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22)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도무지 일어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던 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맹하게 풀렸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이리트는 협탁 위에 자리한 물을 들이켰다. 잠든 사이 흐트러지다 못해 매듭까지 풀린 가운 자락을 여밀 생각도 않고, 이리트는 대뜸 그리페가 쥔 기기를 받아 들었다.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한 이는 곧바로 전화를 받고, 자리를 뜨려는 그리페를 붙잡았다. 가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
[드디어!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신경 쓸 것 없어.”
[그렇다면 다행인데…… 아무튼 급하니 본론만 말할게. 레만이 본격적으로 날 추적하기 시작한 것 같아. 거처를 옮겨야 해서, 자리 잡으면 다시 연락할게. 네가 부탁한 건은 얼추 다 정리됐어. 지금 시간 돼?]
“언제.”
[지금이 열 시니까, 그래, 정오에 봐. 장소는……]
“근처에 서점이 있어.”
[아, 거기. 좋아.]
“그럼.”
[잠깐, 잠깐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갈 거야. 그쪽이 널 알아볼 거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 지금…… 정말 안전한 거지.”
[아직은. 끊을게, 다음에 봐.]
“너, ……진, 진?”
“끊겼어요?”
고개를 끄덕인 이리트가 기기를 툭 떨어트리듯 내려놓았다. 얼핏 통화 내용이 들리긴 했으나, 당장 저는 저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이리트의 연줄 중 하나일 테지.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이리트는 고개를 기울인 채 오랫동안 침묵했다. 느낌이 안 좋아. 속삭이듯 중얼거린 이가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늘 그렇듯, 지난밤의 여파로 여기저기가 아픈 게 분명한 이리트는 반쯤 의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도와줄까요?”
“이게 누구 덕분인데…… 됐어. 옷만 좀 챙겨 줘.”
“알겠어요.”
이리트의 아침 식사는 본의 아니게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흐트러진 이불을 펼쳐 말끔하게 정리하고, 이미 몇 번 본 적 있는 이리트의 옷을 침대 위에 얹어 둔 그리페가 방을 나섰다. 소파에 대충 기대 세워 놓은 청소기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은 그리페는 당연한 듯 돌아와 옷장에서 제 옷을 꺼냈다. 이리트가 혼자 나가겠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따라붙을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 욕실 문이 열리고, 이리트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갈 거예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당신은 이럴 때면 나를 지키려고 드니까, 이리트.”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 같이 가.”
잠시간 말을 고르다가, 뱉을 말이 궁해서 이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페의 말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기도 했으므로. 걸친 채로 잠들었던 가운을 벗어 대충 던져 놓은 이리트는 속옷을 주워 입었다. 자꾸만 새는 한숨을 삼킨 채, 셔츠를 입으려 손을 뻗으면 그리페의 손이 먼저 와 닿았다. 몇 번쯤 겪어 익숙해진 일이었다. 그리페가 들어 준 셔츠에 팔을 끼워 넣으면, 그는 곧 제 앞으로 돌아와 셔츠 단추를 잠가주었다.
“열두 시까지는 가야 해.”
“아직 여유 있어요.”
그리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근방의 유일한 도서관은 차로는 여기서 오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치미는 조급함은 직전의 통화 탓이리라. 괜히 제 얼굴을 문지르면, 그리페의 손이 따라와 소매 단추를 잠갔다. 기실, 조급해한들 지금의 제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단이 없었다. 레만이 언제든 알아챌 가능성이 있다는 걸,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일을 진행한 건 저였다.
“이리트, 그만 생각해.”
“……나는,”
입을 떼려는데, 다가온 그리페가 저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며 체향이 스미고, 이리트는 그제야 제 몸이 긴장한 채 굳었음을 깨달았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몇 번. 품에 안긴 채 괜찮다고 말하고서야 그리페가 저를 놓아주었다. 코끝에 입을 맞춘 그는 제 옷을 죄다 입혀주려는 듯 잘 개어져 있던 바지를 잡아 들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머쓱함에 그를 타박해도 그리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옷감이 마찰하며 울리는 소리, 그 끝에 그리페는 결국 양말까지도 제 손으로 신겨 주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페와 함께 도착한 서점은 이따금 들리던 곳이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매장은 주말 점심쯤에도 사람이 여럿 있었다. 개중에 누가 제게 자료를 건넬 상대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진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전달했을 테니, 이리트는 그리페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책장을 훑었다. 두툼한 소설책 하나를 집어 들고 개요를 훑고 있자면, 한 걸음 더 다가온 그리페가 작게 제 이름을 불렀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이리트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다른 책을 꺼내 살폈다.
