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23)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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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8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그들은 긴 복도를 걷고, 협소한 나선 계단을 올라 좁은 방을 지났다.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걸어 지상까지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십 분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문이며 창문 너머 비치는 햇빛은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기이한 백색 로브를 입은 이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처절한 난투의 흔적만이 남았다. 내부를 찬찬히 돌아보는 사이, 안을 살피던 이가 반색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팀장님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하슬러입니다.”

이리트와 눈이 마주친 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 왔다. 당연히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듯, 제 소개를 해가며. 오해를 정정해 줄 필요가 없기에 이리트는 말을 꺼내는 대신 간단히 묵례했다. 겸연쩍은 듯 어설프게 웃던 이의 표정이 그리페가 짊어진 이를 마주하고 느리게 굳어갔다. 자색 눈이 저를 관찰하듯 응시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등 뒤의 그건 누굽니까?”

“팔마로부터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사람.”

“……살아있는 건 맞아요?”

“살아있습니다. 균열이 발생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전투 중입니까?”

“예. 그런데 조금 전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나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의료반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슬러를 따라 들어간 의료반의 막사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티가 났다. 의자에 걸쳐지다시피 널브러진 치유계 센티넬은 발치까지 사람이 다가오고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운신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리페의 얼굴을 마주한 치유계 센티넬, 로레타는 한 박자 늦게 그의 어깨에 얹힌 사람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당장 저기 내려놔요.”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로레타는 비어 있는 침상을 가리켰다. 그를 모로 눕히고 물러서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로레타가 의식 없는 이의 용태를 살폈다. 늘 전투가 벌어지는 곳, 온갖 상처를 마주한 경험이 있는 로레타의 얼굴마저 서늘하게 굳어갔다. 그의 몸은 얼핏 보기에도 성한 곳이 없다시피 한 탓이었다. 마른 몸뚱이에는 최소한의 근육도 남지 않았고, 호흡은 미약했다.

“상황 설명은 내가 하면 되니까, 팀원들 챙기러 가.”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았어. 금방 돌아올게요.”

제 말을 뭐라고 받아들인 건지. 이리트는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멀어지는 그리페의 등을 오래 응시했다. 빈 의자에 자연스레 걸터앉으면, 로레타가 어디론가 연락을 걸었다. 당장 헬기를 띄우라고 명령하는 그에게서는 어떤 위압감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로레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문을 뗐다.

“뭐예요? 팔마의 머리가 죽은 채로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리페의 말을 빌리자면, 팔마의 피해자 정도.”

“이건……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산 채로 빨아 먹히면 이렇게 될 것 같은데요.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상황 설명을 하겠다고 자처한 것 치고는 좀 우스운 꼴이지만, 로레타, 말해줄 수 있는 게 많진 않습니다.”

“직접 보고 온 거 아니에요?”

“그렇기야 하지만. 어쨌거나…… 그 사람은 어떤 이유로 오랫동안 구속된 채 생명유지장치를 달고 살았으리라 추정됩니다. 단지 추측일 뿐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센티넬인 건 확실합니다.”

“가이딩했어요?”

“발견했을 때 폭주한 상태였습니다.”

“등 뒤에 꽂힌 건……”

“제거할 만한 상태가 아니어서 연결된 관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정보부의 몫이지. 내 선에서는 더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는 것도 없습니다.”

로레타는 마뜩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주 업무는 대개 외상을 입은 이들의 응급처치였으므로, 오랜 시간 갉아 먹힌 이를 치료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처치를 끝마친 로레타는 몇 번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리트는 필요한 내용을 전한 후 입을 다물었으며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앉아있자면 일분일초가 영원 같았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도착한 이들은 바로 눕지도 못하는 이를 들것에 단단히 고정한 후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사태를 옆에서 지켜본 다른 치유계 센티넬에게 동행을 지시한 로레타가 빈 침상을 정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딘가 먼 곳으로 향한 자색 눈은 제 노골적인 시선에도 이쪽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오래 들여다본다고 사람의 속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해마다 새로이 들어오는 신입이 꼭 한 번씩은 센티넬로 오해하는 저 가이드는 더욱. 막사 내부를 말끔하게 정리할 즈음, 그리페가 입구를 가린 천을 걷으며 들어섰다.

“이리트.”

