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07)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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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0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천공이라고도 불리는 균열은 그 역사가 길지 않은 이상 현상이었다. 고작해야 오십 년도 되지 않은 과거, 최초로 나타난 균열은 도심지 한가운데를 초토화했다. 하늘이 열리고 갈라진 틈 사이로부터 쏟아져 나온 괴수는 그 외견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쉬이 사람의 정신을 꺾어 짓밟았다. 흉측한 생김새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고, 하나같이 단단하기 그지없어 화기가 제대로 통하지도 않았다. 첫 번째 괴수는 원자폭탄을 맞고서야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곳은 오래도록 접근이 불가한 제한 지역으로 남았다.

그러나 괴수의 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균열이 나타난 곳 근방을 오랫동안 폐쇄할 것을 각오하고 무기를 동원한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틈새가 열리는 곳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멀쩡한 도시 하나를 복구조차 불가능하도록 망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기는 또 다른 변화의 한 국면임을 증명하듯, 인류는 곧 이능을 각성했다. 센티넬의 첫 등장이었다. 화기와 비교하자면 대다수는 외려 더 수수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능력이었으나 그들은 퍽 능숙하게 괴수와 맞서 싸웠다. 개인의 힘으로 결전병기를 대체할 수 있게 된 이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능이 폭주하기 전까지는. 발현한 이능 자체가 미약한 이라면 이성을 잃고 날뛴다 한들 어떻게든 제압이 가능했으나, 그런 이들은 오히려 폭주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능을 지녔다 한들 사용처가 한정적이었으므로.

또 다른 이능의 소유자, 가이드가 발견된 것은 일종의 경이처럼 기록되었다. 센티넬의 폭주로 인한 희생자가 적지 않고, 센티넬은 심지어 폭주를 두려워해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지조차 않으려 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쉬이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능은 오로지 그 자신과 이능의 접촉을 허용한 센티넬만이 알 수 있었으므로. 센티넬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이능을 숨기고 일반인으로 위장해 살아가려 했다.

그때 협회가 처음 등장했다. 첫 균열이 열린 시점으로부터 꼭 십 년 만의 일이었다. 몇몇 센티넬과 가이드를 중심으로 설립된 기관은 기이할 정도로 쉬이 자리를 잡았다. 정부와 손을 잡은 덕이었다. 처음에는 이능을 지닌 이들을 모았다. 괴수 토벌이 단지 선의에 기반하는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생계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능과 관련한 터무니없는 공포심을 잠재우고, 가이드를 모으는 것 또한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연구에 뜻이 있는 이들을 모아 협회 병설 연구소를 설립하는 건 그다음으로 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위기를 직접 넘겨 가며 쌓은 자료를 취합해, 괴수의 종류와 파훼법부터 심지어는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개념의 정립까지 마쳤다. 그 모든 일을 해내는 데에 더없이 많은 자본과 인력이 소모되었으나 며칠마다 사람 수십, 수백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충분했다.

각고의 노력은 분명 효과가 있었으나, 균열은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재해 중 하나였다. 균열 너머에 다른 차원이 있으며, 괴수가 그곳의 생명체인 것까지는 알아냈다. 균열의 크기로 나타나는 괴수의 종류를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도 있었다. 괴수를 해치우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면 틈새가 닫힌다는 것 또한. 쌓인 데이터로 괴수를 분류하고, 등급을 나누었으나 그뿐이었다. 왜 균열이 이 세상에 열리는지, 괴수가 왜 세계를 건너와 이곳을 공격하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더불어 통계상 균열은 처음 나타난 시점보다 더 늘지도 않았고, 더 줄지도 않았다. 매년 열 개 이하의 차이가 있었으나 그 정도라면 오차범위 내였다. 팔 년 전까지는.

그리페가 성년이 된 후, 본격적으로 협회 소속 센티넬로서 활동하게 된 것이 십이 년 전이었다. 협회의 존재가 당연시되고, 약 십여 년 간 더 이상 새로운 발견도 예외사항도 나타나지 않아 안정기에 들어선 지도 꽤 된 시점. 협회를 비롯해 그곳에 소속된 이들 대다수가 권태에 젖어 있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창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그 해의 균열 수가 여태껏 관측된 균열의 평균치를 뛰어넘었다. 일 년이 석 달이나 더 남아 있음에도. 그해 여름이 유난히 바쁘다고 느꼈던 이들은 관측된 수치를 마주한 순간 더위조차 잊었다. 이겨내지 못한 재앙이 발전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고, 당시 협회에 속했던 이들 중 누군가는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사 년 차, 협회 소속 센티넬로서 제 몫을 다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물네 살 그리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연차가 찰수록 제 체질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그에게 균열의 증가는 특히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까칠하고, 날 서 있던 시절의 기억. 아득한 회상을 건너 현재, 그 모든 혼란과 피해가 인간의 손에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된 그리페는 이를 악물었다.

