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바람꽃 공전 - 4

EP. 몰착락(02)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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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9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빌어먹을 자식.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이리트는 차마 내뱉지 못할 욕지거리를 삼켰다. 치솟은 짜증에 모로 돌렸던 고개를 쳐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란 눈과 시선이 얽혔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달리, 그리페의 낯에는 불안감이 짙게 스민 채였다.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드러낸 날것의 감정은 생경했다. 이 순간 어째서 지구의 위치를 알려주던 때가 떠올랐는지.

한순간 울컥한 감정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리페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애초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그의 행동을 묵인하지 않았으리라. 모조리 제 미련이었다. 채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그리페도 알아챘겠지. 짙푸른 바다를 떠다 놓은 듯한 눈, 곧게 뻗은 콧대며 늘 부드럽게 웃는 입술, 선명한 턱선까지 못난 부분이 없었다. 매끈한 얼굴을 면면히 훑은 이리트는 결국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셀 수 없이 거듭한 고민은 그리페를 마주한 순간 퍽 쉽게 부스러졌다. 어떤 식으로든 시작된 관계엔 끝이 있다. 끝끝내 제가 그의 모든 신의를 배반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될 줄 알면서도 이리트는 강렬한 이끌림 앞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페를 기망했다. 그 짧은 문장만이 남을 미래, 그조차도 제 어깨에 얹힐 죄임을 알면서도 굳은살 박인 손을 붙잡았다.

“왜 자꾸 흔들어. 왜……”

그는 힘없이 웃다가, 무릎 근처에 얹었던 제 손을 붙잡아 왔다. 닿아오는 체온은 제게 비하면 서늘했건만, 그 작은 접촉에 가슴이 크게 뛰었다. 막 사랑을 자각한 어리숙한 소년처럼. 얼굴에 열이 오르는 감각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숨을 짧게 삼켰다가, 제 꼴을 깨달으면 막을 새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제 와 겨우 손을 잡는 게 뭐라도 되는 것 같았다. 마주한 자색 눈이 어느 순간 가라앉아 저를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물으면 아마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겠지. 그리페는 입을 여는 대신 긴 손가락을 얽었다. 창백한 손, 힘이 풀린 손가락의 도드라진 마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장난을 치듯, 교차한 손가락을 간지럽히고 손등에 자리한 비늘 위를 부드럽게 문지르면 이리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항하지 않는 손은 어떤 환희를 불러일으켰던가. 마주한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우리가… 오래 못 가거나, 언젠가 헤어져서 이전의 관계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르는데,”

“벌써 헤어질 생각은 하지 말아요.”

걱정 섞인 문장을 끊고,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분히 즐거운 듯 들렸다. 이리트는 그만 이마를 짚으려다, 짧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수많은 말을 삼켰다. 처음부터 이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 왔으나 단단하게 잡힌 손을 이제 와 매몰차게 빼내기도 어려웠다. 제 손에 닿은 체온이 지나치게 따듯하기 때문이라고, 이리트는 우습지도 않은 변명을 대었다.

이런 곳에서 누군가와 이런 종류의 감정적 교류를 할 생각은 분명 없었다. 모두 때늦은 생각이며, 사족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이유와 배경이 어떻건, 그리페를 기만하는 건 저였고 오롯한 제 잘못이었다. 어디에도 고백할 수 없는 죄였다. 다만 이리트는 어느 쪽에도 소홀하지 않으리라고, 저 스스로 다짐했다. 설령 그로 인해 최악의 결과를 이끌어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지만, 눈에 띄는 차이점은 없었다.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그들은 군인이었으며, 각자 해야 할 일이 명확했기에.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관계는 더욱 깔끔해진 탓에 여러 방식으로 그들을 응원하던 부대원들은 막연히 마음을 정리했나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귀찮은 시선이며 말이 따라붙지 않는 것 하나만큼은 좋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령, 널찍한 그리페의 거처를 두고 굳이 1인실의 좁은 침대에 몸을 부대끼고 누워 있는 그와 저의 꼴 같은 것들이 그랬다. 거의 구겨지듯 누워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그리페는 내내 웃는 낯이었다. 그걸 내버려 두는 저 또한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자세를 바꾸려 꿈지럭거리면, 배 위에 느슨하게 올라가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침대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던 탓에 그리페가 저를 끌어안자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자꾸 움직이지 말아요.”

속삭이는 목소리, 마주한 눈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짧은 정적이 스치고, 이리트는 제 하반신에 닿은 것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옅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맞닿은 신체를 통해 그리페의 웃음이 분명한 진동이 전해졌다. 무엇보다 곤란한 건 그리페의 의도를 알아챈 순간부터 뒷목이 홧홧하도록 열이 오르는 자신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그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기 그지없고, 그마저도 여러 이유로 쉬이 빼앗기곤 했으므로. 얇은 셔츠 아래로 슬그머니 들어와 살집 없는 허리를 더듬는 손길이 다분히 욕망을 품고 움직였다. 분명 간지러움이나 조금 느끼던 곳이었건만, 언젠가부터 그리페의 손이 닿으면 간지러움보다 먼저 쾌감이 퍼졌다.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뜨면 짙푸른 눈과 시선이 얽혔다.

“여기서 하면,”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 거냐고 되묻기도 전에 입술이 맞부딪혔다. 심술을 부리듯 그리페의 입술을 살짝 물었으나 그는 외려 더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벌린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섞이고, 유연한 살덩이가 여린 점막을 간질였다. 단단한 가슴에 손을 올려 슬그머니 밀어내면 그가 웬일로 쉽게 물러났다. 약간의 의심이 서린 자색 눈, 그리페는 웃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않고 뺨에 입술 도장을 찍어댔다.

