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prol.

laid back by Aeen
8
0
0

2022.10.30 작성



〈 소실점 〉

종일 꾸물거리던 하늘이 끝내 미적지근한 비를 쏟아내는 때, 매끄럽게 골목에 진입한 검은 세단이 문득 멈춰 섰다. 비상등을 켜고 내린 이리트의 구둣발이 그새 고인 물에 젖고, 우산 위로 빗방울이 굴러떨어진다. 푸릇한 식물이 틈새를 비집고 자라난 돌담에 겨우 기대어 널브러진 이는 의식을 잃었는지, 옷자락이며 머리칼이 젖고 있음에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날이었다. 평소라면 못 본 척 지나치거나, 여의치 않을 때에는 차라리 우회했으리라. 그럼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은 건 그의 행색이 길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의 것과는 다른 탓일지도 모른다. 이름 모를 남자는 누가 봐도 전투에 적합한 장비를 착용한 채였다. 특정한 패턴 없이 그저 먹빛 일색인 장비를 착용하는 이들은 하나뿐이었다. 센티넬과 가이드로 통칭하는 이능자 협회에 소속된, 그중에서도 센티넬이라 불리는 이들.

그러나 센티넬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가이드가 해결하거나, 여의치 않다면 센터가 수습해 가는 게 일반적이건만. 어쨌거나 그에게 눈에 띄는 부상은 없고, 폭주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왜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가. 고개를 들이미는 의문을 삼키는 일은 어렵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는 법이지. 이리트는 망설임 끝에, 남자의 앞에 쪼그려 앉아 굳은살 박인 손을 감싸 쥐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의식을 차릴 만큼이면 충분할 터였다.

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설프게 우산을 기울여 이미 젖은 남자의 머리에 씌우고 있자니 등허리가 빗물에 젖어 축축했다. 그의 손끝이 움칠거리는 순간, 이리트는 손을 떼어내고 그에게서 물러섰다. 찌푸려지는 미간,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 내뱉는 옅은 신음 따위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정도면 웬 센티넬 하나가 객사했다는 속보 따위를 들을 필요는 없을 테지.

이미 다 젖다시피 한 이, 부질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이리트는 제가 들고 있던 우산을 남자에게 대충 기대주고 차에 올라탔다. 등받이에 닿은 등이 찝찝했으나 여기서 옷을 벗어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답지 않은 일을 한 탓이지. 돌아가면 샤워부터 하겠다고 결심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골목을 빠져나가는 이리트의 낯이 미미하게 찌푸려진 채였다.


샤워가운을 걸친 채,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한 손에 든 이리트는 다시금 쓰러진 남자를 떠올렸다. 연상되는 것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착용한 장비로 미루어 보아 협회 소속 센티넬인 건 분명했고, 근래 센터 간 합동 작전이 없었으니 타지역 센티넬이 이곳까지 왔다고 하기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이리트는 기억을 찬찬히 되짚고서야 며칠 전에 본부로의 발령 소식이 떠올렸다. 제 관심사가 아닌 탓에 희미하게 묻혀 있던 일이었다.

어쩌면 센터에서 마주치게 되거나, 제가 가이딩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개입하는 대신 센터에 연락하고 자리를 뜨는 게 나았을까. 그러나 이미 자신은 답지 않게 접촉 가이딩을 시도했고, 기억 속 남자의 얼굴은 선명했다. 어차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방사 가이딩으로 충분하니 별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의식도 없던 이가 파장의 느낌을 기억할 것 같지도 않고. 이리트는 잠깐 사이 식어 미적지근한 커피를 삼켰다.

그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단말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특별히 알림음을 다르게 설정해 둔 번호는 딱 하나였다. 센터의 긴급 연락처. 그게 지금 울렸다는 건, 한가로운 휴식은 물 건너갔다는 뜻이었다. 그는 다소 짜증스러운 태도로 연락을 받았으나 제 소속과 이름을 대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제 자택과 멀지 않은 곳에서 센티넬이 전투를 벌였으며, 해당 센티넬의 상태가 심상찮다며 보내온 지원 요청이었다.

“현장 상황은? 접촉은 불가합니까?”

[전투는 끝나 수습 중이고, 현재 센티넬과 접촉이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늦어도 10분 안에는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날 먼저 부르긴 했겠지. 이리트는 통화를 끊으며 속으로만 뇌까렸다. 가이드라면 누구나 비접촉 가이딩을 할 수 있지만, 대개 효율의 문제로 접촉 가이딩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리트는 비접촉 가이딩을 주로 하는 특이한 케이스였으므로, 센티넬이 폭주하거나 폭주하기 직전의 상태일 때 일 순위로 호출되곤 했다. 접촉하지 않는다 한들 위험한 건 매한가지인 탓에 그만한 혜택을 더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누구든 휴식 시간이 이런 식으로 깨지기를 바라진 않을 테다.

