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01)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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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7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그의 상태를 확인한 이리트는 금세 떠나 버렸다. 뺨에 남은 체온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건만. 제게 장난을 걸듯 말을 붙이는 관계자를 귀찮다는 듯 떼어놓고 자리를 뜨던 이리트와 얼핏 눈이 마주쳤던가. 자색 눈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혹은 그러고 싶지 않았거나.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음에도 심적인 피로함은 가시질 않았다. 온통 젖은 옷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통신을 걸어 보고를마치고 돌아가려는데, 낯선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뒤돌아 바라본 얼굴은 분명 그에게 말을 붙이던 이였다.

“문제라도 발생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궁금한 게 있어서.”

“뭡니까.”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헤르데는 원래 접촉 가이딩을 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거든요. 빗속인데다 우산까지 쓰고 있긴 했어도 분명히,”

“그 본인은 당신이 이런 걸 묻고 다니는 걸 압니까?”

“뭐, 알기야 하겠죠. 아까 직접 말도 꺼냈는데. 하하, 너무 노려보네. 실례했습니다.”

“예.”

뚝 떨어진 대답에 남자는 머쓱한 듯 웃더니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무례할 정도로 느껴진 대화 속에서 건진 건 그 가이드의 이름 하나뿐이었다. 헤르데, 이름인지 성인지도 모를 짧은 단어. 낯선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면 다시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란 대개 이런 모양새였다. 센티넬은 가이드 없이 살 수 없으나, 가이드의 삶에는 센티넬이 필요치 않았으므로. 그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뜬 것도 별달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컨디션이 정신을 앞섰다. 그렇다고 바로 작전을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허가도 나지 않을 테지.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고 돌아온 집은 여느 때처럼 적막했다. 빗소리로도 채워지지 않는 정적. 그리페는 익숙하게 스위치를 눌러 내부를 밝히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그의 걸음마다 물 자국이 점점이 새겨졌다.

여유가 생긴 후에 그의 정보를 찾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자신 못지않게 이름이 알려진 이였으므로, 헤르데가 그의 성임을 아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비접촉 가이딩이 특기인 그는 그 특성 탓에 현장 출장이 잦다고 했다. 폭주하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센티넬을 막는 데 특화된 셈이었다. 센터에 출근하는 일이 드무니, 이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더더욱 이리트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거였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그러니까 협회 소속 이능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연줄을 통해 그 이상도 알아볼 수는 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료라 한들 유난스러울 정도로 적은 사적 정보가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지 못할 만큼 아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몇 번이나 훑어본 서류를 내려놓고, 그는 우연에 기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번쯤은 센터나 현장에서 마주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사고에 휘말린 사람답지 않은 무감한 낯으로 이리트는 주위를 살폈다. 억척스러운 손길에 끌려 모인 이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거나, 울음을 삼키거나, 그도 아니라면 기도하듯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뒤가 없는 듯 날뛰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팔마 쪽에서도 어지간해서는 협회와 관련된 민간 시설을 대놓고 건드리지 않을 텐데. 근래 그들을 다급하게 할 만한 요인이 있었던가. 잠시 곱씹어도 변화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만한 건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괴수의 습격이 잦아지며 일어난 센티넬과 가이드의 반강제적 인사이동 정도가 전부였다. 제가 무어라 짐작하든, 이곳을 습격한 이들을 잡아 심문하면 금세 알게 될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쌓인 기기 중 하나가 요란하게 울렸다. 갖은 소음이 일시에 멎고, 총을 꼬나 쥔 채 방만한 자세로 서 있던 남자 중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고 기기 더미를 살폈다. 익숙한 알림음에 고개를 들었던 이는, 남자의 손아귀 아래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기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풍경을 마주해야만 했다. 숨을 쉬는 것마저 잊은 이들 사이로 폐물이 되어 버린 기기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말 한마디 없이도 그가 경고하는 바는 명확했다. 허튼짓을 했다간 손아귀 아래 짓이겨지는 게 너희가 될 거라고.