 


종종 이리트의 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감정이 내비쳤다가 사라지곤 했다. 물론 지금은 좋게 말해 봐야 이 개자식, 정도의 뜻을 품은 게 분명했으므로 그리페는 군말 없이 제가 혹사한 몸을 들어 안고 작은 욕실로 향했다. 바닥에 발이 닿으면 이리트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댄 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샤워기 헤드에서 따스한 물이 쏟아지면 그리페는 벽에 기댄 몸을 당겨 제게 기대도록 했다. 잠깐 사이 냉기가 옮겨붙은 몸 위로 온수가 타고 흘렀다.

“내일은 쉬어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내가 호출하면 되지.”

“……”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이리트.”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봤지만, 그리페의 말이 아주 싫은 건 아니었다. 대개 휴일을 뒤에 둔 날에 함께 밤을 보내곤 했으나,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울지도 모른다. 짐짓 찌푸렸던 표정을 푼 이리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그리페는 정말로 일과가 시작되자마자 적당한 이유를 빌미 삼아 이리트를 불렀다. 푹신한 가죽 소파에 기대앉은 이리트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일에 여념이 없는 그리페에게 다가섰다. 손이 멈추고 제게 시선이 향하는 순간은 생각한 것보다 더 만족스러웠던가. 눈을 마주친 채, 한쪽에 자리한 의자를 끌어다 태연히 옆자리에 앉은 이리트는 당연한 듯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이리트.”

“응.”

“누구 들어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누가 네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

“음…… 태연하게 반말하는 이리트 같은 사람이?”

“그러려니 하는 줄 알았는데.”

“나야 괜찮죠. 그렇게 딱딱한 사람도 아니고.”

“그럼 됐어.”

실없는 대화였다. 일을 완전히 멈춰 버릴 수 없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팔이 분명 거슬릴 법도 하건만 이리트는 꿋꿋하게 제 어깨에 꼭 붙어 있었다. 제 일이라도 방해하려는 심산 같아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누르기도 쉽지 않았다. 괜히 동그란 머리통에 쪽쪽, 소리 내 입 맞추는 시늉을 하면 눈이 마주쳤다. 그 모든 일에 가슴이 간질거려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페의 웃음소리가 꽤나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던가. 그는 제가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도 꽤나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었건만. 제가 되묻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조용히 화면을 훑다 보면 눈에 띄는 자료가 있었다. 7119-B2과 함께 거론되곤 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행성, 365C-B0.

“또 출정 가?”

“응? 아, 이거. 그렇게 됐어요.”

“언제 가는데?”

“삼 주 후에.”

시기상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일 테지만, 지난번의 일을 겪고서도 강행할 줄은 몰랐다. 빡세게도 굴리네. 미친 나무 괴물을 쓰러트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누군가 들었다간 경악하고도 남을 문장을 삼킨 이리트는 시간과 가능성을 가늠했다. 약간의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이전에 받았던 연락과 비교해 보면 준비가 끝나는 시기가 적당히 맞아떨어진다. 좋은 신호였다. 작전 도중 패스파인더를 붕괴시키고 전함을 통째로 탈취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미리 연락을 취해 놓아야 할 테지.

문득 이리트는 제게 어깨를 내어준 이를 응시했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저를 보는 이의 얼굴에서는 그림자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짙푸른 눈동자는 올곧았으나 제게 닿으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다. 그 개인의 능력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나니 앞길을 막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고, 존재했더라도 쉬이 치워 버릴 수 있었겠지. 그리고 자신은 아마도 그리페의 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길 테다. 돌이킬 수 없이 끔찍한 오점이 되거나, 그의 수많은 훈장 중 하나가 되거나.

속이 메스꺼워, 이리트는 맑은 시선을 피해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정하게 몸을 돌려 저를 꼭 껴안았다. 이토록 무비할 수 있는 시간이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제든지 비수를 꽂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 때문에.

“이리트. 많이 피곤해요?”

“……”

“간이침대를 펴 줄 테니 좀 자는 건,”

“괜찮아. 그냥… 투정부리는 거야.”

누군가 제 방에 올 걸 걱정하는 이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탓에 입안이 쓰다. 마른침을 삼켰다가, 몸을 조금 물려 그리페의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언젠가 이 얼굴 위로 배신감이 떠오를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겠지. 자신, 혹은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그리페는 살려 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의 존재는 후일 정부군 응집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으므로. 애초에 개인의 무력이 정도 이상으로 뛰어나니 구속해 두기도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이리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전에, 그리페가 입을 열었다.

“왜요.”

“잘생겨서.”

“얼굴 때문에 나 만나는 거예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그리페는 제법 상처받은 표정을 해 보였다. 무게가 실리지 않은 농담, 그 뒤를 잇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잘라낸다. 그렇지 않아도 제 표정이나 기분 따위를 쉬이 읽어내는 이를 앞에 두고 떠올리기엔 적절하지 않은 잡념이었다. 보란 듯 내민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려다, 그대로 목덜미를 감싼 손에 붙잡혀 어정쩡한 자세로 진득하게 혀를 얽었다.