협회는 언제나 손이 모자랐다. 괴수를 상대하다 보면 부상은 필연적이었고, 강한 센티넬이라 한들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기 마련이었으며 심지어는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흔한 편이었다. 당장 적을 상대할 검은 너무도 쉽게 부러지는데, 균열은 그 전조조차 괴수가 등장하기 직전에나 알 수 있는 탓이었다. 이 와중에 협회에 반목하는 단체가 설립되고, 힘을 지니고서 그것을 약자를 향해 휘두르지 못해 안달인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이런 식이니 당장 어제 격전을 치른 자신에게까지 긴급호출이 들어오지. 연일 작전에 투입되는 건 새삼 싫다고 할 법한 일도 아니었고, 외려 그리페는 휴일이 생기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까지나 이리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상념이 작전을 진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안다. 그리페는 짐짓 침착하게 장비를 점검하고, 몸을 풀었다.

허공을 가른 틈이 벌어진다. 팔로 좁은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나오는 모양새였다. 기이하게 꺾인 관절은 지구의 그 어떤 생명체도 닮지 않았으나, 그런데도 괴수는 그 특성 탓에 진원류라 불렸다. 이름에 걸맞도록, 그들은 높다란 빌딩에 매달려 있는 경우가 잦았다. 긴 팔을 지닌 괴수들은 그 크기가 괴수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했다. 물론, 작다 한들 4인승 경차에 비견될 크기였다. 무엇보다 진원류 계 괴수의 귀찮은 점은, 적어도 넷 이상씩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괴수의 온몸에 듬성듬성 돋은 새카만 털에는 광택이 없었다. 제 몸체보다 더 긴 팔에 자리한 관절은 개체차가 있었으나 최소 다섯 개 이상으로, 팔보다는 뱀 내지는 촉수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그리 크지 않은 틈새를 첫 번째 괴수가 부수듯 벌리고 이곳에 발을 디디면, 두 번째는 조금 더 쉬이 빠져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는 이들은 서로 의사소통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리페는 괴수가 전열을 정비하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진원류 계 괴수의 장점이자 단점은 긴 팔이었다. 그 길이만큼이나 사거리가 길고, 그 움직임이 연체동물의 것처럼 자유로웠다. 괴수 특유의 강한 힘은 말할 것도 없고, 긴 팔 끝에 붙은 손의 사용이 자연스러운 편인 데다 갈고리 같은 손톱이 자리했다. 그러나 그 외의 특징적인 공격 수단은 없었다. 따지자면 괴수 중에서는 약한 편이니, 통제구역을 벗어나려는 것만 제외하면 상대하기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전장을 날듯이 가로지른 그리페가 창을 내지르면 허공에서 풍압이 터졌다. 강하게 내지른 공격은 정확하게 괴수의 관절을 노렸다. 날카롭게 벼려진 창끝이 찰나 털이 부숭한 가죽을 찢고, 관절 틈 사이를 벌려 헤집었다. 내지른 창이 돌아왔을 때는 괴수의 팔 한 짝이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잘린 단면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 너덜거렸다. 기습이 통하는 건 한 번뿐이다. 목숨을 끊어낼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약간의 아쉬움을 누른 그리페가 등 뒤로 쇄도해오는 괴수의 팔을 쳐냈다.

괴수의 울음소리에 귓가가 울린다. 걸리적거리는 것을 잡아채려는 듯 다가오는 팔을 밟고 뛰어오르는 동시에 길쭉한 팔을 가른다. 단단한 가죽을 가르고, 뼈마디에 창끝이 걸리는 감각이 선연하다. 허공에 떠오른 그의 뒤로 또 다른 괴수가 팔을 내뻗으면, 함께 작전을 진행하는 센티넬 하나가 다급하게 공격을 막는다. 제 바로 뒤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그는 한 번 힐끔거리지도 않는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팔 한 짝은 바닥을 구르고, 나머지 하나는 길게 갈라져 하얀 뼈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페는 그대로 창을 괴수에게 내리꽂으려 했다. 괴수가 울부짖으면 마치 그것을 지키듯 다른 괴수가 그리페를 공격했다. 몸통 옆으로 꽂히는 공격, 급히 창대를 돌려 막았으나 충격을 완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다. 제 팔을 채찍이라도 되는 듯 휘두르는 괴수를 보고 있자면 한숨이 샜다.

