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01)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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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아, 헤르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게 얼마 만인지.”

“우리가 사담이나 할 만한 관계였던가, 레만?”

“최근에 유해졌다고 소문이 났는데…….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는 모양입니다.”

“시간 없으니 본론만 얘기하지. 팔마가 무너졌고, 계약은 여기서 끝이야.”

“따라붙는 조건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협회의 기밀과 관련된 기억 소거, 혹은 왜곡.”

“잊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다만…… 그 기억이란 것을 정확하게, 정의해야 할 것 같은데요. 시간이 많이 흘렀잖습니까.”

가라앉은 자색 눈이 느물거리며 웃는 낯을 응시했다. 정확하게, 라니. 이리저리 포장해봤자 뜻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를 쓸 뿐이지. 투명하게 비치는 뜻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계약서상의 내용이 부정확한 건 사실이었다.

과거의 제가 팔마가 붕괴하는 것은 물론, 그리페를 만나게 될 것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계약서를 쓰진 않았을까. 소파에 깊숙이 기댄 이리트가 팔짱을 꼈다. 아니, 아니다. 과거의 자신은 분명 최선을 다했다. 비록 그게 자신을 처치 곤란한 폐기물처럼 내버리려는 이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루어낸 일이라 한들, 가진 기반 하나 없는 십 대 중반의 소년이 그 정도면 잘했지. 때에 맞지 않는 후회를 억누른 이리트는 한숨을 삼켰다.

“열람에 2등급 이상의 권한, 즉 정보부 직속이 아닌 한 볼 수 없는 정보를 소거 및 왜곡해야 할 범위로 지정하지.”

“예, 좋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는데……”

그는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는 척하지만, 저건 자신을 떠보기 위해 내보이는 행동일 뿐이었다. 이리트는 짐짓 태연하게 시선을 맞추고,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팔마를 무너트릴 때 당신 손안으로 정보가 꽤나 흘러갔다는 걸 압니다.”

“공표했잖아. 앞서 말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알 텐데.”

“아니요.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

“고민할 것 없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물은 게 아니니까.”

그리페가 이런 짓을 해도 괜찮으냐며 걱정했던 그 일을 레만이 이제야 걸고넘어지는 것이었다. 손안에 숨긴 패가 있다고 주장하며, 의심에 빠진 제가 흔들리기를 원해서.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그건 앞선 조건 내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그리페를 만나기 전에는 책잡힐 일 같은 건 한 적 없었다. 그럴 필요를 느낀 적 없었으므로.

“내 쪽에서도 조건을 걸지.”

“말씀해 보시죠.”

“하나, 너는 직접 손 못 대. 둘, 합의한 범위 외의 기억은 일체 건드리지 말 것.”

이번에는 레만의 표정이 굳었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눈도 거의 깜박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살피던 이리트의 시선에는 명백했다. 일부 기억의 소거, 혹은 왜곡이라고 쉬이 말하지만 기실 그건 머릿속을 낱낱이 헤집는 일이었다. 그 대상이 거부하면 더 큰 힘을 써야 할 테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레만은 아직 제정신인 정신계 센티넬 중 하나였으나, 그는 멀쩡한 정신머리로도 더러운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 만큼 직접 손을 쓰지 못하게 해야 했다.

레만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팔마의 본거지에서 탈출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정보는 뻔했다. 기막힐 정도로 알맞은 시기에 발생한 화재, 복구할 방법 없이 망가진 데이터와 여전히 깨어나긴커녕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는 유일한 증인까지. 그는 차라리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 터였다. 그리페의 기억은 들여다볼 명분이 없었으나, 자신은 달랐다. 처음부터 머리를 건드리는 것을 전제로 한 계약이 존재했기에.

협회의 기밀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는 건 조금의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협회장과 계약을 맺던 순간부터 이미 그 기억은 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 외의 기억은 달랐다. 그건 오롯이 제 몫이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팔마를 무너트린 것만으로도 어렸던 자신을 키워준 은혜는 갚은 셈이었다. 그것을 단순히 은혜라 부를 수는 없었으나, 협회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리페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 대충 뭉개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다른 센티넬 하나를 굳이 거칠 필요 있습니까? 기억을 남겨서 좋을 건 없는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데, 다른 센티넬은 믿을 수 있습니까?”

