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바람꽃 공전 - 3

EP. 몰착락(01)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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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5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당분간은 큰 작전이 없을 거라던 말을 증명하듯, 부대 내에는 다소 풀어진 분위기가 만연했다. 일상적이고 고된 훈련은 빠짐없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모든 훈련이 끝나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이리트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패스파인더에 속한 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신체 능력이 평균을 가볍게 웃도는 탓에 아직도 훈련을 따라가는 것이 버거웠다. 사실 심장이며 폐가 강철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시시때때로 터무니없는 의심이 일었다. 무의미한 생각을 곱씹던 중, 문득 제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힘들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급히 치켜든 고개, 눈이 마주친 그리페는 웃는 낯이었다. 사소한 무례 따위야 아무래도 좋을 일인 것처럼. 놀라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보려 입을 열었으나 그리페가 선수를 채 갔다. 그래 보여요.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건지, 농담이라도 건네고 싶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할 말을 잃고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면 그는 간단하게 먹기 좋은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돌아가는 중에 쓰러질까 봐.”

“……그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도 못했을 테다. 무게 없는 농담임을 알기에 이리트는 그가 쥐여 주는 작은 사탕을 거절하지 않았다. 약간의 당이 활기에 도움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므로. 포장을 뜯어 사탕을 입에 털어 넣은 이리트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간결한 인사를 건네면 그리페는 더 이상 저를 붙잡지 않았다. 우선 흙먼지와 땀을 씻어내고 싶었다.

젖은 머리칼 위에 대충 수건을 얹은 편한 옷을 주워 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조용한 개인 공간만 한 곳이 없었다. 그리페는 자꾸만 제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 순간 다가온 그리페가 말없이 시원한 물을 채운 수통을 내민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훈련은 단체로 이루어졌으나, 그 와중에도 짧은 자율 훈련 시간이 존재했다. 이리트는 그럴 때면 대개 다른 이들에 비해 모자란 체력을 단련했는데, 그때마다 자꾸만 그리페의 시선이 이쪽에 머물렀다. 고개를 돌리면 제 할 일을 하는 척을 해댔지만 아마 그 또한 그 모든 일이 큰 의미가 없음을 알았을 테다.

그 모든 일이 다만 상급자의 염려며 친절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일상적으로 그리페와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제 속에 어느 순간 자리한 균열을 쉬이 메워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페가 이토록 자주 모습을 보이다 못해 제 주위를 맴돌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부대 내에서도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반응은 대개 몇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았다. 하나는 은근히 그리페를 응원하는 이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를 파렴치한 취급을 하는 이들이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에 가까웠고, 그 또한 억울해하는 티를 냈지만 나이며 계급이 꽤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기에 크게 반발하지는 못했다. 그 외에도 이리트를 부추기는 이들이 있었으나 물론 이리트는 꿋꿋하게 그들을 무시했다.

