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02)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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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낮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분명 자신은 협회 내의 그 누구에게도 제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었다. 눈앞에 선 이는 분명 협회 소속의 센티넬이건만. 걱정이 담긴 표정을 한 이름 모를 센티넬이 다가오면, 이리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를 마주한 순간부터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두통이 다시금 치밀었다. 그와 닿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이리트……. 어디 아파요?”

“가까이,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얼른 돌아오겠다던 이가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협회장이 센티넬 하나를 데리고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협회장의 어깨에 얹힌 채 실려 나갔다. 그들이 나왔으니 곧이어 나오겠거니, 하고 기다린 지가 이미 삼십 분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문을 열려는 순간 나타난 이리트의 눈가가 온통 젖어 붉었다.

손을 뻗었을 때 이리트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선 것까지는 괜찮았다. 정말로.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했는지 흥건한 뺨 그대로 나온 이리트는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겁에 질린 듯이 보이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이리트가 입을 연 순간부터, 더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처음 만났던 시절처럼 벽을 치는 이리트를 앞에 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별일 아니라고 말했으면서. 그러나 저를 모르는 이리트에게 뱉어 봤자 아무런 소용 없는 문장이었다. 이리트도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아마도 제게 무슨 말이라도 해 줬을 테니까. 그렇게 뇌까리면서도 속 한구석이 쓰렸다. 이리트는 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성을 축소하여 생각했으므로.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어서 이리트의 앞을 막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와중에 옆쪽에서 다급한 걸음이 다가왔다.

“웨이드.”

저와 약간의 간격을 벌린 채 서 있던 이리트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이리트와 웨이드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이리트의 시간을 아는 이. 그러니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리트가 그를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달려온 웨이드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옆으로 비켜 길을 터 준 그리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문제가 생겼어.”

형형한 그리페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면 굳이 그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웨이드는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조금 전 의식을 잃은 나바로가 협회장에게 들린 채 의무실로 향한 것이며,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센터로 온 이리트가 협회장의 사무실에서 나오다 말고 멈춰 있는 것까지 상황을 파악하기에 적합한 정황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기억 일부가 사라졌어. 시점은 정확하게 모르겠고, 추정하기는 일 년 정도. 레만, 그 빌어먹을 자식이 나바로를 폭주시킨 게 분명한데 기억이 날아가는 바람에……”

사라진 기억이 일 년 치라고 했다. 그리페와 이리트가 답지 않게 대치하듯 서 있던 이유를 알게 된 웨이드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나바로의 이능으로 지워진 기억이 다시 돌아올 수 있던가. 생각을 되짚어 봤으나 떠오르는 사례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기억이 날아가는 상황 자체가 전례가 없었다. 기억을 조작하는 정신계 이능은 아주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사용되었으므로.

“증거를 찾아내는 건 어려워, 헤르데.”

“웬일로 그렇게 부르지? 어쨌든, 그건 나도 알아.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최근 일 년간의 내 행적이야. 그래, 팔마에 관한 것도.”

그리페는 이름을 듣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협회장의 어깨에 매달린 채 실려 가던 사람이 정보부 소속의 정신계 센티넬임을 깨달았다. 정신계 특성상 현장을 거의 뛰지 않아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지 못했던 거였다. 이리트의 기억을 건드린 이유는 뻔했다. 이리트를 두려워한 탓이리라. 그리페는 무어라 말을 얹을 수도 없어, 이리트의 곁을 지키듯 서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저와 닿는 것을 거부한 이리트는 날까지 세우지는 않았다. 생각을 곱씹는 그때, 웨이드의 시선이 제게 닿았다. 거리낌 없이 눈을 마주치자, 웨이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말해 둘 게 있어. 아주 중요한 사안이지.”

“뭔데 이렇게 무게를 잡아.”

“여기, 이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 같은…… 뭐든 간에 기억 나는 게 있나?”

내내 멀거니 서 있던 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던 이리트가 그를 세세히 살폈다. 다가서는 것부터 거부하는 이가 겨우 자세히 관찰하는 것만으로 새삼 다른 무언가를 기억해 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리페는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은 채 자세를 올곧게 고쳐 섰다. 혹여나 열망하는 제 시선을 마주하면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까,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리고 양손을 등허리 뒤에 댄 채로. 그러나 짙은 자색 시선은 그리페를 훑고는 빠르게 떠나 버렸다. 아무것도. 이리트의 대답은 간결하기 그지없었고, 그만큼 희망은 쉬이 부러졌다. 그리페의 표정을 목도한 웨이드는 무어라 운을 떼려다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네 파트너야, 헤르데.”

