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5)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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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독한 약을 그대로 들이마신 탓일까,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부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익숙하게 앓는 소리를 삼킨 그리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가까운 곳에 저를 납치한 이들이 있는지, 대화하는 소리며 자잘한 소음 따위가 들려왔다. 한 겹 막혀 들리는 소리.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파악한 그리페는 뒤늦게 눈을 뜨고 주위를 훑었다. 창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사방이 막힌 공간. 침침한 전구만이 유일한 광원인 듯 실내는 꽤 어두웠다. 창고로 쓰던 공간을 급히 치운 건지, 혹은 원래 이런 식이었는지 벽 근처에는 정체 모를 상자며 짐 따위가 쌓여 있었다.

등 뒤로 돌려 묶인 손목은 원한다면 풀어낼 수 있었으나, 괜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이리트의 안위를 빌미로 자신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 이들이었다. 제가 어떤 식으로 대처하든, 그건 이리트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되돌아갈 게 분명했으므로. 이리트는 지금 어떤 상태일지 자꾸만 걱정되었다. 다치진 않았는지, 다른 이들이 손을 대진 않았는지. 왜 매번 이런 순간마다 자신은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지, 자괴감이 스미면 그리페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 순간 단단하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등을 보이면 달려들 맹수라도 눈앞에 둔 듯, 남자는 눈을 마주친 채 울대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침을 삼켰다. 긴장한 숨소리까지 요란하게 느껴지는 정적을 깬 건, 긴장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이였다. 깨어났다며 소리치는 상대의 꼴이. 아마도 그는 제 손목에 씌워진 구속구가 기실 제 역할을 하지 못함을 이미 아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기껏 저를 붙잡아 놓았다면 노골적으로 얼어붙은 티는 내지 말아야지. 기본조차 안된 이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페는 저항하지 않은 채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소란스러운 기척 사이로 들려오는 건 어떻게 벌써 깼냐, 코끼리도 반나절은 잠들 양 아니었느냐 따위의 시답잖은 말뿐이었다. 의식을 잃은 이후에도 추가로 약을 쓴 모양이었다. 그래, 고작 헝겊에 적신 약 좀 들이마셨다고 두통이 그 정도로 심할 수는 없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뒤로 그의 동료가 합류하면, 남자는 그제야 기세등등하게 창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성큼성큼 다가온 이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주먹으로 뺨을 후려갈겼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고, 볼 안쪽 여린 살이 터졌는지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주제에 저와 비슷한 계열의 센티넬인 모양이었다. 그렇다 한들 고작 사람의 주먹질이었다. 통증보다는 불쾌감이 더 큰, 별것도 아닌 공격. 타격으로 돌아갔던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상대를 다시 바라보면, 그는 주먹을 내지르고서도 분한 듯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표정을 구겨야 할 건 저였다. 자신을 붙잡고자 이리트의 안위를 내거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네 가이드가 우리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린 듯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였다. 대답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는 말에 입을 다물고 있자면, 남자는 한 번 더 같은 쪽 뺨에 주먹을 갈겼다. 입안에 고이는 피를 삼킨 그리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얻어맞는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몇 번쯤 맨주먹에 맞는다고 고장 날 만큼 제 몸뚱이가 연약한 것도 아니었으며, 고작 이 정도 통증으로 두려움이 스미는 것도 아니었다. 외려 그보다 더한 것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이리트는.”

“글쎄, 그건 네 태도에 따라 달라지지. 네 가이드가 잘못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치미는 불쾌감과는 별개로, 그들의 행동거지는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럴듯하게 굴 뿐, 알맹이가 없는 것처럼. 어쩌면 이리트가 이곳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리페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았다. 단독 작전 중에는 며칠씩 복귀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만 존재했다. 어쩌면 제 동료조차 복귀가 늦어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닐지. 만일 그렇다면, 이미 추적이 늦어진 상황에서 한 번 더 장소를 이동했을 때 그들이 따라붙을 수 있을까. 확신하기 어려웠다.