그 모든 일이 마냥 싫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태평하게 연애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이며 계급은 제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이리트는 생각했다. 다만 자신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유예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일 년에 미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어쩌면 부대 자체를 괴멸시키는 원흉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라도 좋으니 미련이 남을 만한 것은 줄이는 게 제게도, 그들에게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리페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끈질겼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균열을 티가 나지 않도록 메우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와 이리트는 명확한 사실을 다시금 인정했다. 제 태도의 어떤 부분에서 가능성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지. 그는 종종 저보다 뛰어난 직감을 내보인 데다가, 이상할 정도로 제 표정을 잘 읽어냈으므로.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리트가 변절하지 않는 이상은 결코 바뀌지 않을 명제가. 제 출신과 목적이 지금과 달랐다면 이렇게 고민하기도 전에 그리페의 손을 붙잡았으리라. 그는 몇몇 결점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제 머리칼을 흩뜨린 이리트는 답이 나오지 않는 번민을 거듭했다. 쌍방이라 한들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잊어야 할 감정이었다. 감정에 휘둘려 목표를 잃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리페에게 적어도 그날이 오는 때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는가. 이미 꽤나 긴 시간 동안 모두를 태연하게 속이고 있었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면 필연적으로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리트는 생각에 잠긴 사이, 저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끼적인 상관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손에 피어오른 불꽃이 상념이 새겨진 종이를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 결단이 지금, 이 순간일 필요는 없었다.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그리 길지 않은 휴식기의 끝을 알리는 건 또다시 벌어진 반역이었다. 언제 풀어진 분위기가 만연했냐는 듯, 패스파인더 소속 인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기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들이 다른 행성과 손을 잡은 듯한 동태가 보였다는 거였다. 그 행성의 존재는 현재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구와 비슷한 수준일 거라고, 기울임체로 쓰인 보고서의 내용을 현재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내전 직후 자원의 부족함에 헐떡이던 지구가 집어삼킨 행성은 대개 알짜배기 자원을 하나쯤은 주력으로 생산해내는 곳이었다. 그건 곧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도 매력으로 작용하는 지점이었으며, 그렇기에 지구는 바깥의 세력으로부터 행성을 지키는 동시에 자원을 쥐어 짜내는 존재였다. 이번에 문제가 터진 곳, 3900-A1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전 3041-D9와는 경우가 달랐다. 3900-A1는 거대한 정글이 지표의 절반을 차지했으나 환경은 대체로 황폐화 이전의 지구와 큰 차이가 없었다. 때문에 이곳에 살았던 지성체 대다수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인간에게 죽음을 맞이했고, 지독한 손속을 피해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들의 수는 기존의 1할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잘 쳐봐야 작은 국가의 규모에도 이르지 못하는 이들은 여러 이유로 저들끼리 힘을 모으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내부를 향한 감시는 자연히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틈을 어떻게 알아챈 건지, 이런 일이 발생했다. 방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건의했건만, 그리페는 보고서를 찬찬히 훑다 이를 갈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어물쩍 넘어가더니 결국 구르는 건 저와 제 휘하의 부대였다. 쾌적한 집무실에 앉아 탁상공론이나 하는 치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러나 이제 와 어떻게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상황이 본격적인 전쟁 양상으로 흐르기 전에 수습하는 게 제게도 좋은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 소규모 전투가 벌어질 테지만, 그 정도로 해결된다면 훨씬 이득이었다.

3900-A1는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달리, 겉으로는 평화롭기만 했다. 땅 위 절반 이상을 덮은 막대한 규모의 숲 덕인지 상쾌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이면 그나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물론, 함선 내에는 언제나 쾌적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항상성 유지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으니 이는 단순히 기분 탓이리라.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기별 없이 급작스레 찾아온 탓에 3900-A1을 관리하는 이들은 한발 늦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해당 사안이 그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페는 차가운 눈으로 제게 겨누어진 새카만 총구를 응시했다. 보고서의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빠진 건 그들이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외세의 끄나풀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지. 한 줄이 조금 넘는 사견이 붙은 보고서는 얼마나 많은 사실을 누락하고 작성되었는가.

“순순히 따르십시오. 당신 같은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습니다.”

“이곳을 점령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였나?”

“……”

“시겔, 나는 우리가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했는데.”

“닥쳐요.”

총구 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희미하게 내비치는 식은땀과 초조하게 깨무는 입술, 떨리는 손끝 따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단순한 양심의 가책인가, 혹은 두려움에 의한 반응인가. 당장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무력하게 제압당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 나타난 관리자들은 약간의 부상을 감수할지언정 생포할 수 있었다. 그리페는 등 뒤에서 손을 까닥였다.

함선의 출입구가 개방되고 나타난 건 굳건하게 선 채 총화기를 겨눈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까닥했다간 선두에 선 그리페가 그대로 총알받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패스파인더의 소속 대원들은 차분했다. 승패는 채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판가름이 난다. 그리페는 상대의 짧은 망설임을 읽어내는 데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고, 홀스터에 꽂힌 총을 꺼내 들어 쏴 갈기는 데에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가까웠다.

수십에 이르는 발포성이 일순간 천지를 뒤흔들었다. 울창한 숲 위로 놀란 새가 날아오르고, 일대가 고요함에 젖어 든다. 그리페의 앞에 선 시겔을 제외한 관리자들이 저마다 바닥으로 무너졌다. 빛을 반사하는 타일 위로 핏물이 느리게 번지며 영역을 넓혔다. 시겔은 한참이나 늦게 제 손등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 여파로 손에 쥐었던 총이 바닥을 구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대령님, 당신도……”

보고 체계를 하나만 두었다는 사실을 그리페는 이미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표정을 감춘 채 침묵하는 사람에게서 시겔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이제 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거짓 보고를 보낸 뒤, 함선이 이 행성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셈이었으므로. 시겔은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손을 머리 옆으로 들었다. 명백한 항복 선언이었다. 다가온 그리페의 부하들이 팔을 거칠게 꺾어 결박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은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빠른 때에, 반드시…… 반드시 독대하게 해 주십시오.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상관없습니다.”

