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08)
2023.03.17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얼빠진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건만, 이리트는 태연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고는 일어섰다. 꼭 헛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전투 이후에는 늘 찾아오곤 하는 후유증이 이번에는 머리로 온 것처럼. 그러나 주변의 이들이 검은 가죽으로 온몸을 감싼 이리트를 응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리페는 그가 환상이 아님을 직시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자색 눈은 타오르는 듯했다.
그러니까, 나는. 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한 그리페는 지난날 목격한 대화를 문득 떠올렸다. 다분히 귀찮은 티를 내는 이리트에게 종알거리던 르네의 말을. 언젠가는 코가 꿰일 줄 알았다고 했던가. 그건 이리트보다는 제게 더 어울릴 말이었다. 이 순간, 그리페는 제 마음을 더는 억누를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당신이 좋다고, 지금보다 더 가깝고 내밀한 사이가 되고 싶다고. 당장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임을 알았다. 다만 그는 성큼성큼 걸어 이리트의 앞에 섰다.
“어떻게 여길 왔어요?”
“센터 쪽에서 연락해 왔어.”
“연락하라는 말은 안 했는데…”
“그럼, 그 꼴로 돌아가려고.”
“다녀오겠다고 했잖아요. 당신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
불만이 있는 듯 불퉁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실없는 웃음이 샌다. 숨을 쉴 때마다 받치는 제 피 냄새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바보같이 웃지 마. 속삭인 이리트의 손이 목이며 뺨을 감싸더니, 그대로 입술이 닿는다. 더없이 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이번에 마주한 특이 사항도, 전투 중에 발생한 부상자 현황도, 심지어는 이리트를 향한 생각조차. 크게 치뜬 눈이 흔들리다가 뒤늦게 감긴다. 숨이 섞일 때마다 손의 떨림이 잦아들고, 머리를 죄는 듯한 두통이 스러진다.
“피 냄새.”
“내 피 아니에요.”
“거짓말.”
“정말인데.”
“현장이나 옷 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바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지. 뻔뻔한 낯을 흘기면서도 이리트는 흐트러진 그리페의 머리칼을 쓸어 정리해 주었다. 그리페와 입을 맞출 때면, 적어도 절반은 피비린내가 함께했다. 그가 스스로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낸 적도 있었고, 입 안에 상처가 나기도 했으며, 이번처럼 속이 진탕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제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내상을 입는 건. 외상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알 수나 있지. 이 빌어먹을 센티넬은 언제나 제게 부상을 숨기려 애를 썼다.
그의 상태가 꽤 호전되었으니 제가 할 일은 명확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리페를 붙잡아 그대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이능의 반동에 앓는 소리를 냈다. 게다가 자신은 그리페뿐만 아니라 다른 전투원의 가이딩도 요청받은 입장이었다. 한숨을 삼키고 그에게서 손을 떼면, 파란 눈이 제 손을 좇았다.
“이야기는 돌아가서 해.”
“그래요.”
바이크의 뒤에 탈 일이 생길 거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리트는 이곳에 올 때부터 작정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짐 실을 곳도 없는 바이크에 기어이 여분의 헬멧을 매달고 오진 않았을 테니. 심지어 자신을 현장에서 빼 가겠다고 언질까지 해 뒀고. 이리트는 항상 발을 뺄 여지를 주지 않았고, 그는 그대로 휩쓸려 바이크 뒤에 얹힌 채 이리트의 허리를 부러 꼭 끌어안았다.
헬멧의 좁은 시야 너머로 풍경이 빠르게 이지러졌다. 찬바람이 옷 틈새를 파고들면 땀이 식어 서늘함이 느껴졌으나, 이리트에게 붙어 있는 부분만은 찬기에도 식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 무게가 전해지지 않도록 이리트의 등에 기대는 시늉만 했다. 그리페는 센터 내에서 다른, 자신들과 같이 계약으로 묶인 파트너 관계를 여럿 본 적 있었다. 봤다고 한들 극히 일부일 뿐이니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확신했다. 그런 이들은 우리와 달랐다. 그들 중 누구도 이리트처럼 굴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욕심이 났다. 제 감정을 확신하지 못할 때부터. 이리트, 당신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에요. 헬멧으로 한 번 막히고, 매서운 바람 소리까지 더해져 전해질 리 없는 말을 속삭였다.
