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06)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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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문득 눈을 뜬 그리페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창밖은 어슴푸레하게 푸른 빛을 발했다. 오전 다섯 시쯤일까, 지난밤 이르게 잠들었으니 평소에 자는 만큼은 잔 것 같았다. 이리트는 이불을 둘둘 만 채여서, 겨우 까만 머리꼭지만이 밖으로 드러났다. 평소처럼 침대에서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던 그리페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제 옆에 이리트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낯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는 이리트, 정확히는 이리트가 든 이불을 바라보던 그리페는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리트가 깨기라도 할까, 기척을 죽인 그리페가 방 안의 커튼을 닫았다. 이리트도 잔뜩 지쳐 이르게 잠들었으니 평소처럼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일어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이르게 일어나는 것보다는 푹 자는 게 낫겠지. 이리트의 꾸준한 불면을 저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어둑한 방의 문을 닫고, 그리페는 바깥의 욕실로 향했다.

이리트는 정말 말 그대로 집안 풍경을 보존한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일말의 필요성조차 없는, 오로지 제가 필요해 가져다 둔 쉐이빙크림과 면도기까지 그대로였다. 잠시간 제 물건을 응시하던 그리페는 익숙하게 선반 안에서 새 칫솔을 꺼냈다. 빠르게 양치질과 세수를 끝낸 그리페는 장기간 손이 닿지 않아 녹이 슨 날을 바꿔 끼웠다.

얼굴 위로 조밀한 거품을 바르고, 면도칼을 들었다. 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거품이 닦이고, 하루 새 자라난 수염이 말끔하게 잘려 나갔다. 얼굴을 이리저리 비쳐 가며 수염을 깎은 그리페는 혹시 남은 것이 있지는 않은지 손끝으로 제 턱을 더듬었다. 손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러운 턱, 다시 한번 얼굴을 씻어낸 그리페가 물기가 남은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욕실 불을 끄고 나온 그리페는 시간을 확인했다. 사 분 뒤면 오전 여섯 시였다. 여유롭게 준비한다고 한 거였지만, 일어난 시간이 워낙 이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이리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 저녁 식사까지 자연스레 건너뛰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면 뒤늦게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본들, 텅 빈 내부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근처 식료품점은 일곱 시에나 문을 열었다.

할 일을 찾자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은 제가 떠날 때와 큰 차이 없이 말끔한 편이었으나, 그리페는 다시 한번 내부를 쓸고 닦았다. 이리트는 때때로 세세한 부분을 놓치기도 했으니 특히 그런 부분을 중심으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용히 청소를 얼추 마치면,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혹시 일찌감치 깨어난 이리트가 저를 찾을까, 식탁 위에 메모를 남긴 그리페는 옷을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이리트와 함께 장을 보면 좋을 테지만, 이리트는 아마도 오늘 내내 그다지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을 터였다. 이리트의 허리를 조금 주물러 주면 좀 나으려나,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그리페는 식료품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카트 하나를 밀며 그리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 이미 메뉴가 들어 있는 사람처럼, 그리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각종 채소와 육류, 빵 따위를 카트에 실었다.

거의 멈추는 일 없이 카트를 밀던 그리페의 발걸음이 문득 간식거리를 파는 칸에서 멈추었다. 푸른 눈이 매대를 빠르게 훑었다. 이리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으음, 짧게 침음한 그리페는 결국 시선을 돌렸다. 제가 옆에 붙어 있을 테니 간식류는 사지 않는 게 나았다. 이리트는 불만을 표할지도 모를 테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 제과제빵이라도 배울까. 일단 떠올리고 보니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과자나 초콜릿 따위를 대신해 이리트의 입에 물려 줄 과일을 마지막으로 담고, 그는 성큼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트렁크에 짐을 옮겨 싣고, 문을 닫았다. 그렇지 않아도 입이 짧은 이리트는 첫 끼니는 유독 대충 먹으려 드는 경향이 있었다. 아침부터 육류는 먹으려 하지 않을 테고, 토스트를 만들까. 우두커니 선 채 생각을 거듭하던 그리페는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고민은 가서 해도 늦지 않았다.