제압당한 채 끌려가면서도 시겔은 끝까지 말을 이었다. 붙잡힌 채 끌려가는 도중이 아니라면 그리페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 보일 것 같은 기세였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이 건이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저 변절자의 읍소일 뿐이었다 해도 그리페는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만큼, 시겔은 창고에 방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근처에 머무는 이들을 모조리 물리고, 별다른 경계도 하지 않는 기색으로 창고 안에 들어섰다. 창백한 조명, 그리페는 쌓여 있는 상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손발이 묶인 채 주저앉은 이를 응시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저를, 저희를 감히 이해해달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대령님, 이곳을 탐내는 이들은 바깥에서 온 존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했으나 활동을 중단한 채 잠들어 그 누구도 존재를 몰랐던 거였어요. 그들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였는데, 하나같이 모두 동일한 이능을 다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을 사람으로 보거나, 그들의 능력을 이능이라 불러야 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꼭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겼고, 숲을 수족처럼 부렸어요. 평범한 수목이 그들 손에 들어가면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고요!”

시겔은 쏘아붙이듯 말을 쏟아냈다. 입을 열 때는 차분하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실내를 울렸다. 번득이는 눈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것처럼 보였으나, 그리페는 그의 상태를 납득할 수 있었다. 지구에는 이능을 지닌 이가 거의 없다. 있더라도 신체 강화 계열 위주로 존재했으며, 그 외의 종류는 이상할 정도로 배척하는 탓에 이능을 가졌다 한들 숨기는 이가 다수였다. 대다수의 일반인은 이능을 죽을 때까지 접하지도 못했다. 인류에게 이능은 언제나 불가사의였으며 심지어는 불길함의 원흉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므로.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지요. 불! 그렇지, 불이라면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다수의 목재는 타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때 세상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사실이나 깨닫고 말았습니다. 소이탄 따위로 붙는 불은 그들에게 이렇다 할 타격조차 주지 못했습니다! 대령님, 저는 두려웠습니다. 총도, 칼도, 심지어는 나무인 주제에 불조차 통하지 않는 적을 상대로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시겔.”

“첫날의 습격 이후 저를 비롯한 이곳의 관리자들은 그들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그게 보고서의 이면입니다. 모성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좀 더 많은 정보를 담았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러모로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놈들은 잠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대령님, 그들이 이변을 알아채기 전에 떠나십시오. 그리고 방비를 마친 후에 다시 그들을 상대해야만 할 겁니다.”

헐떡임이 섞인 목소리가 날것의 두려움으로 떨렸다. 짧은 사이에 쏟아진 정보가 너무 많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외세의 침입이라면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지는 않았으리라. 행성의 환경으로 위장한 채 잠들었던 고대 생물의 반란이라니, 삼류 소설이라도 그런 전개가 나오면 욕을 들어먹기 마련이었다. 다만 터무니없는 소리라 치부하기에는 시겔의 반응이 거슬렸다. 그게 정말로 연기였다면, 시겔은 군대에서 구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겔을 내버려둔 채 그리페는 지휘실로 향했다. 참모진을 모으고, 시겔을 말을 정리해 전하면 그들의 낯이 굳었다. 불신과 의심, 경악 따위의 불안함이 회의장 안을 스쳤다. 각 행성의 관리지국이 실질적으로 전투보다는 행정 업무를 주로 한다 한들, 관리지국에 배치된 병기의 화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우선 물러나 3900-A1의 동태를 살피거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들을 상대하는 것. 시겔의 증언 외에는 상대의 전력조차 정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답답한 침묵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어느 쪽이 타당한지조차 따져볼 수 없었다.

