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25)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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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핏물에 번진 시야로도 상대의 낯빛 역시 어두움을 알 수 있었다. 그건 화가 났기 때문인지, 독에 당했기 때문인지. 그리페가 말없이 그를 응시하면, 상대의 표정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왜 그런 반응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누구 하나 방독면을 챙길 생각을 하지 못했고, 설령 방독면이 있다고 해도 이능으로 나타나는 독은 종류를 짐작하기 어려운 만큼 완벽히 방어할 수 없음을 그 또한 모를 리 없었건만.

“시간을, 큼, ……지체해서, 좋을 것 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바르바노가 붙잡은 팔뚝을 잡아당겼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음에도 그리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를 붙잡으려 진득한 독이 고인 곳까지 와서는 코 아래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는 이의 얼굴이 엉망인 탓이었다. 입을 열면 다시 기침이 터질 것 같아, 말없이 보고 있자면 그가 한 손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뒤에는 아군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뛰어들려던 것 아닌가.

손짓에 담긴 의미를 가늠하는 사이, 시야가 한층 어두워졌다. 그건 꼭 짙은 먹구름이 해를 가릴 때에나 일어나는 현상 같았다. 고개를 드는 순간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실내, 지하 한복판에서. 찰나 말을 잊은 그리페는 비정상적으로 모인 구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살면서 이토록 가까이에서 구름을 본 적이 있었던가.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색 옅은 머리칼이 젖고, 덜 마른 피가 씻겨 내려갔다.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그리페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아릿한 눈에 닿는 차갑고 깨끗한 물은 차라리 달가웠다.

주변을 채웠던 독무는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허공에서는 깨끗하던 물이 바닥에 고일 즈음에는 독기를 대신 머금어 탁한 색을 띠었다. 쓰러져 바닥을 구르던 이들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나, 그들은 어차피 쓰러트려야 할 적이었다. 빗줄기만으로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으나, 적어도 이제는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신체 내부가 손상되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약간의 독기는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가 독을 곧바로 씻겨주었으므로.

비가 쏟아지는 순간부터, 적은 슬금슬금 몸을 물리고 있었다. 구름이 없는 구획으로 이동하거나, 원군을 부르려는 태세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타인의 목숨은 아무렇지 않게 소모해 버리는 이가 제 목숨 소중한 줄은 아는 것이거나. 그리페의 걸음마다 고인 빗물이 방울방울 튀었다.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제 주변을 여전히 진득한 독기로 감싼 채였다. 그의 주변만큼은 빗줄기가 안개를 부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페.]

저를 부르는 먹빛 목소리에 주춤거리는 순간, 등 뒤에서부터 무언가가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시야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탓에 그리페는 뒤늦게 등 뒤에서 날아든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제법 거칠어진 빗줄기를 맞고도 속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은 채 날아가는 철편. 잘 벼려진 날붙이는 짙은 독무를 뚫고 상대의 몸에 상흔을 아로새겼다. 쏟아지는 빗줄기며 독무 속에서도 선명하게 튀는 핏줄기가. 그때에서야 그리페는 적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모건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가도, 누구 하나 그를 막는 이가 없었다. 적을 처리하는 건 그들이 맡겠다는 듯이. 젖어 늘어지는 머리칼을 쓸어올린 그리페는 저 뒤에서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선 이를 응시했다. 제 몸을 보호하지도 못한 채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실내에서 비를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이. 그는 분명 앞선 전투에서 부상으로 한 번 물러서지 않았던가.

“후퇴한 것 아니었습니까.”

“부상 수습 후, 전투가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복귀했습니다.”

“……내 판단이 섣불렀습니다.”

“아닙니다.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리페는 이렇다 할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모건이 싸우는 쪽을 응시했다. 센티넬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잠깐이나마 물러서는 때마다 철편이 육체에 박혀 들었다. 저쪽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잠시간의 여유, 멈춰 선 그리페는 상황을 곱씹었다. 앞을 가로막은 이들 중 S급에 달하는 센티넬이 둘이었다. 레만을 제외하고, 적진에 이 이상의 전력이 존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리트.”

