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04)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렀다. 날이 갈수록 바람은 훈기를 머금고, 오래지 않아 습기를 품기 시작했다. 여름의 초입, 연둣빛 잎들이 짙은 녹색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계절. 그 사이 몇 번이나 이리트를 만났지만, 관계는 예상한 것보다도 발전이 느렸다. 어느 순간부터 이리트가 저를 피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근래 큰 건을 맡은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대개 비접촉 가이딩 선에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으니, 이리트는 매번 적당히 가이딩을 끝낸 후에 입 한 번 열지 않고 자리를 떠 버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이리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면, 이리트가 멈칫거렸다. 곧 그런 적 없다는 듯 다시 채비하는 이리트를 붙잡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싫어졌어요? 이리트의 속도를 기다리겠다는 다짐도 부질없이 그리페는 묻고야 말았다. 이리트가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적어도 그게 제 물음에 대한 긍정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그리페는 묵묵히 이리트를 마주했다.
이리트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뒤로, 이리트는 제 질문을 많이도 외면해 왔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두 달 동안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못한 채 상황이 고착되기 전까지는. 차라리 이리트가 완전히 떠나 버렸다면 이런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을까. 여러 생각이 스쳤으나 결국 저 홀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제 인내심이 스스로 생각한 것만큼 깊지 않음을 깨달을 뿐.
저를 응시하는 벽안은 분명 건조했으나, 이상하게도 푹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늘 한발 앞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탓에 이 정도의 애매한 거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렇게 무턱대고 입을 맞추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바다에 가자던 제안을 거절했던지. 그리페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가고, 홀로 있을 때면 그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랬다. 그를 제대로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 손에 쥘 수도 없었다.
이리트는 그리 오래지 않아 그 기저에 깔린 마음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건 결국 죄책감 내지는 부채감이었으며, 그에게만 남은 추억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이기심이기도 했다. 불안정한 두근거림이 거북한 건, 그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그러나 기약 없는 기다림, 애매한 거리감은 결국 사람을 지치게 했다. 그리페의 인내심은 협회 내의 다른 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라지만, 그 또한 결국은 사람이었다. 제가 그리페를 끝내 지치게 한 거였다. 그 탓에 그리페의 저 물음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어쩌면 그리페가 마지막으로 제게 먼저 손을 뻗는 것일지도 몰랐다. 영원히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낼 게 아니라면 붙잡아야 했다.
제 상태는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집 안을 뒤져 기록으로 남은 추억을 더듬었다. 제 것이되 제 것이 아닌 기억들. 밤이면 거의 잠들지 못하고, 약기운을 빌려 가까스로 잠을 청했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가 눈을 뜨면, 뺨이며 관자놀이가 눈물로 축축한 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 꿈을 꿨을 텐데, 약기운이 가시지 않아 흐리멍덩한 머릿속에서는 안개가 낀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체 일부를 잃은 것도 아니고 사라진 건 기억뿐이건만. 사라진 기억에도 환상통 따위가 존재하는 건지. 그리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건 그에게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일 아니던가.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홀로 기억을 잃어버린 채 돌아온 제가, 정말로 그리페의 손은 다시금 붙잡아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페에게만 지나치게 많은 무게가 실리는 건 아닌지. 이미 오랫동안 그를 괴롭게 했으나, 어쩌면 다시금 그를 만나는 게 또 다른 고통 속에 그리페를 빠트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알 수 없고, 시간은 수없이 많은 생각을 곱씹는 사이에도 물처럼 흘렀다. 그리페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밀빛 머리칼에 가려진 얼굴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차라리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 그대로였다. 젖은 눈가를 못 봤다면, 정말로 제가 헛것이라도 봤다고 생각했을 만큼.
“미안해.”
차라리 사과라도 하지 말지. 다른 이들을 대하듯 차갑게 대하면 희망을 품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페는 차마 쏟아낼 수 없는 원망을 삼키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리트의 뜻이라면, 저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제 판단은 오만에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까. 저 홀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종내에는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다. 세상을 지켜내려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마련이라.’
‘네 가이드라고 무엇이 다를까? 운이 좋아 죽지 않더라도 너를 떠나게 될 거다. 장담할 수 있어.’