벽에 모로 기대앉은 채 이리트는 상황을 곱씹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휴대전화 하나를 부서트린 남자는 물리 계열의 센티넬일 게 분명했으므로. 하물며 그들이 인질을 잡아가면서까지 원하는 것 또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리라. 무력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를 즈음에, 벽 너머로 사이렌 소리가 둔탁하게 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무전기가 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암구호가 오간 끝에 한 명을 제외한 이들이 바쁘게 달려 모습을 감추었다.

눈을 감으면 멀리서 전해지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함성, 기합을 넣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음, 소음기라도 단 듯 둔탁한 폭음. 그들의 손에 하나씩 쥐었던 그 총일까. 센터 측에서도 어지간히 대비를 하고 출동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뇌면서도 입이 마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 정말로, 몇 번을 겪어도 달갑지 않았다.

기다림은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변한 것이라고는 우두머리로 보였던 남자까지 다급하게 밖으로 향했다는 사실 하나였다. 사람을 부리는 것이 더 익숙해 보이는 이가 자리를 떠야 할 상황이라면, 분명 이쪽이 승기를 잡은 것일 테지. 이들은 어쩌면 팔마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인질을 잡아 놓고 써먹지도 않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진 않을 테니.

맨바닥에 닿은 다리로 냉기가 선득하게 전해졌다. 바깥의 소리에 더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트는 눈만 느릿하게 깜박였다. 마침내 귀에 익은 군홧발 소리가 당당하게 실내를 울리기 전까지는. 그래, 누가 보기에도 신뢰가 가도록 각 잡힌 전투복을 입은 이들이 마침내 여기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는 것조차 익숙했다. 현재 상황을 안내하고, 붙잡혔던 이들의 안위를 살피고 달래는 일련의 일들이. 그러나 제게 다가온 사람이 그 많은 이들 중 그리페인 건 그저 우연이라 넘겨 버려야 할 일일는지. 그는 별말도 없이 다가와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목을 단단히 묶었던 밧줄을 잘라냈다. 그를 한 번쯤 다시 만나보고 싶긴 했지만, 이런 걸 원한 적은 없었다. 침묵이 이토록 어색하게 느껴진 적 있었던가. 생각이 스치면 한숨을 삼켰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그리페의 강렬한 인상과는 별개로 목소리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일까, 혹은 큰일이 터지기 전에 그리페를 비롯한 센티넬들이 도착했기 때문일까, 그들은 인질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 이리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거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허리를 감싼 팔은 단단하고, 갖춰 입은 장비 너머로도 느껴지는 체온은 비가 쏟아지던 그 날과 달리 저보다 한참이나 따스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변명 같은 말에 그리페가 차라리 웃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여느 군인이 그러하듯 흔들림 하나 없이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부축했다. 이리트는 그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거부하면 되묻지도 않고 멀어질 것임을 알았다. 입을 떼기 어려운 건 그저 안도감 때문인가. 이리트는 차게 식은 체온 때문이라는 변명을 주워섬겼다.

붙잡혔던 이들 중 대다수는 간단한 절차를 거친 후에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당연한 듯 그 다수 사이에 끼지 않은 이리트는 태연한 낯이었다. 놀라지도 않았는지 무표정한 얼굴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다른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이러한 일이 익숙한 것처럼.

가이드는 센티넬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센티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자, 동시에 한없이 약한 이들. 그러므로 팔마로 대표되는 이능자 범죄 집단은 대개 가이드를 먼저 노렸다. 센티넬이 얼마나 강하든, 가이드 없이는 인간 구실조차 하기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가이드를 설득하거나 협박해서 그들 쪽으로 끌어들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죽여 없앤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이리트는 방금 한 차례 위기를 넘긴 셈이었다. 일반인들과 함께 모여 있었으니 가이드임을 들키지는 않았던 걸 테지만,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함에도 이리트는 태연하게 출동한 센티넬들의 상태를 살폈다. 제 몸이나 먼저 챙기는 게 낫지 않나. 기억 속에 남은 것보다 훨씬 앳된 얼굴, 일순간이나마 비틀거리던 모습 따위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할 생각을 하던 중에 이리트와 눈이 마주쳤다.