그즈음, 검은 마스크를 낀 사람 하나가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접촉, 이리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 하나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페의 차로 돌아오고서야 이리트는 조수석에 축 늘어져 외투 주머니를 뒤적였다. 카드처럼 생긴 USB는 분명 진이 애용하던 제품 중 하나였다. 돌아가면 바로 열어 봐야 할 터였다. 처음부터 제 물건이었던 양, USB를 주머니에 다시 밀어 넣은 이리트는 출발할 생각도 않고 저를 바라보는 그리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진은…… 한 때 나와 함께 협회의 지원을 받았어. 그리고 몇 안 되게 협회의 진짜 속내를 알아챈 사람 중 하나였지. 배경은 대충 그렇고, 어쩌다 보니 빠져나가는 데 협력하게 되어서…… 계속 알고 지냈어.”
“……”
“걱정 안 해도 돼. 협회는 죽은 줄 알아. 실제로도 진의 신분은 말소된 지 오래고. 아마 레만도 진이 그때 그 애라고는 생각 못 할 거야. 그냥…… 그게 누구든 간에 저를 들쑤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는 것뿐이지. 진은 아마 괜찮을 거야. 그래야지. 숨는 건 옛날부터 잘했으니까.”
진이라 불린 이는 아마 이리트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꽤 큰 부분을 차지할 터였다. 차분하게 늘어놓는 말 너머 숨은 불안감이 선연해서, 도리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다고 달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터였다. 아마 이리트도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이리트의 허벅지를 토닥인 그리페가 액셀을 살짝 밟았다.
매끄럽게 나아가는 차, 이리트는 조수석에 기댄 채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이리트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곁눈질하는 제 쪽을 바라봤다. 어디 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간 침묵하면, 이리트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이리트는 기억과 함께 트라우마까지 되돌려 받은 게 분명했다. 이전에도 분명히 티가 난 적이 있었지. 제 나름대로 태연한 척하지만, 두려움을 숨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전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다는 것 정도일까.
“당신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드라이브나 좀 해 볼까 해요.”
“……괜찮은데.”
“겸사겸사 밥도 먹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왔으니까……”
제 목적을 알고 나서야 이리트는 이전처럼 편안하게 등을 기대었다. 이리트 스스로는 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고 있을까. 애써 표정을 감춘 그리페는 손을 뻗어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클래식, 짐짓 태연한 낯으로 착잡함을 숨긴 그리페는 부러 이리트에게도 익숙한 길 위주로 차를 몰았다.
평소 같았다면 교외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난밤처럼 진득하게 붙어먹고 난 이후의 이리트는 내내 집에서 쉬기를 선호했으므로. 작게 열린 창 틈새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웬일로 춥지도 않은지, 이리트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만끽했다. 색 옅은 앞머리가 바람결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던 이리트는 신호에 걸린 차가 멈추자 눈을 떴다.
“원래 나는 세상에 별로 두려운 게 없었는데. 이상하지.”
“뭐가 이상해요.”
“이제 나는 급작스레 다가오는 타인의 손이 무섭고, 원치 않게 시야가 가려지는 게 두렵고…… 목적지를 모른 채 차량에 타는 것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
“그건,”
“그래, 내 잘못이 아니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보다, 그리페, 너를 포함한 내 주변 사람이 위험한 게 더 무서워.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당신을……”
“아니. 한 번도 너 때문에 불안한 적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그리페. 이제 슬슬 네가 나서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하고 싶었어.”
“내가 나서야 할 때라니요, 이리트.”