자신은 도무지 듣거나 부를 일 없는 이름이 들리면, 냉랭한 표정 위로 온기가 퍼졌다. 그를 잘 모르는 자신에게마저도 티가 날 만큼. 그건 꽤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풍경이었다. 네 팀은? 별문제 없어요. 다행이네. 그래, 저런 식으로 대화하니 제게 이리트의 별명을 들었을 때 그리페의 반응이 그 모양이었던 것일 터였다. 자신의 존재까지 잊지는 않은 듯, 금방 가보겠노라 전한 두 사람이 나란히 멀어졌다.


 

마지막 균열이 닫히는 순간,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이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자를 비롯해 이능의 반동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센티넬은 현장을 잠시간 이탈했다.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던 현장지원팀이 전투의 흔적이 남은 곳을 정리하려 움직였다. 좁은 범위에 폭발적으로 생성된 균열은 산 일부를 완전히 훼손시켰다. 곳곳에 파인 깊은 구덩이, 격한 전투로 땅이 깎여나가 벌건 흙을 그대로 드러낸 풍경이.

현장지원팀에 소속된 이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익숙하게 괴수의 사체를 회수하고, 전투의 흔적을 지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팔마의 사유지라는 사실 정도일까.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된 곳에 대하여 항의를 해 올 상대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의 삼 분의 일은 줄어든 셈이었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는 현장지원팀을 뒤로하고, 정보부가 텅 빈 건물로 들어섰다. 곳곳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따라가는 도중에도 그들은 주변을 철저히 수색했다. 팔마의 머리는 이미 죽어 나자빠졌지만, 그의 머리를 쥐어 짜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으며 그 기억조차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상부에는 별달리 숨겨진 사안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마도 저 아래, 아직 들여다보지 못한 곳에 있을 터였다.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연 순간, 그들은 일시에 이변을 알아챘다. 지하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이 분명한, 한 겹 얇은 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연기. 아무도 그 문을 열지 못한 채 침묵하는 때, 그들 중 하나가 기침을 터트렸다. 앞서던 이가 옷을 대충 손에 감고, 문고리를 잡았다. 손안에 닿는 쇳덩이는 아직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불이 저 아래를 완전히 집어삼키진 못했다는 뜻이었다.

“지원 불러, 어서! ……너희는 가서 전기 공급을 모조리 끊어!”

건물 내에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장치가 제대로 되어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애초에 불법으로 지어진 건물이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을 썼을 리가 없지. 미처 살피지 못한 모든 것이 불살라진다면. 화재라니, 그것도 왜 하필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난 이후에야. 문고리에서 손을 뗀 이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건만 무작정 돌입할 수도 없었다.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꽉 쥐어 숨긴 이가 벽을 짚은 채 심호흡을 했다. 저 뒤에서 달려오는 발걸음. 푹 숙였던 고개를 들면, 비키라는 듯 손짓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 손에 들린 하얀 사관, 그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대다수는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고, 가장 앞서 있던 이는 단번에 문을 열어젖혔다. 쏟아지는 연기에 눈이 따갑고 코가 아릿했다. 누군가 방독면을 건네면, 그는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짜증스레 방독면을 덮어썼다.

그는 입속으로 끊임없이 욕설을 짓씹으며 계단을 타고 아래로 향했다. 전기 공급이 차단된 탓인지, 화재 때문인지 내부는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을 만큼 연기가 가득했다. 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알아서 불이 꺼질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내부에 있던 건 손 쓸 수 없을 만큼 타 버렸을 터였다. 최악의 상황에는 이쪽이 발견하지 못한 다른 출입구로 공기가 통해 산불로 번질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지금 당장 불을 꺼야 했다. 빌어먹을, 이런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닌데. 불평을 터트려도 듣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어둔 건지, 완만하게 기울어진 경사로 옆면은 그저 하얗기만 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팔마와 엮이면 무엇 하나 쉬이 이루어지는 게 없다고, 또 한 번 욕을 짓씹으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따르던 이들 중 하나가 제 어깨를 잡았다.

“길이가 모자라요. 더는 진입 못 합니다.”