이리트의 집까지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내 붙어 있던 몸이 떨어지면 뒤늦게 한기가 스쳤다. 바이크를 차고 한쪽에 세우는 이리트의 모습이. 창백한 조명을 반사하는 매끈한 차체는 흔한 흠집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꼭 저 같은 물건을 탄다고, 문득 떠올린 그리페는 얌전히 이리트의 뒤를 따라 실내로 들어섰다.
“언제부터 탔어요?”
“꽤 됐어.”
“왜?”
“나를 부르는 곳은 많고, 공간이동을 매번 요청할 수는 없고, 승용차보다는 저게 빨라서.”
“사고라도 나면,”
“급할 때만 타, 저건.”
무심하게 떨어진 말, 그 이면에 있는 뜻을 읽어낸 그리페가 우뚝 멈춰 섰다. 제대로 된 생각이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이리트가 저 때문에 급히 달려왔다고 생각하면 미안함보다도 기쁨이 더 커서. 굳은살 박인 손이 착잡하게 얼굴을 문질렀다. 정작 말을 꺼낸 이리트는 별생각도 없어 보였건만.
“왜 그래?”
“아니, 음, 조금 피곤해서요.”
“일단…… 가서 씻어. 차라도 한 잔 끓여둘 테니까.”
사람을 이렇게 굴려대는데 S급이라 한들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협회가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이유를 잘 알아 어디에 항의하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욕을 짓씹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리트는 전기포트의 전원을 켜고, 주방 쪽창 너머를 바라봤다. 눈에 잘 들지도 않을뿐더러,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 둔 뒷마당은 잔디며 잡초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자라고 있었다. 그게 꼭 작금의 현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팔마를 쳐야 한다는 건 웨이드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았을 때부터 알았다. 와 닿지 않았지만. 이리트의 손끝이 조리대 위를 반복해서 두드렸다. 팔마를 지금이라도 잡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센티넬의 폭주를 이용하는 만큼 모든 상황을 팔마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얼마든지 팔마의 근거지에도 균열이 열릴 수 있건만, 그들은 제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이런 짓을 벌였다.
맹목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지. 적어도 제정신으로 벌일 수 있는 일 같지는 않았다. 힘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싶어 하는 이들이 팔마를 집어삼킨 이후로 팔마의 행동양식이 바뀐 적은 없었다.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적어도 협회 측 자료로 미루어 보아서는 그랬다. 민간인을 습격하고, 협회 소속 이능자들을 회유하거나, 납치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살해한 사례로 대표되는 조직이 팔마였다.
전형적인 악인으로 이루어진 집단. 지닌 힘을 더 약한 이들에게 휘둘러 제 배를 불리는 놈들. 그들보다 약한 이들의 손해는 당연하나 그 자신의 불이익만큼은 두고 볼 수 없다고 떠들어대는 쓰레기들. 머그잔에 끓인 물을 붓고, 일렁이는 물 위에 티백을 떨어트리듯 올려놓은 이리트가 손에 남은 포장을 구겼다. 그 인간 말종들이 별 이유도 없이 제 살 파 먹힐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이쪽이 알지 못하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리트는 대충 던져두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더 알아낸 것 없어?]
[네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만… 지금은 딱히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연락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채 일 분이 지나기도 전에 답신이 왔다. 화면을 바라보는 이리트의 눈에 짜증이 서렸다. 물론 정보라는 게 내놓으란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렇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정보팀의 일은 이제 제 소관이 아니었으므로, 이리트는 뻔뻔했다. 이번 일은 이례적이었으니 정보부도 사태 파악을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을 터였다.
[그놈들 목적이나 알아봐.]
설명이 필요한 상대가 아니었다. 문자가 전송되었음을 확인한 이리트는 다시금 기기를 내려놓았다. 적당히 우러난 티백을 한쪽으로 치워 둘 즈음, 그리페의 기척이 느껴졌다. 막 샤워를 마친 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대로 뒤돌아 기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리페가 제 허리 옆으로 손을 뻗었다. 졸지에 조리대와 그의 양 팔 사이에 갇힌 꼴이었다. 이리트의 눈이 느리게 굴렀다. 젖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울대가 도드라진 목을 타고, 끝내 가운 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 위를 굴렀다. 긴 눈 맞춤 뒤 진득한 키스는 정해진 수순 같았다.