이리트가 기억을 잃은 뒤로, 비숍의 악에 받친 속삭임은 그림자처럼 제게 따라붙었다. 별것 아닌 헛소리라고 무시했던 목소리가 다시금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새카만 악의로 가득한 말은 오래도록 남아 때때로 숨통을 조이고, 사고를 나쁜 쪽으로 이끌었다. 이리트가 그래도 저를 완전히 내치지 않는 이유는 뻔했다. 그 또한 제 처지를 알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괜찮았다. 측은지심이라 해도 좋았다. 저를 동정해서라도 그가 제 곁에 남았으면 했다.
이리트가 아니면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반쪽짜리 센티넬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비참한 적 있었던가. 그러나 자신은 짊어진 것이 많았고, 이런 곳에서 눈물을 보일 만큼 미숙할 수도 없었다. 수많은 감정을 짓누른 그리페는 가까스로 예의 바른 웃음을 얼굴 위에 그려냈다. 그는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한 이리트에게 차분한 묵례를 건네고 뒤돌아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쉬어요, 헤르데.”
호칭이 가지는 무게를 생각한 적 없었다. 다른 이들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건, 그저 그만큼 친밀해질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뒤로도 그리페가 이름을 부르는 걸 내버려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런데 이제는 그가 제 성을 불렀다. 알고 있다. 제가 자초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이리트는 뒤돌아보지 않는 그리페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바라보았다.
현장이 정리되고, 함께 협회로 돌아가겠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은 이리트는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는 분명 따듯해졌는데 불 꺼진 집 안은 왜 이리 냉기가 맴도는지.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는 것마저도 귀찮았다. 힘 빠진 걸음으로 소파로 직행한 이리트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아무렇게나 몸을 늘어트렸다. 정신적으로 너덜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리페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상했다. 그리페의 의지로 겨우 유지되고 있던 관계임을 분명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고 후회하게 되는 건지.
기억에 문제가 생긴 뒤로 이미 석 달이 흘렀다. 이전의 제가 지내오던 일상은 덧없이 무너지고,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내내 견뎌 왔다. 늘 큰 기복 없던 기분은 때때로 평온했으나 그보다 자주 저 깊은 구덩이 속으로 처박힌 것 같았다. 사라진 기억과 기록으로 남은 추억, 살아 숨 쉬는 증인을 주위에 두고 있자면 숨이 막혔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제 상태도, 제 손으로 망쳐 버린 관계도. 헤르데라 저를 칭하던 그리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막사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채, 이리트는 손에 쥔 기기만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영양가 없는 정보였으나 그나마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현장에는 그리페가 없었다. 아니, 그날 이후로 그리페는 저를 찾지 않았다. 먼저 그리페가 찾지 않더라도 그가 작전에 투입될 때면 협회에서 늘 연락이 오곤 했으니, 아마도 그리페 쪽에서 요청을 보냈겠지. 아직 파트너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건 확인했으나 이미 유명무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팔마가 무너진 이후로 시간이 흐를수록 균열의 이상 발생 내지는 이상 현상이 급격하게 줄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페가 하는 일의 양은 균열 발생 수로 따져 보면 전혀 줄지 않은 축에 속했다. 가이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먼저 그리페를 쳐냈음을 아는 이리트는 차마 먼저 연락을 취하지도 못한 채, 들려오는 소식에 속만 끓였다. 하지만 인제 와 연락한들 제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애초에 협회 쪽에 말을 전해가면서까지 저를 피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
제가 지금 이 현장에 나와 있는 이유도 뻔했다. 그리페와 파트너가 되기 전이나 지금이나 협회 내에서 저만큼이나 단시간에 다수를 가이딩할 수 있는 가이드는 없었다. 이제는 계약으로 묶인 신세가 아니라고 한들, 마냥 집에서 시간을 보내 봐야 기분만 한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때문에 이리트는 자진해서 갈 수 있는 온갖 현장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물론, 이런다고 바뀌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홀로 침잠하지 못할 뿐, 현장에서 가이드는 대개 끊임없이 대기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리페의 얼굴을 볼 일이 없게 된 지 한 달, 완연한 여름이 되어 임시 막사 안이 후덥지근했다. 앞뒤로 늘어진 천을 고정해 바람이 통하도록 했으나, 이도 오래 가진 못할 성싶었다. 이동식 에어컨을 설치하거나, 그도 여의찮은 상황이라면 차량을 이용하게 되겠지. 뭐든 상관은 없었다. 여름을 한두 번 나는 것도 아니고, 겨울보다는 차라리 여름을 좋아했으므로.