[……네가 언제나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는 걸 알아. 아는데, 막상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속이 좀 쓰리네.]

“미안해요.”

[이번에도 치료 안 받아도 괜찮다는 소리 하기만 해 봐.]

“그러지 않을게, 약속해요.”

[손가락을 걸라고 할 수도 없고. 그리고…… 내부 상황은 나도 확신하긴 어려운데, 레만 외의 S급은 더 없을 확률이 더 커.]

“……마음이라도 읽어요?”

[거기까지 가서 할 고민이 뭐 얼마나 된다고. 아무튼, 레만의 능력은 제대로 기억하지.]

“알아요.”

[특히 더 조심해야 해. 퇴로를 죄다 막아 놨으니, 독이 올라도 어지간히 올랐을 거야.]

“퇴로를 막았다고?”

[그 교활한 자식이 제 살길도 파놓지 않고 지하에 기어들어 갔을까. 그래도 그 부분은 네가 신경 쓸 것 없어. 이제 그 자식은 거기서 탈출하려거든 안에서부터 새 땅굴을 파던, 네 쪽을 뚫고 나가던 해야 하니까.]

“알겠어요. 얼른 끝내고 갈게.”

[목이 다 쉬었네. 더 다치지 마, 그리페. 기다릴게.]

더 강한 이가 없다면 이미 남은 전력이라도 긁어모아 어떻게든 대처해야 할 것 아닌가. 그나마 남은 전력마저 아군의 손에 희생시킬 게 아니라. 그리페는 잠깐 사이 바닥에 쓰러진 센티넬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긴, 제가 언제는 레만의 생각을 이해한 적 있었던가. 명예와 권력을 맹목적으로 좇는 이들은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리라 생각하는 이를 상대로 제가 할 일이 명확하다는 것만이 개중에는 다행인 점이었다.

정신계 이능에 대항하는 건, 그 방식이 여타 다른 능력과는 달리 다소 모호했다. 한 계통으로 분류되었다 한들 세부 능력은 모두 다르기 마련이었으며, 센티넬 중에서도 그 수가 적고 하나같이 쉬이 이성을 놓아 버리니 연구가 적게 된 계통 중 하나였다. 어느 때에는 의지만으로도 이겨낼 수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무슨 짓을 해도 거스르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이니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전황을 짐작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종의 도박인 셈이었으나, 그리페는 기꺼이 제 목숨을 내걸었다. 협회 소속 센티넬의 처우 개선 같은 대의를 이유로 들 생각은 없었다. 이리트가 원한 복수였으며, 저 역시 바라 마지않은 일이었으므로. 실내에 쏟아지던 비가 그친 순간, 그리페는 함께 이곳까지 돌입한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거친 빗줄기에도 다 씻겨나가지 않은 핏자국, 피로감이 서린 표정.

이따금 쇳소리가 섞이는 목소리로, 그리페는 차분하게 위험성을 경고했다. 누구 하나 각오하지 않은 이가 없을 테지만, 레만을 마주치는 순간부터는 결단코 돌이킬 수 없음을. 그러나 엄중한 경고에도 누구 하나 무기를 놓는 법이 없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고개를 끄덕인 그리페는 철벅거리는 웅덩이를 밟고 걸음을 옮겼다.

열려 있던 앞의 문과 달리 닫힌 문은 얼핏 보기에도 심상찮았다. 전자식 개폐 장치가 붙은 금속제 문은 손잡이조차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쇳덩이 같아, 개폐 장치를 제외하면 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을 잠깐 살핀 모건은 한구석에 쓰러진 센티넬을 대충 잡고 질질 끌어왔다. 힘이 빠져 늘어진 손을 펼쳐 개폐 장치 위에 대면, 비프음이 울리고 쇳덩이 위에 실금이 새겨졌다.

