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18)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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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3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이가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 손뼉을 쳐 댔다. 무슨 장치를 해 두었는지, 단순히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한껏 긴장한 이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무기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걸까, 귓가를 울리는 웃음소리는 그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좋아, 좋아. 그럴 것 같았어. 우선 내 소개를 할까. 나는 제대로 된 별명은 없거든. 아직까지는. ……그렇지, 나를 비숍라고 칭해라. 호칭은 이 정도로 정리하자고. 그래, 너희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나는 팔마를 집어삼켰고, 균열을 다룰 줄 아는 자, 또한 팔마, 이제는 키르켄이라 부르는 이곳의 창시자다. 이 정도로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겠지?”

“모습을 드러내라.”

“아니, 그건 아직 이르지. 게다가 내가 나섰다간 공격부터 할 것 아냐. 나는 그런 재능이 없어서 곤란해. 어쨌거나, 내가 너희를 이곳까지 인도한 이유를 알 것 같아?”

“……”

“매정하긴. 어쩌면 너희가…… 아직 우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싸우려고 드는 건 아닐까, 내가 너희를 감화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했거든. 적당히 정보를 흘리면 협회는 여기로 올 수밖에 없을 테고…… 지금 너희가 여기 있는 걸 보니 내가 틀리진 않은 모양이야. 식사는 너희를 위해 준비한 건데, 마음에 안 들었나 봐?”

키득거리는 웃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상대가 팔마든 키르켄이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까짓 이름에 담긴 의미 따위는 이쪽이 알 바가 아니었고, 그저 미친 짓거리를 일삼는 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을 뿐이었다. 그리페는 가만히 선 채 창날을 매만졌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두고 볼 겁니까, 헬리온?”

“그럴 수는 없지. 그런데…… 지금 이곳에 있는 인선으로는 저놈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알아낼 수가 없는 게 문제지.”

“무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는 것, 맞습니까?”

“그래. 생각해둔 수라도 있나?”

“가운데 있는 기계를 공격하면 무슨 반응이든 보일 겁니다.”

“……뛰어들 생각은 마라, 하랄트.”

물론 그리페는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뛰어들 만큼 미숙하지도 않거니와, 공중전에 익숙한 만큼 불리한 점을 아는 이였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그가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부터 몸을 혹사해 온 것을 아는 탓이었나. 헬리온은 가만히 짙은 벽안을 응시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협회에 오래 남아 있는 이들이 대개 인명을 중요시 여긴다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편이었다. S급쯤이나 되는 이가 몇 번이나 중상을 입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살만해지면 곧바로 현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좋게 말하자면 사명감이 강하며 선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지인으로도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사람.

“맘대로 해. 내 명령을 듣고 있을 만한 입장도 아니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헬리온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이처럼 드물게 팀 간 합동 작전을 펼칠 때면 대개 그런 구조가 되긴 했다. 명목상의 총지휘관이 있을 뿐, 각 팀의 팀장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다. 그러나 차라리 도구로 쓰이는 쪽이, 적어도 이런 작전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팀원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물론, 센티넬 개인으로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리페는 잡념을 구석으로 밀어 놓고, 보조 무장으로 챙긴 대거를 꺼낸 채 팔을 자연스레 늘어트렸다. 노리는 곳은 수조와 기계의 연결부. 내부가 상당히 어두워 거리감이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여야만 맞출 수 있을 만큼 먼 거리도 아니었다. 상대는 이쪽을 살피고 있을 테니 조준에 긴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다.

와중에도 자신을 비숍이라 칭한 이는 이곳을 소개해 주겠다느니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이리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개소리를 정성스레 지껄인다고 일갈했겠지. 이런 부분에서는 저보다 훨씬 단단한 연인이 떠오르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선택지는 없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그리페가 대거를 던졌다. 주변 이들이 알아챌 즈음 검은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 공기를 가르며 매섭게 날아가는 검이 정확하게 목표를 향했다.

“막아!”

내내 여유롭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서렸다. 이곳으로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팔마 측 인사가 큼지막한 방패를 휘둘러 대거를 쳐냈다. 금속성의 소음이 울리면, 수십 개의 눈이 방패를 들고 우뚝 선 이에게 향했다. 센티넬이 등장하며 사실상 역할을 잃었던 냉병기들이 다시금 사용되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다지만, 그중에서도 방패를 쓰는 이들은 드물었다. 개중에서도 장방형의 커다란 타워 실드를 쓰는 경우는 더욱.