기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리트의 부재를 당장 알아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위협을 느꼈을 때 공격하려 들 건 분명 제가 아닌 이리트일 터였다. 그러니 이리트부터 구출되어야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이리트가 인질로 붙잡혀 있음을 알 정도는 되어야 했다. 물론 이리트는 여전히 협회 소속의 유능한 가이드이며, 여전히 파트너가 없는 센티넬을 이따금 가이딩하곤 했다. 그러니 자신의 경우가 그렇듯, 누구라도 그의 부재를 금세 알아챌 터였다. 수십 가지 고민이 스쳤으나, 어쨌든 자신은 움직일 수 없었다. 적어도 이리트의 안위를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리페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작전이 길어지는 것 자체는 왕왕 벌어지는 일이었으나, 그사이 문자 하나 남기지 않는 건 이상했다. 애초에 그리페 혼자 출진하는 현장이라면 이토록 늘어질 이유도 없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협회 내에서 그리페가 가장 강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건만. 제 입술 안쪽을 짓씹은 이리트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실을 맴돌다가, 때때로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면 그리페가 밖에서 손을 흔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바깥은 적요할 뿐이었다. 멀리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혹시, 하는 기대가 스쳤으나 현관의 잠금을 푸는 소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울리질 않았다. 자꾸만 목이 타서, 이리트는 아예 큰 머그잔에 냉수를 한가득 받아오기까지 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전전긍긍한다 한들 상황이 바뀌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고 일어나면 그리페가 돌아와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며 정처 없이 집안을 헤매던 걸음을 돌려 이리트는 이불 속에 파묻혔다. 곧게 누워 눈을 감고, 온갖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했으나 무용한 시도였다. 애써 외면하려는 시도는 외려 더 선명하게 온갖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자리에 누운 이리트는 눈을 감은 채로도 인상을 썼다.

한순간도 잠들지 못한 채, 이리트는 날밤을 고스란히 지새웠다. 어스름한 빛이 하늘 한구석을 밝히고, 끝내 하늘을 푸르게 물들일 때까지도 그리페는 연락이 없었다. 협회도 매한가지였다. 아니, 협회에서는 이렇다 할 연락이 오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이리트는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페를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버거웠다. 그는 매번 사선을 넘나들고,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왔으므로. 그 순간 전원이 꺼지기라도 할까, 충전기를 꽂아둔 채 내버려둔 기기가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웨이드였다. 전화를 받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그리페에게 분명 문제가 생겼다고.

“웨이드.”

[하랄트가 납치되었어. 최근 센티넬을 납치하던 그 일당에게 당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들은 그대로야. 현장에는 전투의 흔적만 남아 있었어.]

“왜, 어떻게…… 그리페가,”

[지금은 이쪽에도 정보가 없어. 상황에 진전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 테니, 헤르데, 부디 안전한 곳에 있도록. 본부에는 오지 말고.]

무어라 따져 묻기도 전에 연결이 끊겼다. 꺼진 화면, 폭풍처럼 저를 휩쓸고 지나간 통화가.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근래 협회 센티넬 여럿이 납치된 사건은 잘 알고 있었다. 꽤 큰 사건임을 알았으나, 그러한 사건의 희생자가 이쪽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태 사라진 이들은 전원 B급 이하의, 그리페와 비교한다면 터무니없이 약한 이들이었으므로. 애초에 그쯤 되는 무력을 지닌 그리페를 납치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외따로 떨어진 B급 센티넬이나 겨우 납치하던 이들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걸리는 지점만 해도 여럿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빌미로 삼았다면, 그리페를 납치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반쯤 그리페가 자발적으로 그들과 동행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라 해도. 물론 그리페는 자신이 집에 잘 있음을 알 테지만, 어떤 감정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는 저 또한 지켜야만 할 상대로 보고 있으므로 더욱.

웨이드가 말미에 덧붙인 말은 정말로 이상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집에 이런저런 보안 장치를 달아두었다고 한들, 협회가 더욱 안전했다. 협회까지 가는 길을 걱정하는 건 아닐 테니, 그건 분명 협회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 닿으면, 굳어 버린 사고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정보부의 절반 이상이 레만의 손아귀에 들려 있었다. 침묵이 묵직하게 깔린 실내에 이리트의 어금니가 눌려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웨이드조차 과거에는 그의 휘하에 속해 있었으나, 적어도 그는 레만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니 웨이드는 제게 힌트를 남겨준 셈이었다. 협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작전은 정보부에서 뽑아낸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다. 웨이드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정보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페를 불리한 상황으로 내모는 것 따위의 저열한 짓거리들. 하지만 레만이 대체 무슨 이유로 질 낮은 집단과 손을 잡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협회의 센티넬을 납치한단 말인가.