신뢰를 운운하는 꼴이 우스웠다. 일말의 신뢰라도 존재했다면, 끝까지 이런 식으로 더럽게 굴지는 않았겠지. 먼 과거, 센티넬도 아닌 사람 하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먼저 내친 건 레만, 그의 선택이 아니었던가. 차라리 길 가는 행인 아무나를 붙잡더라도 그보다 더 믿음직하리라. 내내 표정이 없던 이리트의 얼굴 위로 냉소가 떠올랐다. 아직도 저를 삶에 그다지 미련 없던 어린애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서.

“네가 내 입장이었다면 퍽이나 날 믿었겠어. 이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지. 담보는 글쎄, 네 목숨 정도면 적합하겠는데.”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건 곤란합니다. 혹시 또 압니까, 당신이 그 조건을 이용해 나를 죽일지. 애초에 내가 죽으면 당신이 기억을 지울 필요도 없다는 걸 모를 것 같습니까?”

“그럴 줄 알았지. 그 센티넬의 목숨을 걸어. 네 하반신도. 제 목이 걸려 있다면 허튼짓하진 않겠지.”

“그게 목숨을 걸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쪽의 손해가 너무 큰데요.”

“손해는 내가 보는 거고. 허튼수작 부리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사안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암녹색 눈이 저를 똑바로 응시했다. 맹수의 것을 닮은 눈은 분명히 불만을 품은 채였다. 제가 원하는 만큼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끌고 가지 못한 탓이리라. 하나 순순히 목줄을 잡힌 채 끌려다닐 만큼 저는 어리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지켜야만 할 사람도 존재했다. 어쩌면 그 반대거나. 그의 시선이 제 손에 닿는 순간 이리트는 제가 왼손 약지를 매만졌음을 깨달았다. 반지를 맞춘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허전함이 느껴지는지. 이럴 줄 알았다면 빼고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이리트는 집요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했다.

“왜 대답이 없어?”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가능하면 빨리 처리하지.”

“굳이 길게 끌어서 좋을 것 없는 일이니까요. 적당한 사람을 호출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계약서나 주고 가. 센티넬의 이름만 채우면 완성되도록 작성해 둘 테니.”

그즈음엔 레만의 낯에서 꾸며낸 웃음마저 지워졌다. 그까짓 인간이 웃건, 화를 내건 제 알 바는 아니었으므로, 이리트는 테이블 한쪽에 꽂혀 있던 펜을 잡고 가볍게 돌렸다.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게 하나 없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를 긁어대는 건, 설령 제 기억을 헤집어본다 한들 레만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탓이었다. 기껏해야 그리페와 보낸 시간이나 더 알게 되겠지.

팔마의 음습한 지하실, 그곳에서 이리트는 기록을 탐독하다 말고 멈추었다. 끔찍한 내용을 굳이 알 필요도 없을뿐더러, 선택지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 기술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제가 편리함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단정할 수 없어서. 이를 악문 채로 돌아오면 조항을 확인하겠다 말한 레만이 새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잡은 손에 힘을 준 통에 이리트는 빼앗는 모양새로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한참이나 저를 노려보다 걸어 나가는 그의 걸음마다 짜증이 진득하게 들러붙은 채였다.

타인의 기억을 건드릴 수 있는 센티넬은 협회 내에서도 그 수가 적은 편이었으므로, 레만을 대신할 센티넬은 그나 자신이나 생각하는 이가 비슷할 터였다. 수작을 부리지 않는 이상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는 하나 목숨이 담보라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게 누가 됐든, 시간을 끌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제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런 이들은 개수작을 부리지 않을 가능성이 현저했다.

