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03)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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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해는 결국 떠오르고, 제 피로감과는 별개로 세상은 아침을 맞이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며 자동차 엔진음 따위가 열린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와 진득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지난밤에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수면제는 그새 다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오늘 별일이 없으면 처방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이리트는 느릿느릿 기지개를 켰다.

먹는 둥 마는 둥 끼니를 때운 이리트는 잊은 건 없는지 확인하듯 집안을 둘러본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며칠쯤 더 쉬어도 상관없을 터였으나, 이토록 속이 시끄러울 때는 차라리 일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문제라면 그리페와 저는 파트너이니, 필연적으로 그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든 싫든 마주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리페는 저와 만나기 전에는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피로감이 몸을 짓눌러 운전마저도 귀찮았다. 긴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탄 이리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사가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닫아준 덕에 편히 도착하면,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리트는 뻐근한 목을 돌렸다. 겨우 하루쯤 잠을 못 잤다고 제 몸 상태가 이럴 리 없었다. 스트레스를 꽤 받긴 했지. 남이라도 된 듯 제 상태를 평가한 이리트가 걸음을 옮겼다.

제게 인사를 건네는 이도, 건네지 않는 이도 대개 아는 얼굴이었다. 얼굴이 낯선 이들은 근 일 년 사이 이곳에 새로이 발을 들인 인물들이겠지. 그리페가 그러했듯. 이리트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며 걸음을 옮겼다. 센터에는 가이드 개개인의 책상이 자리한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를 보는 것은 아니니 명목상 존재하는, 사실상 대기실 내지는 휴게실에 더 가까운 곳이지만 명칭이야 어떻든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제 자리에 앉아 의미 없이 인터넷 페이지나 뒤적거리고 있자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르데.”

협회 내에서 몇 안 되게 친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르네였다. 어디선가 제 소식을 듣고 오기라도 했는지 그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일이 터진 지 겨우 하루째였다. 그리페와의 거리감이 알려지기에는 시기가 지나치게 이르지 않나, 따위의 생각이 스치는 와중 르네가 과장되게 땀을 닦는 시늉을 해댔다.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너스레를 떠는 건지.

“얘기 들었어. 웨이드에게서.”

“내 얘기를 했다고.”

“음…… 대충만. 물어본 건 아니고, 그쪽이 먼저 털어놨어. 최근 기억이 없어졌다는 거랑 한동안 쉴지도 모른다는 것만. 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

“차라리 일하는 게 나아.”

“헤르데, 괜찮은 거 맞아?”

피로가 묻어나는 낯을 한 채로 이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거나, 괜찮지 않음을 알면서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이리트의 심정을 짐작한다고 한들 그를 말릴 방법은 없었다. 이리트가 그나마 말을 듣는 건 그리페뿐이었는데, 기억이 사라졌으니 아마 그리페가 오더라도 이리트를 쉬게 할 수는 없으리라. 그래도 친구 된 도리로서 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야 하지 않나, 고민하는 와중에 이리트의 전화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제가 앞에서 우물쭈물하든 말든 이리트는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이리트 헤르데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동은? 네, 그쪽에 합류하겠습니다.”

저 너머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이리트의 대답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응답한 이리트는 즉시 이동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어서 네 할 일을 하러 가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봤다. 본인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분명한 모습에 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 지금 되게 안 좋아 보여.”

“알아.”

“안다니 더 할 말은 없지만…… 무리하지 마,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 없어.”

“‘네 몸은 네가 챙겨야지.’ 였나. 다음 대사까지 알고 있으니 잔소리는 관둬.”

항복하겠다는 듯 두 손을 든 르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 짧은 인사를 건네면 르네는 손을 흔들고는 건들거리며 사라졌다. 고작 하루쯤 잠을 못 자고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고 얼굴에서 티가 날 정도라니, 근래에 꽤 잘 지내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잠깐 사이 기억이 사라진다면 이렇게 될 거라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변명을 머릿속으로만 뇌까렸다.

