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20)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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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7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한 명도 죽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내내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비숍의 목소리였다. 패배를 시인한 이들을 제압한 두 사람이 동시에 베일을 응시했다. 비숍의 능력은 전에 없이 강력했으나 분명 S급인 그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이능에 휘둘린 이들을 직접 처리했으니,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같은 판단을 내린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통신기가 울렸다.

[균열 다수가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규모는 최소 7급부터 최대 3급으로 추정되며, 해당 균열 중 70%가 작전구역 근방 1km 안에 위치합니다. 지상 지원이 가능합니까?]

“불가.”

헬리온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곳에 남은 적이 오로지 비숍, 그 하나뿐이라 한들 당장 지상으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 새파란 눈이 잠시간 헬리온에게 닿았다가, 이내 정면을 응시했다. 바깥에는 대기 중인 전력이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자 대기하던 S급도. 사실과 별개로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저 바깥에서 대기하는 건 센티넬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갈증이 일었다. 비숍을 빠르게 처리하면.

“그리페 하랄트.”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면, 그리페는 다시 창을 고쳐 잡았다. 제압이 불가피했다 한들 아군까지 쓰러트린 상황이었다. 지금 뒤돌아서면 그 어떤 것도 갈무리할 수 없었다. 베일 너머에 어떤 함정이 준비되어 있더라도 나아가야만 했다. 두 사람은 잔뜩 경계하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흔들림 없이 내딛는 걸음마다 일전의 전투로 부서진 집기가 밟혀 으스러졌다.

긴 호흡, 한순간 시선이 얽히면 그들은 동시에 시야를 가린 천을 걷어냈다. 투두둑 소리를 내며 찢어진 베일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이쪽을 향하는 조명이 눈을 찔렀다. 베일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위해 쓰는 용도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밝은 빛, 그 아래 낱낱이 드러난 이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볼품없는 꼴이었다. 자각도 하지 못한 사이, 단단하게 쥐었던 창의 날 부분이 바닥으로 쳐졌다.

사람보다도 더 눈에 띄는 건 의자였다. 왕좌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의자는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누가 앉아있더라도 의자보다 먼저 눈에 띄기는 쉽지 않으리라. 어울리지도 않겠지. 지금처럼.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큰 의자에 앉은 이는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버석한 살갗은 그 아래 자리한 뼈의 형태를 선명하게 내보였다. 이곳의 센티넬들은 어째서 죄 이런 꼴이란 말인가. 다른 이들이야 비숍이 착취해 그런 꼴이 되었다고 이해나 해 볼 테지만, 그 본인은 대체 왜.

“재밌는 구경을 했어, 덕분에.”

기이한 인상이었다. 내내 협회를 조롱하고 비웃던 상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꼴이었으나 눈만큼은 생기가 흘러넘쳤다.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말라붙은 육체가 그 자신의 감옥이라도 된 것처럼. 그리페는 제 옆에 선 이는 안중에도 없이 저 하나만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비숍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홍채는 깨진 유리 조각을 이어 붙인 듯 여러 색이 뒤섞여 있었다.

빙글거리는 말투와 달리 비숍의 얼굴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이질감을 사람으로 빚으면 이런 존재가 될 것 같았다. 비숍이 떠드는 말 대부분은 들을 가치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건 비숍이 한없이 무력해 보이는 탓이었는지.

일순간 묵직한 통증이 머리를 내리눌렀다. 시시때때로 귓가에 이명이 울렸으나 청각 기능이 저하되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부상을 비롯한 여러 부작용이 육체에 누적되었으나 이성을 흐릴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페는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그만큼 길게 내쉬었다. 그래, 심문은 제 몫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작전을 완수한 뒤, 비숍을 잡아 협회에 인계하면 그만이었다.

“내게 궁금한 게 있구나.”