그가 내민 계약서는 의외로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협회에 소속될 때면 으레 작성하게 되는 비밀유지계약서와 같은 종류. 그 사실을 확인한 이리트는 곧 망설임 없이 지면을 채워나갔다. 레만에게 말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을 뿐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하나, 디지에 레만은 이리트 헤르데의 기억에 직접 접촉할 수 없다. 둘, 2등급 이상의 열람 권한을 요구하는 기밀 외의 다른 부분에는 일체의 조작을 할 수 없다. 잠시간 문장을 들여다본 이리트는 약간의 빈칸을 남겨둔 후에 가장 중요한 내용을 작성했다. 상기 조건을 불이행할 시, ____의 잔여 수명 전부와 레만의 하반신을 대가로 치른다. 간결한 문장을 이리트는 닫힌 문이 다시금 열릴 때까지 뚫어지라 응시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리트는 고개를 돌렸다. 레만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는 정보부 소속 정신계 센티넬, 나바로였다. 이미 조건을 들었는지 표정 없이 굳은 낯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레만이 자리를 뜬 시점으로부터 삼십 분. 이리트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넸다. 머뭇거리며 마주 인사하는 나바로의 모습은 꼭 상대를 잔뜩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손에 쥐고 돌리던 펜을 떨어트리듯 놓은 이리트가 서류철을 내밀었다. 보란 듯 나바로에게 내미는 자료를 중간에 가로챈 레만이 계약서를 훑더니, 빈 지면에 문장을 휘갈겼다. ‘셋, 진행 도중 나바로를 가이딩하고, 가이딩의 부재 혹은 미흡으로 인한 문제 발생 시 책임을 묻지 않을 것.’ 이리트는 가만히 문장을 쏘아봤다. 레만이 지닌 이능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능만으로 타인에게 가해지는 가이딩을 방해할 수 있는가.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으나, 이와 비슷한 사례는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레만을 긁을 수는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폭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기실 저는 제대로 된 반항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니, 이쯤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만 했다. 이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면, 저를 노려보던 레만의 시선이 나바로에게 돌아갔다.

“당신은…… 조건에 해당하는 기억은 거부하지 않고 꺼내놔야 할 겁니다. 그리고 나바로,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이 일과 관련된 당신의 기억을 지울 겁니다. 내가, 직접.”

“알아서 해, 그건. 나바로,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확연히 차이 나는 어투에 레만의 눈썹이 찌푸려졌으나, 이리트는 시선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화살이 돌아올 줄 몰랐던 나바로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레만의 손에 들린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은 들은 것과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자색 눈은 레만의 것보다도 더 서늘했다. 괜한 말을 꺼내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아 고개를 저으면 이리트의 시선이 다시 멀어졌다.

서둘러 빈칸에 서명을 남긴 나바로는 소파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이리트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려 했으나, 머리카락에 손이 닿기도 전에 이리트는 꼭 손을 대야 하느냐며 싫은 티를 냈다. 직접 접촉하는 편이 안정적이라는 말에 이리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이게 전부였다. 진행하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마저 긴장감이 어렸다.

이리트는 차분히 눈을 감은 채 제가 지녔으나 제 것이 아닌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오랫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사실들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구체적인 수치며 내용이 뭉개지고, 어느 때에는 직전까지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잘못 쓴 내용 위로 펜을 죽죽 그어 가리는 것처럼, 분명 흔적은 남았으나 그 아래 숨겨진 것을 알 수 없게 되는 감각.

해묵은 기억을 건드리는 건 쉽지 않았다. 이리트에게는 물론이고, 이리트가 차례로 떠올려 꺼내는 기억을 비틀고 지워내야 하는 나바로에게도. 눈을 감은 채 집중하는 나바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을 감내하며 이리트는 제 팔을 움켜쥐었다. 분명 초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건만 순간순간이 영원 같았다. 원한 적도 없이 얻은 협회의 기밀이 시시각각 으깨지고,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족쇄가 사라져가는 것이나 매한가지였건만 가슴 한구석에서 기이한 공허함이 맴돌았다.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순간에도 가까스로 끝은 다가왔다. 더 이상 기억이라고도 칭하기 어려운 잔해와 더 침잠할 곳도 없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남기고. 잠깐 사이 느껴진 불쾌함의 정도와는 별개로, 지워야 할 것들을 모조리 잘라내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변은 일수유에 일어났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지독한 두통이었다. 겨우 안도하던 차에 치미는 통증, 헛숨을 들이켠 이리트가 눈을 크게 치떴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허공에 뜬 나바로의 손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무형의 힘이 머릿속을 헤집으면 내부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만 같았다. 고통을 삼키며, 이리트는 시야를 가리는 손을 떨쳐내고 맞은편에 앉은 이를 응시했다.

가라앉은 녹안은 흔들리지도 않고 시선을 맞춰 왔다.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 없는 건 물론이고, 위기감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제가 가이드로서의 힘을 방출하고 있음에도 나바로를 폭주하게 만든 원인이 레만임을.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폭주는 최악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머릿속이 시시각각 엉망으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자꾸만 호흡이 가빠지고, 의지와 별개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그러잖아도 불안정한 시야가 한층 더 일렁였다. 레만을 잡아 조지는 건 나중 문제였다. 어금니가 마찰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울렸다.