계속 붙어 있다간 여기서 일을 치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오랫동안 군인이었던 만큼 꽤나 원칙적인 인간이었으므로 그저 제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경우만 해도 이미 예외적이지 않던가. 첫 번째 예외가 생기면, 그 뒤를 잇는 특이사항이 더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게 제게 좋은 일이냐고, 누군가 물어올 때는 그저 애매하게 말을 돌리고 말 테다. 손을 뻗어 그리페를 밀어낸 이는 입을 열었다.

“태만하지 마십시오, 대령님.”

분명 다른 이들이 있을 때는 늘 듣는 어투이건만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아마도 채 닦아내지 못한, 타액으로 젖어 반들거리는 얇은 입술 때문이리라. 그래, 제게만 내보이고는 하는 빈틈과 같은 것들. 이리트가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진득한 입맞춤과 목을 섬세하게 더듬는 손끝 따위는 분명 지난밤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모르는 척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들고 소파에 앉은 이의 옆얼굴을 잠시간 응시하다, 웃음기를 채 지우지 못한 채 손을 움직였다.

조용한 집무실 안에 간혹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기실, 책의 내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한 페이지를 다 읽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에 적당히 책장을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실시간으로 소통을 할 수 없는 탓에 정보의 속도에는 시차가 있었다. 그렇다고 미리 신청하지도 않은 휴가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페가 여러모로 제 편의를 봐준다고는 해도, 원칙을 깰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 안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든 한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가장 정확한 방법을 쓰는 게 낫다.

결정을 내리면, 이곳에서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여기서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쓸 수도 없었고, 손에 든 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리페를 방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였다. 일을 아주 못하게 할 수는 없지. 문득 바라본 그리페는 집중한 듯,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이 있을 때면 내보이지 않는 표정. 그가 시선을 돌릴 즈음 이리트는 짐짓 태연하게 시선을 돌려 책을 응시했다.

긴장을 푼 채 제가 골라 들었지만 재미없는 내용의 책을 읽다 보면 나른함이 몰려왔다. 간이침대를 펴 주겠다는 말을 거절한 보람도 없이. 그리페는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나 멀쩡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그토록 몰아붙인 건 그리페였음에도.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점점 느려지다가, 종래에는 책 위에 얹은 채 멈추고 말았다. 비스듬히 기대앉은 이의 고개가 기우뚱, 기울어 소파 등받이에 닿는다.

집중한 채 화면을 들여다본 탓에 눈이 뻐근했다. 따듯한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가 기지개를 켜는 동작이 하나의 과정처럼 익숙했다. 숨을 길게 들이켠 그리페는 한 박자 늦게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은 이리트를 발견했다. 이리트가 혹여 깨지는 않을까, 그 어느 때보다 숨죽이고 다가선 이는 허벅지 위에 놓인 책을 조심스레 빼냈다. 책에 닿아 있던 손끝이 작게 움찔거리면, 그리페는 호흡마저 멈추었다. 이래서야 자세를 편히 고쳐줄 수도 없다. 꽤 오랫동안 잠든 얼굴을 지켜보던 이는 결국 담요를 어설프게 덮어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물러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연스레 얼굴을 덮으려던 손이 어딘가 걸렸다. 뜨고 싶지 않은 눈을 억지로 떠, 그 정체가 제 몸 위에 덮인 담요임을 확인한 이리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일어났어요? 응…… 몇 시야. 다섯 시예요. 벌써? 깨우지. 잘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좀. 어쩐지 난색을 표하는 듯한 연인의 목소리에 이리트가 밋밋하게 웃었다. 덮었던 담요를 깔끔하게 개고, 다시금 그리페의 옆자리를 차지하면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할 일이 없어.”

“…….”

“구경이나 좀 하게.”

그건 그리페의 얼굴이기도 했고,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정보이기도 했다.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다가 곧 납득한 것 같았다. 한참 얼굴을 들여다보면 때때로 눈이 마주쳤다가, 입술을 맞부딪힌 것만 몇 번이었다. 이날, 그리페는 제 집중력이 그만큼이나 흐트러질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다.


 

모든 일과를 마친 이리트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털어내고 책상 앞에 앉으면 한숨이 먼저 샌다. 줄이 인쇄된 편지지를 앞에 두는 마음은 왜 언제나 변하질 않는지. 진작 해치웠어야 할 일을 이렇게까지 미룰 생각은 없었다. 덕택에 집배원의 방문일을 놓쳐 버렸다. 올해 한 멍청한 행동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일이었으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리트는 펜을 들었다. 첫머리에 에르마의 이름을 써넣는 손길이 신중했다. 어쩌면 이렇게 주고받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천천히 글씨를 써내려갔다.

 

「친애하는 에르마.

그간 잘 지내셨길 바랍니다. 시간이 훌쩍 흘렀지요. 다행히도 저는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 짧은 글줄이나마 남겨두려 합니다.

에르마, 이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우리가 오랫동안 품어 온 문제들 말입니다. 적절한 해결법이 떠올라 언급해 둡니다. 출경한 것이 제게는 득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편지로는 말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정확한 내용은 다음에 직접 만나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에둘러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탓입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편지라는 게 대개 그렇지만,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싶다가도 일단 쓰기 시작하면 무슨 말이라도 쓰게 되곤 합니다. 늘 걱정을 하시는 것 같으니 시답잖은 근황이나 전해 볼까 합니다.

