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03)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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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파트너 할 생각 없었으면 이런 짓 안 했어.”

문을 닫는 짧은 찰나, 틈새로 보인 그리페의 표정이. 괜히 저까지 가슴이 간질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어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 순간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문밖에 선 이가 보이지 않을 줄 알면서도 뒤돌아 문을 응시했다.

“씻겨줄까요, 이리트.”

기뻐서 좀 돌아 버린 모양이지. 우리가 무슨 연인이나 그 비슷한 관계인 것도 아니고. 이리트는 대답하는 대신 문을 잠갔다.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바깥에도 들렸을 테다. 분명 몸을 혹사할만한 일은 없었건만 여기저기가 뻐근했다. 따듯한 물이 쏟아지면 조금 남은 찝찝함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참 만에 욕실에서 나와 보니 어느새 제 옷가지가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도 옷을 정리한 장본인일 그리페는 얼핏 보기에도 꽤 기분이 좋은 티가 나는 표정으로, 희뿌연 김이 가득 낀 욕실로 향했다. 닫힌 문 너머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 같았다.

이런저런 고민이 길어졌던 건지, 어느새 다가온 그리페가 제 옆에 걸터앉았다. 대충 닦아낸 물기 탓에 그의 가슴을 타고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잘 깎인 조각 같은 몸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오래된 듯 흐릿한 것부터 아직 붉은 기도 가시지 않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흉터까지. 개중에 이번에 다친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시선을 위로 올리면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파란 눈과 마주쳤다.

“안 아팠어?”

“괜찮아요, 이런 건.”

고민 하나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도, 이리트는 잠시간 흉터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페는 새삼 제 몸에 남은 흔적들을 살폈다. 흉한가, 하는 의문이 스쳤으나 이리트에게 물어볼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옷을 다시 걸쳐 입고 마지막으로 이리트가 외투를 편히 걸치도록 잡아주는 동안에도, 그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본부 내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귀찮기 그지없는 공식 절차는 거의 그리페가 처리해주었지만, 문제는 사람이었다. 오며 가며 어설픈 친분이 쌓인 이들은 제게 무엇이라도 물어보고 싶은 듯 바라보았다. 그보다 큰 문제는 제 옆에서 자꾸만 알짱거리는 르네였다. 무턱대고 아무 센티넬과 파트너가 되면 어떡하냐, 지난번에 대뜸 입술부터 비비더니 이럴 것 같더라, 언젠가는 네가 센티넬 하나에게 코가 꿰일 줄 알았다, 정도의 뜻을 가진 말을 매번 다르게, 쉼 없이 쏘아대는 꼴을 보고 있자면 경이로움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꾸할 생각도 없거니와, 별달리 틀린 말도 아니어서 이리트는 다소 잔소리를 듣는 기분으로 그를 내버려 두었다. 르네가 혼자서 이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떠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신이야 그리페의 임무가 일상적인 수준이었으므로 현장에 나가지 않았고, 애초에 대다수의 가이드는 현장까지 따라가는 경우가 드물다지만 저 자식은 현장직인데도 할 일이 없나. 입을 멈출 줄 모르는 이를 애써 무시하던 이리트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리트.”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르네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이리트의 시선이 대번에 돌아갔다. 제 옆에 있는 이를 확인한 그리페의 표정이 조금 굳은 채였다. 르네와 마주친 적이 있긴 할 텐데. 그의 성격에 현장직과 마찰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이리트는 귀찮은 듯 대충 손을 휙휙 저어 르네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리페의 옆에 따라붙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뭔데? 상태가 안 좋기라도 해?”

“그런 건 아닌데.”

“너는 좀…… 참는데 너무 익숙해서 문제야.”

한순간에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르네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란히 걸어 멀어지고 있었다. 이리트의 짜증스러운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르네는 깨달아야만 했다. 적어도 이리트에게는 저 센티넬이 ‘아무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가 이전의 일로 그리페에게 제대로 미운털이 박혔다는 것 또한. 둘이 곧 사귀고도 남겠는데. 중얼거린 르네는 잠깐 미뤄두었던 일을 해결하기 위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검은 세단에 몸을 실었다. 등받이에 편히 기댄 이리트가 말해보라는 듯,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그리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센티넬에게는 사소한 문제라도 남겨두지 않는 편이 더 낫다. 특히 그게 현장과 관련이 되어 있다면. 마찰이 일어난 상대가 센티넬이라면 다소 곤란할 테지만, 현장직이라면 얼마든지 마주치지 않게 조정할 수 있었으므로. 짧게 한숨을 삼킨 그리페는 꽤 오랫동안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별일 아니에요.”