“……내, 파트너?”

더없이 익숙한 단어가 어떻게 그렇게 낯설게 들릴 수 있는지. 이리트는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잘 훈련된 군견처럼 서 있는 남자를 노골적으로 응시했다. 창백한 실내등 아래에서도 반짝이는 금발, 시리도록 차가운 벽안이며 어디 가져다 놔도 모자람 없을 얼굴까지. 이전에도 협회 본부에 소속되어 있던 센티넬이라면, 지나가며 얼핏 봤다고 해도 도저히 잊지 못했을 외모였다.

“팔마와 관련된 사안이나 네 행적의 큰 틀은 곧 서류화해서 네 편으로 보내주겠지만…… 글쎄, 헤르데, 그런 것보다 이 사람이 더 잘 설명해 줄걸.”

“……웨이드.”

“그럼, 이야기 잘 나누도록.”

웨이드는 대충 말을 마무리 짓고는 다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는 허둥지둥 사라지고,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센티넬이 한 걸음 물러선 탓에 저 또한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발이 묶인 것처럼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사라진 기억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불완전한 기억은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스몄다. 할 말을 찾으려 눈을 굴리는데 일순간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고, 얼음 같던 벽안이 온기를 품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한 채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온기를 마주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린 것 같았다.

“다시 소개할게요. 그리페 하랄트, 서른세 살. 협회 소속 십삼 년 차 S급 근접전투계 센티넬. 알파 팀 팀장. 그리고……”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하나씩 정보를 나열하다가, 뜸을 들였다. 덩달아 긴장한 채 이리트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당신의 파트너이자…… 연인. 한참 만에야 꺼낸 문장, 그리페라 자신을 소개한 이가 자신을 올곧게 응시했다. 기세에 밀려, 이리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잠시간 시선을 피했다.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하기 그지없었으나, 제게는 난해하게만 들렸다.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 그런데도 그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얼굴과 이름, 직급 정도밖에 없으면서도.

“이런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기억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이리트가 더듬더듬 사과해 왔다. 이런 반응을 원한 적 없다. 그리페는 제가 이리트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보다, 결국 한숨을 삼켰다. 이리트는 당혹스러울 터였다. 일 년 전이라면 저는 아직 본부로 발령받기도 전이었으며, 당시 이리트는 센티넬과는 말도 거의 섞지 않고 거리를 두었을 테니. 이 상황에서 가장 불안한 건 분명 이리트일 테지만, 제 속도 꼭 그만큼 쓰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리트를 탓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리트.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이 낯설었다. 한 박자 늦게 그리페의 제안을 이해한 이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처럼 두고 선 문, 밖으로 나오라는 듯 그리페가 몸을 살짝 돌린 채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이리트는 내민 손을 보지 못한 척 걸음을 옮겼다. 제 손을 한 번 오므렸다가 편 그리페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앞장서는 이리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지금의 이리트는 여느 때보다도 긴장한 채였다. 기억의 부재가 이리트가 지닌 불안의 원인일까. 혹은 제가 부담되는 것일지도 모르지. 제가 모르는 연인이라니. 그러나 당장 이리트에게는 정보가 더 중요할 터였다. 머릿속에서 사라진 1년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렇지 않고서야 진작 자리를 떠 버렸으리라. 그 언젠가, 그들이 처음 만난 그날처럼.

협회에는 듣는 귀가 많았다. 정확한 장소를 말한 적 없이, 그리페는 자연스레 협회 지하에 자리한 주차장으로 이리트를 이끌었다. 그리 짧지 않은 거리를 걷는 내내 이리트는 생각을 곱씹는 듯 말이 없었다. 이리트, 차 빼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뒤돌아선 등 뒤로 시선이 닿았다. 성큼성큼 걸어 차에 올라탄 그리페는 이리트가 볼 수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트의 잘못이 아니라고, 대체 몇 번째 스스로 속삭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게도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당장 이리트를 내버려둘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지. 제가 팔마를 치러 떠나던 날에도 이만큼 불안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느리게 차를 움직여 이리트의 앞에 멈춰 세운 그리페가 차창을 내렸다.

“타, 이리트.”

“어디로 갈 겁니까?”

“우리 집.”

“우리?”