레만의 뒤를 캐려고 시도하는 이들은 굳이 제가 아니어도 더없이 많았다. 아무리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이런저런 자선 활동 따위를 한다고 한들 적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런 사소한 것까지 처리하려 든다면, 아무리 레만이라 하더라도 어딘가에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해서, 여태까지 레만은 본인이 정한 선을 넘지 못하는 이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어쩌다 알아서는 안 될 것까지 알게 된 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진이 몸을 피해야만 할 상황이 된 건, 그가 알아낸 것이 레만에게 충분히 약점이 되고도 남는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자료를 건네받고서 제가 해야 할 일이란 명약관화했다. 레만을 고꾸라뜨리는 것, 그리하여 승리를 쟁취해내는 것. 거기에는 그리페를 비롯하여 실질적인 무력을 지닌 이들의 도움이 필연적이었다.
“……네게 늘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위험할 거야. 변수는 얼마든지 생겨날 테고, 어쩌면 다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다면, 그리페, 힘을 빌려줬으면 해.”
그리페가 거절하지 않을 걸 알고 뱉은 말이었다. 지금의 자신과 그리페를 필두로 팔마를 해치우자던 레만은 얼마나 다른가. 차이점이라고는 이미 팔마 건은 끝난 일이었고, 이쪽의 일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정신은 있었다. 그리페에게 이에 대해 언급하는 건, 그저 제 마음을 달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제 말이 끝나는 순간 바뀐 신호에도 그리페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뒤차가 경적을 울릴 때까지.
“내가 당신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해.”
엔진의 진동, 좁게 열린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에도 그리페의 낮은 목소리는 선명했다. 그 내용이 퍽 터무니없어서, 이리트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갑자기 사람을 죽였다고, 어떡하냐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가벼이 내뱉은 말에 그리페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협회의 주적이었다 한들, 함께 사람 하나를 죽인 적이 있었으니 그다지 적절한 농담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후회가 스밀 즈음 그리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겠어요. 일전에도 느낀 적 있지만, 신뢰라는 건 정말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제게 힘을 빌려 달라던 이리트는 한동안 바빴다. 올슨과 여러 번 만났고, 여전히 본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아마도 제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 레만과 부딪치기도 했을 테지.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느새 길가의 가로수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삭풍이 옷 틈새를 파고드는 계절. 완연한 겨울임을 증명하듯 휘날리는 굵직한 눈발 아래, 그리페를 비롯한 이들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한 눈 위로 짙은 발자국이 남았다.
협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전투복을 빠짐없이 착용한 이들은 긴장인지, 결연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굳은 얼굴을 한 채 목표 건물을 향해 다가섰다. 평상시 정규 작전에 비하면 몇 배나 적은 인원은 모두 자원을 통해 이곳으로 차출되었다. 지휘관의 자리를 떠맡다시피 받아들인 그리페는 한숨을 삼켰다.
기실, 이번 작전은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리트는 여느 때처럼 설명 없이 이런저런 일을 진행했으며, 저는 부러 캐묻지 않았으므로. 협회의 분위기는 내내 어두웠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이리트가 원한 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즈음, 이리트가 날짜와 목표지를 알려 왔다. 올슨 휘하의 센티넬이 함께 움직이게 되리라는 설명을 덧붙여서.
여태껏 침묵한 것이 무색하게도, 이리트는 제가 아는 모든 정보를 건네려는 듯 세세한 사안을 모조리 설명해 주었다. 백지 위에 막힘없이 그어진 검은 선은 여럿으로 겹치고 모여 건물 내부의 구조를 그려냈다. 그리고 특정 지점을 표시해 가며 해야 할 일과 부차적으로 하면 좋은 일 따위를, 번호를 매겨 읊었다. 제가 얼추 지도를 비슷하게 그릴 수 있음을 확인한 이리트는 온갖 글씨가 적힌 종이를 미련 없이 구겨 벽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올슨에게 받아왔다며, 이리트는 이번에 동행하게 될 아군의 자료를 건넸다. 대부분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들이었다. 협회에 소속되어, 균열이며 각종 범죄 조직과 맞서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 다만 몇몇은 전투 능력 상실로 인해 은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고도 기어코 복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머무는 시선을 알아챈 이리트는 그들의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단조로운 어투로 말했다.