자꾸만 이리트를 생각하게 되는 건 고작 하루 전과 지금이 차이가 없는데 안정감의 차이는 이토록 컸다. 일상생활에서는 어쩐지 허술한 구석이 있는 이리트를 챙기는 게 제가 예상한 것보다 적성에 잘 맞았던 모양이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차에 올라타 출발하려는데 옆에 대충 둔 기기가 울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연락이 올 곳이 없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화면을 확인한 그리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이리트, 벌써 일어났어요?”

[잠깐 깼는데…… 옆에 네가 없어서……]

“메모 못 봤구나. 냉장고가 텅 비었길래 근처 식료품점에 왔어요.”

[……]

“금방 갈게요. 더 자도 돼.”

[응……]

낮게 잠긴 목소리, 평소보다 느리고 웅얼거리는 어투는 어떻게 들어도 잠이 덜 깬 티가 났다. 이리트가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기기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통화가 먼저 끊어지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졸고 있을지도 모르지. 부러 통화를 끊지 않은 채 그리페는 기기를 거치대에 걸었다. 스피커 너머에서는 이따금 느린 숨소리가 울렸다.

 


 

양손에 짐을 들고 돌아온 그리페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가죽 소파 팔걸이 너머로 삐죽 튀어나온 하얀 이불 끝자락 탓이었다. 그 자리에 짐을 내려놓은 그리페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몸을 웅크린 이리트가 이불을 대충 덮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얼굴 위를 덮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긴 그리페가 콧잔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기척을 느끼고 열리는 눈꺼풀, 매섭도록 날 선 눈빛은 저를 알아보자마자 누그러졌다.

“왜 여기서 자.”

“가기 귀찮아서…….”

인과관계를 자르고 뚝 떨어진 말이었으나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잠결에 저를 찾으러 나왔다가, 제 위치를 알고 나니 허리도 아프겠다 그대로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는 뜻이리라. 더 잘 거예요? 속삭이면 이리트는 눈도 뜨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깨우지 말 걸 그랬나. 고민해 봐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배 안 고파.”

“저녁도 걸렀잖아, 이리트.”

게으름을 피우듯 눈을 감은 채 입만 움직이던 이리트가 단박에 눈을 뜨더니 저를 빤히 바라봤다. 다소 찔리는 것이 있는 그리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소파 앞에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내려둔 짐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데도 꿋꿋하게 따라붙는 시선 탓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힘들다는 이리트를 밀어붙인 건 저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뾰족한 시선은 오래지 않아 거두어지고, 그리페는 한층 편안하게 텅 빈 냉장고에 식료품을 채워 넣었다.

이른 아침이니만큼 무거운 요리는 부담스러워할 터였다. 토스트 정도면 부담스럽지 않은 선이겠지. 버터를 녹인 프라이팬 위에 식빵을 얹고, 다른 팬 위에는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까 넣었다. 조용한 집 안에 지글지글 달걀 익는 소리가 울렸다. 양배추를 씻고, 채반을 툭툭 털면 이리저리 물이 튀었다. 때마침 익어가는 달걀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한 면이 노릇해진 식빵을 뒤집었다. 그즈음 등 뒤에서 느릿느릿 발을 끌며 걷는 걸음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치즈와 슬라이스 햄을 꺼낸 그리페는 문득 이리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트.”

“응.”

“토스터 살까.”

“갑자기?”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

“사면 되지, 그럼.”

“짐 늘어나면 싫어할까 봐.”

“그건…… 벌써 많이 늘지 않았나.”

그것도 그렇긴 했다. 원래 이리트의 집은 살풍경하다시피 비어있었으므로. 분명 필요한 것 위주로 샀건만 돌아보니 이런저런 가전이며 가구가 제법 많이 늘었다. 이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한 반응이 어쩐지 좋아서, 그리페는 웃는 낯으로 이리트의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같이 사러 갈까.”

“음…… 너 안 바쁘면.”

“시간은 내면 생기죠.”

그들은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씹었다. 이리트가 네 등분으로 자른 토스트의 절반을 먹는 사이, 그리페는 제 몫의 토스트 두 개를 말끔하게 먹어 치웠다. 그리페와 식사를 함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언제 봐도 신기하기만 했다. 먹는 양 자체야 몸을 쓰는 게 직업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리 서둘러 먹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그릇이 말끔하게 비어있다는 점이. 세 번째 조각을 집어 든 이리트는 제 그릇을 그리페 쪽으로 슬쩍 밀었다.