결론이 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초 예상보다 위험한 건 사실이니 우선 퇴각하고 정비한 후에 돌아올 것. 답을 내었다면 더 망설일 것은 없었다. 지시사항이 하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선이 다시금 떠오를 채비를 마쳤다. 화면 너머로 비치는 낯선 행성의 풍경은 이질적이었다. 단지 낯선 것뿐이라면 이토록 거슬릴 이유가 없는데. 그리페는 화면을 낱낱이 훑다가, 굵직한 나뭇가지가 이상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단순한 흔들림이 아니다. 인위적인 떨림은 분명 바람과는 달랐다. 시겔이 말한 그들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위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관리지국은 그들로 인해 제대로 된 보고서를 보내지 못했다고 했으니 본국의 지원 여부를 알았을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서늘함이 등줄기를 훑었다. 그 순간,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평범하던 나무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늘어나며 움직였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함선이 일순간 선내에 서 있던 이들이 비틀거릴 만큼 크게 덜컹거렸다. 이 근방은 원래 함선의 이착륙을 위해 만들어둔 곳이므로 동선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이 없었다. 함선 내에 경보를 울렸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외통수였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 끝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외계종들과 싸워야만 한다. 함선을 붙잡아 감은 나무뿌리의 모습에는 소름이 돋았다. 무작정 미사일 따위를 쏴 갈길 수도 없었다. 애초에 미사일 정도로 뿌리가 부서진다면 다행인 일이었지. 다행히 함선을 감싼 뿌리는 그 역할을 다한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부터 그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덩치가 큰 편이었다. 개중에 작은 개체도 어지간한 나무의 키를 훌쩍 넘길 만큼. 오퍼레이터 여럿의 차분한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선내를 울렸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굉음,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는 검회색 연기를 뚫고 그들은 찰나 멈추었을 뿐, 기세가 무너지는 일 없이 전진했다. 탄두의 파편 따위는 그들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근방의 숲에 불이 퍼지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건 생명체가 아니라, 무기질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지 못한 위협이 있다는 정보만 전해 들었던 대다수의 사병은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함선에 전해진 심상치 않은 충격과 발포 음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었다. 그러나 미사일조차도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 개인이 들고 휘두를 수 있는 수준의 병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외계종족과 전투를 벌인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상식의 범주를 넘어난 상대를 대적한 적이 있었던가. 상황을 주시하던 한 병사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리트 또한 골치가 아팠다. 이곳에서 패스파인더의 전력이 깎여나가는 건 제게 있어 기꺼워야 할 일이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압도적인 패배와 영토 및 주 전력의 상실을 겪은 정부는 내부의 방비를 다지는 데에 우선순위를 둘 테고, 그렇다면 일 년을 마지노선으로 잡은 계획이 모조리 틀어진다. 그렇다고 제가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총화기는 이들이 든 것과 하나 다를 바가 없고, 이제 와 이능을 드러내는 것도 미친 짓거리였다. 입단속을 한다 한들 비밀은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쉽게 새어나가기 마련이었으므로.

이리트의 자색 눈이 날카롭게 상황을 살폈다. 나무처럼 생긴 것들이 내보이는 내구력이라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약한 수준이라 한들 분명 불에 타격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대단한 내구력과 그에 걸맞은 크기만큼 느렸다. 그렇다면 제 이능으로 태워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걸리는 점이라면 보는 눈이 너무 많다는 거였지. 그리고 부대 전력에 적당한 피해가 미치는 게 좋다. 완전한 패배가 아니라면 정부는 몸을 사리려 들지 않을 테니까.

함선 내부에서는 답이 없다. 이리트는 충분히 제정신이었으므로, 수습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애당초 제 이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밖으로 나가기까지 해야 했다. 그들과 상성이 맞는다는 건 제게 다행인 일인가, 혹은 불행한 일인가. 이리트는 이제 함선 코앞까지 다가온 외계종족을 화면 너머로 응시했다. 그들은 이지를 잃은 괴수가 아니었기에 함선을 부수려 들 게 뻔했다. 어지간한 포탄에도 타격을 입지 않고, 불에도 잘 타지 않는 것들이 함선을 내리치면 어떤 꼴이 될까.

“방어 시스템 발동.”

기판을 조작하는 오퍼레이터의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함선 주위로 투명한 구형 막이 둘러쳐진다. 그들 중 하나가 근처에 자리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 크게 휘둘렀다. 싱그러운 나무 한 그루가 방어막에 와 부딪힐 즈음엔 그 모습이 모조리 바뀌어 쐐기의 형태를 갖추었다. 방어막 너머로도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오퍼레이터는 찰나 침묵했다가, 방어막의 손상률을 불렀다. 일격에 10%가 넘는 피해를 주는 그 위력이. 함선 내에 얼음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이 노리는 게 이곳에 있는 인간인지, 혹은 함선인지 구분하는 데 의미가 있나. 그리페와 그의 부대는 진작 점령했다 생각한 행성에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적이 발하는 압박감에 목을 죄었다. 언젠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있었으나, 이런 식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들이 인간의 손에 대응되는 부위를 느릿하고 크게 휘두를 때마다 방어막의 손상률이 쉬이 치솟았다.