양팔의 기능을 상실한 괴수는 몇 번의 발악 끝에 그리페에게 목을 내어 주었다. 벌써 사방에 피가 튀어 난장이었다. 등 뒤에서는 누군가의 기합 소리가 들리고, 열린 균열에서는 여전히 괴수가 몸을 빼내고 있었다. 쓰러진 것 하나, 빠져나오고 있는 놈까지 포함해 이미 이곳에 발을 디딘 것 여섯. 부상자를 비롯해 당장 이곳에 올 수 없는 이들을 제외하면 전력 차가 아슬아슬했다.

대다수의 괴수가 그렇듯 한 개체였다면 다소간의 부상을 감안하더라도 혼자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놈들은 협공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주변 통제구역 밖으로도 뛰쳐나가려 했다. 통제구역 주변에 사는 이들도 우선 대피하긴 할 테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괴수를 이곳에 붙잡아 놓아야만 했다. 괴수를 상대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쉬운 적 없었으나, 오늘은 유난히도 버거웠다.

일단 괴수와 맞붙고 나면 이후의 작전은 사실상 작전에 투입된 이들의 판단에 의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통신기를 통해 정보부의 오퍼레이터가 보조해 주었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비전투계 센티넬이거나 훈련받았다 한들 일반인이므로 한계가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에 진입하기 전에 현장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페의 휘하에 있는 이들은 대개 그와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훈련하지만, 특히 잘 맞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느낌이 좋지 않다. 어쩌면 예상보다 더 많은 수의 괴수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를 것 같다는 직감이 스쳤다. 불안감을 딛고 바닥을 박찬 그리페는 창을 휘둘렀다. 채찍처럼 움직이는 괴수의 팔이 창끝에 스치면 쉬이 갈라졌으나 상처는 얕았다. 그가 전황을 확인하며 두 걸음쯤 물러서면, 그가 서 있던 위치에 길게 할퀸 자국이 남았다. 이런 괴수는 저보다 원소계나 에스퍼계 센티넬이 상대하는 게 더 낫건만.

한숨을 삼킨 그리페가 삽시간에 괴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등 뒤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척을 무시한 채, 날카로운 창이 괴수의 머리를 꿰뚫으면 그가 단단하게 박힌 창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괴수의 몸이 맥없이 뒤집어지며 창이 빠져나오고, 벽돌로 포장된 인도 위에 살점 섞인 핏물이 번졌다.

다른 이들은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었고, 방금 세 사람의 합공 끝에 하나가 더 쓰러졌다. 남은 건 뒤늦게 나온 개체까지 포함해 여섯 마리. 허공에 뜬 균열은 이제야 잠잠해졌다. 지원을 요청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살점과 지방, 혈액 따위가 질척하게 달라붙은 창을 휘둘러 털어내고, 그리페는 팀원의 옆을 노리는 괴수를 향해 대거를 던졌다. 관절 틈새에 박힌 건지, 괴수의 팔이 기묘하게 경련했다. 때를 놓치지 않은 이가 질긴 거죽을 끊어내면, 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른 놈을 향했다.

핏발 선 괴수의 눈은 제각각 깜박였다. 함께 행동하는 몇몇이 이미 쓰러진 탓일까, 일견 두려움을 느끼는 듯 괴수는 그를 경계했다. 한 걸음 다가서면 답지 않게 움찔거리는 괴수의 움직임은 분명 이상했다. 괴수에게도 지능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들은 언제나 두려움 따위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오로지 인간을 공격하는 것만이 그들의 전부인 듯이.

으르렁거리는 괴수를 눈앞에 둔 채, 그리페는 의아함을 억눌렀다. 찰나의 실수가 곧 목숨과 직결되는 전장이었다. 의문을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적을 해치우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두려움이건, 단순한 이상 반응이건 상관없다. 적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제게 유리한 상황일 뿐.

그리페는 수천, 수만 번 휘둘러 궤적마저 그릴 수 있는 움직임으로 괴수의 심장을 노렸다. 단련된 근육이 수축했다가, 폭발적인 힘을 발산했다. 그의 신형이 찰나 잔상을 남김과 동시에 괴수가 스스로를 껴안듯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품 안을 빠져나간 뒤였다. 괴수의 긴 팔이 구불거리며 스스로를 껴안았다. 뒤늦게 거죽이 갈라지며 피가 쏟아져, 괴수는 큼지막하게 열린 가슴을 틀어막는 꼴이 되었다.

