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4)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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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두 손으로 꼽지 못할 만큼 많은 이들을 붙잡고, 어린아이 하나까지 데려온 채 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그 애의 거취까지는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런 곳보다는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협회를 향한 적개심을 심어 준 제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를 테지. 그렇다 한들 그 상황에서 대체 뭘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형식적인 보고까지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온 그리페는 문을 열어 준 이리트를 덥석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오늘 별일이 다 있었어.”

“왜?”

“많이 쳐 줘도 열댓 살이나 되었을 법한 애가 현장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무너진 조직에 둘 수도 없어서 데려왔어요. 아니, 여기 데려왔다는 건 아니고. 협회에.”

“별일이긴 하네.”

“……그런데 이리트, 내가 해친 상대가 그 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서. 그게, 자꾸 생각이 나요.”

그리페가 유달리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인 모양이었다. 그는 사람을 상대한 날이면 유난히 피로감을 호소하곤 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작전 중에 일어난 일은 종류를 불문하고 그리페의 잘못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단순히 제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현장에서 일어난 일까지 죄를 물어야 한다면, 협회 소속 센티넬의 대다수가 살인자가 될 테니.

거기에는 저조차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얘기하더라도 그리페는 납득하지 못할 테다. 그게 되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겠지. 이리트는 그저 조용히 그를 끌어안은 채 낮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던 그리페가 잠시간 말을 멈출 때면 등을 토닥이며.

“사실, 협회 쪽에 맡겨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내가 데려올 수도 없어서……”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어떤 이유에서든 그 어린애는 협회에 대한 적개심이 강할 테니…… 도구로선 실격이지. 레만이 그 애를 정보부에 들이려고 하진 않을 거야.”

지나치게 냉정한 판단이었으나, 감정이라고는 없이 가치판단을 기반으로 한 말을 듣고 있자면 차라리 안심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결여된 인간성에서 위로를 얻어도 되는 건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리페는 이리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는 그 애가 고를 수 있을 몇 가지 선택지를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좋은 결과만 존재하는 게 아니어서, 도리어 더 믿음이 가는 말.

“어떻건 간에…… 그 애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 아직 한참 어린데.”

“뭐, 알아서들 하겠지.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너 좋자고 한 일도 아니고.”

언제나 그렇듯, 이리트는 무심한 어투로 위로를 건네 왔다. 저를 탓하지 않는 이리트를 붙잡아 끌어안고 있자면 내내 가슴 속을 누르던, 죄의식인 줄도 몰랐던 중압감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이럴 때면 언제나 이리트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가 있느냐고.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페는 이리트를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슬슬 뒤로 밀리면서도 이리트는 저를 밀어내지 않았다.

이대로 이리트를 끌어안은 채 남은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장비가 대부분 막아 주었다지만 비를 뒤집어쓴 몸이 찝찝했다. 이리트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뗀 그리페가 내내 붙잡았던 허리를 놓아 주었다. 씻으러 갈 거지. 제가 멀어지는 순간 의도를 알아챈 이리트가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페는 답지 않게 맥 빠진 걸음을 옮겼다.

샤워기에서 김이 펄펄 오르는 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물줄기 아래 선 그리페는 낮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감이 모든 긴장이 풀리는 순간에야 체감이 되는 탓이었다. 오늘만큼은 그저 쉬고 싶었다. 평소보다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제 몸을 씻어내린 그리페는 샤워가운을 걸치고, 허리끈조차 둘러매지 않은 채 욕실을 나섰다. 열린 방문, 그 틈새로 전기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해요?”

“피곤해 보여서 차라도, ……왜 그러고 있어.”