나가서 총을 쏴 갈긴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그러나 이곳에 앉아 죽음의 때를 기다리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그리페는 가장 뒤에 서 있던 미약한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느꼈다. 굳은 얼굴로 선 부대원 사이에 늘 뚱하니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기척은 이리트의 것이다. 그리페는 일순간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지금 당장 이리트를 따라가야 했다. 이유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그리페는 가장 가까운 참모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노라 통보하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저를 부르는 당혹한 목소리가 얼핏 들렸으나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리트!”

늘 부르던 계급명 대신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리페는 제 실수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막 뒤도는 이리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요. 나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놀라 커진 자색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스쳤다. 저 안 죽습니다, 대령님.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는 분명 단단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어째서? 그리페는 얼이 빠진 채 되물었다. 분명 얼마 전에도 이런 꼴을 보이지 않았던가. 이리트의 앞에 서면 자주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제가 체면을 구기건 말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이리트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의문을 품은 시선이 손에서 얼굴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비어 있던 손에서 환한 빛과 열기가 퍼졌다. 이리트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과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더욱 강렬한 열기가 포악한 형체를 드러내었다. 붉다 못해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은 곧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광원을 직시했던 탓에 한순간 주위가 어둠에 잠긴 것 같았다.

“부디 못 본 척해주십시오.”

이능이었다. 찰나의 경험만으로도 알 수 있는, 여태껏 본 바 없이 강력한 수준의 이능.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동시에, 그가 이능을 숨겨야만 했던 이유를 아는 그리페는 앓는 듯 탄식했다. 군부는 이능을 꺼리다 못해,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선발 단계에서부터 이능자를 걸러낸다. 그 사실은 대외비였으나 군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의심해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이리트는 전투에 관련한 능력도 뛰어난 편이었으나 전략 전술에 비교적 더 높은 가능성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사실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테다.

그 모든 눈을 속이고도 이리트는 수석으로 훈련 과정을 수료했다. 함선을 공격해대는 놈들의 존재보다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리트는 지금 이곳에 서 있었다. 그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었으며, 이 답 없는 상황의 유일한 타개책에게 이능을 숨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논할 만큼 그리페는 무능한 인사가 아니었다. 굳이 군부가 아니라 해도 이런 능력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사회 전반에 이능을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탓이었다.

“……내가, 도울 게 있습니까?”

“부대원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끌어주십시오. 제 부재를 알 수 없도록. 그리고…… 변명거리가 되어 주십시오.”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이 지독할 정도로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일정 수준의 전력 손실에는 당연히 함선의 파손도 포함되었다. 동시에 이리트는 저들을 상대하지 못하는 전력이라면 저 하나 또한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자신에게 속삭였다. 멍청한 짓이었다. 제 자아가 나뉘어 싸움이라도 하는 꼴이다. 빌어먹을, 뭘 어떡하란 말인가. 어차피 이들 전부가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 사람은, 얼어붙지 않는 바다가 눈 속에 일렁이는 그리페만은.

“약점을 알아내면 무전 할 테니, 잠깐 동안만 직접 조종간을 붙잡고 공격을 주도해주십시오. 우연히 약점을 찾은 척하면 어떻게든 속여 넘길 수 있을 겁니다.”

그리페는 자신과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통신기를 넘겼다. 만일 약점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돌아올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는 그리페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리트는 통신기를 착용하고 비상탈출구를 통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페는 다시 돌아와 커다란 화면을 응시했다. 그 잠깐 사이, 방어막은 최대치의 피해량을 흡수해 터져 나갔고 그들은 이제 함선을 직접 공격해댔다. 커다란 충격이 몇 번이고 선내를 덮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 몇 개가 점멸하더니 꺼졌다.