수조 앞을 가로막은 이는 분명 한때 협회 소속이었으며, 몇 년 전 홀연 종적을 감춘 S급 센티넬이었다. 누군가는 그가 괴수에게 당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고, 누군가는 끝나지 않는 전투에 지쳐 모든 것을 관두고 떠난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그의 친인척마저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 탓에 죽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건만. 그런 이를 팔마의 깊숙한 지하실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위르겐…….”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위르겐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을 향했다. 한때는 기사라는 별칭까지 지녔던 이의 금빛 눈동자는 짙게 가라앉아 음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위르겐은 물론 그가 지닌 힘의 크기만큼이나 진중한 사내였으나 우울과는 거리가 멀었다. 팔마의 조직 분위기가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변절자라는 낙인을 달고 그 정도의 자리까지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차라리 과거에 그러했듯 당당한 자세였다면.

생각이 스치는 순간, 창대를 쥔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미숙하던 시절의 동경은 시간이 흐르며 잊힌 줄 알았건만. 뒤늦게 찾아든 배신감은 씁쓸함을 남겼다. 자신조차 잊은 사이 너절해진 선망은 아마 다시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겠지. 위르겐의 심정이 어떠하든, 그는 그 자신의 과오를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 몇 년이 지나도록 잊을 수 없는 모습 그대로 위르겐은 방패를 앞세운 채 필연적으로 일어날 전투를 대비했다. 그의 뒤로, 팔마 소속 센티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 불신자들은 영원히 이 지하에서 부패하게 되리라.”

“목표는 적 섬멸, 전투를 준비해라!”

내내 유들거리던 비숍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이미 벌어질 것을 예상했던 전투였다. 그리페를 비롯한 이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누구 하나 빠짐없이 수십 번은 겪어 익숙해진 자리에 섰다. 적은 팔마의 정예였다. 이곳까지 오는 과정 중에 마주친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법한 상대. 이쪽에 비하면 수가 적은 편이나 그들이 어떤 이능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위르겐은 방패를 앞세운 채 이곳을 향해 다가왔다.

“헬리온, 위르겐은 단독으로 맡겠습니다.”

“괜찮겠나?”

“문제없습니다.”

다수 대 다수로 벌어지는 싸움을 지휘하는 데는 자신보다는 헬리온이 더 적합했다. 헬리온이라면 물론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도 문제없이 지시를 하달할 테지만, 기용할 수 있는 수단을 쓰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리페는 창을 쥔 채 위르겐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완고한 인상을 더욱 짙게 했다.

“위르겐,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쪽을 끝장내 버리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살의는 이상하게도 옅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은 때때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인해 길을 잃곤 했다. 그럼에도. 위르겐의 검을 받아내면 금속의 마찰음이 귀를 긁었다. 등 뒤에서 그릇이 깨지며 파열음이 울렸다.

사람과의 전투는 필연적이었던 만큼 그리페는 갖은 냉병기를 상대하는 법을 익혔으나, 개중에서도 방패를 든 상대는 까다로운 편이었다. 이쪽의 공격은 너무 쉽게 막히고, 적은 방패를 믿고 공세를 이어가기 용이하므로. 다행인 건, 완력 자체는 제가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끈하기 그지없던 방패에 그리페의 흔적이 남았다. 공방이 몇 번쯤 오갔을 때, 그리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위르겐의 움직임은 과거 그가 지녔던 위상에 걸맞지 않았다. 방패를 다루는 것만큼은 여전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한 실력을 내보였으나 그게 전부였다. 타워실드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은 S급답지 않았다. 방패를 휘둘러 공격하는 것이 차라리 더 위협적일 터였다. 위르겐도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곳에서의 생활이…… 당신을 녹슬게 한 것은 아닙니까.”

여지없이 이어지는 침묵. 적의 마음 같은 건 이해해봤자 득 될 것이라고는 없음을 알면서도. 차라리 그가 여느 광신도처럼 완전히 미쳐 버렸다면 자꾸 생각을 거듭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위르겐의 눈은 빛을 완전히 잃지도 않았으며, 맹신으로 기이한 빛을 발하지도 않았다. 다만 음울하게 침잠했을 뿐이었다. 관리되지 않은 도구는 끝내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위르겐 또한 그런 입장일 테지만. 이를 악문 그리페가 마침내 위르겐의 손목을 베어내고, 날이 상한 검이 바닥을 굴렀다.

“왜 제대로 싸우지 않습니까, 위르겐.”

“……”

“타인의 손을 빌려 죽을 생각이라면 관두십시오.”

그리페는 사람의 피를 묻히는 일에 원한 적도 없이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런 이가 의도적으로 급소를 방어하지 않는 움직임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위르겐은 이곳으로 와야만 했던 이유를 이미 잃은 것 같았다. 차라리 나서서 입을 놀려 준다면 좀 달랐을까. 그리페는 창 앞으로 돌격하는 이의 움직임을 막고, 방패 너머로 드러난 몸뚱이를 가격했다.