“벌써 배불러요?”

“응.”

“먹는 양도 줄었나……”

“아침이라서 그래.”

이 정도면 평소보다도 많이 먹은 편이었다. 애초에 제가 이 시간에 식사하는 일부터가 드물지 않던가. 그리페에게 말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으므로, 이리트는 말을 늘어놓는 대신 얌전히 입안에 든 것을 씹었다. 그리페는 더 먹으라 종용하지 않고, 남은 조각을 제 입에 홀랑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릇을 거두어 그릇과 프라이팬을 씻었다.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은 이리트는 느슨하게 턱을 괴고 그리페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그리페의 왼손이 눈에 들어오면 잠시간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그리페, 네 손의 반지 말인데…… 내게는 없던데.”

왼손 약지에 낀 반지이니 그건 분명 과거의 저와 그리페가 맞춘 물건이리라. 그러나 제집 어디에도 같은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였으나, 지난밤 얽히던 손가락 사이 이질적인 감각을 느낀 이상 잊을 수 없었다. 잠들기 전에 말하려 했으나 그나마도 제 체력이 달려 본의 아니게 미뤘던 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릇을 건조대에 올려두던 그리페가 일순간 멈칫했다. 잠시만, 이리트. 그는 걸어둔 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성큼성큼 거실로 향했다.

이리트의 반지는 그날 이후로 내내 제가 가지고 있었다. 흠집이라도 날까,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싶어 케이스에 곱게 넣은 채로. 때때로 저를 마주하는 이리트가 언젠가 반지에 관해 물어보거나, 기억을 떠올려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그사이 여기저기에 군티가 새겨져 있었으나, 그리페는 아무렇지 않게 표면 위를 손으로 슥 쓸었다. 온갖 장비를 넣어두는 데 쓰는 가방이었다. 작은 주머니에 따로 넣어두었다고 한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케이스는 얼마든지 새로 살 수 있으므로.

작은 상자를 한 손에 숨기듯 쥔 채, 그리페는 이리트의 앞에 자연스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프러포즈라도 하듯 뚜껑을 연 케이스를 내미는 이. 그리페의 행동은 그린 듯 멋졌으나, 이리트는 반지를 받아 들지도 못하고 마른세수했다. 그리페는 평상복 차림이기나 하지, 저는 방금 자고 일어나 잠옷을 입은 건 물론이고, 까치집이 된 머리조차 정리하지 않았다. 반지를 받아 드는 대신 그리페의 손을 잡아끌면, 그는 쉬이 제게 딸려 왔다.

“이런 꼴로…… 그렇게 반지 받고 싶지 않거든.”

“예쁘기만 한데, 이리트.”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거나, 제가 사소한 불만을 표할 때면 그리페가 웃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리페는 제가 그의 얼굴에 약하다는 점을 잘 아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가 저 얼굴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면, 그리페는 제 손을 끌어다가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날 당신이 내게 맡겨뒀어요. 반지를 건네는 표정이 결연해서 이유도 못 물어보고 받았다가…… 내내 가지고 있었어요. 억지로라도 당신 손에 다시 끼워 줄 걸 그랬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만일 그랬다면 이리트는 조금 더 빨리 저와 그의 관계를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반지를 보며 제 생각을 한 번쯤은 더 했겠지. 물론, 이리트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한들 이리트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리페는 가만가만 이리트의 손을 어루만졌다. 딱 맞던 반지는 미묘하게 헐렁한 기색이 있었다. 훌렁 빠져 버리거나 낀 채로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레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너와 관련된 어떤 부분도.”

“……”

“나쁜 뜻이 아니라. 음, 나를 이용해 너를 휘두르는 꼴이 보기 싫었을걸, 기억의 잃기 전의 나는. 레만, 그 자식은 감정조차 수단으로 보니까.”

레만의 이름을 떠올리면 새삼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노회한 쥐새끼는 어느 틈에나 제가 도망갈 틈을 파 두는 탓에 목숨을 건 계약으로도 수작을 부리는 걸 막지 못했다. 그리페와의 관계도 어떻게든 안정되었으니, 가까운 시일 내로 레만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지. 먼 곳을 향하는 이리트의 시선이 형형하게 빛나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리페가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이리트. 레만은……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응, 뭔데?”