“말하기 싫으면 관둬. 그래도 보고는 올려 둘 거야, 르네와 같은 현장에 내보내지 말라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당신이 떠나고 나서 그 사람이 꽤 무례한 질문을 했어요. 그게 당신과 관련된 질문이라.”

“하, 알만하지.”

“그런데 이리트, 지금 보니 당신과 꽤 친한 것 같네요.”

르네가 무슨 소리를 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르네가 입술을 비볐다는 소리를 유난스러울 정도로 많이 해댄 탓이었다. 이어지는 그리페의 말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종류여서, 이리트는 그대로 멈춘 채 눈만 깜박였다.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푸른 눈까지도. 짧은 침묵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스치고, 이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상념을 털어내는 건지, 그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이었는지.

“얼굴만 좀 아는 사이야.”

“어쨌든 간에요. 날 걱정하는 건 알지만…… 보고는 올릴 필요 없어요.”

“그래, 그럼.”

“이리트, 뭐 잊은 거 없어요?”

눈이 마주치고, 한 박자 늦게 이리트가 고개를 돌려 벨트를 맸다. 차가 매끄럽게 센터를 빠져나가면, 그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센터 주변은 뭐 하나 변하는 것 없이 늘 같은 풍경이었다. 색색으로 물들었던 가로수가 잎을 하나둘 떨어트리기 시작해, 도로며 인도에 마른 잎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녔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오후. 따사롭게 내리쬐는 가을 햇빛은 평화로움마저 깃든다. 늘 이러면 좋을 텐데. 이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수시로 안위를 위협하는 괴수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 순간, 그리페의 기기가 울렸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나른한 듯 잔잔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스러지고, 그 자리를 불온한 냉기가 대신 차지하고야 만다.

“갈 거지.”

“S급 중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에요.”

“나도 알아.”

그가 또다시 위험한 싸움에 뛰어들 걸 알면서도, 그의 의사를 확인하듯 묻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리페를 막을 명분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었다. 상식선의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는 괴수가 모습을 드러낸 곳으로 향할 테다.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은 곧 불쾌함의 연장선이었고, 제 옆에 앉은 이는 기민하게 제 상태를 알아챘다. 조금은 왜곡된 방향으로.

“내려 줄까요, 이리트. 현장이 많이 위험할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당신은 지금 꽤,”

“알잖아. 원래 내가 어떻게 일했는지. 가, 차 돌려.”

그리페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제 감정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데다, 센티넬이 하는 일이라는 게 감정에 매몰되어선 답이 없었다. 몇 분 전의 평화가 거짓말 같았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가을의 빛깔은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지러진다.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이리트의 손끝이 제 허벅지 위를 수십 번씩 두드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장은 가까웠다. 10여 분 만에 도착한 곳은 이미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였다. 민간인 대피가 거의 끝나가고, 현장을 중심으로 인원이 배치되어 사람의 진입을 막았다. 어지간한 건물과 맞먹는 크기의 괴수는 이 순간에도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제 앞길을 막는 건물이며 시설 따위를 마구잡이로 부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그리페 휘하의 팀원은 각자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금방이라도 출격할 듯 도열한 채였다. 제가 동행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더 다가가면 저 또한 다른 민간인과 다를 바 없이 센티넬의 전투에 방해가 될 뿐이다. 저 멀리, 괴수의 등 뒤에 자리한 불길한 균열을 바라보던 이리트가 벨트를 풀어내던 그리페의 손을 붙잡았다.

“다치지 마.”

“조심할게요.”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 같으면 내게 와, 참지 말고. 약속해.”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느냐고 대꾸하는 대신, 이리트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놓았다. 각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페의 옆에 따라붙은 이가 상황을 브리핑하고, 이리트는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대기 장소로 향했다. 불안은 늪처럼 발목을 붙잡아 이끈다. 이토록 불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같은 전장에 설 수 있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까. 무용한 가정임을 안다. 고개를 돌린 이리트는 기괴한 괴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익숙한 무기가 손에 감기고, 그리페는 심호흡했다.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고, 괴수는 자신이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종류였다. 그러나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 한순간의 방심은 언제나 사고의 원인이 되기에. 근방의 모든 민간인이 대피하고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미리 배치된 화기가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일반적인 수준의 병장기는 저 정도 크기의 괴수에게는 직격타를 입힐 수는 없었으나, 발을 묶기에는 충분했다.