위르겐은 오늘 이곳에서 죽지 않는다. 협회가 빠져나갈 길 없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다고 한들.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거나, 저지른 일을 똑바로 마주해야만 한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신앙에 정신마저 팔아버리지 않은 이상, 그는 팔마가 저지른 일의 증인이 되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타인의 손을 빌려 자살하려는 이를 고이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전투는 예상한 것보다는 순조로웠다. 그들이 등 뒤를 지키는 것을 우선한 탓이었다. 목표는 처음부터 수조였다. 협회 측과 팔마 정예들의 힘이 이미 아군 쪽으로 기울어 있고, 저들은 자신을 위르겐에게 완전히 맡긴 채였다. 위르겐을 무력화하면, 그다음부터는 이 애매한 균형마저도 깨질 테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엔 이쪽이 낫다. 제게 무기는 공격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인 적 없었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그리페는 보란 듯 창을 떨어트렸다. 내내 생기 없이 죽어 있던 금안이 드물게 의문을 표하며 이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리페에게는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정확하게 내뻗은 주먹이 방패로 막히면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손이 으스러지고 말았을 테지만, 그리페의 손은 변함없이 말끔했다. 그의 몸은 그 자체로 병기와 다름없었다. 위르겐이 지닌 장방형의 방패는 크고 무거웠다.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으나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그 또한 S급이니 반쯤 송장이 되지 않고서야 의식을 잃지는 않을 터였다. 거추장스러운 방패부터 치워야 했다. 싸울 생각이 없다 한들 위르겐은 끈질겼다.

피해는 꾸준하게 누적되기 마련이었다.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방패를 후려치고도 멀쩡한 손으로 상대를 갈기면, 아무리 S급이라고 한들 멀쩡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일격을 허용할 정통으로 맞으면 통증이 일고 그게 몇 번쯤 반복되면 뼈에 실금이 갔다가, 끝내 으스러진다. 그가 기침을 내뱉으면 새빨간 피가 튀었다. 그리페는 내내 싸늘하게 굳은 낯으로 위르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무릎이 마침내 차가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게는 왜 제대로 싸우지, 쿨럭…… 않느냐고 묻더니, 무기를 들지 않는 이유가 뭐지.”

“할 말은 그것뿐입니까.”

지탱할 것 없이 늘어진 위르겐의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주위의 상황을 살펴볼 여력은 남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토록 강렬한 고통을 느껴본 것이 얼마 만이었는지. 위르겐은 눈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창을 주 무장으로 사용하는, 밀빛 금발에 벽안을 지닌 S급 센티넬. 제대로 된 가이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특이성 탓에 여태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이. 극복하기 어려운 약점에도 쉼 없이 전투에 나서던 모습을 꽤 좋게 봤던가.

“……기계를 공격하지 마라.”

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팔마를 상대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태도임을 알았건만.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던 위르겐이 별안간 새빨간 생피를 토했다. 부상으로 인한 것과는 분명 달랐으며, 제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금제를 어길 때의 페널티 중 가장 흔한 형태였다. 이 이상은 말해줄 수가 없군.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갈라져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위르겐의 사지에 구속구를 채우는 그리페의 손은 단호했다.

그를 팀원에게 넘긴 그리페는 곧바로 헬리온을 찾았다. 간략히 상황을 전달하면, 헬리온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그 역시도 상황의 이질감을 곱씹고 있던 탓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이쪽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비숍은 그의 수하가 밀리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적 개개인이 지닌 기량에 비하면 묘하게 방어적인 태도나, 바로 옆에서 그들의 머리가 쓰러지는 데에도 일말의 반응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헬리온에게 향하는 공격을 보지도 않고 쳐낸 그리페가 대답을 기다렸다. 실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여느 작전이 그랬듯 물러설 길은 없고, 선택지는 허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정도는. 그러니 이건 그저 마음을 다잡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변동사항은 없다. 작전을… 속행한다. 담담한 어투였다.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어선 이 특유의 초연하고 굳은 태도는 제게도 익숙했다.

작전 계획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하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이쪽의 싸움은 이미 거의 마무리되는 상황이었으며, 저는 손이 남았다. 고민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식탁을 가볍게 디딘 그리페가 이번에는 정말로 몸을 던졌다. 자신의 체중과 가속도를 실어 온몸으로 내려찍는 순간, 금속제 파이프가 갈라지는 소리와 비숍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신경을 긁었다.

창을 빼내면, 큼지막하게 찢어진 틈 사이로 불그죽죽한 액체가 터져 나온다. 피할 새도 없이 튄 액체에서는 찝찌름한 쇳기가 느껴진다. 이 넓은 곳에 머물던 비린내의 근원. 수조 내부가 비치지 않던 이유를 그리페는 찰나 직감한다. 인간의 혈액. 어지간한 사람보다 더 큰 원통형 수조 안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피는 몇 사람 분의 것인지. 새빨간 액체는 수조가 올라간 단을 적시는 것으로는 모자란 듯 바닥을 타고 퍼진다.