“고마워요. 나를 구해준 것도, 당신이 내게 돌아온 것도, 전부.”

“고마울 것까지야.”

머쓱한 듯 시선을 피하면서도, 이리트는 제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맞닿은 살갗으로 전해지는 체온은 왜 그렇게나 포근하게만 느껴지는지. 한참이나 조용히 손을 잡고 있던 그리페는 이리트의 머리칼을 쓸어 정리했다.

“오늘은 긴급한 일 생기지 않으면 집에 계속 있을 거예요.”

“알았어.”

“필요하면 얼마든지 부려 먹어도 된다는 뜻이에요, 이리트.”

“날 뭐로 보고.”

“지금도 움직이기 싫어서 식탁에 계속 앉아 있는 걸 모를 줄 알고.”

“누구 덕분에 허리가 아파서 그래.”

“……침실에 데려다줄까요?”

“말 돌리는 거지, 그리페.”

그러면서도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이리트의 몸을 안아 들면 단단한 꼬리가 허벅지를 받쳐 든 제 팔에 휘감겼다. 안 무거워? 어제는 잘만 안기더니. 그때는 그런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었어. 하나도 안 무거워요. 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이리트는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조금 더 적응되면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안아 달라고 요구할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리페는 이리트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페.”

“응.”

“예전 이야기 해줘. 그러니까…… 내가 기억이 있을 때.”

“별로 재미있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궁금해.”

“알겠어요. 편하게 앉아 봐요.”

그리페는 잠시간 생각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타인의 시점에서 본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비록 어느 때엔 제가 그런 행동까지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그리페는 과거를 곱씹는 듯 때때로 말을 멈췄으나 그래도 흠잡을 것 없이 훌륭한 화자였다. 듣기 좋은 목소리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냈다. 몇 달 전, 팔마를 한창 상대하는 와중에 그들이 어떠했는지. 그때도, 이번에도 그리페의 폭주가 관계 발전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서류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무슨 남 일처럼 말하네, 이리트.”

“내 일 같지 않긴 하지. 기억도 없고.”

대부분의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그리페는 이리트의 말에 한숨을 삼켰다. 딱 하나, 그가 팔마에 납치된 순간만큼은 제 입으로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어 모르는 척 넘어갔다. 이리트의 기억이 돌아오기는 할까. 기억이 돌아오고 말고는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으나 그리페는 부질없음을 알고도 자꾸만 고민했다. 그때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과 이대로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 중 어느 쪽이 이리트에게 더 좋을지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아니, 저 스스로는 차라리 그 기억이 사라지는 편이 좋으리라 확신했으나 이리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리트는 자꾸만 제게 사라진 기억에 관해 물어오기까지 했다.

그리페는 괜히 이리트의 손을 붙잡고 쓰다듬었다. 과거 이리트는 제게 팔마에 납치당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정확하게 말해준 적 없었으나, 모를 수도 없었다. 이리트의 부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기실, 부상의 형태 따위를 운운할 필요도 없었다. 가이딩의 기본 형태는 신체접촉이었으며, 그로 인한 문제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가 명확하게 정립된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발생했다. 협회 내에서 생기는 분쟁은 그나마 사소한 편이었다. 협회 밖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차라리 참상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온갖 규율로 센티넬의 손발을 묶어도 드물지 않게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느슨한 바깥은 말해 봐야 입이 아픈 수준이었으며, 팔마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악질로 유명했다.

여전히 확신할 수단은 없었으나, 이리트는 기억이 사라지며 덩달아 트라우마 또한 사라지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완화된 것 같았다. 이리트가 영원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으면 했다. 관계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회복되었으며, 제가 아는 범위 내의 과거에 대해서는 이리트가 궁금해할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말해줄 수 있었으므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문득 이런 일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괴로워지면, 그리페는 반쯤 눕다시피 앉은 이리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유도 묻지 않는 이리트가 제 머리칼을 슬슬 쓰다듬었다.

“이리트,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응.”

