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9)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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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평화는 더없이 멀었다. 가장 큰 집단이 무너진 틈을 타 제 몫을 챙기려는 이들이 들끓었다. 협회 내에는 불온함이 감돌고, 협회의 근간이었던 신뢰에 새겨진 금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구출 작전을 허가해 주지 않았던 날의 기억은 팀원들에게서 왜곡되어 있었다. 사라진 이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리페는 유일한 예외가 되었다. 채워지지 못한 빈자리는 때때로 괴로움을 불러일으켰다. 아득한 절망감을 딛고 선 그리페는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사람이 어디까지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지, 이제는 알았다. 그렇다고 한들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선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타인을 짓밟는 저들은 구심점을 잃는 순간, 지금만큼의 폐해를 끼치지 못할 터였다. 악의란 언제나 진부하며, 한없이 나약하고 비겁한 성질을 지녔으므로.

그러나 동시에, 그리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균열은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협회 바깥에도 저열한 이들은 무리 지어 약자를 공격하기 일쑤였으므로. 이리트는 내내 바빴다. 늘 말끔하던 서재, 큼지막한 책상 위에는 온갖 메모며 종이 따위가 나뒹굴었다. 빼곡하게 새겨진 정보 위로 이리트가 휘갈겨 쓴 글씨가 선명했다. 이리트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었다면 얼마든지 알려줬을 테지만, 집중하고 있는 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제각각의 일로 바쁜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본부에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공기가 스쳤다.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이며 삼삼오오 모여 떠는 이들의 모습은 분명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건만. 어쩌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여느 때처럼 살가운 인사를 건네 왔다. 의아함을 삼킨 그리페는 마주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얼핏 들려오는 말 속에는 레만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협회 내의 가십이라면 잘 알 만한 이가 있었다. 곧바로 제 팀에 주어진 훈련장으로 향한 그리페는 러셀하르트를 불러내었다. 유난히 긴장한 기색으로 따라붙은 이가 뻣뻣하게 굳은 채 섰다. 제가 없는 사이 사고라도 친 걸까, 의문이 스쳤으나 제 귀에 따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일이라면 하슬러가 알아서 처리할 터였다. 애초에 큰 사고라도 났다면 곧바로 소식이 들어 왔겠지 싶어, 괜히 추궁하는 대신 그리페는 벽에 편히 기대섰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으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물어보다니요?”

“본부 분위기가 조금…….”

“아! 그게,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요. 아빌라 건 말이에요. 크게 안 번지도록 입막음한 게 정보부 소행이라고.”

새삼 사방에 퍼지기에는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아빌라는 협회 내에서만 레만의 후예로 점찍혀 있던 게 아니었다. 레만과 함께 활동하며 얼굴이 꽤 팔렸으니, 그런 이가 그토록 질 나쁜 범죄에 엮였다면 말이 나와도 진작 나왔어야 했다. 한때나마 협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협회의 이미지를 위해서 조용히 넘어간 것 같다고, 당시에도 잠깐 술렁거리다 말지 않았던가.

“어지간히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나?”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그렇죠. 요즘 분위기도 별로고요.”

“더 있어요?”

“네. 뭐라더라, 아빌라는 꼬리 자르기 당한 것뿐이라고 했던가. 연관된 사람이 더 있다고.”

“……”

“팀장님은 믿어지세요? 솔직히 요즘 돌아가는 꼴 보면 그럴듯하기도 한데…….”

“……훈련하러 가세요.”

“아니, 팀장님이 궁금하다고 물어봐 놓고서는!”

“러셀하르트.”

“참 나. 예, 예, 갑니다.”

보란 듯 입을 댓 발 내민 러셀하르트는 뭉그적거리며 느릿느릿 자리를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페는 그의 입으로 전해 들은 소문을 곱씹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부대끼다 보면 이런저런 헛소문이 도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이번 건은 누군가 작정하고 말을 흘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한 차례 지나간 일에 다시금 불이 붙지는 않을 테니. 말이 도는 시기조차 공교로웠다.

상부와 실무진 사이의 거리감은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만 있었다. 상부의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이 제 배를 불리기 바쁜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전반적인 감정이 나빠진 만큼 이미 지나간 일이 다시금 떠오르는 게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직감했다. 온갖 가정을 덧붙여도, 소문이 고작 하루 사이 파다하게 퍼진 건 그야말로 부자연스러웠다.