외근을 준비하는 이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누군가는 장비를 챙기며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누군가는 긴장을 풀려는 듯 몸을 풀고 있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장지원팀과 센티넬, 가이드가 뒤섞인 소란함 속에서 이리트는 한 겹 유리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목소리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으나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협회 내에서 이토록 제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건 한 명뿐일 테니.

“당신도 갈 줄은 몰랐어요.”

“내가…… 당신의 파트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쉬겠거니 했어요. 어제, 힘들어 보였으니까. 지금도…….”

“그렇게나 티가 납니까?”

당신의 뒷모습부터 이미 지친 티가 났다고 하면 믿어주기나 할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트는 늘 그렇듯 사람 틈바구니에서 한 발짝 멀어져 홀로 서 있는 것뿐인데도 왜 그렇게나 위태롭게만 보였는지. 어쩌면 그건 제가 지나칠 정도로 이리트를 걱정한 탓일지도 몰랐다.

모든 채비가 끝날 때까지 이리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제 옆에서 훌쩍 떠나지 않았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모를 일이었다. 이리트는 어떤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덕분에 고작 하루 새 피로가 새겨진 이리트의 얼굴을 낱낱이 살필 수 있었다. 내 생각을 했냐고, 그래서 밤을 지새운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리트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제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순간에도 이리트의 태도는 말문을 잘못 텄다가는 그대로 멀어질 것처럼 방어적이었으므로. 여러 고민과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출발해야 할 시간이 금세 다가왔다. 끝내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그들은 각각의 소속에 따라 나뉘어 험비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어수선함은 사그라지고, 그 공백을 긴장감이 대신 채웠다. 균열의 전조를 확인한 직후 파견된 현장지원팀은 이미 근방 민간인의 대피를 끝냈다. 텅 비어 버린 한낮의 도심은 언제 마주해도 낯선 분위기를 풍겼다. 저 높이 뜬 균열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선두에 선 그리페는 눈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갈라진 틈을 응시했다.

예측하기로는 3급, 예상에서 벗어나더라도 2급 이상 개체는 등장하지 않을 확률이 크다고 했던가. 휴가의 끝을 선언하기에는 적절한 수준이었다.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요도 없는 정도. 잠시간 눈을 내리감은 그리페는 숨을 골랐다. 잡념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밀어내야 했다. 한순간의 실수로 다치게 되는 게 저 하나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팀 단위로 움직이는 특성상 누구에게 그 불똥이 튈지 알 수 없었다.

괴수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괴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인 초기에 제압해야 했다. 그리페가 수신호를 보내는 순간, 그의 등 뒤로 도열해 있던 이들이 각자의 자리로 퍼져나갔다. 각종 공격이 일시에 내질러지고, 괴수의 살갗이 갈라져 첫 번째 피가 튀었다. 제자리에서 창을 한 번 돌린 그리페가 몇 걸음 가볍게 발을 내딛고는 창공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팀원들의 주 역할이 괴수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라면, 그리페의 역할은 괴수의 숨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잘 벼려진 날이 햇빛을 반사해 반짝인다. 묵직하게 내지른 창은 단번에 괴수의 목덜미에 틀어박히고, 내부의 뼈와 장기를 헤집으며 빼내는 순간 상처에서 피가 솟구친다. 알아들을 수 없으나 비명임이 확실한 괴성을 내지르며 커다란 괴수가 몸을 뒤튼다. 표정 한 번 바뀌지 않은 그리페는 태연하게 창날을 괴수의 몸에 박은 채 중심을 잡고, 무기를 빼내며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남긴다.