그리페의 탄탄한 몸이 벌어진 앞섶 새로 훤히 보였다. 새삼 내외할 사이는 아니라지만, 이리트는 성큼성큼 다가가 가운을 여미고 허리끈을 대강 묶어 주었다. 머리를 말리는 것도 귀찮았는지 그리페의 머리 위에는 이미 물기를 먹은 수건이 얹힌 채였다. 오늘 일이 어지간히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물은 나중에라도 다시 끓이면 그만이었다. 그리페의 손을 붙잡아 당기면, 그는 저항도 하지 않고 따라왔다.

침대에 그리페를 밀어 앉힌 이리트는 욕실에서 새 수건을 꺼내 왔다. 축축하게 젖은 수건은 의자에 대강 걸쳐 두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 위에 잘 마른 수건을 얹었다. 손끝을 세워 머리칼을 문지르면 수건은 금세 습기를 먹었다. 어차피 수건만으로 말릴 생각은 없었다.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지 않을 즈음, 이리트는 수건을 거두었다. 산발이 된 채 눈을 감은 그리페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고, 수건을 빨래통에 던져두려 걸음을 옮기려는데 팔이 붙잡혔다.

왜, 하고 운을 뗄 새도 없이 다가온 그리페가 입술을 부딪쳤다. 혀가 얽히면, 치약 특유의 상쾌한 박하 향이 코끝에 스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니, 착각은 아닐지도 모르지. 숨결이 뒤엉키고, 한참 만에 그가 멀어져 이리트는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그냥 여기 있어, 이리트. 직전까지도 진득하게 입 맞춘 사람답지 않게 간절한 어투였다. 이유도 설득도 필요하지 않은 관계였다. 이리트는 그리페의 머리칼을 닦았던 수건마저 의자 위에 던지듯 걸쳐 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리광 부려서 미안해요. 그런데…… 오늘은 좀 그러고 싶어.”

“색다르고 좋네.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앉는 듯하던 그리페는 그대로 저를 끌어안고 드러누워 버렸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이리트는 놀라지도 않은 채 그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잖아도 늘 따듯한 그리페의 체온은 좀 전에 씻고 나온 탓인지 평소보다도 더 따끈따끈했다. 눈을 감은 채 저를 끌어안은 그리페의 얼굴을 힐끗 본 이리트가 그의 팔을 토닥였다.

 


 

내내 이리트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하루를 보낸 그리페는 그럭저럭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이틀 뒤,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원 둘의 실종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사라진 이들 또한 성인이었으니 하루 만에 실종이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몰랐다. 센티넬이 현장에서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잠적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사라진 이들은 꽤 긴 기간 함께했으며, 이제 와 연락 한번 없이 도망칠 리가 없었다. 그것도 범연한 동료일 뿐인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지다니.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그들 각각의 가이드는 같은 의문점을 재기했다. 작전이 끝난 직후에는 당장 만날 수 없는 상황이어도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고. 모든 정황은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협회가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기실, 협회에 소속된 이가 실종되는 것 자체는 전례가 있는 일이었다. 협회 자체에 적개심을 지닌 단체가 적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사라진 사람은 대개 단신으로는 제대로 된 무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를테면 일반 사무원, 현장직, 가이드 내지는 비전투계 센티넬. 입안이 온통 꺼끌꺼끌했다. 그렇게 사라진 사람이 생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끝내 찾아내지 못한 이들은 참혹한 꼴의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라진 이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정보부의 몫이었다. 당시의 현장에 나가 주변을 뒤져 본다 한들 제대로 된 흔적이 남아 있을 리도 만무했다. 이리트의 일이 있었던 때 이미 겪어 본 바 있는 무력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몇 번을 겪더라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초조했다가도 화가 나고, 그러다가 금세 우울감이 스몄다. 팔마의 몰락이 의미 없는 소모전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평화가 길게 이어질 수는 없었는지. 지닌 힘을 오로지 사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이들은 더없이 많았다. 그들이 도대체 왜 그래야만 만족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만족감을 알기는 할까. 염치도 없이 타인의 것을 탐내는 이들을 떠올리고 있자면 짙은 환멸이 스몄다. 깊은 수심, 그리페의 낯은 드물게 버석했다.