문득 이리트의 얼굴을 떠올린 그리페는 뻣뻣한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가 관련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이리트는 제가 납치당했던 그 날을 기점으로 여태까지 한 번도 본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물론 온 적이 있다고 한들, 이리트처럼 가십거리를 떠들긴커녕 안부 인사조차 잘 나누지 않는 이가 직접 소문을 퍼트릴 수는 없었으리라. 그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일이었다. 이미 레만과 대놓고 대립하고 있다고 해도.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못해 성가셔하기까지 했음에도, 이리트는 의외로 친분이 있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센티넬이 아니었으며, 또한 친화력이 좋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개개인을 잘 알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그들의 입만 빌리더라도 이 정도 소문을 퍼트리는 건 이리트에게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리트가 친분을 그런 식으로 이용할 사람이던가.

한숨을 삼킨 그리페는 품속의 담뱃갑을 쥐었다가, 결국 긴 숨을 내뱉으며 손을 뺐다. 이리트가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잘 처리했으리라 믿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고 속이 쓰린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여느 적과 같아서 무력만으로도 해결이 되면 좋을 텐데. 굳은살 박인 손을 힘주어 말아 쥐었던 그리페는 힘을 탁 풀어 버렸다.

실상 사람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건 제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능을 발하지 않더라도, 극한까지 단련된 신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병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 뒤에 오는 죄책감이며 후회 같은 감정은 차치하고, 오롯한 사실만을 말하자면 그랬다. 협회에 소속된 센티넬 중 손에 피 한번 묻히지 않은 이는 드물었다. 아니, 없다고 보는 게 옳을 터였다. 그럼에도 저를 포함한 그들이 살인자 취급을 받지 않는 건, 단지 그게 작전 중에 일어난 일인 탓이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만큼은 그게 모두 불가피한 일이었노라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레만을 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작정하고 죽이려 든다면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보일 이미지를 생각한 탓인지, 혹은 자신의 이능을 믿기 때문인지 그는 거의 경비 인력을 고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본부 내에 자리한 레만의 집무실은 출입이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리트도 의지만 있다면 저격 정도는 쉬이 해낼 수 있으리라. 물론 제게 이리트가 본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으며, 권총을 다루는 것과 저격 소총을 다루는 것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레만이 죽는다고 여기저기 산재한 문제가 쉬이 해결될 리 없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일이었다면 진작 이리트가 레만을 죽여 버리자고 했을 테니.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자신은 이리트를 도울 수가 없었다. 이리트를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단신으로 괴수를 쓰러트릴 수 있으며, 조직 하나를 괴멸시킬 수 있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레만이 끝내 무너지는 때가 오면, 그러면 아득한 평화가 다가올까. 복도 창문을 연 그리페는 쏟아지는 볕에 눈을 찌푸린 채 잔잔한 풍경을 응시했다.

“……팀장님!”

“러셀하르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부르는 것도 못 들으시고.”

“……”

“말씀하기 싫으시면 말고요. 바쁘지 않다면…… 대련 상대나 좀 해주시죠.”

“후회할 텐데?”

“이번에 팀장님 구하러 갔다가 느낀 점이 좀 많거든요.”

“스스로가 약하다는 생각이라도 했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팀장님 가이드분 있잖습니까. 가이드인데도…… 어지간한 센티넬보다 겁을 안 내던데요. 호위 명목으로 거기 같이 있긴 했지만, 내게 그만한 행동력은 없다 싶었어요.”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지.”

그리페는 그야말로 바보라도 된 듯 웃었다. 그리페는 빡빡하게 굴지 않는 편이며, 편히 대하는 것에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래도 상관에게 꺼내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말이지. 입을 꾹 다문 러셀하르트는 채 표정까지는 다 숨기지 못했으나, 그리페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원래도 온화하고 다정한 면모를 보였으나, 이리트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 누구도 착각할 수 없도록 새파란 눈에 따듯한 빛이 감돌았다.