이미 예상했으나 부디 현실이 되지 않길 바랐던 일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살피며 온 길, 하얀 벽은 한 치 틈새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화전 따위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긁어모을 수 있는 정보는 시간을 끄는 만큼 사라지고, 연기는 점점 짙어지고 있으나 아직 그 근원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대기하던 이들 중에 불을 끄는 데 적합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있던가. 분노와 짜증으로 점철된 머리가 자꾸만 삐거덕거렸다. 아니, 방독면을 뒤집어써 호흡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맨몸으로 화재 현장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일을 끝마치기는커녕,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될 뿐이었다. 나가서 기다리는 게 최선임을 알아도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서, 제기랄……”

자꾸만 발을 붙잡는 미련을 떨쳐내고 그들은 왔던 길을 다시 되짚었다. 그사이 연기가 더 자욱해진 것 같았다. 저 안에서 대체 어떻게 불이 났단 말인가. 저들이 최소한의 이성이라도 지녔다면, 저들 스스로 불이 날 수 있을 법한 짓거리는 벌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니 이 드넓은 지하에 소화전은 물론이고 소화기마저도 배치하지 않았겠지.


 

푹신한 소파에 대충 기대앉아 기기나 만지작거리던 이리트는 제 앞에 앉은 이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사건이 모두 일단락되고, 짧은 휴식기를 가지는 사이 웨이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어볼 것이 있으니, 한 번만이라도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해 오던 사람치고는 오래 말이 없었다. 협회 차원에서 온 연락이 아닌 것 하며, 웨이드 자신이 쉬는 날에 맞춰 온 것으로 보아하면 적어도 협회는 화재의 진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헤르데.”

이리트는 대답 없이, 그저 느긋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날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건 그리페와 이리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구조한 센티넬은 한 번 의식을 되찾았다가 다시 잠든 뒤로 여태 깨어나지 못했으며, 화재 덕분에 현장에는 건질 게 없었다. 상부는 숙적을 제거한 것치고는 반응이 시원찮았다. 정보부의 수장이랍시고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제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현장에 파견되었던 센티넬 중 대다수가 부상을 얻은 탓에 상부에서도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했으나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집까지 쳐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지 아는 게 분명한 이리트는 평소와 하나 다를 바 없이 태연했다. 심지어는 시간을 끄는 것이 불만인 듯, 기기를 내려놓고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이리트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었다간 기껏 방문한 보람도 없이 그대로 쫓겨나게 될 터였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 그리페가 그래도 손님이지 않으냐며 가져다준 차를 벌컥 들이켰다. 물론 그마저도 입만 웃지, 눈은 한겨울 북풍처럼 싸늘했다.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웨이드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빨리 끝냈으면 하는데.”

“……”

“웨이드.”

“현장에 아무것도 안 남아 있더군. 아주 깔끔해. 합선 때문에 불이 났다던가. 너와 하랄트가 가장 마지막에 빠져나왔던데, 아는 것 없나?”

“글쎄. 이미 보고서를 제출했잖아.”

심드렁한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제 잔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기회만 잡으면 언제든 저를 쫓아낼 기세였다. 내부에서 찾아낸 컴퓨터는 전소되어 데이터 복구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현장에서는 단순한 합선 외의 정보를 찾을 수도 없었다. 지금 이리트를 만나러 온 건 오로지 제 직감 때문이었다. 보고서는 어색한 부분 없이 아귀가 모두 맞아떨어졌고, 그나마 알아낼 수 있는 정황과도 어긋난 부분이 없었다. 그 깊은 곳, 거대한 기계 여기저기에 남은 흔적은 확실히 그리페의 것이었으므로.

그런데도 웨이드는 확신했다. 이리트가 분명 무언가 더 알고 있을 거라고. 그러나 이리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무언가 더 진행해 볼 수도 없었다. 아니, 실은 이리트가 다른 답을 들려주더라도 매한가지였다. 대부분의 가이드에게는 적용되는 규정의 수가 적으며 그 적용도 융통성이 있지만, 이리트는 경우가 달랐다. 원한 적도 없이 정보부에 속했던 과거가 발목을 붙잡는 탓이었다. 하물며 적의 정보를 손 쓸 도리 없이 파괴한 사람이 이리트라 밝혀진다면, 그리페의 파트너라는 사실조차 이리트의 방패막이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웨이드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일 처리에 허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웨이드, 너는 이미 확신하고 있어. 그런데 내게 무슨 답을 바라는 거지?”

“오늘,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질 거다.”