사고와 기억 따위가 멋대로 헤집어지는데 센티넬이 진정되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잠시간 허공을 더듬은 이리트의 손이 이내 협회에 방문할 때면 늘 상비하는 테이저를 쥐었다. 고통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손끝이 자꾸만 떨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조준할 필요도 없이 가까운 상대였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웃음소리가 샜다.

턱없이 가벼운 웃음소리가 어떤 신호라도 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분명 멀쩡하게 앉아 있는데도 등 뒤가 무너지는 것만 같은 현기증이 치밀었다. 세상이 저를 둔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감각이. 이리트는 가까스로 테이저를 쥔 채 소파 위를 손끝으로 짚었다. 가까스로 다시금 눈을 뜨면, 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제 옆에 앉은 센티넬이 제 머릿속을 주무르고 있음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리트는 단숨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미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던 몸뚱이가 통나무처럼 굳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고통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고, 이리트는 숨을 고르면서도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자신은 분명 직전까지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지 않았던가. 머릿속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정식으로 협회 소속 가이드가 된 것 같다가도, 가이드로서 활동하는 데 이미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삽시간에 계약서를 훑은 이리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야에 걸린 계약서 최하단에 쓰인 날짜가 기억과 달랐다. 아니, 지금 제 기억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이 아니다.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어야 할 서랍장이 모조리 뒤엎어진 것처럼. 그러나 혼란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가장 최근으로 추정되는 기억과 차이는 일 년가량이었다. 그새 팔마가 무너지고, 제가 계약을 종료하고자 이곳에 온 게 분명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계약서를 훑는 것만으로도 이리트는 확신했다. 레만, 이 개 같은 자식이 기어이 일을 쳤다고.

“레만.”

갈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에 진득한 불쾌감이 실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은 제 옆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경련하는 센티넬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을 노려봤다. 직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떨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올곧게. 젖은 뺨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강렬한 시선, 이리트는 제가 범인임을 확신할 터였다.

물론 사실이었으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있었다면 이미 나바로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으리라. 게다가 한순간이나마 이리트는 혼란스러워했다. 주위를 훑던 시선이 계약서 아래 적힌 날짜에 유난히 오래 머무르지 않았던가. 최근 기억이 날아가는 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팔마가 지녔던 비의를 제가 알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도 남지 않아야 했으므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만약 내가 무슨 수를 쓴 거라면, 내 하반신이 날아갔겠지. 그렇게 계약했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불어 직전의 기억이 없으니, 상황을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이리트는 입을 다문 채 레만을 노려봤으나,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레만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면 끝 간데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얼굴이 엉망입니다, 헤르데. 나바로는 이쪽에서 수습할 테니, 추스르고 나오세요. 보아하니 휴가가 며칠 더 필요한 모양인데…… 그건 적당히 처리해 둘 테니, 우선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리트가 반응하거나 말거나, 레만은 제 할 말만 내뱉고 나바로를 짐짝처럼 둘러맨 후에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꼴 보기 싫은 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이리트는 벌벌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안감을 담고 뻗은 손이 가죽 소파 위를 더듬다가, 무엇이라도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호흡이 기이할 만큼 힘들어서, 이리트는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몸은 아프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두통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눈물은 이상하게도 멈출 줄 모르고, 속이 메스꺼웠다. 어떻게든 기억을 지키려 했던 이유가 있었다. 분명히.

뺨을 타고 흘러 내려와 턱 끝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허벅지 위를 적셨다. 깜박이지도 않는 눈이 맹렬하게 기억을 되짚는 듯 허공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어지럽게 흩어진 기억을 그러모아 퍼즐을 짜맞추듯 살폈다. 어느 때에는 막 능력을 각성해 더없이 많은 불안을 혼자 씹어 삼키는 어린애였다가, 어느 순간에는 익숙해지다 못해 무심해지기까지 한 가이드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새로운 계약서까지 작성해 가며 기억을 지키려 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도저히 떠올릴 수 없도록 지워진 일 년, 그 사이에 무언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분명 자신은 기밀과 함께 기억 대부분이 날아간다 해도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단조롭게 살아왔건만.

걸음을 옮기는 순간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런 곳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사라진 일 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닫힌 문을 당겨 열자마자,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이와 눈이 마주쳤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형광등 아래에서도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시리도록 푸른 벽안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가, 젖은 뺨을 본 순간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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