그게 고작 나흘 전이었다. 사실상 손발을 맞춰 볼 틈도 없이 작전에 돌입한 꼴이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전원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지만, 무슨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게 실전이었다. 한쪽 귀에 착용한 인이어에서는 무감정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 대신, 이리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가슴 언저리에 고정해 둔 소형 카메라는 이리트의 눈을 대신해 줄 터였다. 잘될 거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인 이후 아직은 지시할 것이 없는 듯 조용할 뿐인 인이어를 고쳐 끼운 그리페가 건물의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웨이드를 이쪽으로 끌어들인 덕이었다. 현재 협회 정보부 인원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레만의 수족이거나, 웨이드처럼 진상을 알고도 레만에게 동조하지 않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정보부 휘하 팀에 소속되어 중요한 내부 정보에는 접촉하지 못하는 이들. 그러나 이리트는 정보부에 속한 이들 중 믿을 수 있는 건 웨이드, 그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제게 탐탁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이 시점에 웨이드에 준하는 위치며 능력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고 안전을 검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호가 떨어지면 진입해야 할 목표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흔하기 그지없는 주택으로 보였다. 굳이 특징을 꼽아 보자면 꽤 오래전에 지어진 티가 난다는 것 정도일까. 하나 이런 시대에 사람이 주거할 수 있는 오래된 건물은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 건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을 수 있다는 건, 곧 이 근방에 위험한 균열이 열리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었으므로. 노망 난 것으로도 모자라서 편집증까지 걸린 게 분명하다고 깎아내리던 이리트의 말을, 그리페는 뒤늦게 제대로 이해했다.
[바로 진입해.]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동시에, 그리페는 빠르게 부지 안으로 이동했다. 모든 인원이 동시에 진입하려던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진 게 분명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환경에서 협회의 전투복이 은신에는 다소 불리한 지점이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해당 건물 근처에는 사각이 없도록 곳곳에 폐쇄회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정에 없이 이른 발각조차 이리트의 예상 범위 내였을까.
곧바로 내부로 진입하지 않고, 그리페는 작은 돌멩이를 던져 단번에 카메라 렌즈를 깨트렸다. 이상을 알아챈 이들이 이리로 오기 전에 이동해야 할 테지만, 우선 창을 통해 내부를 염탐했다. 어두운 실내에는 경고 문구가 붙은 말통과 그보다는 작은 용기들이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공간 대부분을 차지한 철제 선반은 창고에 흔히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내부에 쌓여 있는 것들은 취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화학약품으로 추정되었다. 약품 제조 공장도 아니거니와, 화학 실험과는 더욱이나 거리가 있는 주택에 이런 위험물이 대량으로 적재되어 있을 이유가 있나.
“여기 무슨 약품 같은 게 많네요.”
[응, 보여. 아마…… 뭐라도 해보려던 거겠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
속삭이던 그리페는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아직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층까지 외부 창문에는 철창이 덧대어져 있었으나, 그 위로는 별달리 설치된 것이 없었다. 삼 층으로 바로 진입할게.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을 어지럽힌 그리페는 우선 앞에 놓인 철창을 양옆으로 힘껏 벌렸다. 절단기라도 가지고 오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위장은 아니었다. 그저 간단한 눈속임일 뿐.
외벽에 고정된 배관을 붙잡은 그리페가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 손으로 배관에 매달린 채, 군홧발로 일 층의 창을 깨트렸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유리 조각을 대강 털어낸 그리페가 쉬이 외벽을 타고 이동했다. 외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밟고 위태롭게 이동하는 중에도 그리페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했다. 기실, 한시도 멈추지 않는 괴수의 몸체에도 올라타 공격을 감행하는 이에게 그저 조금 오래된 건물이 위기감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깥에 오래 매달려서 좋을 게 없었다. 이 층을 살펴보지 않고 곧바로 그리페는 조금 더 올라가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했다. 문득 내려다본 아래에 검은색 옷을 입은 이들과 옷차림이 제각각인 이들이 대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선이 끌렸을 때 이동해야 했다. 하나 가까운 창문은 잠겨 덜걱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내부의 기척이 정확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창을 깨고 돌입하는 건 어려웠다.