다시 한번 단단하게 포장된 바닥을 딛고 떠오르면 고민도, 상념도 스러진다. 그게 뭐가 됐든, 이 싸움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아무렇게나 꺾여 들어오는 괴수의 팔이며 꼬리를 가르고 부순다.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인간의 것처럼 붉은 피가 튀어 창끝을 따라 흩날린다. 괴수의 생을 빼앗는 데에 대한 죄책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형형한 빛이 서린 그리페의 시선은 상대를 놓치는 법이 없다.

토막 난 팔이 바닥을 구르고, 짓밟혀 뭉개졌다. 하나둘씩 쓰러진 거체가 바닥을 굴렀다. 괴수의 시체 중 일부는 부산물을 얻어낼 수 있다지만, 놈들의 시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바닥이 온통 피로 젖어 질척거렸다. 분명 피 냄새가 진동할 터였으나 지금의 제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을 늘어트린 채, 그리페는 난장이 된 현장을 훑었다.

[균열이……]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날 선 시선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했다. 맑은 하늘을 찢어 놓은 새카만 틈이 여전히 건재했다. 그 끝자락조차 소멸하는 기색이 없었다. 분명 그 내부에서 쏟아진 괴수를 모조리 처치했음에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괴수라도 있단 말인가. 괴수가 전장을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나온 놈의 수와 남은 시체의 수는 일치했다.

“균열 발견이 늦었습니까?”

[아닙니다.]

“전투 중 빠져나간 개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발생 과정도, 전투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승리를 자축하던 이들 사이로 적막이 스몄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균열은 소멸하는 대신 조금씩 더 벌어졌다. 누군가 하늘을 잡고 양쪽으로 당기면 이런 꼴이 될까.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마침내 균열의 확장이 끝났을 때, 그 사이로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원류가 아니다. 이때까지 하나의 균열에서 이종의 괴수가 등장한 적은 없었다. 일순간 떠오른 팔마의 정보에 그리페는 이를 악물었다. 정형화된 모든 일에는 예외가 발생하기 마련이었으나, 이건 예외 정도로 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협회는 아직 입을 다물고 있었고, 팀원은 얼빠진 얼굴로 빠져나오는 괴수를 보고만 있었다. 괴수의 덩치는 대체로 개체의 무력에 비례했으며, 저건 방금 쓰러트린 것들과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정신들 차려!”

불호령이 떨어졌다. 불가해한 상황을 마주한 이들은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이성을 붙잡았다. 놓았던 무기를 다시 들고, 가이딩을 받기 위해 빠졌던 이들이 되돌아와 전열을 가다듬었다. 괴수가 한 걸음, 이곳에 발을 내디디면 지축이 울렸다. 비늘로 덮인 살갗은 얼핏 보기에도 단단하기 그지없고, 번들거리는 눈이 난장판이 된 현장을 훑었다. 새로이 나타난 건, 비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파충류 계열로 취급되는 괴수였다.

이때까지의 규칙이 들어맞는다면 저런 괴수는 대개 단독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판에 이때까지 관측된 결과를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무작정 돌격하는 것만으로는 이 괴수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시선을 끄는 동시에 공격까지 가능한 건 지금으로서는 저 하나뿐이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 괴수의 정면에 섰다.

“개체가 둘 이상 확인될 시, 대기 인원 전원 투입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연이어 이어지는 전투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 끝은커녕 더 강한 적이 나타나는 순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페의 팀에 속해 있다고는 하나, 그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일반 전투원이었으므로. 게다가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건 또한 좋은 핑곗거리이기도 했다. 저 앞, 등을 보이는 이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뒷걸음질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파트너인 이리트와 더불어 근래 센터 내에서 가장 화제가 된 S급 센티넬. 검은 제복으로 감싸인 몸은 여느 근접 계열이 그렇듯, 이런저런 장비를 입고 있어도 단련된 티가 났다. 단단하고 곧은 자세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괴수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산 같은 존재감으로 다른 이들의 사기를 진작했다. 흐트러진 밀빛 머리칼이 바람결에 가닥가닥 흩날렸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부터 전투가 시작될 테다. 급하게 가이드를 후방으로 보낸 탓에 이능의 후유증이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오랫동안 그리페의 등을 바라보던 이가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멀미라도 하는 듯 속이 메스꺼웠으나 싸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그리페의 첫 번째 걸음이었다. 발을 잡아끄는 중력이 그 하나만 피해 가기라도 하는 듯 높이 떠오른 신형. 일순간 시야를 벗어나더니 곧 그의 창이 괴수의 단단한 비늘 틈 사이를 꿰뚫었다. 울부짖음이 귓가를 울리면, 이제 다른 이들 또한 나서야 할 때였다. 상태가 멀쩡한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제각각 이능을 끌어올렸다.