코끝이 시큰거리도록 퍼지는 화약 냄새, 화창한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짙은 잿빛 연기. 무장한 센티넬들이 좌우로 퍼지고, 그리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이 괴수의 굽은 등 위에 꽂힌다. 창을 뽑으며 울퉁불퉁한 살갗 위에 올라서면 검붉은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등 뒤가 갈라지는 고통에 괴수는 울부짖으며 날뛴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울린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괴수의 몸체 위에서도 그리페는 한 치 흔들림 없이, 상처 위에 다시 한번 창을 꽂는다. 그리페의 뒤를 따르듯 괴수의 몸체 위로 올라탄 이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인간에게 너무도 낯선 형태를 한 괴수는, 도리어 그 구조만큼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었다. 붉은 피, 팔다리를 지탱하는 뼈와 그 중심이 되는 척추 따위가. 질긴 외피를 가르고 나면, 그 아래에는 연한 피육이 존재했다. 괴수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통에 버티지 못한 이들 몇몇이 나가떨어졌다. 무너진 건물 파편이 이리저리 튀어, 그것만으로도 유리가 깨지고 시설물에 흠집이 생겼다.

내내 몸을 비틀던 괴수는 한 팔로 철근을 뽑아 들더니 제 등 위를 훑어내듯 휘두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두 발로 일어서 등을 건물에 부딪쳤다. 길게 찢어진 상처 사이로 살이 뭉개지며 큼직하게 금이 간 건물 외벽이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되었다.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괴성을 내지른 괴수는 더 이상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듯 눈을 굴렸다. 기묘하게 인간의 눈동자를 닮은 세 쌍의 눈이 제각기 구르며 제 몸집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센티넬을 찾아 헤맸다.

길이가 다른 두 팔을 내뻗어 센티넬을 붙잡으려는 움직임은 괴수의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재빨랐다. 섣불리 다가선 이 하나가 그대로 집어 던져져 건물에 처박히자마자, 그리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가 사람을 집어 던진 건물에 다가간 괴수는 충격으로 일순간 정신을 잃은 센티넬을 제 손안에 쥐려 했다. 건물에 처박힌 것 정도는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어지간한 센티넬은 그 정도 부상으로 죽지 않으므로. 그러나 괴수가 그 힘으로 사람을 쥐어 터트리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찰나 판단을 마친 그리페가 다시금 비상했다.

괴수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그리페가 창을 휘둘러 큼지막한 눈알 하나를 찔렀다. 물컹한 감각이 창대를 통해 전해졌으나 불쾌한 감각에 주의를 빼앗길 만큼 상대는 만만하지 않았다. 창을 깊숙이 꽂은 채 힘껏 그으면, 눈과 눈 사이를 구분하는 얇은 피막이 찢어지며 한쪽 눈 세 개가 모조리 터져나갔다. 뼈를 긁으며 빠져나온 창날은 투명한 액체와 피막이 엉기어 엉망이었다. 그리페는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괴수의 머리를 밟고 뛰어 물러서는 움직임에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다른 이들이 기절한 센티넬을 구출했고, 겨우 의식이 돌아온 이는 곧바로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괴수는 한 박자 늦게 제 얼굴을 더듬었으나 당연하게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고, 그저 끔찍한 고통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공격해대는 센티넬을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시야 반절이 사라진 탓에 빈틈이 너무도 컸다. 허연 뼈가 드러나도록 파인 등의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괴수의 발밑은 온통 철벅거렸다. 근방의 도로 여기저기에 붉은 웅덩이가 생기고, 그나마 멀쩡한 건물조차 핏자국으로 난장이 되어 있었다. 누적된 피해와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상처가 괴수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끝이 머지않았음을 아는 건 괴수뿐만이 아니었다. 공격의 선두에는 매번 그러했듯 그리페가 있었다. 처음과 하나 다를 바 없이 형형한 눈은 기민하게 적의 상태를 파악하고, 약점을 노렸다. 괴수의 목뒤를 노린 공격은 예상한 만큼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긴 날을 넘어서까지 박혀 든 창, 괴수의 벌린 입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괴수의 거체가 서서히 무너졌다. 무릎이 꺾이며 그의 몸 아래 고였던 피 웅덩이가 밀려나 도로 위를 또 한 번 적셨다. 목을 뜯어내다시피 하며 창을 빼낸 그리페가 땅 위에 발을 디뎠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 수시로 신경을 긁던 끔찍한 울음소리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내내 바깥을 살피던 이리트가 가장 먼저 기색을 알아채고 이동했다. 속이 메슥거리도록 치미는 피비린내, 얼핏 보기에도 엉망이 된 주변 따위가. 올곧게 선 이, 아래로 처진 창끝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페. 제 이름이 들리자 들어 올린 고개, 뺨 위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당신이 한 말, 잘 지켰어요.”