“……”

엿들을 사람도 없건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리페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다가섰다. 대답이나 질문은 곧 비숍이 정신을 건드릴 틈을 열어줄 뿐이었다. 수작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비숍의 상체가 이쪽으로 기울어지고,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가라앉아 차가운 벽안이 세 치 혀를 놀리는 이를 관찰했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인가, 혹은 여전히 여유가 남았나.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리페는 다만 확신했다. 비숍의 개짓거리는 오늘로 끝이었다. 그가 여태껏 사람을 휘두르는 데에 사용했던 이능은 제게 한해서 거의 무용한 수준이었고, 최소한의 근육조차 남지 않은 육체는 제대로 된 저항은커녕 도주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저항할 수 없는 이를 제압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비숍을 제압하려는 순간, 등 뒤가 화끈거렸다.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으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완전히 피하지 못한 공격은 등 뒤에 긴 창상을 남겼다. 열감, 막을 틈도 없이 터져 나온 피가 옷을 적시며 아래로 흘러내리는 감각. 위협하듯 창을 휘두르며 뒤돌아서면, 당연하게도 익숙한 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분명 자신의 한 걸음 뒤, 옆으로 빗겨 서 있던 헬리온이. 무기를 단단히 쥔 채로, 또다시 검을 휘두를 것처럼.

이전에는 분명 헬리온도 이능에 휘둘리지 않았다. 양 팀의 팀원들이 모조리 제정신이 아닌 채 두 사람을 공격해 올 때도 멀쩡히 저와 등을 맞대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인제 와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는 때, 새파랗게 선 칼날이 조명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창대와 검이 부딪치며 불티가 튀고, 묵직한 충격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탁하게 침잠한, 어딘가 초점이 어긋난 눈.

헬리온 스스로가 비숍의 이능에 저항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미 겪은바 비숍의 이능은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려는 기생충을 닮아, 조금 마음을 놓는 것만으로도 길이 열릴 터였다. 물론, 이는 여지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배신하려 했거든, 조금 더 이른 시점에 움직였으리라. 제 등을 공격하기 좋은 기회는 이미 몇 번이나 있었을 터였으므로. 그러니 지금 이토록 상황을 급변하게 할 만한 변수는 하나뿐이었다. 쏟아지는 빛 아래 방만한 자세로 걸터앉은, 희번덕거리는 눈이 아니라면 생존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이.

비숍은 A급을 포함한 센티넬 다수를 한 번에 조종했다. 이곳에 진입할 때 마주했던 민간인도 매한가지였다. 위르겐이 이곳에 주저앉은 것 또한, 비숍의 힘이 작용한 탓이었다. 위르겐을 오롯이 이능만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한들, 그의 이능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으리라. 비숍의 코앞까지 협회의 의지가 당도한 시점이었다. 만약 비숍이 그들을 누르던 이능을 모조리 거두어 한 사람에게만 집중한다면.

맹공을 받아내는 사이, 스치듯 살핀 비숍의 눈은 악의로 새카맣게 물든 채 휘어져 있었다. 헬리온의 복부를 걷어차 거리를 벌린 그리페가 이를 갈았다. 비숍의 얄팍한 의도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헬리온은 다른 이들처럼 적당히 맞붙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죽일 수는 없으니, 최소한 전투 지속이 불가능할 만큼 큰 상처를 입혀야만 했다. 달갑지 않은 선택지였으나, 지금 상황에서 믿을 건 S급 센티넬의 맷집과 회복력뿐이었다.

제가 그러하듯, 헬리온도 어지간한 상처는 회복할 수 있다. 그러니 문제는 시간이었다. 등의 상처가 얼핏 느낀 것보다 더 깊었는지, 피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등허리가 온통 축축했다. 시시때때로 전해지는 충격이며 그로 인한 통증은 이미 익숙했으나, 실혈로 의식이 흐려지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미 다수의 경상이며 이능의 반동을 짊어진 상태였으므로 더욱.

병장기가 맹렬하게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음을 울린다. 그리페의 발아래에 이따금 핏방울이 떨어지고, 헬리온은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어댄다. 누구 하나 물러서는 법 없이 이어지는 공방. 창이며 검이 쉴 새 없이 빛을 반사하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잔상처가 새겨진다. 딱 한 걸음, 아주 미약한 차이로 내내 밀리던 그리페가 침음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미안합니다, 헬리온.”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한 말이었다. 그리페의 기류가 달라지면, 멈추는 법을 잊은 듯했던 헬리온이 우뚝 선 채 그를 노려보았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그 같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헬리온의 사지를 멀쩡하게 보전할 자신이 없었다. 협회의 전력 손실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컸다. 더는 잃을 수는 없었다. 사람도, 사람의 능력도.