팔마가 무너진 지는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주일간 토벌된 균열에서 이상 현상이 보고되는 횟수가 줄었지만, 완전히 아무 문제도 없던 시절의 수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이대로 줄어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오랜 시간에 걸쳐 비틀어진 통계였다. 한순간에 돌아오는 건 어려울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건 결국 연구부와 정보부에서 결론을 내릴 문제였다. 저 같은 현장직이야 그저 괴수를 죽이고 균열을 닫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생각이 미치는 건,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만큼 위험에 빠지는 이들의 수가 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팔마 토벌 중 타격을 입은 제 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였다. 맞서 싸울 수단도 없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쉬이 괴수 하나를 쓰러트리고, 이제 막 빠져나온 다른 개체를 향해 다시금 공격을 지휘하면서도 그리페는 후방에 있을 이리트를 생각했다.

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여느 때처럼 임시로 새운 천막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지금 이리트의 몸 상태라면 쉬고 있을 것 같았으나, 동시에 예민하기 그지없는 이가 날 선 상태로 다른 이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에서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일을 빨리 끝내는 게 이리트를 쉴 수 있게 하는 방법이겠지. 전투를 지속하면서도 이리트를 생각하던 그리페는 문득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근 일 년 간의 기억이 사라졌다면, 비숍을 제 손으로 끝내고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느냐고.

피를 머금은 창이 또다시 괴수의 살갗을 찢고, 뼈를 갈랐다. 그렇다면, 만일 정말로 이리트의 악몽까지 사라졌다면. 그리페는 괴수의 반격을 쳐내고, 몇십 미터를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각력으로 괴수를 걷어차면 살이 움푹 파였다. 일순간, 그리페는 차라리 희망을 느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괴수를 팀원들이 기어이 넘어트리면, 그리페가 괴수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비릿한 향이 터지고, 하얀 뇌수와 피가 섞여 바닥을 적셨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이리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창을 휘둘러 날에 들러붙은 피와 살점, 지방 따위를 떨쳐내는데 귓가에서 균열이 닫히고 있음을 보고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전원 철수.”

빠르게 복귀한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잠깐 사이 흙먼지며 괴수의 체액 따위를 뒤집어쓰긴 했어도, 부상자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페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들은 오늘의 승리를 만끽했다. 저들끼리 환호하는 것도 잠시, 대다수가 제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한참이나 못 박힌 채 서 있던 그리페는 긴 한숨을 삼켰다. 이리트에게 물어야 할까. 하지만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 기억과 함께 가라앉았을 악몽까지 떠올리게 한다면.

직접적으로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 결론을 내리고서야 그는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내디디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막사 밖,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선 이리트를 발견한 탓이었다. 이리트. 버릇처럼 익숙한 이름을 부르자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리며 자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머뭇거리며 한 걸음 다가서면, 제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이리트가 도리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이리트 특유의 기운이 빠르게 주위를 잠식했다.

가이딩이었다. 지독하리만큼 달게만 느껴지는 기운의 주인이 몇 걸음 만에 제 앞에 당도했다. 미지근한 손이 뺨을 감싸고, 생각을 거듭할 틈도 없이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때를 놓친 새파란 눈이 크게 벌어졌다가, 느리게 감겼다. 괴수가 4급에 지나지 않았던 만큼, 가이딩은 분명 비접촉 가이딩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보다도 더 예민하게 제 상태를 알아채던 이리트니 이제 와 모를 리가 없건만. 호기롭게 입을 부딪친 것치고 이리트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놀라 굳었던 팔을 움직여 허리를 감싸면 이리트가 움찔거리면서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잠시간 입술을 뗀 그리페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색 눈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이리트, 싫으면 밀어내요. 가라앉은 목소리 끝이 갈라졌으나,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작게 벌어진 입술을 아프지 않도록 깨문 그리페가 한 손으로 이리트의 목덜미를 감싼 채 혀를 얽었다. 이리트의 손은 어느새 제 어깨를 짚었고, 품에 가둔 몸은 긴장한 듯 굳은 티가 났다.