문손잡이를 잡은 이리트의 눈빛이 미묘했다. 한 호흡 늦게 제가 뱉은 말을 깨달은 그리페가 낮게 탄식했다. 우리가…… 같이 살고 있어요, 이리트. 당신의 집에서. 벌어졌던 입을 금세 다문 이리트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편하게 기대앉은 이리트의 시선은 돌아가는 내내 창밖을 향했다. 근황 따위를 전해주는 제 말에 드물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묵직한 철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이리트는 직감했다. 제 기억 속의 집과는 위치만이 같을 뿐,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제집을 어떤 사유로든 방문할 만큼 친분이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집이 너무 삭막하지 않으냐고 말을 꺼내 왔다. 그때마다 분명 저는 필요 없는 물건을 들여 봤자 짐이 될 뿐이라고 말해왔건만, 눈 앞에 펼쳐진 실내에는 말 그대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모르는 사이 짐이 늘어난 실내는 신기하게도 내부 전반이 정갈했다. 온통 무채색뿐이던 실내에 차분하나마 색이 들어서 있었다. 그건 꼭 한 걸음 뒤에서 제 반응을 살피는 남자를 닮았다고, 이리트는 직감했다. 기반이 되는 큼지막한 가구들은 변한 것이 없건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거실이며 거실과 연결된 주방을 훑던 이가 걸음을 옮겼다.

열리는 문마다 낯선 공간이 펼쳐졌다. 심지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창고 용도로 내버려둔 빈방까지. 하나하나 문을 열고 내부를 빠르게 훑던 이리트가 멈춘 곳은 가장 안쪽에 자리한 침실이었다. 다른 곳의 가구는 대개 그대로였으나, 침실만은 달랐다. 제 체격 탓에 기존에도 그리 작지 않은 침대를 들여놓았건만, 익숙한 물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 미터를 넘기는 남자 둘이 눕고도 여유가 있을 법한 침대가 자리했다. 이끌리듯 다가선 이리트가 괜히 매트리스 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제게 있어 집은 오롯이 저 하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 이 정도로 뒤바뀌어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낯선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리트가 그리페를 올려다봤다. 집에 들어선 뒤로 그리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말이 없었다. 제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낯설어서…… 이상해.”

“당신이 싫다면 따로 나가 살게요. 하지만 짐은 그대로 두면 좋겠어. 기억 속의 풍경을 자꾸 보다 보면 사라진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망설이지도 않고, 이미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뇐 듯 매끄러운 문장을 뱉은 그리페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이능에 의한 기억 손상도 일반적인 기억상실처럼 대처해도 되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스치고, 이리트는 입을 열었다. 돌아갈 곳은 있습니까. 살림을 완전히 합친 거라면 무작정 쫓아낼 수는 없었다. 타인이라면 몰라도, 그저 제 기억에 없을 뿐인 파트너이자 연인 아니던가. 무엇보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의 상처가 오롯이 제 잘못은 아니지만, 무결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돌아갈 곳이라니, 내가 너를 두고 대체 어디로.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던 그리페는 긴 숨을 삼키고, 끝내 울컥한 마음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 제 심정을 알 리 없는 이리트는 여전히 말간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데, 일순간 비숍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끝에 가서는 제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고, 이리트조차 떠나게 될 거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버릇처럼 등 뒤에 대고 있던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원래 살던 곳은 처분하지 않아서 괜찮아요.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갈게요, 이리트. 원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못 받을 때도 있겠지만, 어지간해서는 받을 테니까.”

그는 이리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제 기분을 빌미로 이리트에게 한 번쯤은 나쁜 말을 쏟아낼 것 같아서. 쉬어요, 피곤할 텐데. 짧게 인사를 건넨 그리페가 안방을 나섰다. 이리트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끝내 저를 붙잡지는 않았다. 저 스스로 닫은 문을 잠시간 바라보던 그리페는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제가 떠나고 나면, 이리트는 집 이곳저곳을 다시 한번 살펴볼 테다. 메모 패드에 글씨를 휘갈겨 쓴 그리페는 냉장고 위에 작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다른 물건은 시일이 오래 지난다고 상하는 게 아니니 괜찮지만, 냉장고 안의 식료품은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이리트는 식사를 잘 챙기는 편이 아니니 더욱. 기껏 붙인 쪽지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한 번 더 메모지 위를 문지른 그리페는 그제야 제 짐을 챙겼다.