모든 망설임을 걷어내고 내지른 창이 헬리온을 관통할 것처럼 움직였다. 잔뜩 경계하던 헬리온은 버겁게 공격을 쳐냈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가오는 이. 그는 헬리온이 다가오는 것만큼 물러섰다가, 바닥을 강하게 딛고 곧장 검을 쥔 팔 한쪽을 길게 베어냈다. 찰나 힘이 풀린 손이 검을 떨어트렸고, 그리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헬리온의 무릎 뒤에 창대를 걸고 넘어트림과 동시에 창대로 헬리온의 상체를 눌렀다. 입, 다물지 마십시오. 무의미한 경고를 뱉은 이가 묵직한 전투화를 신은 발로 허벅지를 짓눌렀다.

강철 같은 괴수의 살갗도 찢어내는 힘이었다. 단련되었다 한들 신체의 내구성이 그보다 더하지는 않은 탓에 굵은 뼈가 한순간에 으스러졌다. 경고가 무색하도록 눌린 신음이 잇새로 새고, 거칠게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고투하는 몸뚱이가 바닥을 긁고, 몸을 누른 창대를 부러트릴 듯 쥐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작전에 나갈 때면 늘 착용하는 보호장구가 아니었다면 뭉툭한 창대가 살갗을 꿰뚫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창을 쥔 손 아래 온통 식은땀이 배어났다. 그리페는 이를 꽉 깨문 채 창대를 부여잡은 헬리온의 손을 걷어차 떨쳐냈다. 헬리온은 두 팔로 기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으스러진 다리가 의지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물론, 제 양 다리가 너덜거린다 한들 헬리온은 멈추지 않을 터였다. 센티넬, 그것도 협회 산하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 그러했다.

검을 쥐고, 제 쪽을 향해 들어 올린 팔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헬리온이 멈추지 않겠다면, 저 또한 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엉망으로 으스러진 다리였다. 움직이지 않는 쪽이 추후 회복에 더 유리할 테니, 제발 멈추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제압을 위해 소지하는 수갑은 이미 다른 이에게 사용한 지 오래였으며, 있었더라도 헬리온쯤 되는 이에게는 무용한 물건이었다.

비숍을 죽이는 것으로 조작된 정신이 돌아오리라 확신할 수 없는 지금, 헬리온을 무시하고 비숍의 목을 꺾을 수도 없었다. 괴수보다도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이였다. 전력의 다수를 상실했다지만, 비숍을 생포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이 등에 또다시 칼이 꽂힌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게 언제나 마땅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한 가지 선택을 강요받을 뿐이었지.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짙은 피로감을 다만 부상과 이어지는 실혈, 혹은 이능의 반동 탓이라 치부한 그리페가 거칠게 창을 휘둘렀다.

“헬리온……”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은 이전과 비교해 훨씬 맥이 없었다. 두 다리가 제대로 몸을 지탱할 수 없는 만큼 무게가 실리지 않아 약했다. 창을 틀어 검 면을 후려치면 긴 날이 두 동강 나 파편이 바닥에 꽂혔다. 헬리온은 꿋꿋하게 부러진 검을 쥐고 버텼다. 평소의 그였다면 차라리 검을 던져 버리고 육탄전을 벌였을 테지만,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은 부러진 검이나마 상대의 몸에 박아 넣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헬리온과 맞붙고 싶지는 않았다. 호흡을 고르는 와중 한기가 스쳤다. 내부의 온도가 낮은 탓인지, 피를 과다하게 흘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등허리가 찝찝했고, 이대로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등 뒤에서 비숍이 무언가 주절거렸으나 갈수록 심해지는 이명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실은, 그리 알아듣고 싶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답답함, 그리페는 장갑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제발 그만 좀 해. 제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던가. 날카로운 말은 둘 중 누구를 향한 것이었지?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는 있는 대로 신경을 긁어 놓았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