“나쁜 기억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괜찮아.”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온 대답. 이리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며 묻던 그리페가 퍼뜩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선명한 자안은 한 치 흔들림이 없고, 올곧은 의지로 선명한 빛을 발했다. 저 혼자만의 고민이 쉬이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차마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자면, 이리트의 낯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도 알고 있어. 팔마의 일 말이야. 웨이드에게서 받은 서류에 적혀 있었거든.”

“……”

“납치당했다가 근 일주일 만에 구출됐다던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미치광이 센티넬이 가이드를 납치해다가 할 일이야 뻔하지.”

“당신이 겨우 돌아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이리트. 당신은 자주 괴로워했어요. 불면증은 물론이고, 겨우 잠들었다 싶을 때는 악몽을 꿨어요. 때때로 내 행동마저 두려워하면서도 당신이 내게 알리고 싶지 않은 눈치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내 옆에 있었잖아, 그때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걸. 확신할 수 있어, 그리페.”

“하지만 이리트, 당신은 비숍을, 팔마를 무너트린 날에도 악몽을 꿨잖아.”

“원흉을 죽였다고 각인된 기억이 곧바로 사라지진 않잖아.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때의 나도 결국에는 회복했을 거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억을 굳이 되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만큼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지.”

당시의 일이 그리페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게 분명했다. 팔을 뻗어 그리페를 끌어안으면, 떨리는 호흡이 느껴졌다. 차라리 제가 그를 의지했다면 이만큼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고민이 스쳤으나 인제 와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기였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만에 하나 돌아간다 한들 제 행동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다만 이리트는 그리페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다시 악몽을 꿔도 괜찮아. 아니, 어쩌면 이건 내 자만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어.”

“왜, 이리트?”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너랑 관련된 건 아까워서.”

담담한 이리트의 목소리가 전하는 뜻이. 기억을 잃어도 이리트는 이리트인 모양이었다. 이럴 때면 도저히 말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기쁘면서도 괴로워하던 이리트를 떠올리면 속이 쓰렸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이리트를 끌어안고 있자면 저를 토닥이던 손이 이제는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렇지, 나도 하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몸 상태 나빠지는 걸 알면서도 왜 다른 가이드를 안 만나봤어.”

이리트의 말은 정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왜, 라고 해도 이리트가 원하는 명확한 답을 내기는 어려웠다. 저도 알았다. 센티넬에게 가이딩은 필수적이었으며, 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 정도는. 이리트를 제외한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은 효율이 극단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고, 애초에 가이딩보다 격이 떨어지는 대체 약물은 당연히 제대로 들지도 않았다. 이리트를 만나기 전까지 제게 가이딩이라 함은 가이드와의 성관계를 의미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늘 완벽한 상태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허덕였다. 그래서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한계에 가까운 채로도 몸을 움직여 전투하는 데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지만,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했다. 어지간한 정도의 접촉으로는 최소한의 효율도 나지 않을뿐더러, 섹스한다고 해도 어차피 최상의 상태까지는 회복하지 못하므로. 그 모든 상황 내에서 예견하지 못한 점은 딱 하나였다. 이미 가이딩에 익숙해진 몸뚱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무너졌고, 그리하여 결국 이리트가 또다시 폭주한 저를 구해냈다는 것.

“당신의 관심을 끌고 싶었나.”

“……거짓말.”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가이드를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왜.”

“당신이 있기 전에…… 여태까지 내가 만난 가이드들은 아주 밀접한 접촉을 하고서야 겨우 숨통을 트이게 해줬거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리트가 입을 달싹였다. 곧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다문 이리트의 손끝이 제가 덮은 이불자락을 매만졌다. 굳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이이니, 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아채고도 남았으리라. 침묵하며 생각을 곱씹는 이리트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네가,”

“당신은 내가 다른 가이드와 붙어 있는 꼴을 보고 싶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건, ……상상만으로도 불쾌해지는 것 같네.”

“당신을 탓하는 말은 아니에요. 그만큼 피하고 싶었다는 얘기지.”

“알아.”

짐짓 덤덤하게 대답하는 이리트의 표정은 미약하나마 구겨진 그대로였다. 어디까지나 예전 이야기니까 마음 쓸 것 없어, 이리트. 이불을 매만지는 손을 붙잡고, 그리페는 제가 끼워 준 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풀린 듯 이리트가 부드럽게 힘을 주어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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