이리저리 흐르던 생각이 멎음과 동시에 그리페는 깨달아야만 했다.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낯부끄러운 감정을. 가장 아래 깔려 있던 불안을. 정작 상대는 이렇다 할 표정조차 드러내고 있지 않건만.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숨을 멈추기라도 할 듯 삼켰다가 겨우 내뱉으면,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의아함이 떠오르고, 이내 성큼성큼 이리트가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다만……”

입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당연하지,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는 왜 그렇게 가 버렸냐고, 인사조차 건네지 못해 아쉬웠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당신 같은 가이드를 만난 건 처음이라고, 파트너가 되어 줄 수는 없겠느냐고 물어야 하는가. 어느 쪽이든 그리페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하얀 서류 위 정돈된 문장으로 정의된 이리트는 협회 내의 어떤 누구보다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처럼 보였고, 그건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들 수도 없었다. 일방적인 필요성 아래, 언제나 아쉬운 건 센티넬이었으므로. 심지어는 제가 체감했던 확신과 같은 감각을 그와 공유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도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눈은 일말의 가능성을 의미하는가. 터무니없는 생각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저 미약한 가능성에라도 매달리고 싶을 뿐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파트너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겨우 두 번 봤는데.”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고민해보겠습니다.”

입을 열 때부터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손에 땀을 쥐도록 긴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편적인 이능자 간의 파트너십이란 어느 정도 친밀한 사이에서 이뤄지곤 했으며, 서로를 가장 우선시하겠다는 뜻을 내포한 계약 내지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 관계에 운명에 가까운 이끌림이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기록에나 남아 있을 정도로 적은 사례였고, 그마저도 어쩌면 제 착각일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은 이능을 각성한 이후로 한 번도 맞는 가이드를 찾지 못하고 약물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왔다. 그런 제게 이리트의 가이딩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선사했다. 거부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을 그 힘.

“시간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상대를 달래려는 듯 조금 전보다 부드러웠다. 제 표정이 그만큼 좋지 않았던가. 표정을 숨기는 것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상황이 되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한숨처럼 내뱉은 목소리는 저 스스로 흠칫할 만큼 엉망이었다. 이리트가 말한 대로 몇 번 보지도 않은 사이에 별꼴을 다 보였다. 버석한 낯으로 그리페는 마른세수했다. 때마침 상황이 얼추 마무리되어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을 행운이라 불러야 하는지. 어색하게 묵례하고 돌아서는 그리페의 발걸음엔 힘이 빠진 채였다.

기억의 한 귀퉁이가 닳아 버렸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그날의 감각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당혹스러움에 앞뒤 잴 것 없이 돌아와 온갖 자료를 뒤적였다. 피로한 눈을 눌러 가며 찾은 자료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사례를 말했다. 그리페가 올라탄 차량이 갈림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이리트는 오랫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짙푸른 눈 안에 차오른 절박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제 말을 듣자마자 아래로 향하던 시선도. 그리페가 서둘러 말을 꺼낸 이유도 알았다. 사과를 해야 할 건 그가 아니라 저였다.

강렬한 이끌림은 되레 두려움을 일으켰다. 가이드에 비하면 센티넬의 근속연수는 짧은 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선을 넘나드는 존재였으므로. 센티넬 간의 전투라면 차라리 부상이 덜했다. 존재조차 제대로 정의되지 못한 괴수 따위를 상대할 때면 등급이 높은 센티넬이라도 참혹한 꼴이 되기 일쑤였다. 아무런 문제 없이 퇴직하는 센티넬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신체의 일부를 잃어 더 이상 싸울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거나, 정신이 붕괴하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 이곳을 떠나던가. 그렇기에 이리트는 독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센티넬에게 냉담한 가이드 중 하나였다. 친분을 쌓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폐인이 되거나 시신이 되어 돌아오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혼자인 게 더 났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러나 그리페는 경우가 달랐다. 가이딩을 대체하는 약물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건 당장 센티넬이 폭주하지 않게 막을 뿐인 임시방편인데다, 최근 들어 장기복용으로 인한 부작용도 속속들이 보고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그리페에게 행해지는 거의 모든 가이딩 효율이 타 센티넬에 비해 절반 이하의 수치를 기록했고, 일부는 거부반응까지 일으켰다. 그게 문제였다.