이리트의 호흡이 불안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옷자락을 움켜쥐었던 손에 힘이 들어가 어깨를 밀어냈다. 여느 때처럼 버티는 대신 이리트가 원하는 대로 밀려나 준 그리페는 아무런 말 없이 이리트를 응시했다. 왜 입을 맞췄냐고, 멋대로 혀를 섞는데도 곧바로 밀어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색 옅은 입술이 잠깐 사이 피가 몰려 붉게 부어올랐으나, 곧 이리트가 손으로 가린 탓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상해.”

“싫었어요?”

대답 대신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리트는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게 어느 쪽의 확인이건 그리페는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생각만이 가득했으므로, 이리트의 묵묵부답에도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을 닦아내던 이리트의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저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았음을. 저와 이리트는 여전히 공식적인 파트너 관계였으며, 책임감에 비롯되었다 한들 이리트는 파트너십을 끊어 버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아직 주어진 시간은 많았으며, 제가 현장에 나서는 만큼 이리트를 만날 수 있을 테니. 이리트가 지난 추억을 잊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본인의 끔찍한 기억을 비롯하여 제가 병원에 앓아누웠던 모습도 잊었을 테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생판 모르는 남이던 시절부터 연인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차라리 상황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몇 번이고 만날 명분이 존재하므로. 그리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리트는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더니 막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처음 가이딩을 받은 그날처럼 차가운 일별이었으나, 그리페는 굳이 이리트를 쫓지 않았다. 평소보다 예민하게 날 선 이리트를 필요 이상으로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생각이 정리되고, 이리트의 반응을 보고 나니 한층 말끔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페는 조용히 웃다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전투는 끝났다지만, 모든 할 일을 끝마친 건 아니었다.


 

그리페는 때때로 먼저 연락을 해 오고, 통화가 끝날 즈음엔 매번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탓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이리트는 쉬는 날을 그리페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오늘도 그랬다. 옷을 고르다가 문득, 이리트는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의문스러워했다. 그리페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을 뿐이건만. 하지만 이미 약속한 시각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관두자고 하기엔 너무 늦었지. 적당하다 싶은 옷을 빼고, 펼쳐둔 나머지 옷을 옷장에 걸어 둔 이리트가 창밖을 살폈다. 드문드문 구름이 껴 있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채비를 마친 이리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에 익은 차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 통화 내용을 되짚어 봐도 제 기억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문 앞에 잠시간 멈춰 있자면, 저를 발견한 그리페가 차창을 내렸다. 상쾌하게 웃는 얼굴을 앞에 두고서는 왜 와서 기다렸냐고, 마음에도 없는 타박을 할 수가 없어서 얌전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처럼, 시트에 닿은 등 뒤며 허벅지에 따끈따끈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리트, 이후에 일정 있어요?”

“……없습니다.”

“말 편하게 해요. 종일 같이 있을 건데.”

“종일?”

“당신에게…… 바닷가에 가자고 하고 싶어서.”

“그런 얘기는,”

“안 했죠. 얼굴도 보기 전에 도망갈까 봐. 싫어요?”

모르는 사람에게는 태연한 무표정으로 보일 테지만, 그리페는 알았다. 지금 이리트는 꽤 당황한 모양새였다. 자꾸만 바깥으로 구르는 시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듯 작게 열렸다가 도로 다무는 입술 따위가. 아마 이리트는 거절하지 않을 테다. 그럴 줄 알고 벌인 일이었다. 일단 저를 만난 이후의 이리트는 매번 묘하게 무른 구석이 있었으므로. 그리페는 이리트가 얼마나 대답을 망설이건, 그저 기분 좋게 웃으며 이리트를 응시했다.

바다에는 따듯한 계절이 늘 한 박자 늦게 찾아온다. 아직 추울 테니 방문에 좋은 시기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함께하고 싶었다. 한겨울, 일 때문에 근처 바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균열을 닫고, 그때가 아니면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싶어 따로 빠져나와 시간을 보냈다. 이리트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고 해도 좋았다. 데이트라고 칭해도 모자람 없을 일 아니던가. 한참을 고민하던 이리트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이거 받아요.”