전투 직후의 센티넬에게는 곧바로 다가서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원칙 따위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닥을 적신 액체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다가선 이리트는 제 센티넬의 상태를 살폈다. 검은 전투복은 가까이서 보고서야 피로 여기저기가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부위에 시선이 머물면 그리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다쳤어, 이리트.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거친 전투 직후에도 그리페는 이전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 난장판의 뒤처리는 전투에 참여한 센티넬의 몫이 아니었으므로, 간략히 보고를 마친 그리페는 걸음을 옮겼다. 평상시라면 다른 센티넬과 함께 센터로 돌아가 피에 절어 버린 장비며 옷을 해결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리트와 함께 있으니 센터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차에 싣고 갈 수 없는 창과 겉에 걸치는 장비만을 맡긴 그리페는 이리트와 걸음을 맞춰 걸었다.

운전석 문을 열려던 그리페를 제지한 이리트는 제가 그 자리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타. 여지조차 주지 않는 단호한 말에 그리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운전을 못 할 정도는 아닌데, 중얼거리듯 말해도 운전석에 앉은 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피로가 쌓이지 않은 건 아니었는지, 편히 기대면 몸이 축 늘어졌다. 이리트의 옆얼굴을 이렇게 본 적이 있었던가.

“왜.”

“예뻐서.”

“…운전하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당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리트.”

“……”

“오늘 몸 상태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좋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 괴수는 혼자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전부 당신 덕분이에요.”

이리트의 시선이 잠시간 제 쪽을 향하고, 늘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더니 곧 사라졌다. 그 찰나가.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돌린 그리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리트도 사람인 만큼 언제나 표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 앞에서 웃은 적은 처음이지 않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자면 이제 막 첫사랑을 경험한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이리트의 집 욕실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고 선 채였다. 이리트와 파트너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이상을 원하는 건 욕심에 지나지 않을 테다. 김이 끼어 흐릿한 거울을 대충 닦아내면 온몸에 가득한 흉터부터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이리트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던,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 살갗을 문질러 닦아도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 기분이었다.

큼지막한 수건을 허리에 감고 욕실을 나서면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머그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커피를 내렸을 이리트는 안방 욕실에서 씻고 있는 건지,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렸다. 채도 낮은 실내 풍경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차분하게 보였다. 머그잔은 두 개였으나 그리페는 어느 쪽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해가 거의 다 져 가는 시간, 커튼을 치고 뒤돌아보니 어느새 가운을 걸친 이리트가 적당히 식은 잔을 집어 들고 있었다.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게 이리트이기 때문인지, 혹은 이전 전투의 여파로 감각이 조금 무뎌진 탓인지 모르겠다. 시선이 마주치고, 이리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운… 문 옆 선반 위에 뒀는데.”

“그랬어요?”

“말해주고 갈 걸 그랬네. 커피 별로 안 좋아해?”

“마셔도 되나 싶어서.”

“그러라고 둔 거였지.”

“씻고 나와서 내리지 않고?”

“뜨겁잖아.”

일순간 내려앉은 침묵. 이리트는 이 긴장감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기실, 지금만큼 적당한 때도 없긴 했다. 방금 큰 사건을 처리하고 왔으니 협회 쪽에서도 웬만큼 큰 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 그리페를 찾지 않을 터였다. 문제가 생기지 않을 선이라고 한들, 이능을 쓴 만큼 가이딩을 받아두는 게 더 좋기도 할 테지. 상황을 자각하고 나면, 그가 반라 상태라는 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제가 느낀 기류를 그리페가 모를 리가 없었다.

막 씻고 나온 이리트의 얼굴은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한 기색에 속절없이 웃음이 새고, 제 웃음의 이유를 대번에 알아챈 이리트의 시선이 뾰족해진다. 그럼에도 뺨을 감싸 입을 맞추면 허락하듯 입술이 벌어졌다. 망설이듯 잠시간 허공을 헤맨 이리트의 손이 제 허리께에 감기면, 그리페는 이리트가 걸친 가운의 매듭을 풀어냈다. 잘 여몄던 앞섶을 풀어 헤치자마자 매끄러운 나신이 드러났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싫은 건지, 새삼 놀라기라도 했는지, 이리트가 저를 밀어냈다. 거의 쏟을 뻔한 잔을 내려놓는 이리트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였다.

“하지 말까.”

“……”

“억지로 할 생각 없어요. 가이딩은…… 다른 방법도 있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낯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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