불안감 섞인 동요가 한층 짙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두 손을 모으고, 이름 모를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누가 그 모습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리페는 단신으로 함선 밖으로 나간 이를 알았다. 자신마저 소요에 휩쓸려선 안 됐다. 인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그리페는 비어 있는 기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숲에 불이 붙어 메케한 연기가 퍼졌다. 이리트에게는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전장의 향기였다. 이리트는 그렇게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걸이로 움직여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겼다. 조금 떨어져 바라본 놈들에게는 한 가지 특성이 있었다. 정면에서는 볼 수 없는, 위치상 목덜미나 뒤통수 정도로 추정되는 곳에 자리한 작은 균열. 그 틈 사이로 비치는 구슬을 닮은 물체는 분명 그들의 약점일 테다. 한 번쯤 총을 쏴 갈겨 강도를 테스트해볼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저 혼자인 이상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창백한 손 위로 불꽃이 피어오른다. 압축된 불꽃은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발했다. 메케한 연기를 뚫고 한계까지 눌러 크기를 줄인 화염을 중심으로 길쭉한 빛줄기가 퍼졌다. 지금. 이리트의 목소리가 새는 순간, 무전을 한 것도 아니건만 정확한 때에 함선 쪽에서 미사일이 격발되었다. 거의 동시에 손끝을 떠난 구체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외계종의 뒷머리를 후려갈기고, 탐욕스레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키며 맹렬히 타올랐다.

미세한 틈 사이로 파고든 화염은 외계종의 머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작열했다. 거대한 몸체가 팔을 휘적거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핵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열기를 견디지 못해 터져나가면 금빛 수액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그마저도 광염 속에 삼켜지고 만다. 고통 섞인 몸부림이 조금씩 멎어들다가, 끝내 거체가 느릿하게 무너졌다. 잭팟이다. 이리트는 희뿌연 연기 속에 홀로 우뚝 선 채 희게 웃었다.

“목 뒤 틈새에 갈색 내지는 금빛 구슬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게 약점이에요.”

화면 너머 쓰러진 거체에는 잔불이 남아 있었다. 그 순간 경이를 느꼈던 것도 같았다. 이리트는 약점만을 공격한 듯 말했으나 그 불길은 미사일 따위로도 타격을 주지 못한 외계 종족의 외피를 명백하게 불태웠다. 이리트가 무엇을 원해 군부에 몸을 투신했는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쪽으로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듯 이리트는 이렇다 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적당히 쏴요. 타이밍은 알아서 맞출 수 있습니다.”

그때에서야 함선 쪽에서는 그들의 뒤통수는커녕 발끝도 보기 어려움을 깨달은 그리페가 미안해요, 하고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통신기 너머 이리트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지금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확인할 방법은 부재했고 그리페는 익숙하게 사감을 억눌렀다. 이리트의 존재로 오늘 우리는 죽지 않으리라. 기판을 조작하는 손끝이 흔들렸으나, 아주 잠깐이었다.

순풍을 타고 불길이 퍼진다.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며 눈을 따갑게 하는 연기는 시원한 바람으로도 흩어지질 않았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타이밍이 적합하게 맞아떨어진 탓인지, 이쪽을 알아채지 못한 것도 같았다. 혹은 지능이 있더라도 뛰어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거나. 저 커다란 몸체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필요가 없다면 적어도 셋 즈음은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다. 화염구 여럿이 이리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함선 측에서 섬광이 터졌다. 이리트는 아무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긴 꼬리를 남기며 날아간 불덩이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외계종의 뒤통수에 가 닿아 작열했다. 길쭉한 몸뚱이가 몸부림을 쳤다. 그들에게 박혀 있는 구체가 터져나가며 탄내 속에 순간이나마 단 향기가 섞였다. 이토록 힘을 발산할 수 있는 게 얼마 만이었던가. 끓어오르는 열기가 자신을 반기는 것만 같았다.

네 명이 쓰러지고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노리는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함선에서 쏘아대는 공격의 여파를 견디기 위해 큼지막한 바위를 엄폐물로 삼고 있던 이리트는 그 낌새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짙게 깔리는 연기 따위는 이리트의 감각을 속일 수 없었으므로.

“대령님.”

“알아요. 저 틈을 맞추면 되잖아.”

이럴 때마다 그리페가 보기보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독단적인 행동을 유연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일 테다. 일말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매서운 시선이 외계종을 향했다. 탄두는 작은 틈새를 약간 빗겨나갔으나, 뒤이은 폭발은 그 머릿속에 꽂힌 핵을 파괴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갈라진 나뭇결 사이로 끈덕진 금빛 액체가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외계종의 맑은 체액에 불티가 튀면 불이 쉬 옮겨붙는다. 끈질길 정도로 움직여 대던 몸뚱이가 멈추는 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독할 만큼 집요한 생의 집착이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나름의 기준점을 세우고 좌표를 설정해 폭발을 일으킨다. 폭음 속에 숨긴 또 다른 폭음, 마침내 모든 적이 쓰러졌을 때 대지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하하, 이리트는 전장의 중심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모습을 감추기 위해 여러 제약이며 조건을 걸고 쓴 이능이었음에도 내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또 한동안은 얌전히 지내야 할 테다.