빠르게 흐르던 생각은 벽에 막힌 듯 제자리를 맴돌았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페는 별문제 없이 살아있을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레만은 제게든, 그리페에게든 원하는 게 존재하는 눈치였으므로.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든 내줄 생각은 한지도 없었다. 다시 한번 이를 간 이리트는 격양된 감정을 누르려는 듯 느릿하게 심호흡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였다. 거기에 그리페가 엮이기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시간을 되돌려 그리페를 붙잡아 말린다 한들 똑같은 일이 벌어질 터였다. 이번 현장이 아니라 다른 어떤 작전에서라도. 그렇다면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부디 그리페가 큰 고초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리트는 한구석에 던져둔 기기를 집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실마리가 잡혔다면 뒤를 캐는 건 훨씬 쉬워지기 마련이었으므로. 평소 쓰는 것과 다른 기기는 정보책과의 연락 수단이었다. 잠시간 상황을 복기한 이리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페의 작전지가 어디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전달한 이리트는 조급한 사안임을 강조하고, 빠르게 알아 올수록 더 많은 추가 보수를 지불하겠노라 약속했다. 추가금을 언급할 즈음에는 대답하는 상대의 목소리에서 묘한 활기가 느껴졌다. 시시껄렁한 잡담을 할 상황도, 그럴 기분도 아니었으므로 이리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 상황에 제가 직접 발로 뛰는 건 어려웠다. 그리페를 구하려다 제 신변에까지 문제가 생기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높은 확률로 그리페는 제게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반강제로 그들을 따라갔으리라. 그건 기우였지만, 자신까지도 당한다면 그리페의 걱정을 사실로 만드는 셈이었다. 애초에 둘 다 문제가 생긴다면 빠져나올 길도 요원하리라. 그러니 제가 나서지 않는 선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써야 했다. 이리트는 믿을 만한 정보통 여럿에게 연락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올슨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올슨, 내가 건넨 정보 값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만.”

[연락하기를 기다렸습니다, 헤르데.]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인사말을 듣자마자 대뜸 내뱉은 말에도 올슨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페의 실종은 협회의 근간을 다시 한번 뒤흔들 테니, 사방에 그가 사라졌음을 알리지는 않을 터였다. 추정컨대 협회 내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레만을 비롯한 상부 소수와 정보부가 전부이리라. 그러나 분명 그 소수에는 포함되지 않을 올슨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쁜 신호는 아니었다.

[하랄트 건은…… 네, 한 번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 아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면 끊겠습니다. 사담이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아니라서.”

[조급한 건 알겠지만, 진정해요. 레만은 최근 들어 한 사람과 계속 만나 왔습니다. 적어도 사나흘에 한 번, 늦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주소는 따로 보내줄 테니 확인하세요. 만나는 장소까지 고정적인 걸 보면, 아마 그곳도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직접 찾아가진 말고, 몸조심해요.]

“……”

[이쪽에서도 최대한 돕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답답하겠지만…… 헤르데, 그래도 버텨야 해요.]

“압니다. ……그럼.”

새로운 정보까지 전달하고 나면, 정말로 모든 문제가 제 손을 떠나 버렸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애써 다른 일을 찾아도,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무언가를 하려다가도 그리페가 떠올랐다. 그는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운신에 문제가 없으며, 쉬이 죽지 않을 거라고, 이리트는 저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목은 타고, 혹시 연락이 오지는 않을지 미동 없는 기기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집안의 적막에 숨이 막혔다. 제가 정말로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리페가 어디에서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건만. 하지만 제가 뭘 한단 말인가. 협회에 가서 레만의 멱이라도 잡고 흔들 것도 아니고, 웨이드를 닦달한다고 한들 그렇게 답이 나올 문제라면 진작 해결이 됐을 터였다.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아 집안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일순간 세상이 빙글 돌았다. 아찔하게 멀어졌다가 돌아오는 듯한 감각, 되는대로 손을 뻗어 무엇이라도 붙잡으면 두통이 치밀었다. 누군가 제 머리를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버겁게 숨을 삼킨 이리트는 가까스로 걸음을 옮겨 소파 위로 무너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은 낯설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한 번도. 아니, 애초에 이런 고통을 느껴본 적은 있었던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 같았다.

숨을 쉬는 작은 움직임에도 관자놀이 부근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 왔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 이리트의 잇새로 앓는 소리가 샜다. 그러잖아도 복잡한 머릿속이었다. 딱 죽겠다 싶은 고통까지 더해져 상비약을 가져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리트는 끔찍한 감각을 견뎠다. 주먹을 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였다. 파리한 안색,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와 차마 감지도 못한 채 부릅뜬 눈.

“그만……”

들을 사람 하나 없는 애원을 내뱉은 순간,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잦아들 줄 모르는 통증에 몸을 떨면서도, 이리트는 확신했다. 그건 사라졌다고만 생각한 제 기억이라고. 사라지고 왜곡된 기억의 분량은 제가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도 방대했다. 한 번 물꼬가 트이면,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조각난 파편처럼 순간순간 스치는 장면이었으나, 그건 결국 하나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리페와 보낸 시간의 기억들. 어느 순간에 저는 협회 지하의, 단 한 번도 방문할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진정실에 있었다. 또 다른 순간에 저는 그리페를 붙잡고 털끝 하나 다치지 말라며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페와 함께 카트를 끌고 마켓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리페를 앞에 두고 사진기를 들이밀기도 했다. 기억 속에서 그리페는 늘 자신을 바라본 채였다.