막상 들고 가자니 온통 애매한 것뿐이어서, 챙긴 짐은 결국 제 옷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혹시나 이리트가 기억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함께 맞춘 옷은 그대로 두고서. 이래저래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닫힌 문 너머에서는 움직이는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홀로 남은 이리트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되었건 지금은 제가 참견할 수 없다. 치미는 씁쓸함을 삼킨 그리페는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침대 헤드에 몸을 모로 기댄 이리트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협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무엇 하나 잘못되지 않은 게 없었다.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실실 웃던 레만의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가도, 그리페가 서 있던 자리에 시선이 가닿으면 짜증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이 솟아올랐다. 그리페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했으나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현관의 잠금장치가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소리가 울리고도 한참 후에 이리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잠깐이나마 함께 있던 사람이 떠나고 난 뒤의 집은 고요했다. 적막에 잠긴 집은 분명 제게 당연하건만 왜 이리도 외롭게 느껴지는지. 외로움이라고. 일순간 제 감정을 직시한 이리트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잘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켠 이리트는 이름 모를 이들의 말소리를 배경으로 깔아둔 채 실내를 다시 살폈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던 걸음이 멈춘 것은 작은 메모가 붙은 냉장고 앞이었다.

‘식사 꼭 챙겨요. 안에 있는 것들 상할 때까지 내버려두지 말고.’

단정한 글씨체에서 어쩐지 그리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눌러쓴 글씨를 응시하던 이리트가 쪽지를 붙여 둔 채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말끔하게 정리된 내부에는 각종 식료품 따위가 칸칸이 가득했다. 혼자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그러나 그리페는 이미 이곳에 없었다. 제 손으로 쫓아낸 것과 다름없지 않던가. 한숨을 삼킨 이리트는 몇몇 통을 냉동실로 옮기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았다. 옅은 노란색 쪽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다시 냉장고를 연 이리트는 긴 고민 끝에 상하기 쉬운 것부터 꺼내 들었다. 이를테면 얼릴 수도 없는 채소와 과일 따위를. 적당한 크기로 손질된 채소를 찬물에 헹군 후에 적당히 물을 털어내고, 얕은 그릇에 채소를 대강 얹었다. 시판되는 제품이 아닌 것 같은 드레싱을 약간의 물기가 남은 채소 위에 뿌리면 과일류의 상큼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릇을 한쪽에 밀어둔 이리트는 어느 한 군데 색이 덜 물든 곳 없이 고운 사과를 흐르는 물에 씻었다. 껍질을 깎기는 귀찮아 네 등분으로 잘라 꼭지와 씨 부분만을 베어내고, 그것을 다시 반으로 잘라 빈 그릇 위에 대강 올려두었다.

이 정도면 한 끼를 때우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유난히 허전한 식탁에 앉아 샐러드며 사과를 씹고 있자면, 이렇다 할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 입쯤 먹고 모조리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반쯤은 의무감으로 음식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는 와중 식탁 한구석에 올려둔 기기의 화면이 반짝였다. 웨이드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예상한 것보다도 몇 배는 빠르게 도착한 메일, 이리트는 예사롭게 내용을 살폈다.

지루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이리트의 표정이 일변했다. 샐러드를 씹는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고, 화면에 가득 찬 글자를 읽어내리는 눈은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모양새였다. 팔마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것들이 건재했다면 어떤 이유가 생겼다 한들 계약은 종료될 수 없었으므로. 그러나 제삼자의 시선에서 쓰인 저와 그리페의 관계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했다.