요즈음은 온통 지루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우울할 뿐인 것 같았다. 답을 내릴 수 없으나 무한히 반복되는 고민은 쉬이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애초에 강렬한 목적이나 재미로 살아가지 않던 사람이었으나, 요즘은 특히나 사는 게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사람 하나를 사귀었다가 기억을 잃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모든 게 틀어질 수가 있나 싶었다. 이리트는 상념을 거듭하며 무성의하게 스크롤만 내리다가, 화면 가득 떠오른 알림에 멈칫했다. 협회와 협약을 맺은 병원이었다. 저도 몇 번쯤 신세를 진 적 있던. 그러나 병원 측에서 제게 갑자기 연락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리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헤르데입니다.”
[지금 병원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파트너분께 급히 가이딩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약물도 효과가 떨어져서요.]
전화를 받기 전부터 몇 가지 나쁜 상황을 그렸던 이리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고민하면서도 이리트는 거리를 가늠했다. 이곳에서 연락이 온 병원까지는 차로 서두른다고 해도 이십 분 정도를 가야 했다. 이십 분은 걸립니다. 말을 뱉으면,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현장은 나중 문제였다. 이리트는 적당한 윗선에 말을 남기고, 허가를 받은 직후 그대로 차를 몰아 자리를 떴다.
핸들을 쥔 손, 손끝이 초조하게 가죽 커버 위를 두드렸다. 이럴 때는 신호마저도 제 앞길을 막는 것 같았다. 오늘 있는 다른 작전에 그리페가 투입되었던가. 협회 내의 정보를 모조리 훑는 것도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음알음 들려오는 소식 중에는 그리페가 근래 꽤 피곤해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효율이 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가이드를 찾을 법도 하건만.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리트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액셀을 거칠게 밟았다.
주차장 빈자리에 차를 정면으로 밀어 넣은 이리트가 텅, 묵직한 소리가 울리도록 차 문을 닫았다. 그대로 날듯이 달려 병원 로비에 들어선 이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그리페의 위치를 물었다. 기세에 밀린 듯 주춤거리면서도 유니폼을 입은 이는 방문 경위를 확인한 뒤에야 그리페의 위치를 알려줬다. 병원 내부 구조는 어느 정도 알았다. 차마 달리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서두르는데 의료진으로 보이는 이가 따라붙었다. 누구인가 싶었으나, 이리트는 금방 얼굴을 기억해 냈다. 안면이 있는 이였다.
“하랄트가 폭주했어요.”
“들었습니다.”
“부상이 있는데 치료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특수격리실에 있습니다. 당신이 들어간 후에는 다시 문을 잠글 겁니다.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방 곳곳에 자리한 붉은 버튼을 누르세요. 상황이 말끔하게 정리되면, 출입구 옆 녹색 버튼을 누르면 문을 열 겁니다.”
“지침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혹시 또 모르잖습니까. 다치지 마세요. 언제나 본인을 먼저 생각하시길.”
그리페가 저를 공격할까. 들어서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센티넬의 폭주 양상은 센티넬의 수 만큼이나 다양했다. 제 걸음에 따라붙으며 지침서 내용을 다시 읊는 이는 다치지 말라고 했으나, 기실 이리트는 약간의 부상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저 아니면 폭주한 그리페를 가이딩할 사람도 없었으며, 아무리 신체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범위라 한들 진정제 따위를 고용량으로 쑤셔 박는 모습을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문 앞에 서면, 그가 저와 눈을 마주치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철문이 열렸다. 만일을 대비하여 여러 겹으로 된 문, 제가 들어서고 첫 번째 문이 닫히면 복도의 빛이 문 틈새로 사라지고, 곧 묵직한 마찰음이 들리며 문이 잠겼음을 알려 왔다. 저는 그리페와 마찬가지로 바깥과 격리되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내부 등이 켜졌다.
시계가 확보되면 거칠 것이 없었다. 이리트는 망설임 없이 내부의 문을 열고, 잠그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에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구속복에 메여 무릎 꿇은 채 앉은 그리페를 마주했다.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탓일까. 그리페는 폭주한 센티넬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얌전했다. 불안정한 호흡,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속삭임만이 그가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증명했다. 분명 흰색이었을 구속복은 그가 뒤집어썼는지, 그의 상처에서 흘렀는지 알 수 없는 피로 여기저기 얼룩이 졌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기이하게도 화가 치밀었다.