함선을 조작하는 법을 최근에 배웠습니다. 함선이라기보다는 개인용 전투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긴 하겠지만, 조작법의 기초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 어떻게 불러도 상관은 없겠지요. 이 부대의 소속 인원이라면 다들 기본적으로 배운다고 합니다. 다들 하는 거라고 해도……. 탈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만. 취한 채로도 운전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부대원이 있더군요.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다들 꽤나 좋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떠나온 지 꼭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입니다. 문득 떠나온 곳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도 떠오르곤 해요. 향수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할 시기인가 봅니다. 다시 편지를 써야 할 즈음엔 편지가 아니라 직접 만나면 좋을 테지요. 부디, 그때까지 건강하길 바랍니다.

추신. 1-4(2), 2-4(1), 2-7(1), 2-8(1), 3-1(1), 4-1(3), 4-5(1), 4-6(2), 4-8(1)

이리트로부터.」

 

편지를 단단히 봉하고, 이리트는 수많은 망설임을 대신 써넣은 종이 하나를 불태웠다. 부대 내에 오는 이들을 통해서 전하면 답장을 받을 시간이 모자라다. 그다지 내키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리페를 통해 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작은 억지는 그리페도 들어줄 테다. 그가 편지를 열어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을 향한 의심을 거둔 것 같았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답장이 오는 타이밍을 따져 발각 여부 정도는 알 수 있다. 계획이 틀어지겠지만, 언제는 제가 편한 길만 걸어왔던가.

이제 막 소등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페가 이제 막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고민을 할 시간도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더 늦었다간 잠에 빠진 그리페를 마주하게 될 테니. 이리트는 조용히 방을 나서 그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불이 켜지지 않은 복도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쳤다. 수많은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공간이 이토록 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얼핏 이유를 떠올린 이리트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걸음을 서둘렀다.

“이리트,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일단 들어와요.”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닐 텐데, 대답하기도 전에 그리페가 문간에서 비켜섰다. 그래도 남이 들어서 좋을 건 없는 일이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면 품 안에 챙겨 온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했으나 돌려 말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굳이 숨겨 오해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편지를…… 보내 줬으면 하는데.”

“편지?”

“응. 부대를 통해 보내면 출정하기 전에 답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

하얀 봉투가 탁상 위에 놓였다. 집배원은 한 달에 두 번 날짜를 정해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일은 이미 지나 버렸고, 두 번째 날은 너무 늦었다. 이리트가 편지를 보내는 곳이라면 내일 당장 보내야 두 번째 방문일에나 겨우 답신이 돌아올 수 있었다. 날짜를 가늠해 본 그리페는 짧게 침음했다.

“어려운 부탁인 건 아는데, 이번에 떠나면 또 한동안 못 돌아올 테고……”

이리트는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저나 다른 이들처럼 쉽게 연락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무작정 안 된다고 잘라 말하기엔 신경이 쓰였으나 원칙을 무시해 버릴 수도 없었다. 문득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보니 웃음이 새고 말았다. 이리트가 부탁을 해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사실 하나가 못내 신경이 쓰였던 거였다. 결국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이리트는 수많은 고민 끝에 그냥 고마워, 기계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해명의 여지도 없이, 이러한 상황은 그리페를 이용하는 거였다. 편지를 열어볼 가능성 따위의 변명을 덧붙였으나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페는 이능을 그에게만 내보인 시점을 기준으로 저를 향하던 의심을 거둔지 오래였다.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묻어주고서도. 차라리 계속 의심했다면 제 마음은 더 편했을 테지만, 그마저도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리페.”

이름을 부르면 제게 닿는 시선을 바로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눈을 피하고 싶어 제 옆에 앉은 이를 끌어안으면 마주 안는 팔이 서러울 만큼 단단했다. 끝이 머지않은 시점이었다.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한 것도, 그 끝을 능히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던 것도 저였다. 변명과 자기합리화는 지긋지긋할 정도였고, 추스르지 못한 마음은 때를 모르고 줄줄 흘러내려 흉했다.

무참히 뒤섞여버린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 그리페의 뺨을 감싸 입을 맞추었다. 그는 별달리 거부하지도 않았다. 외려 제 허리를 끌어안아 더욱 깊숙하게 혀를 섞을 뿐이었다. 놓으면 사라지기라도 할세라 단련된 몸에 팔을 휘감아 당기면 그리페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리페가 욕망을 참는 얼굴은 언제나 자신을 흥분하게 했다. 지금처럼.

“내일 못 쉬잖아요, 이리트.”

“상관없어.”

섹스는 곧 도피였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쾌감으로 죄책감을 덮어 가리고, 몸을 부딪치며 그가 제 옆에 있음을 확신하고 싶었다.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꼴이었으나, 그런 것에 연연했다면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오지도 않았으리라. 속절없이 쏟아지는 감정 앞에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던 적도 없었다. 내내 무릎을 꿇고 있던 게 저였다. 이제 와 위신이며 자존심을 세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페의 손은 얇은 셔츠를 쉬이 벗겨내고,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누향이 남은 상체가 밝은 빛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검은 비늘에 부딪힌 빛이 사방으로 산란했다. 탁한 광택을 띄는 비늘 위를 쓰다듬는 손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잘못 손을 댔다간 긁히기라도 할 것처럼. 그 손길이 왜 그렇게나 갈증을 일으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마른 목소리로 그리페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금세 제가 꽤나 흥분해 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급해요.”

“……몰라. 이리와, 안아 줘.”

 


 

“씻을래.”

“응, 이리 와요.”

그리페는 체액으로 더럽혀진 옷을 뒤늦게 벗었다.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면 놀란 발끝이 한 번 허공을 휘저었다. 매번 안겨 다녀도 어쩐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걸을 수 있어. 투덜거려도 그는 마냥 웃을 뿐이었다. 머쓱함이 앞섰으나 제 발로 그리 걷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이리트는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안 무거워?”