느릿하게 열리는 철문, 그 사이로 나타나는 풍경에 그리페는 일순간 말을 잃었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은 원통형 유리관이 주르륵 늘어선 풍경.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당연하게도 사람이었다. 한눈에 수를 다 세기 어려운 관 안에 어쩌면 협회 소속의 센티넬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페는 의식적으로 관 안의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구해내는 건, 레만을 제압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일 테니.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실내, 차마 발을 더 들이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이들 앞으로 레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이는 짐짓 피곤한 체를 했다. 싸울 생각도 없다는 듯한 태도에도 그리페는 무기를 놓지 않은 채 레만을 응시했다. 어떤 무엇보다도 믿을 수 없는 상대가 정신계 이능을 지닌 센티넬이었다.

“이야기를 좀 합시다.”

“……”

“다 아는 사이에 그렇게 낯가리고 있을 겁니까? ……뭐, 좋습니다. 혼자 떠드는 데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리페, 이미 알겠지만…… 저 자식 말 듣지 마. 뭐라고 지껄이더라도 사람도 다 못 된 게 짖기까지 하는구나, 해.]

레만이 떠드는 목소리 위로 이리트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귓가에 착용한 장비 탓임을 알면서도 꼭 이리트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리트는 정확하게 레만이 입을 놀릴 때마다 동시에 말을 건네 왔다. 주의를 돌리려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리트는 사소한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그가 사용하는 이능의 정체는 일종의 최면술이나 다름없음을 상기한 그리페가 문득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웨이드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 거야. ……아니, 반응 보니 누구 하나는 벌써 당했군. 네게 큰 위협은 아닐 테지만, 그리페, 항상 등 뒤를 조심해. 지금만큼은 아무도 믿지 마.]

정신계는 센티넬 중에서도 분명 드문 편이었다. 그런데 왜 팔마의 비숍도, 레만도 비슷한 결의 목적을 지니고 움직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하는 행동마저 똑 닮아 있었다. 저와 같은 전투계 센티넬에 비하면 신체 능력이 한참은 뒤떨어지니, 주변의 사람을 이용하려 드는 점마저 비슷했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이미 겪어 익숙한 일이었다. 새삼 충격을 받을 것도 없이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손목을 세게 후려쳐 무기를 떨어트리게 했다.

일전 비숍이 했던 일과는 다르게 이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오롯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레만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겼다. 자신의 목적을 밝히는 것 같았다가, 어느 순간엔 이쪽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답하는 이가 없건만, 머쓱하지도 않은지 레만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제가 연단에라도 서 있는 줄 아는 게 분명했다. 그는 말로써 타인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으니, 그의 삶은 언제나 강단 위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몰랐다.

창백한 형광등은 전력이 불안정한 듯 이따금 깜박이고, 그럴 때마다 다가오는 공격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레만은 주변을 끊임없이 이동했다. 어느새 다가온 이는 난전 속까지 파고들어 아군을 공격하려 드는 센티넬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짐짓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자신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뜻을 함께해달라 설파했다. 교활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귓가를 파고들었으나, 자각하지 못한 채 귀를 기울이려 할 때마다 이리트의 목소리가 저를 붙잡아 당겼다.

분명 이쪽의 소동이 이리트에게도 전해지고 있을 텐데, 이리트는 신기할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레만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가는 만큼, 그에게 홀린 이들이 늘었다. 처음부터 전부 떼어 놓고 혼자 진입하는 게 옳았을까. 하나 레만 외의 전력도 어느새 나타나 이쪽을 공격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분명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아군을 공격하는 이들 중엔 드물지 않게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한가락 하는 범죄 단체 소속 인물이 드물지 않게 섞여 있는 탓이었다. 레만은 그들의 이성마저 흔들어 이용하고 있을까. 따져 보자면 그러한 이들을 설득하는 게 협회 소속 센티넬을 뒤흔들어 놓는 것보다는 쉬우리라. 언제나 무언가를 욕망하며,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허덕이는 이가 대다수였으므로.