처음 만나던 날부터 접촉 가이딩을 시도한 것은 물론, 폭주한 그리페를 진정시키고자 제 발로 협회 지하의 진정실로 향했다고. 그걸로도 모자라 공식적으로 파트너십을 맺고, 후에는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했다고 했다. ‘협회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음.’ 덧붙여진 문장을 읽고 있자면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한순간에 함께한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채 돌아온 저를 바라보던 그리페의 표정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모를 기대에 찼다가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제 무심한 대답에 일순간 일그러지던 얼굴을. 그는 곧 다정함이 깃든 무표정 아래로 제 마음을 숨겼으나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시시때때로 흔들렸다. 감히 짐작하자면, 아마 그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리페를 마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가 짐을 챙겨 떠나는 데까지는 겨우 두 시간 남짓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 내내 그리페는 수없이 흔들리고, 때때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저를 대하는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채 말하지 못한 제 걱정까지 끝끝내 조각으로 남겨두고 떠나는 이가. 아무런 언질이 없어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의 행동과 어투는 한 번 헷갈리지도 않게 명확했다.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리페가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긴 한숨을 내쉰 이리트는 결국 반쯤 비운 그릇을 치웠다. 도무지 무언가를 씹어 삼키고 싶지 않았다. 끝 모를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대로 눕고 싶었으나 이리트는 서재로 향했다. 늘 어둑한 공간의 불을 켜고, 서가를 그대로 지나쳐 가장 안쪽에 자리한 목제 책상에 앉으면 희미한 안정감이 스몄다. 익숙한 자리에 앉아 한참이나 생각을 거듭하던 이리트는 문득 책상 아래 붙은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열자마자 보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그 아래 깔린 사진첩은 낯설었다. 늘 텅 비어있다시피 하던 서랍 안에 자리한 사진첩이 제법 두툼했다. 사진을 찍는 취미는 분명 없었는데. 그리페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단단한 커버를 넘기자마자, 이리트의 손이 멈추었다. 타오르듯 붉은 노을과 그에 물들어 자줏빛을 띠는 바다를 배경으로 등을 보이고 선 사람. 짙은 그림자로 물든 뒷모습이었으나 사진 속 사람은 분명 그리페였다. 이리트의 손은 한참이나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첫 장에 머물러 있었다. 마음을 다잡듯 숨을 삼킨 이리트가 페이지를 넘겼다.

장마다 그리페의 사진이 가득했다. 첫 장의 사진처럼 제법 멋진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상을 보내는 도중 내킬 때마다 찍은 티가 났다.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담겨 있는 장면이. 이를테면 푸르스름한 새벽빛 아래 깊이 잠든 그리페의 얼굴이나, 주방 조리대 앞에 선 채 고개를 숙인 뒷모습. 사진을 찍지 말라는 듯 손을 뻗는 그리페도 있었고, 무슨 이유에선지 환하게 웃는 얼굴도 찍혀 있었다. 심지어는 옷을 벗는 건지, 입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도.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이었으나 단 한 가지는 명확했다. 제가 지녔던 감정도 그리페가 보여준 것 못지않게 깊었음을. 지금의 자신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타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스치면, 이리트는 사진첩을 집어넣고 서랍을 마구잡이로 닫아 버렸다. 입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은 이리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뭘 어떡하라는 말인가. 그리페가 왜 짐을 치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당부했는지 쉬이 알 수 있을 만큼 집 안 곳곳에 추억이 서려 있었다. 돌이켜보는 곳마다 제가 잃은 기억이었다. 그러나 텅 비어 버린 머리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천치가 된 기분이었다. 살면서 이만큼 제 머리가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는 것도 없이 흔들리는 마음은 기실, 불쾌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 모든 사태가 제 잘못으로 촉발된 일이 아니라 한들, 그리페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가 없었다. 나쁜 쪽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감정이 견디기 어려울 만치 무거웠다. 조금이나마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면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를 테지만, 이만큼 추억이 가득한 장소에서조차 자신은 어떤 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걸지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끝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이리트는 서재를 벗어났다. 묵직한 문을 밀어 열면, 계단 위로 보이는 창이 어두컴컴했다. 분명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꽤 밝았건만. 시간 감각마저 망가진 건지, 생각에 잠긴 탓에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둑한 창을 보던 이리트는 한 박자 늦게 시간을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오후 아홉 시를 가리켰다. 평소의 저는 한창 이런저런 일상을 보낼 시간이었으나, 오늘은 유난히도 지치는 하루였다. 오전 시간대부터 기억이 날아가 기실 머릿속에 남은 건 한나절 정도에 그쳤음에도. 힘 빠진 걸음으로 느릿하게 계단을 올라간 이리트가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 외출복을 입은 그대로 침대 위에 늘어진 이리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만 깜박였다.

이리트의 눈이 곧 잠들 것처럼 느리게 깜박였다. 눈을 감은 채 오 분쯤이 지났을까, 앓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 이리트가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걸친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벗으며 욕실로 향하는 길에 허물처럼 구겨진 옷이 남았다. 수전을 열고 잠시간 기다리면 따스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적당히 따듯한 물에도 잠기운은 금세 날아가고, 이리트는 오랫동안 물을 맞으며 서 있었다.