“별로. 그보다 이리트, 전보다 더 가벼워진 것 같아요.”

“그런가.”

“누가 괴롭히면 말해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면 그리페는 태연하게 정말로요, 하고 말을 덧붙인다. 애초에 부대에는 사람을 괴롭히려 들 만한 성정의 이들도 없는 데다 제가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런 걱정을 듣다 보면 꼭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미리 물을 틀어두지 않은 욕조는 차가웠다. 반신욕을 하더라도 몸을 먼저 헹궈내고 싶었던 건 맞지만, 서늘한 공기에 열이 남은 살갗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페는 샤워기 헤드를 들고 물의 온도를 맞추었다. 그는 늘 저보다 높은 온도의 물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 덕에 그리페와 함께 씻고 나오면 매번 뺨이며 살갗이 얇은 부위가 분홍빛으로 열이 올랐다. 그리페를 보며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 그가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맞아,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도 이능을 가졌어요.”

“너.”

“신체강화 계열.”

“그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데……”

“묵인되니까.”

그리페의 말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기실, 정부는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 또한 환영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종류는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 들 뿐이었다. 그 차이였다. 왜 그렇게나 이능에 겁을 집어먹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약간의 허탈함에 입안이 썼다. 그래, 그 전투 능력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 있었다. 이미 눈으로 보아온 일들로 그리페가 쓸데없는 거짓을 말하지 않음을 알았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리페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능에 관해 물어본 적 없는 점이나, 자연스레 그때의 일을 우연의 일치로 덮어 버린 점이 그랬다. 그걸 숨겨야만 했던 이유를 다르게 알고 있을 테지만, 똑바로 알려줄 수도 없는 게 지금의 제 처지였다. 체력이 달리니 기분이 쉽게 가라앉았다. 기껏 돌려놓은 사고를 다시금 그쪽으로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

따듯한 물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궤적을 따라 온기가 전해졌다. 몸을 대강 씻어내고, 수챗구멍을 막으면 널찍한 욕조에 물이 느리게 차올랐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시끄러워,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했다. 수위가 허리 위를 넘겼을 즈음 그리페가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다리가 얽히면 왜 실없는 웃음이 새는지.

함께하는 밤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다시금 돌아온 일과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지난한 하루였다. 출정 전에 준비할 것이 많은 만큼, 그리페의 얼굴을 보기는 다소 어려워졌다.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이리트는 밤이면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후회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낮이면 태연한 듯 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곳에 온 뒤로 숨긴 비밀만 몇 개였던가.

그리페를 통해 보냈던 편지는 집배원의 두 번째 방문일에 답장이 돌아왔다. 출정을 단 하루 남겨 둔 시점이었다. 더불어 특별한 언급이 없는 그리페까지. 편지를 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뜻을 숨기면서도 굳이 의심스러워 보일 법한 내용을 적어두었음에도. 신뢰를 기저에 깔아두지 못하는 관계는 불안정했다. 물론, 그마저도 오롯이 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기에 이리트는 내색하지 않았다.

돌아온 편지는 간단명료했다.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대로 진행하라는 것과 제 안위를 걱정하는 말. 편지의 내용을 모조리 외운 이리트는 답장을 태워 버렸다. 이제 모두 끝내버릴 때가 되었다. 기나긴 후회의 나날도, 그보다 더 오래 바라왔던 숙원도. 그리페와의 관계마저도. 숨을 깊이 삼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그래, 전부 끝이다.

부대원 모두가 모여앉은 자리에선 365C-B0의 환경을 비롯한 그곳의 종족이며 특징 따위를 정리한 브리핑을 들었으나 귀에 들어오는 내용이 없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지독하게 추운 행성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곳의 날씨는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을 비롯한 패스파인더 소속 전원은 아무도 그 행성에 발을 들이지 못할 테니. 한 걸음 물러선 채 회의를 관망하던 이리트는 그대로 남아 모두가 회의실을 나간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준비는 순조로웠다. 짧은 기간 사이에 지난번의 전투로 입었던 피해를 모두 수복한 함선은 새것처럼 말끔했다. 함선에 온갖 미사일이며 무기가 다시 보충되고, 떠나 있는 동안 부대원들이 먹을 맛없는 보존 식량도 속속들이 쌓였다. 그 모든 과정을 보거나, 일정 부분 참여한 이리트는 그게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도 종종 그리페를 마주치면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제 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365C-B0에 도착하는 데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한나절 정도의 오차는 있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시점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멀다는 얘기였다. 이리트는 그 비행 계획의 허리를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이틀째까지는 지구 쪽에서 지원을 쉬이 올 수 있었고, 엿새를 넘어가면 돌아오는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이런저런 계획과, 예비 계획까지 그려가며 이리트는 홀로 다른 목적을 가진 출정을 준비했다.

마침내 해가 떠오르고, 모두가 전함에 몸을 실으면 느릿하게 떠올랐다. 다시 지구에 돌아올 때면 이곳의 모든 게 뒤바뀌어 있으리라. 이제는 익숙해진 충격이 한바탕 함선을 뒤흔들고 나면, 늘 그러했듯 단단히 매었던 안전벨트를 풀고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일반 병사들은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누군가는 이 여백을 틈타 자기계발을 했고, 누군가는 휴식을 취했으며, 누군가는 전투를 앞두고 감각을 잃지 않고자 훈련을 했다. 이렇다 할 특이사항 없이 함선은 새까만 우주를 가르고 내달렸다. 이리트는 또다시 복도에서 함선 밖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 풍경을 봤을 때의 기분은 아마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이리트는 배움이 빠른 이들 중 하나였으므로, 이제는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지구의 모습을 금세 찾아냈다.