주위를 살피면, 다행히도 가까운 창문이 열려 있었다. 불안정한 곳에 태연하게 선 이가 내부를 살폈다. 사무실 내지는 작은 서재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창문과 마주 보는 벽면에 자리한 책장을 살피는 사람.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정체 모를 이가 책을 빼 드는 순간, 그리페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상대의 목에 팔을 걸고, 남은 손으로는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듯 버둥거린 이는 손이 쉬이 떨어지지 않자, 팔꿈치로 제 목을 조르는 이의 옆구리를 내려찍었다. 하나 등 뒤에 선 사람은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팔꿈치에 닿은 몸뚱이는 돌처럼 단단했다. 돌덩이가 사람을 붙잡으면 이런 꼴이 될까. 온몸으로 상대를 밀어내도 끄덕하는 법이 없고, 의식은 빠르게 흐려졌다. 하다못해 입을 틀어막은 손이라도 떼어내려 했으나, 빈틈없이 무장한 덕에 손톱은 맥없이 가죽만 긁어내릴 뿐이었다.
반항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몸부림이 잦아들면, 곧 미약한 반항조차 멈추었다. 힘이 빠져 늘어진 몸을 바닥에 누인 그리페가 상대를 살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자는 적어도 현장을 구를 법한 센티넬은 아니었다. 3층으로 진입했어요. 이리트, 사람 하나를 제압했는데…… 전투계 센티넬은 아닌 것 같고, 누군지 모르겠네요. 속삭이듯 읊조린 그리페가 내부를 살폈다. 책장을 훑어 알 수 있는 건, 이 공간의 주인이 생명공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예상한 것보다 더 시야 확보가 잘 안되네……. 아무튼, 민간인은 아닐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걱정 안 해요. 카메라는…… 옮길까, 이리트?”
[안 그래도 돼.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괜찮아.]
“알겠어요. 다른 쪽 상황은?”
[대부분 아직 바깥에 있어. 그쪽에 이목이 끌렸으니 네가 움직이긴 편할 거야.]
귓가에 바로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여상했다. 이리트의 판단은 철저히 제 안위를 우선으로 했다. 제 통신 채널을 이리트가 따로 맡은 이유를 새삼 깨달은 그리페가 제 얼굴을 문질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에게 보이지 않음을 찰나 잊고. 서랍을 뒤져 찾은 노끈으로 쓰러진 이의 팔을 뒤로 돌려 묶은 그리페가 내부를 다시 한번 살폈다. 여전히 당장 제가 확보할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출입구 근처에 선 채 바깥의 기척을 살피고 있자면, 주위는 조용했다. 시야 끝에 걸리는 연구원으로 추정되는 이. 어쩌면 이 최상층은 실질적 전투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도, 바깥을 돌아다니는 이도 없으니 움직이기에는 적기였다. 문고리를 돌리면, 오래된 나무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열린 틈새로 보이는 광경은 고요하기만 했다. 짧은 복도와 한가운데의 공용 공간은 익히 보아온 구조였다. 보통의 가정집이었다면 이곳은 침실이었으리라.
“이리트, 상층부터 확인해 볼까요.”
[나쁠 건 없지만, 아마 주요 시설은 지하에 있을 거야.]
“나중에 진입하는 쪽에 상층 조사를 맡겨주세요. 지하로 바로 갈 테니까.”
[응.]
골조 외 다른 부분은 이미 모조리 갈아엎었는지, 내부 분위기는 일반적인 주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다른 것보다는 상황이 문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벽을 넘어, 둔탁하게 들려오는 기합이며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들 모두가 진입에 실패할 리는 없었다. 그런 실력이었다면 애초에 이번 작전에 참여하지도 못했을 테니. 그러니 저건 어느 정도는 의도된 소란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조직의 성향은 우두머리의 성향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건물 주위를 빈틈없이 감시하던 폐쇄회로카메라로 미리 알 수 있듯, 이곳의 이들은 극도로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괴한의 급작스러운 습격에도 최소한의 인원만이 전투를 위해 나서고, 나머지는 여전히 안에 머무른 채 상황을 살폈다. 적의 실력을 가늠이라도 하듯 밀린다 싶을 즈음에만 조금씩 증원해가며. 이런 이들이 어쩌다 이리트에게 본거지를 들켰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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