이제껏 자신이 여기저기 불려 갔던 현장을 고려해 보면, 어떻게 해도 그리페를 모든 상황에서 가이딩할 수는 없었다. 해결 방안은 하나였다. 공식적인 파트너가 되는 것. 그걸 그 또한 모르지 않았을 테다. 어떻게 상황을 재어 봐도 그게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단단한 벽에 기대선 이리트는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아는 것과 납득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자신은 냉철하다느니, 독하다느니 하는 주변의 말과는 달리 그저 겁이 나는 것뿐이었다. 하물며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들과의 친분조차 거부했건만. 거짓말처럼 이끌리는 상대가 멀쩡하게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덜컥 거부감부터 치밀었다. 그리페의 전적은 화려했다. 전반적인 신체 기능이며 컨디션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맞는 가이드가 붙는다면 그는 더 강해질 테고, 그만큼 위험을 무릅쓰게 되리라. 그러나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페는.

선택권은 전적으로 제게 있었다. 가혹한 일이었다. 차라리 누군가 등을 떠밀어 주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이리트는 터무니없는 소리임을 알면서도 한탄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싶었던 적 없다. 언제까지도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이능을 써 먹다가, 적당한 때에 은퇴할 생각이었다. 그리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었으나 이제는 무용한 이야기였다.


 

조직의 구성원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건, 조직은 대개 별문제 없이 돌아가곤 했다. 이능자 협회, 그중에서도 무력으로 치면 제일가는 중앙본부도 매한가지였다. 안정된 조직이라면 모름지기 개인의 문제로 휘청거리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것과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 다른 문제였다. 전장의 끝자락, 최후방에 세운 천막은 저를 비롯한 가이드가 대기할 장소인 동시에 임시 치료소였다. 늘어진 천막을 말아 올려 열어 둔 입구 근처에 선 이리트는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저곳, 커다란 덩어리 같은 괴수가 있는 곳에서 그리페가 싸우고 있다. 거리가 있어 자세한 정황은 보이지 않았으나 돌아가는 분위기로 적어도 이쪽이 밀리고 있지 않음은 알 수 있었다.

그리페에게 파트너 제의를 받은 게 겨우 이틀 전이었다. 지은 죄도 없건만 그리페의 얼굴을 보자니 마음 어딘가 한구석이 불편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얼굴을 봤을 때는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었음에도. 제가 이러한 작전에 참여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익히 해 오던 일이었다.

부상을 입은 센티넬들은 이곳으로 이송되어왔다. 앓는 소리조차 억누르는 이들은 하나같이 제 발로 걷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전선에서 물러섰다. 자잘한 부상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굴다가, 끝내 치명상을 입고서야 끌려오는 꼴이었다. 그들이 들것에 실린 채 제 옆을 지나치면 숨길 수 없는 피 냄새가 스치고, 칸막이 너머에서는 드물게 고통 섞인 신음이 샜다.

작전을 시행할 때면 언제나 치유 능력을 갖춘 센티넬이 동행한다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누구도 부러진 뼈가 어긋난 채로 붙거나, 이물질이 박힌 채 아문 상처 따위를 원하지는 않을 테니. 괴수와의 전투, 그 끝에 얻은 부상은 언제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 마련이었다. 복합골절은 발에 챌 정도로 흔했고, 신체 일부가 아예 뭉개진 채 실려 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이들도 있었는데, 이를 데려오는 동료들은 겨우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현장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막사 한쪽에서 이리트는 그 모든 장면을 지켜봐 왔으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의 신음을 애써 무시하며 가이딩을 해 왔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 이미 사지 중 하나를 잃은 이가 존재하나, 죽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분명 승기를 잡았는데도 이런 꼴이었다. 부상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이쪽으로 누군가가 실려 올 때마다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안다. 그리페는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이들 중 무력으로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그런 이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이곳으로 실려 올 상황이라면 승기를 잡았다는 말 같은 건 꺼낼 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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