실종된 이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균열은 여전히 수시로 모습을 드러냈고, 팔마의 빈자리를 두고 저들끼리 경쟁하는 이들은 조직 하나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꼴을 보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해야만 하는 일은 늘 같았다. 괴수와 싸우고, 필요할 때는 사람과도 전투를 벌였다. 무엇 하나 어렵지 않았다. 아니, 한 번도 쉬운 적 없었으므로 새삼 어려울 것도 없을 뿐이었다. 협회의 일상은 전쟁 같았고, 이리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겨우 숨을 고를 틈을 주었다.

그들이 사라진 시점으로부터 삼 주가 지났다. 아무런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는 이들은 차라리 증발한 것 같았다. 통상적으로 이 경우 실종자가 일주일이 지나서도 살아있을 확률은 일할 아래로 추정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그들이 돌아오더라도 살아서는 아닐 거라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정보부의 추적은 지지부진했다. 몇 번을 캐물어도 돌아오는 건, 최선을 다해 찾고 있다는 형식적인 대답일 뿐이었다.

문제는 수습되기는커녕 몸집을 키웠다. 그들은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협회 소속 센티넬이 또다시 실종되었다. 이번에도 작전 완료 직후 복귀하는 시점에 사라졌다고 했다. 협회에 소속된 센티넬이 하나같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지닌 힘이 그리 크지 않은 이들이 꽤 많았으므로.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더없이 많은 실전을 경험한 이들이 어설픈 습격 따위에 쉬이 당할 리가 없었다.

협회 내에 불온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작전이 완료되고, 각자 흩어진 직후에 서로에게 연락을 보내는 일이 관행이 되었다. 심지어는 현장에서 따로 흩어지지 않고 인원을 확인하고 협회로 복귀한 뒤에 흩어지는 일도 적잖게 일어나고 있었다. 협회의 정보부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불신이 쏟아졌으며, 상부는 사태를 알고도 이렇다 할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했을까, 상부의 속내가 어떻건 협회 소속 인원들에게는 불신을 심어주는 꼴이었다.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사라진 이들은 모두 B급 이하였으며, 상황을 알게 된 B급 이하 센티넬은 자의적으로 여럿이 모여 다니기 시작했다. 상부는 여전히 침묵할 뿐이니,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즈음, 그리페는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만이 센티넬을 편리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을 정말로 한낱 물체 따위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센티넬은 무력을 지닌 인격체였으며, 어쨌거나 협회 구성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미했다. 그리페는 지닌 권한 안에서 팀원들을 보호했으나, 이미 늦은 대처가 아니냐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는 협회의 근간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리페는 오늘도 현장에 나섰다. 평소와는 달리, 괴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님에도 홀로. 그건 팀원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조직 자체의 붕괴가 목표가 아니었으므로 그리페 혼자의 무력만으로도 필요치를 훨씬 상회했다.

최근 날뛰는 이들은 센티넬을 주로 목표물 삼았으나, 혹시 모를 일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이리트는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페는 차분히 목표를 복기하고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오늘의 목표물은 사람 하나였다. 으슥한 골목은 한낮임에도 그림자가 져 어두웠다. 쓰레기며 담배꽁초 따위가 굴러다니는 길을 성큼성큼 걸어간 그리페는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지가 달린 철문은 페인트칠이 벗겨져 나간 곳마다 녹이 슬어 붉었다. 오래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듯 문은 온통 흘러내린 녹물로 엉망이었으나, 손잡이는 번듯했다. 둥근 손잡이를 돌리면, 녹슨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쉬이 열렸다. 안으로 뻗은 복도는 좁고 어두침침했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면, 내부는 흐릿한 비상구 표시등만이 비칠 뿐 이렇다 할 조명이 없어 어두웠다.