얼추 다 깎아 놓았다고 생각한 전력은 생각보다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이따금 한쪽에서 울리는 폭음. 난전 중에도 알 수 있는 건, 레만의 이능에 넘어간 이들조차 뒤늦게 나타난 적을 우선 공격한다는 점이었다. 비효율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광경은 아마도 그가 지닌 이능의 한계일 터였다. 어쩌면 레만에게 권력이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었으리라.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그리페는 끊임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나가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사람은 대개 일면식 없는 적이었고, 어느 순간에는 등을 맡길 수 있던 동료였다. 이곳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레만은 때때로 제게 향하는 공격은 잘도 피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 높여 제 주장을 펼쳤다. 시작은 둘이었으나, 레만 덕에 세 집단으로 나뉜 이들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여기저기 튀는 피, 들끓는 기세가 제각각의 상대를 향했다.

“이리트, 아군 중에 몇이 넘어갔어요?”

[잠시만. 웨이드, 확인 좀 해 봐. ……대략 삼 분의 일 정도. 예상치보다 적네.]

이곳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리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분했다. 위기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저까지도 열기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새 물기가 거의 다 마른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리페가 한숨을 삼켰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레만은 끊임없이 이능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 삼 할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리는 이들이 늘어날 확률이 높았다. 레만에게 반동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멍청한 일이었다. 모든 공격이 자신을 향한다 한들, 레만을 먼저 쓰러트려야 했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지만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만을 먼저 처리해야 해요.”

[……내게 허락받지 않아도 돼. 보고도 마찬가지고.]

“당신이 걱정할까 봐, 이리트.”

[괜찮아. 거기까지 갔다면…… 네가 멀쩡하게 돌아올 거 알아.]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저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런 의문을 꺼내기에 적합한 때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페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진 주인 모를 무기 하나를 집어 한가운데 선 레만을 향해 집어 던졌다. 파공음을 울리며 거의 직선으로 날아가는 냉병기를 발견한 레만은 급히 몸을 틀어 투사체를 피했다. 그의 뒤에 자리한 수조에 박힌 칼.

투명한 유리관에 긴 실금이 새겨지더니 유리가 폭발하듯 터지며 내부의 액체가 쏟아졌다. 그 안에 의식 없이 갇혀 있던 이가 덩달아 튀어나오며, 유리 파편 따위에 긁혀 벗은 몸 위에 상처가 새겨졌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그리페의 곧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실내 전투는 늘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특이 제 움직임에 제약을 거는 사물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의식 없이 바닥을 구르는 이를 건져낼 새도 없이, 그리페는 옆쪽에서 덮쳐 오는 이를 제압해야 했다.

이미 터져 버린 수조는 당장 수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깨지 않는 게 최선일 뿐. 제 성향을 이미 아는 레만은 수조 사이를 오가며 그리페의 주위를 맴돌았다.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요령 좋게 장애물을 이용하며 움직이는 레만을 잡기가 어려웠다. 동시에 레만에게 제대로 집중하면 언제 어떻게 그의 이능에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만전의 상태이며, 저는 이미 앞선 전투로 반쯤 너덜거리는 상태였으므로.

때를 모르고 치미는 피를 삼킨 그리페가 짐짓 여유로운 듯 걸었다. 수조를 방패 삼는다고 해도 레만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그리페는 창도 들지 않은 채 레만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서늘한 빛을 발하는 벽안, 함부로 나아갈 수도 그저 멈춰 있을 수도 없는 때에 저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잠시간 가만히 선 채, 그리페는 숨을 골랐다. 레만의 목소리가 이제는 오롯이 저를 향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해서 같은 협회에 소속된 아군에게 무기를 겨눕니까. 그리페, 그리페 하랄트! 가엾은 센티넬 같으니.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누구를 공격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고 있기는 해요? 당신이 지닌 것도, 협회의 동료도, 모조리 다 잃고 나서야 깨달을 겁니까?”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레만의 말은 얄팍하며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제게 한해서는. 하나 그게 그리페의 마음속에 남은 불안감을 자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나. 창을 쥔 손끝이 일순간 떨리지 않았던가. 그리페의 숨소리가 흐트러진 건 아니었나. 전투에 집중하는 그리페는 말수가 평소의 절반 이하로 줄었으므로 확신할 수 없었다. 레만은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어느 때에는 자신을 걸고넘어지고, 또 어느 때에는 주위를 둘러보라며, 저기 쓰러진 이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지는 않냐고 묻기도 했다. 그리페가 더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게 해야 했다.