그리페는 종종 눈을 뜬 채 혀를 얽었다. 처음엔 이리트의 상태를 살피려는 의도였고, 이제는. 이유야 무엇이 되었건, 이리트의 뒤에서 반짝이는 화면에 시선이 간 건 순전히 우연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져 버리겠어, 이리트.] 순식간에 글씨를 읽어낸 뒤 저도 모르게 발신인을 확인한 것 또한. 이리트가 도망칠 길을 막았던 손이 가는 허리를 훑고 올라가 머리 뒤를 받쳤다. 송곳니가 입술을 누르면 그는 약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굴어.”
그 잠깐 사이 부은 입술은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이유를 묻는다 한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웨이드는 그리페 또한 아는 상대였다. 사무적이고 냉철한 이였다. 그런 사람이 이리트와는 무슨 관계여서 느물거리는 말투로 저런 내용을 전하며 이리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지. 한때 두 사람이 같은 부서 소속이었음을 알았으나 그것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와 꽤 친해 보였던 르네조차 이리트를 헤르데라 칭한 탓이었다.
“그리페.”
진득하게 침잠하던 벽안이 퍼뜩 상대를 향했다. 이리트는 자신의 반응을 단지 전투 후에 따라붙는 후유증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알았다면. 그리페의 손이 이리트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불온한 탐욕을 삼킨 채. 큼지막한 손이 그리페의 뺨을 감싸고, 자색 눈은 그의 면면을 훑었다. 늘 그렇듯 무표정했으나 이리트는 분명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제 감정을 토해내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다. 이럴 때면 유난히 앳된 티가 나는 이리트가.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은 그리페는 장난처럼 입을 맞추고, 그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손을 뗐다.
“내가 피곤하긴 한 모양이에요.”
그는 제가 꽤 수상하게 굴고 있다는 점을 알기는 할까. 물어본다고 한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이리트는 여태 조리대 위에 놓여 있던 머그잔을 건넸다. 그사이 차가 미적지근해졌으나 이제 와 다시 물을 끓이는 것도 무용한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얌전히 잔을 받아 들고 이리트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저나 그리페나 나서서 떠드는 편은 아니었던 탓에 침묵은 익숙했다. 분명 이전까지는 그랬다. 오늘 아침에 한 말 때문일까. 하지만 곱씹어 봐도 현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제 옆얼굴에 닿는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어쩐지 어색하기 그지없어 괜히 평소에는 잘 건드리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든 이리트는 상단에 뜬 알림을 뒤늦게 확인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또 되지도 않는 소릴 해 놨다. 제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왜 이따위로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웨이드가 조금만 덜 유용했어도 저 스스로 연락을 하는 일은 없었을 테다. 그래도 이 꼴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순 없지. 한 치 망설임 없이 수신을 차단한 이리트는 고개를 휙 돌려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그리페를 바라보았다. 내내 이쪽을 향하던 시선이 분명히 느껴졌건만, 그는 머그잔으로 눈을 돌린 채였다. 문자가 온 타이밍과 그리페의 태도가 급변한 순간이 겹치지 않던가.
의심은 들불처럼 퍼졌다. 입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아, 이리트는 미적지근한 차를 향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크게 들이켰다. 어쩌면 이마저도 제 바람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제게는 더없이 잘된 일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리트는 기기를 툭 던졌다. 웨이드가 일 외적으로 도움이 된 건 처음이었다. 그가 알게 된다면 꽤 억울해할 법한 생각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이리트는 짐짓 태연한 낯으로 말문을 텄다.
“팔마는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좀 알아보라고 웨이드에게 귀띔해뒀어.”
“웨이드와는… 아직 연락을 하나 봐요.”
“연줄이라는 게 그런 거지. 그리고 내가 말한 건은 균열 이상발생의 이유를 아는 이들 중 몇몇이 이미 생각해봤을걸.”
“또 저번처럼 위험한 짓을 하려고.”
“내가 전선에 뛰어드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페.”
“눈에 띄어서 좋은 게 없다는 걸 알잖아요.”
“여기서 어떻게 더 눈에 띄어. 협회는 내 가치를 이미 알아. 협회를 배신하려고 드는 게 아니라면 묵인할 수밖에 없어.”