그리고 끝내 떠오르고야 마는, 그리페가 제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가장 큰 이유. 기억은 왜곡되어 있었다. 제게 반복해서 속삭이던 말은 자신의 의지를 꺾고자 함이었다. 제 몸을 욕보인 것도 매한가지였다. 그들이라고 가이드가 새삼스레 부족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내내 눈이 가려져 있었던 탓에 예민하게 날 선 감각으로 느껴지던 타인의 손길. 거칠게 반항하여 너덜너덜해진 몸뚱이에서 수시로 치밀어 오르던 통증과 그보다 더 괴로웠던 모멸감. 이따금 그리페를 떠올리던 순간들. 굴욕의 기억은 찰나 스치고 흐름 속에 섞여 멀어졌다.

그즈음 이리트의 뺨이 눈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리페가 보고 싶었다. 아프다고, 안아 달라고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파편으로 흩어진 기억 속에서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욕보인 상대가 그리페의 손아귀 아래 피떡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그리페가 단단히 말아쥔 주먹으로 상대를 후려칠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리고, 피로 흠뻑 젖은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긴 궤적을 그렸다. 소파를 짚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이리트가 가늘게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페의 손이 제 손목을 감싸 쥐던 순간을 기억했다. 허리를 끌어안고 흔들리는 총구를 다시금 붙잡아 주던 체온, 그리페의 손에 묻어 있던 피가 번진 자국들. 거기까지 떠오르면 이리트는 가실 줄 모르는 고통에 버거워하면서도 몸을 추슬렀다.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페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리트는 축축하게 젖은 뺨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사라진 기억이 어떻게, 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으리라 막연하게 추측할 뿐. 그러나 왜 이 순간이어야만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리트는 뒤죽박죽 뒤섞인 기억을 되짚었다. 엉망으로 흩어진 조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끼워 맞추고, 사라진 일 년이 얼추 온전한 모습이 되었을 즈음에는 아찔한 두통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통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머물렀다. 긴 호흡, 그 끝에 이리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되찾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잃은 게 정녕 무엇이었는지. 계약이 틀어졌던 그 날,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 없던 허전함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스스로도 반쯤은 맹목이라 생각했던, 레만을 향한 분노가 무엇을 장작 삼아 타올랐는지 제대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고통과 함께 되돌아온 기억을 쥔 이리트는 제 입안을 짓씹었다. 정말로 그리페를 이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제가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나, 애초에 이런 식으로 사람을 쓰는 건 제 전문 분야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정보를 끌어모은 이리트가 머릿속으로 전개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페쯤이나 되는 이를 숨길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람의 시선을 최대한 피할 수 있고, 이동하는 것 자체도 떳떳하지 못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 어차피 그리페를 잡아두는 인력은 무의미함을 그들도 알 테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버려둘 수도 없으리라. 뒷골목으로 통로가 나 있으면서, 한 조직이 머물 수 있을 만큼의 크기가 되는 공간.

최악의 상황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이리트는 애써 외면했다. 제게 뜯어내고자 하는 것이 정보라면, 레만은 적어도 그리페를 멀쩡한 꼴로 내버려둬야 함을 알 터였다.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은 이리트는 차분하게 후보로 점찍어둘 만한 곳을 짚어냈다. 그사이 그리페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분명, 제가 짚은 곳 중 하나에 그가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후보지가 좁혀졌으니 남은 것은 그리페를 찾는 것이었다.

웨이드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웨이드 자체는 그럭저럭 믿을 만한 상대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현시점 정보부의 반수 이상이 레만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그리페를 구해내는 데에는 협회의 센티넬을 동원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테지만, 동시에 레만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가서는 안 됐다. 그게 가장 골치 아픈 지점이었다.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건 레만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권한이 없는 제가 멋대로 센티넬을 동원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리트가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흩트렸다. 제가 지닌 힘이 미약함을 원망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무력 같은 것, 있으면 편하지만 없다고 사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제가 센티넬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그리페와 이런 관계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짜증스레 앓는 소리를 흘린 이리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 채로 천장만 노려보고 있는 사이, 초인종이 울렸다. 기이한 타이밍이었다. 무력감에 늘어지는 몸을 이끌어 움직인 이리트는 입을 열지 않은 채로 작은 패널에 비친 이를 응시했다. 화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화면으로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상대는 하슬러였다. 그리페의 팀에 속한 A급 센티넬.

[저, 멋대로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심란하실 걸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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