옆으로 물러선 그리페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러 닦았다. 살갗에 닿은 피가 따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것처럼. 뒤쪽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어쩌면, 팔마의 정예라 생각했던 저들은 미끼일지도 몰랐다. 싸울 의지가 없던 웨이드와 싸우기는 하나 적극적이지 않던 이들. S급 하나와 A급으로 추정되는 이 여럿을 한낱 미끼로 던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차치하고서.

수조 내부를 가득히 채우고 있던 액체가 빠져나가는 만큼, 조금씩 안에 들어 있던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온갖 관이 끼워진 채 눈을 감은 사람이 액체가 빠져나가며 천천히 늘어졌다. 늑골의 형태가 다 드러날 만큼 마른 이의 가슴팍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살아있었다. 핏속에 잠긴 채 억지로 생명이 연장되어. 혼자서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 몰골을 한 이가 대체 무엇이어서 어떻게든 명줄을 붙잡아 대지 위에 발붙여 놓았는지.

숨이 막힐 듯 무거운 적막 위로 핏줄기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렸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끊임없이 흐르던 액체가 서서히 멎어 들고, 방울져 아래로 낙하했다. 기이한 직감이 스치면 그리페는 피가 깔리지 않은 쪽으로 물러섰다.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전투에 익숙한 그의 시선은 맥없이 흐르던 액체가 일순간 꿀렁거리다가 날카로운 가시의 형태로 변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제압당한 이들이 한 일일 리가 없다. 이런 짓이 가능했다면 진작 내보였어야 했다. 비숍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고,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눈을 뜬 수조 속의 사람. 온통 붉은 이는 차라리 마네킹 따위의 인형 같았다. 얼굴의 근육마저 굳어 버린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이, 느리게 구르는 눈동자는 빛을 모조리 흡수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칠흑이었다.

사람이라 불리기에 적절하지 않은 존재로부터 시선을 돌린 그리페는 헬리온의 뒤에서 사지를 결박당한 채 무릎 꿇린 위르겐을 응시했다. 고개를 숙인 건 속박당한 탓인지, 수조 속의 저것을 두려워한 탓인지. 하랄트! 헬리온의 다급한 외침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뒤돌아 바라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척에 크게 물러선 그리페는 다시금 아군과 합류했다.

“왜 저들이 나서서 수조를 깨지 않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상대는 사실상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수조를 건드린 이를 우선으로 공격합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예. …지금처럼.”

그리페는 말하는 도중에도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창과 뾰족한 결정체가 부딪히면 맑은 소리가 울렸다. 먼저 깨진 것은 결정체라지만, 그것은 형태를 잃는 순간 다시금 녹아내려 액체가 되었다. 영락없는 소모전이었다. 그것도 이쪽이 일방적으로 잃기만 하는. 팔마 쪽에서도 저것을 제어할 수 없어 구속해 둔 것일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그들이 늘 하는 것처럼 죽여 버리면 상황이 이처럼 꼬이지는 않았으리라. 강제로 센티넬 하나의 생을 연장해 가며 여기까지 온 건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측이라도 한 탓인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고, 아직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적의 멱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상대의 이능이 혈액을 다루는 것인지, 액체라면 모조리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헬리온은 피로한 듯 한 손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 길어지는 와중에도 아군은 변화무쌍한 공격을 막아내기 바빴다. 이미 일반 전투원의 낯에서는 여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퇴각하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인가. 하지만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도망치고 나면, 그다음은? 팔마는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쳐 시간을 끌 테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균열의 이상 현상만으로도 협회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으므로.

설령 팔마가 도망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전력을 보강하고 이곳에 돌아왔을 때 상황이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협회 내의 S급을 모조리 이곳에 투입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균열 발생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협회는 비정상 균열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질 터였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곳의 전력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강했다.

“더 이상의 의문은 묵인하지 않겠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마라. 싸워라, 그리고 이곳에서 죽어라. 그러면 오늘 우리는 저들의 살을 찢고, 끝내 저들의 피로 승리를 쟁취하리라!”

단단한 목소리가 공동 안을 가득히 울리면, 그들 또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함성을 내질렀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을 마주하며 머뭇거리던 이들의 망설임이 명령 아래 모습을 감추는 순간이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헬리온의 어깨를 툭 친 그리페가 사납게 웃더니, 헬리온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여기서 죽을 생각 없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이드를 애지중지한다더니……. 누구는 파트너 없는 줄 알아. 초 치지 말고 가서 싸우기나 하도록.”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길래. 아군이 방어에 집중해 주면 저것 자체를 처리하는 건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 발로는 못 움직이는 상태라, 공격만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무리하지 마. 문제가 있다면 즉시 지원을 요청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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