잠시간 서 있으면, 이내 어둠에 적응한 눈에 주변 사물이 비쳤다. 어딘가 습한 공기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묵직한 전투화를 신은 채로도 그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래층인 것 같았다. 일 층은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도록 고요했다. 계단을 내려가 곧바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면, 닫힌 문 틈새로 빛이 비쳤다. 복도 쪽으로 새어 나와 일직선을 그리는 빛. 그리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내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들리는 목소리는 둘이었으나, 내용을 듣고 있자면 적어도 셋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목표물과 최근 친분을 쌓는다던 이들일지도 모르지. 대상과 비슷한 수준의 센티넬이라면 네다섯쯤은 큰 소란 없이 제압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정체 모르는 이들을 꺾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페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패었다. 분명 이 시간에 목표물은 혼자 시간을 보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상이 사람인 만큼 일정의 변동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사안이었으나, 대화는 분명 특별히 만나는 이들 사이에서 오갈 법한 내용이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보가 잘못 전달되었을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상황이 꼬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당장 작전 수행을 중단하고 이곳을 나가 상황을 알려야 했다. 사전에 조사한 정보가 완전히 어긋난 상황에서 무리하게 속행할 수는 없었다. 목표물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했으나,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들키지 않아야 다음이 있는 법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닫혔던 문이 열렸다. 계단참에 선 그리페는 기척에 주의하며 거의 날 듯이 주파하려 했으나, 계단 끝에 사람이 서 있었다. 잠깐 사이 스치는 수십 가지 생각, 어쩌면 정보부가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건 처음부터 이 상황을 노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직감에는 근거가 없었으나, 그리페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정체 모를 사람은 제가 숨어들었음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계단 아래쪽이 뚫어지라 바라보는 채였다.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서로를 인식했음을. 찰나, 그리페는 귀에 착용한 리시버가 기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조용했음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귓가를 눌렀으나 연결 대기 중일 때면 들려오던 소음까지도 부재했다. 처음부터 연결된 적 없는 것처럼. 욕을 잇새로 짓씹어 뱉는 순간, 상대가 소리쳤다.

“여기다!”


아래쪽의 기척에 정신이 팔려 빠르게 알아채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기실, 이런 상황이었다면 어디로 향했든 들켰을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가정이 아니었다. 그리페는 제 이를 꽉 물었다. 아래쪽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리페는 훌쩍 뛰어올라 계단을 막고 선 이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의 등 뒤로 다가오는 이들. 정보부의 배신이건, 협회에 아직도 다 잘라내지 못한 끄나풀이 있는 것이건 상관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협회로 복귀해서 상황을 알려야 했다. 근간부터 흔들리던 협회의 체계가 끝내 무너지게 되더라도.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둡기 그지없던 복도 조명이 한 번에 점등되었다. 어둠에 적응했던 시야, 아릿하도록 눈이 부신 와중에도 그리페는 움직였다. 근방에 아군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얼핏 본 형체와 이 순간에도 들려오는 발소리를 비롯한 기척이 존재했으므로,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시각을 제외한 감각에 의존한 채로도 그리페는 달려드는 이들 몇몇을 처리했다. 잠시간 감았던 눈, 곧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푸른 벽안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들은 총화기를 들었으나, 앞뒤로 저를 포위한 상태에서 격발하지는 못했다. 묵직한 쇳덩이는 차라리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들, 그리페는 입을 다문 채 사람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이런 집단에는 언제나 아군이 맞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 대는 미치광이들이 존재했다. 누가 그런 존재인지 구분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저를 공격하고자 하는 이들을 또한 자신의 방패로도 이용해 가며, 그리페는 상대를 쓰러트렸다.

쓰러진 이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며 아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누군가는 발에 짓밟혀 얼굴에 난 구멍마다 피가 쏟아졌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흥분을 일으키고, 그건 곧 열기가 되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호흡기가 홧홧하게 뜨거웠다. 새빨간 피가 허공에 튀고, 그들은 눈을 희번덕이며 달려들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그리페의 움직임은 늘 그렇듯 군더더기가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회피하고, 내뻗은 반격은 한 번 빗나가는 법 없이 급소를 가격했다.