뒷좌석 쪽으로 뻗었던 그리페의 손에 잡힌 건 작은 쇼핑백이었다.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열어 봐요, 하고 덧붙이는 이는 어쩐지 들뜬 티가 났다. 이쯤 되어서 그리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이리트는 얌전히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 든 건 얇은 외투였다. 그러니까, 그리페는 제가 거절할지 수락할지도 모르면서 바닷가가 아직 춥답시고 이런 것까지 준비한 거였다.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도 줄 생각이었어요.”

“왜?”

“고르는 내내 당신 생각을 했거든.”

“……”

“입어 봐요. 별로라면 교환하는 게 나으니까.”

그리페는 옷을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잡아 주었다. 그리페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얇은 외투는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크기도, 심지어는 스타일마저도. 잘 어울려요.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페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자신을 잘 아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따듯한 차 안, 괜히 열이 오르는 듯한 기분에 이리트는 입었던 외투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놨다.

“……고마워.”

그저 선물을 받아 든 것뿐인데도,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함에 무릎 위에 올려둔 외투의 부드러운 천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다가온 그리페가 제 쪽으로 팔을 뻗었다. 등받이 쪽으로 바짝 몸을 붙이면, 그리페는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입꼬리를 휘더니 안전띠 고리를 잡고 멀어졌다. 찰칵, 소리가 울리는 순간이 되어서야 긴장을 푼 이리트가 뒤늦게 그리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으나 그는 태연한 낯이었다.

저 정도로 태연하면 외려 이쪽에서 따지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해지고 만다. 입을 꾹 다문 이리트는 편히 몸을 기댔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가는 바다에 도착하는 것보다 지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양 이쪽을 보던 그리페도 곧 정면을 보고 부드럽게 출발했다.

평일 이른 오후의 도로는 한산했다. 어쩌면 약속을 잡을 때부터 그리페는 바다를 갈 작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온갖 조건에 들어맞지 않았을 테니. 근방의 바다는 그리 멀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한 시간은 가야 했다. 얇게 코팅해 둔 차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한 탓일까, 졸음이 쏟아졌다. 운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자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생각했으나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해 수면제를 먹었건만.

“피곤하면 좀 자, 이리트. 도착하면 깨울게요.”

“그래도 운전하는데……”

“괜찮아요, 정말로.”

“응……”

느리게 깜박이던 눈이 금세 감겼다. 때마침 신호에 걸려 멈춰 서면, 이리트의 낮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페는 차를 멈춰야 할 때마다 이리트를 바라봤다.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리트가 한층 편하게 말을 건네는 것도, 제 옆에서 경계하지도 않고 잠드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트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제가 풀어졌음을 깨달으면 다시 날을 세울 게 뻔했으므로. 길고양이를 길들이는 것도 이만큼 조심스럽지는 않을 텐데. 세상모르고 잠든 이리트의 옆얼굴을 보던 그리페는 성마른 웃음을 흘렸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외려 길이 뻥 뚫려 예상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그러나 이리트는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날 기색이 없었고, 그리페는 이리트를 깨우는 대신 차를 세워둔 채 근처 카페에서 따듯한 커피 두 잔을 샀다. 이리트의 몫은 내부 홀더에 끼워 놓고, 운전석에 앉아 느리게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면 곧 이리트가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 한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더니 이내 그리페 쪽을 쳐다봤다.

“……깨우라니까.”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봐, 커피도 아직 뜨겁잖아.”