이성이 휘발된 센티넬이 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도 않는 것처럼, 이리트는 성큼성큼 걸어 그리페의 앞에 섰다. 그럼에도 반응 없는 이. 이리트는 그 앞에 앉아 대번에 그리페의 멱을 붙잡았다. 그때에야 방 안에 들어선 사람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그리페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전에 비해 마른 뺨이 눈물로 온통 흥건했다. 옷깃을 쥐어 잡은 손 위로 미적지근한 액체가 방울져 떨어지면, 이리트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마지막인 듯 확인할 때도 끝내 우는 얼굴은 보여준 적 없으면서.
“왜 울어.”
“……”
“날 안 보게 해달라고, 내가 모르게 협회에까지 말을 전했으면 잘 지냈어야지. 다른 가이드라도 만나 봤어야지.”
옷깃을 붙잡은 그대로, 이리트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눈물 섞인 키스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짠맛이 느껴졌다. 무비하게 벌어진 입술, 이리트는 제멋대로 혀를 섞었다. 그리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제 오랜 고민이 모두 무의미한 일 같았다. 괜히 저 스스로를 괴롭혔을 뿐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보다 그리페를 더 괴롭게 했을 테지. 이미 잃어버린 몇 달 치 추억이 무엇이라고. 처음부터 망설이지 않고 그리페의 손을 붙잡았다면, 잊은 것과 비견될 만큼 긴 추억을 쌓았을 텐데. 하나 뒤늦은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그리페는 저와 멀어지겠노라 결심한 게 분명하건만.
한참이나 입을 맞추다가, 숨이 부족할 즈음 떨어진 이리트가 그리페의 구속을 하나하나 풀었다. 급한 마음에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겹겹이 둘러싼 매듭과 버클 따위를 한참 걸려 풀어내면, 구속구가 떨어져 나가며 묵직한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그리페는 여전히 묶여 있기라도 한 듯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창백한 손이 다시 그리페의 뺨을 감싸고, 얼굴이며 눈빛 따위를 살피는 자색 눈이 짙게 가라앉은 채였다.
그리페의 눈에는 아직도 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축축한 뺨을 부드럽게 닦아내도, 멎을 줄 모르는 눈물은 금세 다시 흘러내렸다. 그는 이성이 휘발된 상태로도 제 가이딩을 거부하고 있었다. 속이 쓰라렸다. 어떻게 해야 빠르게 그리페를 진정시킬 수 있는지는 알았다. 진득한 입맞춤보다도 더 긴밀한 접촉이 필요할 테지. 제 마음이 준비되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리페가 원치 않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런 상태에서 멋대로 일을 벌여도 되는 걸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이리트는 다시 한번 입술을 맞부딪혔다. 차라리 시간을 더 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으므로.
어느 순간, 쉼 없이 흐르던 눈물이 멎었다. 그리페의 눈이 느리게 깜박이면, 이리트는 다시금 그의 낯빛을 살폈다. 시선이 흔들림 없이 교차하고, 그리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더 외면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제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도 이리트는 알 터였다. 이미 이성이 꽤 제자리를 찾았으며, 남은 건 그저 폭주의 여파뿐임을. 이리트…… 헤르데. 가라앉은 데다, 약간씩 갈라지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엉망인 목소리였으나 그래도 안심이 되는지, 이리트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네 소식을 전해 들었어. 근래 들어 피곤해 보였다고.”
“……”
“효율이 나지 않더라도 다른 가이드를 만나보지 그랬어. 내가 그렇게…… 싫었다면.”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네 탓을 할 일이 아닌 거 알아, 그리페. 미안해. 그냥…… 네가 네 몸 축내면서 일하지 않으면 좋겠어. 그러지 마, 내내 내가 옆에 있을 수도 없잖아.”
설움 섞인 목소리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찰나 간의 침묵이 스치면, 이리트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페가 이성을 되찾고 상태가 안정되었으니 제 할 일은 끝났다는 것처럼. 평소의 여유로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이 성큼성큼 출입구로 향했다. 이리트. 충동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속삭였다.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부름에도 이리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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