“당장 멈춰!”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으므로, 그리페는 공격을 막아내고 상대를 쓰러트리기를 반복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달려들던 이들이 몸을 사리듯 슬금슬금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리페는 길이 열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으리라. 이 상황에서 물러나는 이들을 공격해서 얻는 이득은 미미했다. 가라앉은 벽안은 주위를 빠르게 훑어 상황을 파악했다. 이내 허리를 펴고 곧게 선 그리페는 가드조차 내린 채 걸어 나오는 상대를 응시했다. 그리페의 검은 가죽 장갑에서 피가 뚝뚝 흘러 떨어졌다. 창백한 형광등 빛 아래에서도 이따금 반짝이는 밀 빛 금발에도 피가 튀어 엉긴 채였다.

“이리트 헤르데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얌전히 항복하는 게 좋을 거다.”

그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균열 외의 상황을 처리해야 할 때면 이리트는 거의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며, 균열을 처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협이 도사렸으므로. 지금 이리트는 집에 있을 터였다. 최근 협회 분위기가 싫다며,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본부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 집에는 이런저런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문제가 생기면 제게도 연락이 오게 되어 있건만.

“믿지 못하는 모양이지?”

이름 모를 이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기기를 꺼내 제 쪽으로 던졌다. 반사적으로 제게 날아오는 물체를 붙잡은 그리페는 그것을 차마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상대를 응시했다. 괜히 시간 끌면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기이할 정도로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페는 눈을 굴려 켜진 화면을 응시했다. 어두운 곳에서 찍은 듯 사진은 화질이 조악했다.

의식이 없는 듯 늘어진 몸, 양팔을 각각 다른 사람에게 붙잡힌 채 억지로 일으켜진 이.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익숙한 체격은 이리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검고 머리칼 끝 일부만 하얀, 특이한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기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화면에 금이 가면, 띄워진 화면이 일그러지며 질 낮은 사진마저도 사라졌다.

“그걸 부수면 어떡하자는 거야, 응?”

앞에서 빈정거리는 상대의 말 따위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리페의 눈이 번득였다. 이런 사진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었다. 애초에 이리트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마든지 비슷한 사람을 구해 찍을 수도 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조작하는 게 어렵지도 않은 시대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이리트라면? 이리트는 원치 않았다 한들, 납치 당시의 기억을 잊은 이에게 다시금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라면.

“무기 내려놓고 손들어.”

“……”

“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거든. 잘 알 텐데?”

습격에도 흔들림 없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진득한 분노를 머금은 채로. 평소라면 그 기세만으로도 뒷걸음질을 쳤을 테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여기저기 피를 묻힌 고강한 센티넬은 동요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이. 짐짓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리페가 등 뒤에 걸었던 창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금속제 무기가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울렸으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리페를 응시했다.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한 건, 어차피 형식적인 일이었다. 그는 제 몸만으로도 이곳을 돌파하고 나가는 데 하등 문제를 겪지 못하리라.

“원하는 게 뭐지.”

“글쎄.”

“이리트를 건드린다면,”

경고하려는 듯 그리페가 입을 열었으나, 그는 짐짓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휘적거렸다. 그리페의 뒤쪽에서 접근한 이가 젖은 천으로 그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시리도록 푸른 눈은 이미 등 뒤에서 다가오는 이를 알고 있었는지, 마지막까지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저를 주시했다. 제 가이드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면 너희를 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천을 적신 약품은 독하기 그지없고, 그리페의 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겼다. 의식을 잃은 이, 무너지는 몸을 받아 든 이가 당황한 듯 숨을 삼켰다.

“뭐하냐.”

“어어, 이 자식 생각보다 더 무거운데요.”

“둘이든 셋이든 달라붙어서 차로 옮겨. 우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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