괜히 제 뒤통수를 긁적인 러셀하르트는 현장에서 본 이리트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페의 말대로였다. 그는 정말로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현장에서 이리트를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지하의 문을 묵직한 망치로 후려치던 이리트의 눈에서는 귀기가 흘렀다. 그리페는 영원히 알지 못할 테지만. 본부로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리트는 여러모로 유명했다. 결단코 접촉하지 않는 가이드라니, 말 그대로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비접촉 가이딩은 이리트가 보이는 기이한 면모의 가장 작은 부분이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이리트의 움직임에서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 묵직한 슬레지해머를 휘두르면서도 거의 흔들리지 않던 중심축은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협회에 속한 가이드로서,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배운 호신술만으로 가능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롯이 그것만이 이상한 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협회는 어째서인지 작전 실행을 위한 정보를 하나도 내어주지 않았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으나, 당시에는 다들 충격에 빠져 있었던 탓에 항의할 여유조차 없었던가. 게다가 직접 움직인 건 제가 아니라 하슬러였으니 정확한 상황을 더욱 잘 알지 못하는 채였다. 어쨌거나 모종의 과정을 통해 하슬러는 이리트와 접촉했고, 분명 평범한 가이드일 뿐일 이리트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그리페가 피랍되어 있으리라 추정되는 후보지를 골랐다. 그리고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정답이었다.

그날 하루 내도록, 이리트에게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고 싶어 하던 사람은 짐작하건대 한두 명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그리페를 되찾은 이리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그날 이후로는 만날 기회조차 없었으므로. 그러나 이리트와 마주치게 된다고 한들, 제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묻는다 한들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올 가능성은 더없이 낮았고, 깊숙이 숨겨진 비밀은 아는 것만으로도 무게를 나누게 됨을 아는 탓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기도 했다. 애초에 제 상관의 파트너가 규격 외의 존재라고 한들 무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실상 오래 함께했던 탓에 익숙해졌을 뿐 그리페도 일반적인 센티넬의 범주에서 한참은 벗어나 있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두 사람은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잠깐 사이 스친 여러 상념을 억누른 러셀하르트는 약간의 진심을 섞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와…… 팀장님 그런 표정은 처음 봐요.”

“표정이 어땠길래 그래요.”

“되게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별명만 들어도 보통은 아니다 싶긴 했거든요. 본인 없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는 그만하고, 제 훈련이나 좀 도와주시라니까요.”

얼굴에 그렇게 티가 나나. 잠시간 제 얼굴을 더듬어 본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 걸었다. 팀원들은 그날 일을 거의 그대로 기억했다. 단 한 가지, 상부의 허가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제외하고서. 당시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자신과 이리트뿐이었다. 제 기억은 조작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이유로 확실한 건 없었으나,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생각이 깊어진 그리페의 걸음이 잠시간 늦어지면, 바짝 따라붙은 러셀하르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 등을 밀었다. 어서 가자고, 능청스레 재촉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 심지어는 명예까지 지닌 이를 완벽하게 무너트리는 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망이나 질병으로 인한 불가피한 은퇴 따위로는 그의 명예까지 깎아내릴 수 없었으므로. 입에서 입을 타고 쉬이 퍼지도록, 말이 퍼지는 사이 조금쯤 과장되어도 터무니없는 개소리로 여겨지지는 않게 소문을 만들어내는 건 그야말로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살아있는 상대, 그것도 정보를 다루는 데 더없이 익숙한 상대는 정말로 번거로웠다. 심지어 레만은 사람의 정신까지도 주무를 수 있었다. 물론 협회 내에 포진한 인원 중에는 센티넬이 제법 많고, 그건 레만에게도 약간의 부담이 될 테지만 그 정도가 전부였다. 잘 퍼지나 싶던 소문이 어느 순간 다른 이슈로 덮이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일단 죽인 다음에 그를 깎아내리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순간순간 스쳤다. 물론,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레만의 최후가 피살로 장식되고 나면, 그의 이미지를 뒤엎는 건 몇 배는 어려운 일로 변모하고 만다. 일평생을 바쳐 사람을 지키고 끝내 살해당한 영웅, 혹은 그 비슷한 명성을 얻는 건 그에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그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지. 제 손으로 그의 무덤을 장식해 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리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치솟는 살의를 익숙하게 눌러 삼켰다.