“네가 본 그 보고서가 전부야, 웨이드.”

“이리트 헤르데!”

“내게 소리치지 마! 한 번만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애원을 해대더니,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게 고작 이딴 짓거리야?”

차를 내주고 자리를 비워주었던 그리페가 어느새 거실 벽 한쪽에 기대서있었다. 조금만 더 언성이 높아지면 직접 불청객을 제압할 것처럼. 상황을 주시하는 그리페의 얼굴은 드물게 굳어 있었으나, 웨이드에게는 대화에 끼지 않은 이까지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버석하게 마른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미안, 미안하군. 내가 흥분했어. 그래, 내가 너 같아도 이 상황에 나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네가 네 입으로 시인했잖아. 현장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도록 깔끔했다고.”

“그래, 그게 네 방식이지. 너를 찾아온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직감을 따랐을 뿐이니까.”

“그래서? 이 상황에 네가 얻는 이득이 뭐길래 나를 돕겠다고 해.”

“너나 하랄트를 협박해서 어쭙잖은 이득 좀 얻어보려는 게 아니라! 하……. 네가 상부의 등쌀에 시달릴 일 없길 바라는 것뿐이다.”

“왜? 그까짓 놈들이 뭘 할 수 있어서. 내 목이 날아가려면 진작 날아갔어야 했어.”

“너 혼자면 그렇겠지, 헤르데. 하지만 그들이 하랄트를 어떻게 휘두르는지 이미 겪어 알잖아. 나를 제외한 정보부의 그 누구도 너희를 의심하지 않으니 정말 일이 더럽게 꼬였을 때가 아니라면 괜찮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명분이니까.”

내내 웨이드를 노려보던 자색 눈이 일순간 뒤돌아 그리페를 응시했다.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를 리 없건만, 그리페는 눈이 마주치면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무슨 선택을 하던, 네 뜻에 따르겠다고 전하는 것이거나. 차라리 돌아보지 말 걸 그랬어. 이리트는 누구도 탓하지 못한 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쪽이 더 나은 것들이 있어. 그 안에 있던 것도 그랬던 것뿐이야. 막상 입을 열고 나면, 당시의 일을 털어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실, 몇몇 의도적인 왜곡을 제외하면 보고서에 그대로 기록해 두기도 했으므로.

“……그래, 그랬군. 만일 너희 쪽으로 말이 나온다면, 내 선에서 끊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보지.”

“난 여전히 네가 이해가 안 돼. 내게 죄책감이든, 책임감이든 느낄 필요 없다는 건 알고 있잖아.”

“네가,”

잠시간의 침묵, 그 틈새로 그리페는 웨이드를 올곧게 응시했다.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이었건만, 웨이드는 그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허튼소리를 지껄일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키워 온 마음은 원하는 만큼 쉬이 정리되지 않았으나, 멀쩡히 연인이 있는 상대에게 티를 낼 만큼 어리석은 것도 아니었다.

“정보부를 떠났다고 내 동료였다는 사실마저 사라지지는 않아, 헤르데. 하랄트를 만난 네가 이전과는 다른 판단을 내린 것처럼.”

“……가, 이제. 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얻으려던 것도 얻었을 테니.”

매정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웨이드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언성이 높아질 때 나온 뒤 내내 상황을 주시하던 그리페가 몸을 바로 세웠다. 일어서려는 제게 두 사람이 동시에 괜찮다는 듯 손짓하면, 이리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도 한층 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집 앞까지 배웅해 줄 생각인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집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만 좀 노려보지, 그래.”

“무슨 생각으로 온 겁니까?”

“말한 그대로야. 상부가 너나 헤르데를 물고 늘어질 가능성은 적지만…… 일단 알아두면 일이 틀어졌을 때 대처하기가 쉽거든.”

“……이래서 정보부 소속들은.”

“헤르데도 포함되는 거 알지?”

“이제는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렇지.”

“이리트의 목 이야기는 뭡니까.”

“왜 배웅까지 해주나 했더니, 이게 본론이었군. 음…… 헤르데는 네게 이 사안을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아 할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리트는 늘 많은 부분을 침묵으로 넘겨 왔으며, 저는 굳이 숨기고 싶은 부분을 캐내지 않으려 했으므로.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리트가 위험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심지어 저를 이용해 상부가 이리트를 이용하려 했다면 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예, 압니다.”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내뱉은 단호한 대답. 웨이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리페를 응시하다가, 헛헛하게 웃었다. 어디에 귀가 있을지 모를 바깥에서 하기에 적합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면,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짙푸른 세단은 웨이드가 접근하자마자 신호음을 울리며 잠금을 해제했다.