그리페가 내미는 잔이 따듯하긴 했다. 잔을 받아 한 모금 머금으면 부드러운 캐러멜 향이 입안에 퍼졌다. 조금 걸을까요, 이리트. 차분한 물음에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매어져 있던 안전띠를 풀고,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외투를 손에 들었다. 외투를 옆구리에 끼고 문을 열려는데, 그 잠깐 새 내린 그리페가 문을 열어 주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는 손까지 내밀 기세여서, 이리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스친 바람에서는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바닷바람이 오는 내내 따듯하게 데워진 몸에 닿으면 한기가 느껴졌다. 자연스레 그리페에게 잔을 맡긴 이리트가 외투를 걸쳐 입었다. 등 뒤에서 차 문이 잠기는 신호음이 울리고, 그들은 나란히 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주차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로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내려갈 거예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드넓게 펼쳐진 해변,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 구르는 소리가 아스라이 울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서 둥그런 자갈이 구르는 느낌이 났다. 때때로 파도가 스쳐 땅이 젖은 곳까지 다가서면, 이리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볕이 일렁이는 수면에 부딪혀 반짝이며 흩어지고, 낮은 파랑은 해변에 와 닿는 순간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졌다.

찬바람 부는 이른 봄의 바닷가에는 인적이 없었다. 세상에 꼭 둘만 남은 것 같아, 이리트는 수평선에서 눈을 떼고 옆을 바라봤다. 애초부터 저를 바라보고 있던 그리페와 시선이 마주칠 줄은 모른 채로. 시린 빛깔의 눈이 햇빛을 받아 바다만큼이나 반짝이는 듯했다. 처음부터 무슨 말을 꺼낼 생각으로 그리페를 본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일순간 말을 잃기에는 충분했다.

파도 소리며 잔돌이 구르는 소리 사이로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울렸다. 두근거리는 소리는 바로 옆에 선 그리페에게도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컸다.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리트는 거의 삐거덕대며 고개를 돌리고, 기계적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알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그러니까, 이런 달고 부드러운 커피 대신 찬물이라도 들이켜고 싶은 심정이어서. 이리트는 괜히 빈손을 꾹, 말아 쥐었다.

마냥 서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기면, 등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별말도 하지 않고 따라붙는 듯 가까운 곳에서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났다. 이리트는 한참이나 침묵하며 걸었다. 때때로 발 앞에 툭 튀어나온 몽돌을 걷어차기도 하며. 얼마나 말없이 걸었을까, 손에 쥐었던 종이컵에서 미약한 온기만이 느껴질 즈음 이리트가 다시 멈췄다.

“왜 바다에 오고 싶었어.”

“전에, 일 때문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당신이 많이 좋아했어요. 할 일을 마치고 나니 딱 해 질 녘이어서, 고작 한 시간 만에 해가 완전히 저무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는데도. 그리고는 다음에 꼭 시간을 내서 다시 오자고 약속했어요.”

“……”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리트, 약속 같은 건 모조리 잊어도 좋아. 나는 그저 당신이 즐거워하길 바랄 뿐이에요. 그래서 억지를 써 가며 오자고 한 거기도 하고.”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정말 티끌만큼도 원망스럽지는 않은지, 사라진 기억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러나 저를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에는 한 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아서, 이리트는 버거운 숨만 삼켰다. 그리페에게 묻지 않아도, 제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페가 제게 지닌 감정을. 그러면서도 제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리트는 다 식어 빠진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입안이 온통 달짝지근했다. 꼭 지금의 제 마음처럼.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그리페에게 비견될 만큼의 마음이 있는지 조금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불쾌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면서도,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확신이 생길까. 생각을 곱씹는데 문득 콧잔등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착각인가 싶어 옆을 바라보면, 그리페가 옅게나마 인상을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하늘은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맑은 편이었는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이내 표정을 풀더니 주저앉은 제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붙잡으면, 단단한 힘이 저를 순식간에 일으켜 세웠다.

“아쉽지만 돌아가야겠어요. 비 소식은 못 들었는데…….”

“일기예보 틀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하필 오늘 그럴 게 뭔가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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