그리페, 언제나 선두에 서는 그들의 상관처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완전히 무용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괴수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함성과 비명은 한 끗 차이었다. 정교한 훈련을 받았다 한들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그저 감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괴수는 제게 꼬여 드는 벌레를 쳐내려는 듯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휘둘렀고, 그 덕에 건물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직전까지도 무기를 휘두르던 이 하나가 콘크리트 덩어리를 피하려다 괴수의 꼬리에 맞아 쓰러졌다. 당장 쓰러진 이를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치지 않은 이들도 이능의 반동으로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망치는 이가 없었다. 싸울 수 있는 이들은 괴수의 사지에 들러붙어 악착같이 공격을 감행했고, 더 싸울 수 없는 이들은 쓰러진 이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둘러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비교적 공격이 덜 닿는 아래쪽이 이럴 진데 괴수의 시선을 대놓고 끌고 있는 그리페는. 그는 아득한 높이가 두렵지도 않은 것 같았다. 괴수의 몸 위를 타고 움직이며 여태 한 번도 땅을 밟지 않았다는 사실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페가 지나간 곳마다 비늘이 벌어지고, 깊숙하게 찢어진 괴수의 몸체에서 피가 흘렀다. 탁한 상앗빛 비늘 위로 붉은 무늬가 새겨진 괴수는 맹목적으로 그를 좇았다. 지닌 무력의 차이가 아플 정도로 명확했다.

“얼타고 있으면 어떡해!”

걱정이 서린 목소리,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는 움직임. 퍼뜩 고개를 돌려 보면, 서 있던 자리로 사람 머리통만 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져 부서졌다. 젠장, 욕을 내뱉은 이는 숨을 가다듬었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비록 그리페의 실력에는 비할 바가 되지 않더라도, 분명 괴수에게 꾸준하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어지러움은 여전하고, 이젠 손끝이 떨려왔지만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그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몸체를 타고 흐르다 말 뿐이었던 핏줄기가 마침내 바닥을 적셨다. 그즈음 괴수의 비늘은 원래 붉은색이었던 것처럼 물들어 있었다. 격렬한 반항은 느리게나마 잦아들고, 위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뒤집어쓰면서도 그들은 멈칫거리는 법이 없었다. 물러서! 이 난장판 속에서 가장 올곧은 목소리가 울리면, 그들은 한 치 의심도 없이 괴물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덩어리진 피가 철퍽, 소리를 울리며 떨어졌다. 곤죽이 되어 버린 자신의 체조직 파편 위로 괴수가 무너져 내린다. 거체가 지면에 부딪히면 흙먼지 대신 핏물이 비산했다. 쓰러진 괴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목격한 이들의 시선은 자연히 하늘을 향했다. 빛조차 채 미치지 못하는 깊은 틈이 끝자락부터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은 비로소 이 싸움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이능의 반동을 견디던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았다.

괴수와 싸우는 일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승리하는 것. 처절한 승리는 언제나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가리지 않고. 전장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되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그게 사람이건, 혹은 다른 그 무언가이건. 오늘 목숨을 잃을 뻔한 센티넬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능의 반동에 앓는 소리를 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후방에서 대기하던 가이드 여럿이 이리로 다가왔다.

한참 만에 땅 위를 밟은 그리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뻗어 버리고 싶었다. 예상외로 길게 늘어진 전투는 그에게도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피해가 누적된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목에서는 자꾸만 쇳내가 올라왔다. 손이 떨리는 감각이 싫어,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의 고통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라고 생각했건만, 한 번 가이드를 찾은 몸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건물의 파편이며 괴수의 사체를 피해 새카만 바이크 한 대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접근했다면 분명 관계자일 텐데, 센터 내에서는 본 적 없는 차종이었다.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면 일순간 기시감이 스쳤다. 얼굴은 헬멧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체격도, 옷소매와 장갑 틈 사이로 비치는 창백한 피부도 분명 아는 이의 것 같았다. 의심이 끝도 없이 자라날 때쯤, 바이크가 옆으로 미끄러지듯 요란하게 멈춰 섰다. 바이크 위에 걸터앉은 채 헬멧을 벗은 순간 드러난 얼굴이.

“……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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