“이리트.”

제 이름을 부를 사람은 부대 내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군함의 머리이자 제 연인, 그리페 하랄트. 함선 내에 사람의 발길이 드문 길은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개중에 지구를 볼 수 있는 곳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복도 끝자락에 선 그리페를 바라보았다.

그리페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존재하는 교본에 나올 것처럼 똑바르다. 턱을 당긴 채 가슴과 허리를 펴고, 내딛는 발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소한 것마저도 그를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잘생겼고, 매너가 몸에 배어있으며 유능한 장교. 그게 그리페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 중 일부였다. 이리트의 눈길은 투명하게 그리페의 면면을 훑었다. 가라앉은 눈빛을 그리페가 다가오면 거두고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 표정을 이미 봤을 테지만, 숨기는 것을 굳이 캐묻지 않는 이였다.

“네가 예전에…… 첫 작전 때 지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줬었는데.”

“응, 기억나요.”

“이제는 알려주지 않아도 찾을 수 있게 됐어.”

이리트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는 푸르른 행성이 자리했다. 자못 멀어져 점처럼 보였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리페는 문득 제 옆에 선 사람을 응시했다. 이리트는 아주 오랜 추억을 더듬어 회상하는 듯 말했다. 꼭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언젠가, 그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에 때때로 내비치던 분위기는 무슨 연유로 다시 그의 주변을 맴도는가. 엄습하는 불안감에 그리페는 저도 모르게 이리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리트, 당신은 가끔 훌쩍 떠날 사람처럼 굴어. 알아요? 잘못 건드리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숨기고 있는 게 뭔지 물어볼 수도 없어.”

“…….”

“아마 모르고 있겠지만, 이리트. 함께 잠을 잘 때 종종 악몽이라도 꾸는지, 당신이 괴로워할 때가 있어요. 깨워도 일어나질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잡아도 인상을 더 찌푸리기만 해. 그럴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을 켜지도 못하고 당신을 지켜봐요. 그게 내가… 나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해요.”

“…미안해.”

“그래도 이리트, 근래에는 그러지 않아서 안심했어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이곳에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분명 안정기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시 당신은……”

이리트는 공허한 사과를 거듭 입에 담았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제가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이리트가 허락한 면뿐이었다. 성조차 없이 이름만 달랑 남긴 이. 필연적으로 남아야 할 생의 족적은 끊긴 것처럼 찾아볼 수도 없었고, 이제 와 더는 그런 방법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달의 뒷면은 우주에 나가면 볼 수 있다지만, 당신의 뒷면은 어디에 가야 볼 수 있는가. 대체 어느 즈음에야 당신은 내게 허락을 말할 텐가. 아무것도 조를 수 없는 그리페는 다만 껴안은 허리를 한 번 더 힘주어 당겼을 뿐이었다. 마주 안아오는 손길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내게 단 한 가지만 약속해줘요. ……당신이 준비되면, 아주 늦더라도 좋으니 언젠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을 알려주세요.”

“그게 너를 실망하게 할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어요.”

아득했다. 제게 흔들린 적 없냐고 물어오던 그 날이 떠오를 정도로. 매정하게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예상한 그대로 자신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무비하게 흘려버렸고, 그리페는 그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그는 때때로 놀라울 만큼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었으며 그건 자신과 관련된 일에도 예외가 없었다. 필사에 이르는 독약을 삼키는 기분으로,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사흘 뒤면 알고 싶지 않더라도 알게 될 진실이었다.

그는 드물게 불안정해 보였다. 늘 연장자 특유의 여유를 두르고 저를 대했건만. 처음부터 이런 관계가 되지는 않았어야 한다고, 이리트는 이미 수십 번은 더 곱씹은 생각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리페는 제게 있어 안정감의 주체였으며, 동시에 괴로움의 근원이었다. 그렇다 한들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시작부터 제가 무게를 지고 가기로 한 관계였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만으로 점철된 팔로 그리페를 마주 껴안은 이는 느리게 숨을 삼켰다.

단단히 맞닿은 몸, 미약한 온기는 분명 이곳에 존재했다. 나직한 숨소리며 느릿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는 분명 제게 익숙한데, 어째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그토록 멀게 느껴졌는지. 큰 작전을 앞둔 탓에 불안이 가중된 걸지도 모른다. 이리트는 심장이 박동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제 등을 토닥였다. 꼭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행동이었으나, 이리트가 그렇게 대하는 대상은 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혀끝이 아릴 만큼 달았다.

한참 만에야 그리페는 걸음을 옮겼다. 품 안 가득했던 체온의 잔열이 남아, 이리트는 오랫동안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층 더 멀어진 지구가 이제는 다른 별과 구분이 되지 않을 즈음, 이리트 또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텅 빈 통로가 유난히도 외롭게 느껴져서 더는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트는 그날 이후 의도적으로 그리페를 피했고, 그는 자못 바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리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개인실에 박혀 있었고, 때때로 시선을 피해 제 계획에 필요한 장치를 설치해두었다. 대개 그리 복잡한 장치는 아니었다. 항상성 유지 시스템의 센서에 약간의 오류를 일으킬 목적으로, 떼어내고 나면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할 장난감 같은 물건이었다.