이리트가 마지막으로 던진 불꽃은 함선을 감싸고 있는 뿌리에 들러붙었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며 이능의 흔적도 사라졌는지, 평범한 장작처럼 나무뿌리가 타올랐다. 큼직한 덩어리가 함선에서 떨어져 쿵 소리를 내며 낙하하는 순간 그는 전투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이리트는 바위에 등을 댄 채로 죽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쾌한 심정과 달리 힘을 끌어다 쓴 몸뚱이가 피로함을 호소했다. 연기 너머로 비치지 않도록 불꽃을 제어하는 건 외려 더 큰 힘을 쓰는 원인이 되었다.

일어나야 돌아갈 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싸워 얻어낸 어려운 승리를 만끽하는 틈에 섞여들어야 자연스러울 텐데. 생각과 달리 몸은 휴식을 요구하는 듯,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끄는 것을 잊은 무전기 너머에서 그리페의 목소리가 울렸다. 겨우 여유를 되찾은 목소리가 제 계급을 불렀다가, 대답이 없자 다시금 이름을 부른다. 왜 자꾸 이름을 불러. 이리트는 결코 그에게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이대로 침묵하고 있다 그리페가 만에 하나라도 함선에서 뛰쳐나오기라도 하면 상황이 애매해진다.

“안 죽었습니다. 약속했잖습니까.”

“대답을 좀…! 아니, 아닙니다. 괜찮아요?”

“좀 지친 것 빼고는.”

전투의 흔적으로 말끔했던 이착륙장의 바닥재가 모조리 뒤집어지고, 여기저기 흙바닥이 드러나 있었으나 먹빛 함선은 안정적으로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출입구를 열었다. 등을 진 채 불길이 다 사그라지지 않은 주위를 느긋하게 응시하던 이리트는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기척을 깨달은 이리트가 고개를 들면, 파란 홍채가 눈길을 잡아챈다. 그리페의 저 표정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리트는 다만 그의 표정이 지휘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괜찮다더니.”

“오랜만이라 힘 조절을 못 한 것뿐입니다. 그보다,”

“……혼자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 상황 파악이며 정리를 핑계로 나왔어요.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눈 없을 때 돌아가요.”

움직일 힘이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리페가 무릎 아래와 허리께를 받쳐 들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들지는 않을 텐데. 의문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리페는 담담했다. 그의 의중을 다 알 수 있었던 적도 없었다. 단단한 품은 꽤나 편안했고, 호의를 거절할 만큼 체력이 다 회복되지도 않았다. 얌전히 몸을 기댄 이리트는 눈을 피하는 그리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지나치는 복도가 왜 이렇게나 길게 느껴지는지.

그리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알았다. 그러나 그 당사자에게 안겨서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이성적이니, 합리적이니 떠들어댔던 건 결국 변명일 뿐이었다. 상황으로 눈을 돌려 외면했던 사실이었다. 그래, 그에게 방해가 될 걸 알면서도 통신기의 연결을 끊지 않았던 것 또한. 힘을 싣고 단단하게 명령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은 탓이었다.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 그리페가.

“내려 주십시오.”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요. 견디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이리트는 다시금 흔들리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정말 지친 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페는 문이 닫힐 때까지 앞선 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안에 자리한 옅은 아쉬움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전함이 입은 피해는 미미한 정도였으니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복귀할 요량이었다. 멈춰 버린 통신 기지국이 유일한 문제였는데, 헐레벌떡 달려온 부대원이 기지국을 재가동했음을 알려왔다. 단순하게 전원이 끊겼던 것뿐이라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들의 발을 붙잡는 사안은 없었다. 극도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진정제를 맞고 잠들었던 시겔은 언제 깼는지 창고의 문 앞에 달라붙어 있었다.

“대령님,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죽었어요.”

“몇 마리였습니까?”

“여덟.”

“맙소사……”

“더 있나?”

“본 건 그게 전부입니다.”