문득 시계를 확인한 이리트가 혀를 찼다. 하필 이런 날에 비가 내렸다. 시간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부를 걸 그랬나. 물론, 투정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센티넬이 폭주할 가능성은 커지고, 그러면 외려 피곤해지는 건 저였다.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이리트는 집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식어갈 커피 따위는 나중 문제였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한구석에 차를 세워 둔 이리트는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빗줄기, 위험물이라도 되는 듯 거리를 둔 채 센티넬을 포위한 이들. 그 틈새로 보이는 밀빛 금발은 분명. 남자는 어지간한 사람보다 긴 창을 쥔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뛰어들 것처럼. 성큼성큼 걷던 이리트의 걸음이 일순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움직인다.

“늦었네.”

“이 정도면 빨리 온 거라고 봐야지, 르네.”

“저거 지금 잘못 건드리면 진정제부터 쏴야 하게 생겼거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 사람 꽤 유명 인사인데…… 아니, 너한테 기대할 게 따로 있지. 그리페 하랄트, 이번에 이쪽으로 온 센티넬이야. 하여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무장 보면 알겠지만 근접 전투계라 조심해야 해. 폭주한 건 아니고, 그 직전 정도?”

남자는 용케 아직 폭주하지 않는 상태 같았다. 창을 단단히 붙잡은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힘줄이 불거지고, 정상적인 호흡이 어려운 듯 숨을 헐떡이는 티가 났다. 고통을 견디듯 감은 눈, 저 스스로 깨물어 터진 입술의 핏방울 같은 것들이. 이상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센티넬은 짧은 의식불명 정도로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 마련이고, 거기에 짧게나마 가이딩을 받았다면 상태가 안정적이어야 했다. 게다가 현장이 부서진 집기 하나 없이 깔끔한 것으로 봐서는 전투 자체도 크게 위험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리페라 불린 저 센티넬은 어째서.

의문은 나중에라도 해결할 수 있다. 이리트가 현장에 다가서면, 다른 이들이 자연스레 길을 텄다. 그리페의 상황이 정확하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시시각각 상태가 나빠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느리게나마 회복할 기미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리트는 여러 상황을 상정해 보며 차분하게 이능을 움직였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기세가 제 힘이 닿는 대로 순한 양이라도 된 듯 이를 감추는 감각이 선연했다.

고개를 든 그리페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안도감이 뒤섞여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제게는 익숙한 표정이었으나, 이리트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건 숫제 힘을 빨아들이는 수준이고, 일회성 전투에서 일어날 만한 소모가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아본 적 없는 것처럼. 사고의 흐름이 일순간 덜걱였다. 그래, 그거였다. 이미 여러 징후가 보였으나 희귀한 경우인 만큼 고려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가벼운 현기증이 스치고, 이리트는 비 오는 골목길에서 그러했듯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그리페의 푸른 눈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흔들리면서도 이리트를 똑바로 바라본다. 접촉하지 않고서도 부작용을 진정시키는 이능의 소유자를. 단색 장우산 끝자락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불현듯 그리페는 잠시 의식을 잃었던 사이 제게 씌워져 있던 우산을 떠올렸다. 매달릴 곳은 그 하나뿐이라는 듯 창대를 쥐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어지간해서는 놓을 일 없는 창을 스스로 내려놓은 그리페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현장에 서늘한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두 사람을 가로막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뻗기만 해도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선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시선만이 서로를 꿰뚫을 듯 뚜렷하다. 기울어진 우산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호흡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깨지기 쉬운 조각을 건드리듯 조심스레 뻗은 하얀 손이 물기로 축축한 뺨을 감싸고, 그제야 그리페는 제 체온이 평소보다 낮음을 깨닫는다.

온기를 품은 손이 오래된 상흔을 더듬는 것과 동시에, 물에 잠긴 듯 먹먹하던 감각이 일시에 명정함을 되찾는다. 마주 닿은 살갗은 극히 일부임에도 오랜 지병이나 다름없던 이능의 부작용이 빠르게 스러지고, 그리페는 굴종하듯 눈을 감는다. 이 순간, 그는 제게 축복을 내리듯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드물게 짝을 이루는 케이스가 존재했다. 흥밋거리로 읽었던 정보가 한참이나 늦게 떠올랐다. 짝이 되는 이들은 특별한 절차 없이도 그들 스스로 알아챌 수 있다고 했던가. 마치 운명과도 같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대강 넘어간 문장이 이제 와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고, 그리페는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감각 속에서 생각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커플링
#리페릿
추가태그
#센티넬버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