“현장에 의료 지원이 필요할 겁니다. 상황을 알리는 시기를 조금 앞당겨야 할 테고……. 레만과 함께했던 이들도 처리할 겁니까?”

“권력자의 뒤꽁무니에 매달려 단물이나 쪽쪽 빨아먹던 것들이에요. 새롭게 바뀔 협회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는 작자들 아니겠어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예상 못 한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봤을까.”

“레만을 처리하고 나면, 당분간은 협회 일에서 손 뗄 겁니다. 그리페도 마찬가지고.”

“당신 같은 사람이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참 좋을 텐데요.”

“여기까지 동행한 것으로 만족하시죠. 해당 사태가 정리되고 나면 장기 휴가를 신청할 겁니다. 돌아온 후에는…… 복잡한 일에 더는 엮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일개 센티넬과 가이드로 남고 싶어요.”

“계획은 늘 어긋나기 마련이 아닌가?”

그즈음 더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이리트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이어진 정적 끝에 먼저 고개를 내저은 건 올슨이었다. 농담이었다고 덧붙이는 이의 눈에 남은 아쉬움을 읽어내지 못하면 더 좋았을 테지. 하나 무슨 말을 했든 올슨이 원하는 방향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로 할 말은 필요한 만큼 했고, 얼싸안고 승리를 만끽할 만큼 별달리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까닥이고는 일어나 나서려는데, 올슨이 등 뒤에서 저를 불렀다.

“정말 많이 고생했어요. 두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고마워요. 더 표현할 말이 없어 아쉬울 만큼.”

“……마무리를 모조리 떠넘길 생각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헤르데, 나는 오히려 당신이 더 신기합니다. 분명 레만을 어떻게든 하고 싶을 텐데. 아닌가요?”

단박에 부정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니, 그런 욕망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맥없이 붙잡힌 레만을 조롱하고 싶었으며, 내리막길밖에 남지 않은 그의 삶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나 동시에 레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조차 아깝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협회의 동료를, 사람을 붙잡아 터무니없는 인체 실험 따위를 했음이 들통난 순간부터, 레만에게 예정된 건 오로지 파멸뿐이었다. 그가 지닌 권력도, 명예도, 자본이며 인맥도 그를 구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보다 더 오래 원한을 지녔던 이가 그를 완전히 무너트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있잖습니까. 내게는 한 번 독대하는 기회로 충분합니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잘 가요.”

“그럼.”

묵직한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눈이 마주친 그리페가 사르르 웃었다. 환한 웃음을 마주한 이리트의 낯에도 금세 온기가 퍼졌다. 일으켜 세워 주겠다는 듯 손을 뻗으면, 그리페는 거의 손을 잡는 시늉만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건 다 치료받았어? 응, 말끔해졌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아무튼, 우리한테 고맙대. 그 말 들으니까 좀……. 실감이 났어요? 그리페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래, 자신은 이제야 가장 큰 고비를 넘어섰음을 확신했다. 레만이 사라지고, 많은 이들이 교체되며 협회가 혼란한 시기를 겪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후련했다.

“응. 속이 다 시원하네. 그리고…… 일단 좀 푹 자고 싶어.”

“식사만 하고 얼른 돌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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