기어코 네 번째 아침이 밝았다. 도저히 잠들 수 없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에 피로감이 머리며 어깨를 짓눌렀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는 방을 나서기도 전에, 지난 며칠간 설치해두었던 장치를 차례로 작동시켰다. 모두 일반적으로는 지나다닐 일이 드문 바깥쪽 구역이었다. 개인실의 문을 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누군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이제 시작이었다. 보고가 올라가면 귀찮아진다. 나머지 장치를 모조리 작동시키고, 갑작스러운 이상 사태에 뛰어가는 이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이리트는 중앙 배전실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부를 비추는 폐쇄회로 카메라를 터트리고, 주요 시설을 위주로 전원을 끊었다. 모두 끊는다 한들 비상전력이 작동하니 혼란을 일으키는 게 더 나았다.

함선 내에 붉은 경고등이 점멸했다. 누구 하나 평소처럼 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이들이 없었다. 철판 위로 군홧발이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울리고, 누군가는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원인을 찾으려 이리저리 달릴 때, 이리트는 내내 꺼두었던 통신기를 켰다. 짧은 신호를 보내면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리페는 제 연락을 받았다.

[이리트.]

“전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라고 해.”

[무슨,]

“지금 이 난리가 난 이유를 알아냈으니까, 어서. 그리고 잠시만 상황실에서 기다려. 그리로 갈게.”

[……내게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겁니다.]

통신은 매정하게 끊어졌다. 직후에 함선 내를 울리는 그리페의 목소리. 하하, 이리트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유는 알아낼 필요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한 짓이었다. 놀라울 만큼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래, 이 함선의 머리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건 그런 거였다. 누구도 제 발걸음을 막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적이 내려앉을 일 없는 상황실 안에는 오퍼레이터들이 남아 있었다. 이리트는 그리페의 동향을 묻는 척, 중앙 기판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리트는 기압 조절 장치를 부술 듯 강하게 내리눌렀다. 열렸던 문이 순식간에 닫히고, 일순간 이리트의 주위에 맺혔던 결정이 총알처럼 쏘아져 오퍼레이터의 머리를 관통했다.

“이리트!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금 여기 네 눈앞에 선 내가 이 사태의 원인이야.”

그는 웃는 것도 아니었고, 울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화를 내는 표정조차 아니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는 얼굴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리트는 제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뒤돌아 상황실을 제외한 모든 곳의 항상성 유지 시스템을 조작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시 그리페를 마주한 이리트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데에 성공했다.

“다시 소개할까. 나는 혁명군 제1의 참모, 이리트다.”

“……”

“그리페, 네가 그렇게나 궁금해했던 사실은 이런 거였어.”

문이 열리자마자, 상황실의 중앙에 선 이리트를 알아보았다. 그 주위를 맴도는 하얀 결정은 그 정체를 인지하기도 전에 주위의 오퍼레이터에게 꽂혔다. 그리 크지도 않은 결정은 인간의 두개골을 깨부순 것으로도 모자라 부딪힌 벽에 흠집을 내며 부스러졌다. 여섯 명의 머리에서 피가 흩뿌려지는 광경은 환상 같았다. 모든 게 심란함에서 비롯된 악몽이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리트는 제게 뒤를 내보이는 게 두렵지도 않은 것 같았다.

피로가 서린 자색 눈은 충혈되어 붉은 기가 남았고, 장치를 조작하는 손길은 어색함을 채 감추지 못했다. 이리트가 가진 이능의 수준을 따진다면,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전함 하나를 집어삼키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테다. 그 뒤에 탈진이 뒤따르겠지만, 모두를 제압한 뒤라면 그까짓 탈진이 걸림돌이 되진 않겠지. 그 어떤 무엇보다 앞선 문제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이리트를 믿고 싶은 제 마음이었다. 눈앞에서 여섯 명이 머리가 깨진 채로 죽었음에도.

섣불리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리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곳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죽게 될 테다. 심지어는 저마저도. 한 발 내딛기것조차 쉽지 않았다. 상황실의 입구와 이리트가 선 곳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다소간의 피해를 감안하면 이리트를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능을 발하는 방식을 알 수 없었다. 주문이 조건이라면 입을 틀어막을 테고, 시야가 조건이라면 눈을 가려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리트는 특별히 주문을 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보지도 않고 사람의 머리통을 뚫어 버리기까지 했다.

이리트는 제가 혁명군의 참모라 했다. 그가 훈련소에 들어선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의문이 짧은 문장 하나로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전장에서 몇 년은 구른 것 같은 판단력이나 총화기를 다루는 수준급의 실력, 그보다 더 훌륭한 전략 전술에 대한 이해 따위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리트는 어린 편이었다.

처음 훈련소에 입소한 그는 겨우 스물셋이었다. 일 년이 더 지나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이라 말할 수 있을 나이에 그만한 경험을 쌓으려면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실전을 겪었어야 했다. 그저 똑똑한 것과 경험이 뒤를 받쳐주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므로. 스물 초반, 젊다 못해 어린 이가 반란군의 참모가 되기까지 도대체 무얼 겪었고, 무엇이 그를 전장으로 내몰았는지. 그리페는 자신을 이루는 것들의 근간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란군을 제가 직접 상대한 건 그들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리 강하지도 않은 세력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곳에서 모습을 감추면 또 다른 곳에서 나타났고, 숨을 죽인 듯하다가도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한 싸움이었다. 몇 년 전, 마침내 찾아낸 본거지를 소탕한 후에 사라진 게 그들이었다. 만일 그때 소탕한 본거지가 가짜였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제 살을 내어주고 시간을 벌려는 작정이었을 터였다.