“원칙상, 거짓 보고를 올렸으니 지구로 압송될 겁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특별한 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동료들은,”

“그들은 그저…… 견디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제 손으로 끝을 내지조차 못해 총구 앞에 몸을 던진 셈입니다.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동료들을 막지 못한 게 접니다. 그러니 저 또한 동료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겁이 많은 걸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 부분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내 정신이 없어 그들의 행동에 의문조차 갖지 못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섣부른 위로의 말은 건넬 수 없었던 그리페는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때에서야 모든 일을 끝마친 듯, 탁 풀린 표정으로 짐 더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슨 말을 더 꺼내기도 애매했다. 그리페는 입을 다물고 제 공간을 향해 다시금 돌아섰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그러나 그에게 시겔과 그 동료들의 일을 곱씹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대원들이 모두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압축해 정리한 보고서를 받은 그리페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죽은 외계종의 시체는 일반 목재처럼 변모해 그들의 정체를 알 방법이 없었다. 살펴본 시체는 단 한 놈을 제외하면 모두 뒤통수에 자리한 틈이 새까맣게 불타 있었다. 그 차이의 이유를 아는 건 이 함선 내에서 둘 뿐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득 인이어 마이크가 연결된 통신기가 눈에 띄었다. 둘 다 정신이 없어 까맣게 잊었던 물건. 응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리트를 불러 보았다. 무전이 연결되는 듯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곧 조용해졌다. 그리페는 꽤나 기대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괜히 조용하기만 한 통신기를 툭 건드려 본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 바보라도 된 것 같았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써 찝찝했다. 옷을 툭툭 털어내면 먼지가 풀풀 날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욕실로 향하려는 순간, 나중에 그리페에게 가져다줄 요량으로 한쪽에 올려 두었던 통신기가 울렸다. 그 짧은 신호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버튼을 누른 이리트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페는 또다시 제 이름을 불렀다. 이걸 들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저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통신기는 다시 신호를 울리지 않았다.

김이 오르는 물이 쏟아진다. 몸을 깨끗이 닦아내는 일련의 과정 내내, 이리트의 머리 한쪽에서 그리페의 이름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가 온갖 방식으로 저를 홀리는 건지, 수습하는 데 실패한 감정이 제 이성을 붙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트는 제법 이성적인 인간이었고, 그 덕에 저 스스로가 불가항력적으로 그리페에게 홀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시했다. 바닥으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며 욕실 안을 울렸다.

물기를 대강 닦아내고 침대에 걸터앉은 이리트는 탁상 위의 통신기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돌려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고, 스스로를 탓했으나 무용한 일이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리페를 만나러 갈 이유를 만든 걸지도 몰랐다. 젠장. 죄 없는 침대 위를 내려친 이리트가 옷을 꺼내 입었다. 확실하게 끝을 내야 했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관계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느니 따위의 이야기는 전부 변명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문제였으므로.

이리트는 몇 번이나 두드렸던 문 앞에 선 채 심호흡을 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리페의 이름을 부르면, 굳게 닫혔던 문이 스르륵 열리고 문을 마주한 채 앉은 이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곧은 눈에 찰나 멈추었던 이리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부터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경례와 같은 체면치레를 하지 않게 된 탓이었다.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은 그의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말을 꺼낼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이리트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제게 다가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일순간 머릿속을 스친 이유 모를 직감에 그리페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그의 옆에 자리 잡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오래 망설이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전에 한 번, 계급 차이가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물었을 때 이리트는 고개를 저었었다. 사람이 좋으면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고, 드물게 편안한 얼굴로 웃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만 해요, 우리.”

한숨처럼 내뱉은 말, 저를 외면하는 이리트의 낯이 버석거리기라도 할 것처럼 지쳐 보였다. 그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그리페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한 번쯤 생각해 보았던 장애물을 모조리 곱씹었다. 나이, 계급, 배경, 그 외 여럿과 어쩌면 제가 생각하지도 못했을 부분들. 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가, 느릿하게 내쉬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망설이게 하는 건지. 생각을 곱씹던 그리페는 제게 참고할 만한 기억조차 없다는 사실에 그만 실소할 뻔했다. 이전의 연애는 가볍기 그지없었고,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는 알파 구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세가의 주인이며 그의 부모마저 흙 아래 잠들어 있었으므로, 외려 그리페의 관심을 끌고자 매달리는 이들의 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이 메 헛기침을 하고서야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단 한 번도 나로 인해 흔들린 적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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