“당신이 배신하려 한다고 판단하면, 그때 협회는 이리트, 당신을……”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처리하려 들 거예요. 차마 문장을 끝맺지 못한 그리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수상한 어투로 문자를 남긴 웨이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협회는 선을 표방하나, 그들 역시도 피로 역사를 써 내려왔다. 무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상 그 누구도 무결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멀쩡한 이를 얼마든지 배신자로 몰아갈 능력이 있었다. 그들 손으로 만들어낸 가짜라 한들,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조직의 기밀까지 쥐고 있다면.
“네가 내 센티넬인 이상 그럴 일 없어.”
“나는……”
“협회는 나를 믿지 못하겠지만,”
일시적인 진공, 그 짧은 사이에 이리트는 과거를 떠올렸다. 정보부에 속한 이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서 양성된 이들은 실상 정보부의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명목상 일종의 고아 지원이었지만, 정보부에 속한 이들은 모두 알았다. 협회는 단 하나의 천재 대신 다수의 범재를 원했다. 특출난 재능이 없더라도 머리가 덜 굳어 말랑할 때부터 갈고 닦으면 쓸 만한 인재가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세상은 정보부가 전부였으므로.
그렇기에 이리트는 정보부에서 버려졌다. 가이드로서의 이능 발현은 책잡힐 것 없이 좋은 사유였다. 이리트는 저를 아주 내치지도 못하고, 완전히 다루지도 못하는 이들의 태도의 틈을 파고들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면 뒤야 어떻든 협회는 그들의 입장 때문에라도 대놓고 선을 넘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페와 공식적인 파트너가 되며 저는 외려 더 숨통이 트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모를 테고,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믿어. 나와는 다르지.”
이쪽을 응시하는 자색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형형한 빛을 마주하는 게 고되어 그리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리트는 때때로 독선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리페를 두렵게 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트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틀린 구석마저 옳은 것처럼 보이도록 설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제게는 똑같았다. 이리트의 말이 오롯한 사실이든, 그 자신의 사견이 섞인 가정이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럴 때면 제가 미친 건지, 이리트가 미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 사람이 죽어 나가고, 그 자신의 목숨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페는 손안에 쥔 잔의 표면을 응시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수면. 맺혔던 상은 쉽게도 기울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에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눌러 참은 침음, 다시 고개를 들면 이리트는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현시점 협회 내에서 당신을 대체할 가이드는 없어요.”
“그렇겠지. 하지만 나 하나 없다고 협회가 망하지는 않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이득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묻고 싶은 거예요. 이리트, 당신이 말한 대로 당신은 나와 다르잖아요.”
누구도 꺾을 수 없을 자신감으로 형형하게 빛나던 이채가 사그라졌다. 가장 자주 마주할 수 있었던, 조금도 그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가면을 닮은 표정. 그리페는 이리트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끈질기게 그를 살피고, 관찰한 끝에 조금이나마 표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번에도 통하지는 않았다. 견고한 무표정 아래 숨어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매달려 묻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답을 내어줄 듯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침묵했다.
한없이 가라앉는 적막 속에서 먼저 몸을 움직인 건 이리트였다.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거리를 두려는 듯, 제 위치에서 몇 걸음쯤 떨어진 일인용 소파에 앉았으면서. 그리페의 앞에 선 이리트는 태연하게 허리를 숙여 탄탄한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대답하기 싫어. 조금만 멀어도 들리지 않을 듯 작은 목소리. 그리페는 반도 비우지 못한 잔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다. 미약한 온기를 품은 손이 대충 매듭지은 허리끈을 풀고, 흘러내리는 가운 자락 사이로 밀려 들어와 살갗을 더듬었다.
몸을 일으킬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모양이지. 미약한 온기를 지닌 손이 제 성기를 감싸 쥐었다. 짐짓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이리트를 바라보면, 기다렸던 것처럼 입술이 맞부딪쳤다. 격렬한 관계가 끝나고 기진맥진한 이리트가 때때로 저를 짐승이라 불렀던 것이 일순간 머리를 스쳤다. 무엇보다 곤란한 건, 어물쩍 넘어가려는 이가 불만스러우면서도 정직하게 반응해 피가 몰리는 아래였다. 이래서야 정말로 짐승 새끼나 다름이 없지 않으냐고.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