물기를 먹은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해질 즈음에야 이리트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뿌연 김이 쏟아졌다. 머리칼 끝에서 물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대충 수건을 뒤집어쓴 이리트는 발끝으로 제 옷가지를 슬슬 밀어 한데 모았다. 그대로 둘 수 없음은 알고 있으나, 깊숙이 파고든 무력감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버거움을 느끼게 했다. 내일 꼭 치우겠다고 다짐한 이리트는 잠옷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눈꺼풀을 잡아 누르는 듯한 수마는 한낱 착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두꺼운 커튼으로 달빛마저 가린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숨을 쉬는 행위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도 어딘가 불편했다. 머릿속으로 양을 세다가, 그 수가 일만이 넘었을 때 관두었다. 몸을 움직여 의식적으로 사지에 힘을 빼 보아도 잠깐이었다. 잠들려 시도하는 것도 이골이 난 이리트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깜박였다.

도무지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은 분명 익숙했다. 그러나 이토록 머릿속이 복잡한 적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난장판이었다. 저녁쯤에 본 사진첩의 내용이 떠오르면 가슴이 자꾸만 술렁였다. 여과 없이 느껴지던 짙은 애정은 일견 거부감마저도 느껴질 정도여서, 숨이 막혔다. 제 삶은 언제나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건만. 어째서 최근 일 년은 그토록 달랐는지, 왜 하필 그간의 기억이 사라진 건지. 더해 원치 않게 흔들리는 이 감각은 어째서 이렇게나 제 신경을 건드리는지.

무엇 하나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아니, 문제의 원인은 존재했다. 레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테지. 긴 한숨을 내쉰 이리트가 제 입술을 짓씹었다. 기실, 협회에서는 레만이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분노했다. 그러나 제가 잃은 줄도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마주할수록, 다방면으로 화가 치밀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자식을 협회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라고, 이리트는 꾹꾹 눌러 다짐했다.

모로 누워 이리트는 팔을 쭉 뻗었다. 손끝이 협탁 위를 더듬다가, 이내 원하던 물건을 쥐었다. 무심코 켠 화면이 지나치게 밝아 눈이 부셨다. 서둘러 밝기를 낮추고도 인상을 찌푸린 채 이리트는 화면을 응시했다. 오전 네 시 십삼 분. 눈을 감은 채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 시도한 것만 세 시간이 넘은 모양이었다. 갈 곳을 잃은 채 떴던 이리트의 손끝이 문득 연락처를 열었다. 등록된 연락처는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사이 당당하게 자리한 그리페의 번호. 문자 메시지 기록 위에서 머뭇거리던 이리트는 끝내 화면을 꺼 버렸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잠겨 있자면, 차라리 숨이 막혀 왔다. 그 무엇도 제 목을 죄고 있지 않음에도. 화면을 다시 켜 보지 못한 이리트는 기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미 잠을 자기는 글렀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화면이나 멍하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이리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협탁 서랍을 뒤적거리는 손에 낯선 물건이 집혔다. 튜브 형태의 용기, 이리트는 구석에 던져둔 기기를 주워 와 흐린 빛으로 그 정체를 비추어 본 후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연분홍색 뚜껑, 반투명한 튜브 안에 든 건 윤활제였다. 그것도 채 반도 남지 않은. 이런 물건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건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지. 얼른 손안에 쥔 튜브를 내려놓은 이리트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싸구려 라이터로 손장난을 치며 이리트는 베란다로 향했다.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제 포장을 뜯어둔 건지 알 수 없는 담배는 습기를 먹어 눅눅했으나, 못 피울 정도는 아니었다. 근래에는 담배를 떠올릴 일도 없었던 모양이지, 이리트는 비뚜름한 웃음을 흘렸다. 불티가 이리저리 튀고, 곧 담배 끝에 불이 옮겨붙었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면 메케한 연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짙은 남빛 하늘 위로 희뿌연 연기가 퍼졌다.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간에도 완전히 잠드는 법 없는 도시의 하늘에는 별조차 뜨지 않았다. 속도 모르고 휘영청 뜬 달은 창백한 빛을 온통 흩뿌렸다. 손가락 새에 담배를 걸친 채,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봤다. 피우지도 않고 길어진 재가 바람결에 부러져 떨어지고, 마지막 한 모금을 깊숙이 삼킨 이리트가 필터 코앞까지 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마음 같아서는 몇 개비 더 피우고 싶었으나, 줄담배를 피운다고 심란한 속이 명료해지지 않음을 이미 잘 알았다. 바람이나 조금 더 쐬다가 돌아가 잠을 청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리트는 난간에 느슨하게 기대선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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