“이리트.”

그리페의 부름은 여전히 다정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배신감에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무턱대고 제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일상과 같은 목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정부군 패스파인더 소속 중사가 아니었다. 이리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그리페를 마주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한여름의 바다처럼 푸르렀고, 긴장감을 누르는 모습마저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납득하기 어려운 건, 그에게서 저를 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먼저 적의를 드러내었다면 제가 공격을 감행하는 게 조금 더 쉬운 일이 되었을까. 정의할 수 없는 압박감으로 자꾸만 거칠어지는 호흡을 몇 번이고 다시금 다잡았다. 그리페는 양 손을 들고 제게 조금씩 다가왔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리페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계획이 모조리 틀어졌다. 오퍼레이터를 눈앞에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리페를 자극하기만 하는 꼴이었으므로.

그리페를 정면에서 제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저보다 육체적 조건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먼 곳에 있을 때 발을 묶어야 했다. 망설이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그는 큼직한 보폭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게 뭐든 저질러야 했다.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당겨 겨우 한 걸음, 발을 내디딘다. 독한 마취용 약품으로 젖어 축축한 손수건을 꼭 쥔 채.

“미안해.”

제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던가. 이리트는 이를 악물었다. 손수건으로 그리페의 코와 입을 틀어막으면 그리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본능적으로 내뻗었을 손이 제 팔을 붙잡았다. 이를 악물고 있지 않았다면 신음했을 만큼 아찔한 고통이 느껴졌다가, 단단한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걷어붙인 소맷자락, 비늘 위를 스친 손에 이제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마주한 눈동자가 어떠한 여지도 없이 선명했다.

그리페는 제 의지로 저항을 포기했다.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푸른 홍채가 한 꺼풀 얇은 살 아래로 숨겨졌다. 그 자체로 병기나 다름없는 육체가 힘을 잃고 무너진다. 생각을 거듭할 틈도 없이, 이리트는 묵직한 몸을 받아 안았다. 그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손목이며 다리에 사슬을 둘러 감았다. 그리페가 정신을 차린다면 금세 풀어낼 구속이었으나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즈음에는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다.

벽에 등을 기댄 이리트는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갇힌 이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때까지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리트는 품을 뒤적여 담배를 빼 물었다. 싸구려 라이터는 그새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간헐적으로 튀는 불티는 불을 붙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라이터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이리트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치고, 이능으로 불을 붙였다.

익숙한 연기가 텁텁하기만 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희뿌연 연기가 새고, 이리트는 담배가 홀로 타건 말건,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든 제가 그려 낸 계획은 성공했다. 과정은 분명 문제가 산재했으나 결과를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약에 취해 잠든 그리페는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은 채였다. 감은 눈, 옅은 그림자가 깔리도록 긴 속눈썹이며 기묘할 정도로 순종적이던 태도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길게 매달렸던 재가 덩어리째 뚝 떨어졌다. 무작정 불을 붙였으나 그리 끌리지도 않았다. 상념에 빠진 사이 필터 근처까지 타 버린 담배의 끝자락을 손으로 문질러 꺼트리고, 이능을 발해 남은 재마저 태워 흔적을 지웠다. 이곳에는 분명 어떤 종류의 유독가스도 쏟아지지 않고 있건만,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 같았다. 현실에서 한 발 떨어진 기분으로 이리트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멍하니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때에, 우렁찬 경고음이 울렸다. 공기 중 유독가스를 감지한 시스템은 환기를 시작하겠지만 그건 외려 누출을 가속할 테다. 분명 날카로운 울림은 신경을 긁어야 할 텐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페가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태껏 제가 했던 모든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원인이었으나, 그게 약물로 인한 의식 상실에도 적용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리트는 다급히 패널을 조작해 경보음을 껐다.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의식을 되찾은 이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잠깐 사이 깊이 잠든 것처럼. 그는 몸을 움직이려다 쇠사슬에 묶여 거동이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고서야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리트의 주변으로 오퍼레이터의 머리를 관통했던 것과 같은 결정이 맴돌았다. 그건 깔끔한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옮겨붙고 나면 통제하기 어려운 불꽃보다 더 안전하게 그리페를 위협할 수단이었지. 안전한 위협이라니.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그것보다 제가 하려는 행위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대충 묶여 있는 쇠사슬을 살피던 그리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침묵했던 그리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직감이 거칠게 경고했으나 이리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궁금해서였을지, 그가 내뱉을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서였는지.

“나를 이용했나요, 이리트.”

“……그래.”

한때 사랑을 속삭였던 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홧김에 내뱉은 짧은 대답이 형편없이 떨렸다. 눌린 목소리는 갈라져, 거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저 스스로 판단하기에 이런 꼴이었다. 그리페가 듣기에는 더했을 테지. 이리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등 뒤에 기울어진 기판의 끝이 닿았다. 도망칠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유리한 고지에 있는 건 자신이었다. 방금 막 깨어난 이의 움직임은 아직 둔했다. 이리트는 자꾸만 망설이는 저 스스로를 세뇌하듯 생각을 곱씹었다.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리트는 분명 당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테지.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건 연인의 배반으로 인한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리페는 누구보다 그 마음의 이름을 잘 알았다. 불안감이었다. 이리트가 했던 행동을 감히 이해했노라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 분명 매력적인 와일드카드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큼은 이리트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대원들이 실질적인 위협을 마주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사랑마저 거짓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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