사실에 기반한 소문은 결국 바깥으로 흘러 나갔고, 어느 정도까지는 레만의 위신을 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소문으로 그의 이미지를 깎아내는 건 한계가 분명 존재했다. 긴 시간 쌓여 온 믿음은 관성적인 수준에 이르렀으며, 민간인 대다수는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협회의 수장에게 큰 관심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와 관련된 소문은 무게감 없는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이렇다 할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 채 스러졌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므로. 애초에 당장 레만을 고꾸라뜨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이까짓 소문 따위로 꺾여 버릴 상대였다면 살의를 몇 번이고 억누를 필요도 없었으리라. 레만, 그가 공들여 꾸며 온 이미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려 했을 뿐이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였다. 그의 발목을 붙잡아 넘어트리기 위해서는 실체가 필요했다.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목을 축인 이리트는 심각한 표정을 한 상대를 응시했다.

“여유로워 보이는군요.”

“개인이 조급해한들, 변하는 건 없습니다.”

“예, 알죠.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헤르데, 우리는 이제 움직이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 이상 소문을 퍼트리는 건 무의미해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내가 이곳에 온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생각해 둔 방안이라도 있나 보죠?”

자세를 고쳐 앉은 이리트의 손끝이 낮은 테이블 위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물론 가닥은 잡아두었지. 하지만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굳이 레만을 상대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상과 실전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다르기 마련이었다. 무감한 시선과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올슨 또한 답을 알고는 있을 터였다. 뒷공작은 한계가 왔으며,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레만은 심상치 않은 일을 진척시키고 있다면.

“근래 벌어진 납치 사건을 모르진 않을 테고……”

“이쪽도 그게 레만이 벌인 일이라고 추정은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명확한 물증이 없을 텐데요.”

몇 번이나 마주한 끝에 겨우, 그것도 어렴풋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된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짧은 웃음은 환영이라도 되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으나, 그가 찰나 내보인 반응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분명 꼬리를 잡았다. 긴가민가 고민하지 않을 만큼, 더없이 확실하게. 그를 보고 있자면 이따금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지, 이리트의 정보력은 매번 제 쪽보다 뛰어났다. 출처를 물어본들 답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올슨은 그저 이리트를 응시했다.

동일범에게 피랍되었다고 여겨지는 센티넬은 총 열여섯 명이었다. 생환한 그리페를 제외한 숫자로,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협회 정보부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들의 무능을 의심케 할 만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다. 물론 지금 어떠한 정보도 얻어내지 못하는 건 단순히 그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리라. 무슨 생각인지, 이리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대략이라도 좋으니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인원, 더불어 등급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하랄트로는 부족한가요?”

“……그 말이 내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 않을 텐데.”

“내 뜻이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잖아요.”

보란 듯 미소 짓는 올슨은 정말로 협회장 자리에 잘 어울려 보였다. 순전히 저를 긁기 위해 말을 내뱉은 올슨이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시도거나. 어느 쪽이든 사소한 부분에 시간을 뺏길 생각은 없었다. 짜증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이리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을 텐데, 왜 굳이 입씨름하려 드는 거지.”

“확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렇듯, 나도 무작정 동료를 내어줄 수는 없으니까.”

“하…….”

“하랄트 이야기는 진심은 아니었어요.”

“그러시겠지. 피랍된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이 정도면 만족합니까?”

까칠하기는. 올슨은 말을 뱉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단호하다면, 한 번 믿어 볼 만했다. 여기까지 온 판에 이리트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확인은 해야 했다. 거의 다 식어 김도 거의 오르지 않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이리트가 저를 똑바로 응시했다. 언제, 어느 때에라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라. 근래 레만과 그의 측근들의 움직임이 의뭉스러워진 덕에 이쪽으로 마음을 돌린 이들이 꽤 늘었다. 그렇다 한들 상부의 알력 싸움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센티넬이 소수였으므로,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앞뒤 안 가리고 움직일 수 있는 건…… S급 하나, A급 여섯, B급 마흔가량. 그 이하 정보도 필요해요?”

“그들이 기거하는 곳을 아니, B급 아래로는 제외할 겁니다.”

“그럼 이 정도가 전부네요. 상황을 타겠지만……. 더불어 나 또한 움직일 수 있고요.”

“일선에서 물러난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손 하나도 아쉬운 상황인 줄 알았는데.”

“당신 자신이 B급 이상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합니까?”

“확신 못 할 것도 없지요. 과거에 부적격 판정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

“당신도 모르는 게 있긴 하군요. 부적격 판정은 어디까지나 괴수를 상대하는 걸 전제로 했을 때의 조건이죠. 사람과의 전투는…… 그래, 그쪽이 오히려 적성에 맞았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기억해 두죠. 대충 전달할 건 다 전달했으니, 이 주 내로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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