이미 다친 등에 다시금 칼이 꽂히건, 헬리온을 비롯한 팀원들의 정신이 쉬이 정상화되지 않건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한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협회 소속 센티넬이 된 후 가장 먼저 배우건만. 그리페는 헬리온의 손목을 잡아 비틀고, 그가 맥없이 떨어트린 검을 걷어차 저 멀리 밀어내고 몸을 바로 일으켰다. 비숍을 잡으면 이 지긋지긋한 작전도 끝이었다. 후일 보고를 비롯해 여러 절차가 이어질 테지만,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페는 무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짙게 가라앉은 눈이 비숍을 향했다. 그 사이 비숍의 입가에 피가 번진 흔적이 새로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무지 저지를 수 없을 일을 벌이고 다니는 탓에 진작 이능이 폭주해 몸이 그 꼴이 된 줄 알았건만. 그러나 이제 와 그가 흘린 피, 그것도 이능의 발출로 인한 미미한 출혈은 그의 죗값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 자신에게 남은 생을 모조리 가져다 바친다 해도 매한가지였다.

불쾌했다.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짚을 수도 없을 만큼. 비숍의 이능이 끝내 제 빈틈을 찾아낸 것일까.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근방에 비숍이 끌어다 쓸만한 인력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제 앞을 막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지금이어야만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예상한 것 이상으로 피를 흘렸고, 사용한 힘에 비해 과도한 부작용이 신체며 정신을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이 순간에도 살아남고자 비숍은 자신의 정신을 헤집으려 애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에 하나, 저마저도 정신을 빼앗긴다면 이 작전은 그야말로 파국에 이른 것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핏줄 불거진 손이 비숍의 헐렁한 옷깃을 잡아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뚱이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딸려 와 흔들린다. 느릿하게 움직인 손이 그리페의 손 위로 가볍게 내려앉으면, 그는 손을 떨쳐내는 대신 비숍의 안면에 주먹을 갈긴다. 단 한 번의 수세만으로 얼굴 반쪽의 형태가 무너진다. 코와 입, 심지어는 눈에서까지 새빨간 피가 흐른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도 비숍은 웃음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는 뭉개진 발음으로나마 끊임없이 속삭인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건만 제 옷을 단단히 붙잡은 그리페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은 채. 반쯤 이성을 잃은 이에게는 한 어절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의 앞날을 온 마음으로 저주하고, 그가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떠든다.

“종내에는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다. 세상을 지켜내려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마련이라. 봐라, 너의 가족은 이미 오래전에 무력하게 스러졌다. 팀원도, 동료도 저 뒤에 쓰러져 있구나. 네 가이드라고 무엇이 다를까? 운이 좋아 죽지 않더라도 너를 떠나게 될 거다. 장담할 수 있어.”

지금 당장은 헛소리라고 무시해도 괜찮다. 무의식 속에 던져진 못은 끝끝내 그의 발을 찌를 테니. 불가피한 이유로 움직임을 가속할 수밖에 없던 시점부터 원대했던 목표는 한낱 헛꿈으로 변모한 지 오래였다. 아니, 팔마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분명 괜찮았다. 이전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오히려 크나큰 약점을 지니고 있던 이가 이 정도의 변수가 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었지.

제가 써 내려가고자 한 역사는 여기서 끝이었다. 패자는 아무것도 남길 수 없으므로. 그렇다면 제 목표만큼이나 찬란한 센티넬 하나 정도는 꺾어 버려야 수지가 맞는 일 아니던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였는데도 이능이 통하지 않는 것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바였으나, 그래, 차라리 이 정도는 되어야 억울하지 않으리라.

그리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비루먹은 육체를 내려친다. 날카롭게 부러진 뼈가 살갗을 찢고 빠져나와 그리페의 손에도 긴 상흔을 남긴다. 비숍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고, 히죽거리지도 않는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깔딱거리는 호흡. 제 손을 자꾸만 어루만지던 비숍의 손이 맥없이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니까, 이건. 잔주름이 자리한 목 위로 손을 얹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목을 꺾어버리려는 때.

“그리페, 하지 마.”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매서운 이명을 뚫고 귓가에 박혀 들었다. 이 음성의 주인이 이곳에 올 리 없었다. 이런 곳에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제게 닿는 무형의 힘은 분명. 비숍의 멱을 잡은 뒤로 한 번 고쳐 쥐지도 않았던 손에 힘이 풀리고, 반송장이 된 몸뚱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범벅이 된 비숍이 철퍽, 소리를 울리며 떨어지는 건 그 누구의 관심사에도 들지 못했다.

“이리트.”

“응.”

“이리트, 헤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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