“그리페. ……그리페? 대답해.”

[……이리트.]

낮은 목소리는 한참이 지나, 가까스로 들릴 만큼 희미하게 응답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이리트는 그리페가 듣고 있음을 알면서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좁은 화면 너머 보이는 그리페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창을 겨누고만 있을 뿐,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리페 주위로 레만이 주위를 느리게 돌며 조금씩 다가왔다. 언제 달려들지 알 수 없는 짐승을 경계하듯이.

“그리페, 내 말 듣고 있어? ……저 말에 매몰되지 마. 대답해, 그리페. 어서.”

내내 끊어진 적 없는 통신기에서는 자잘한 전장의 소음만이 이따금 전해졌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페에게 몇 번이고 주의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을 근간부터 가능한 한 명확하게 설명했다. 하나 정신계 센티넬이 지진 건, 대개 안다고 막을 수 있는 성질의 능력이 아니었다. 협회는, 정확히는 레만의 협회는 S급 센티넬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살피곤 했다. 그들은 그리페의 약점을 알았다.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을 약점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그 외에 더 적합한 표현이 없었다. 하나 저는 불리할 줄 알고도 그리페를 내보낸 거였다.

아니, 실상 그 외의 누구를 전면에 앞세웠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결국 제가 자초한 일이었다. 조금 더 신경 써서 그리페의 주의를 돌려놔야 했는데.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그리페에게만 단독 채널을 할당한 거였는데. 후회는 아무리 빠르게 한들 늦기 마련이었다. 근접해서 싸우는 이에게 애초에 소리를 차단하는 방식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페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확신한 레만이 다가와 그리페의 귀에 꽂힌 리시버를 빼내려 하는 것 같았다. 내내 움직임이 없던 이가 일순간 물러서 다가오는 손을 쳐냈다. 아직 그리페가 완전히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확신하기 어려운, 희망에 더 가까운 일이었으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웨이드, 그리페 주위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해.”

“왜, ……아니, 알았다.”

어느 때보다 서늘한 표정을 목도한 웨이드는 찰나 상황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드가 분명 반대하리라 생각했던 이리트는 잠시 그를 의외라는 듯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레만의 이능은 점진적인 세뇌 혹은 최면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 직접적인 도움이 있다면 정신을 차릴 테지만, 괜히 다른 이들까지도 그의 이능에 당할 확률이 높았다. 웨이드도 그걸 모르진 않았을 테니 찬성한 걸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레만은 제 이능으로 길들인 이들을 이용하여 아군을 치도록 유도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제 목소리에 반응하니 아직은 괜찮다고, 이리트는 저를 달랬다.

그리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페가 해야 할 몫을 읊고, 그마저 휩쓸렸을 때 일어날 피해를 말해주어도 제대로 된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동기로도 부족하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순간에도 레만은 자꾸만 그리페를 긁고 있었다. 아직 그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주어진 시간은 분명 길지 않았다. 그리페의 주의를 확실하게 끌어올 만한 방법이 필요했다.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었으나 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진입하는 것 자체는 가능했으나, 그리페가 정신을 차린 이후에는 제가 오히려 방해될 터였다. 이런 상황에 저까지 지키며 싸우게 할 수는 없었다. 자꾸만 레만이 비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화면을 보는 이리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패었다. 처음부터 그리페의 귀를 막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불가능한 일을 고민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고를 끊어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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