덩달아 올라탄 차 내부에는 옅은 방향제 향이 났다. 잡동사니 하나 없이 깔끔한 공간.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를 분리한 웨이드는 낮게 침음하더니 시동을 걸었다. 손에 쥔 메모리 카드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는 이. 그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리트의 비밀을 멋대로 밝혀도 되는지 망설이는 듯 보이기도 했다. 빈 수납함에 작은 침을 무성의하게 던져 넣은 후에야 웨이드는 입을 열었다.

“헤르데는 어릴 때부터 협회에서 키워졌지. 그건…… 말은 인재를 위한 지원이라지만 실상, 협회를 위한 도구를 키워내는 게 주목적이다. 어린애의 세상은 아주 좁고, 그대로 시간이 지나 머리가 굳고 나면 관성적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니까. ……표정하고는. 어쨌거나 헤르데는 몇 년 만에 계륵 같은 존재가 되었어. 그다지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보다 적합한 단어를 못 찾겠군. 왜 그랬을 것 같나?”

“……”

“헤르데가 너무 빠르게 배웠기 때문에.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고, 한 번 알게 된 건 잊지도 않았거든. 심지어는 가르쳐 주지 않은 것마저 스스로 깨우치곤 했다.”

“인재로서는 좋은 재능일 텐데.”

“말했잖나. 협회가 원한 건 도구였다고. 좋은 도구라면 마땅히 쓰임을 벗어나는 일이 없어야 해. 아무튼, 그들은 헤르데를 다루지 못했다. 헤르데는 지나치게 뛰어났고, 협회는 능력이 모자랐으니까…… 헤르데는 그들에게 잠재적인 위협으로 취급받았어. 물론, 협회가 그걸 확실히 깨달았을 즈음에는 이미 그의 손아귀에 넘어간 정보가 너무 많았고.”

“하지만 이리트는 그런 것,”

“원한 적도 없었겠지. 인제 와서는 어땠을지, 아마 그 당사자조차 확신하지 못할 테지만……. 아무튼, 그 시기쯤 때마침 가이드로서 이능을 발현했으니, 협회에서는 옳다구나 헤르데에게 제안했을 거다. 정보부에서 발을 빼되, 가이드로서 협회에 잔류하라고.”

웨이드는 잠시간 입을 다물고, 느릿하게 숨을 골랐다. 갈증이 일었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었지만, 이미 입을 열어 놓고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한 성질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말을 듣는 내내 그리페의 표정이 어두웠다. 때때로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기도 했고, 허벅지 위에 얹은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조직의 궁극적인 목표가 선하다고 한들, 사소한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더러운 수를 쓸 수도 있지. 조직의 명운이 달렸다면 더욱이나. 한낱 개인을 묻어 영원히 입을 다물게 만드는 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지금보다 더 어렸던 헤르데도 그걸 알았던 모양이야. 헤르데는 협회장과 계약을 맺었고, 당당하게 살아남았거든. 무슨 수를 쓴 건지……. 그 내용은 기밀 중의 기밀이라, 정보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와서도 알 방법이 없더군. 어쨌거나 목이 날아가니, 어쩌니, 하던 건 그 얘기야.”

“부채감을 느낄 이유는 뭡니까?”

“……이건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데.”

“웨이드.”

“제기랄……. 헤르데가 이곳에 발이 묶인 이유 중 하나가 나다. 협회가 원하는 기준에 제가 부합하지 않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관두겠다던 애를 내가, 내가 붙잡았어. 그때 헤르데를 말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을 텐데.”

감정을 억누르려 짓씹어 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었다. 시간을 돌이키지 않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엮였다면 더욱. 그러나 그리페는 그를 위로할 생각이 없었다. 이리트는 여전히 협회에 매여 있으며, 지금도 협회는 고아를 데려다가 저들 입맛대로 육성하고 있을 터였으므로. 제가 웨이드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겠노라 감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협회의 지원을 받는 이들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길을 골랐든, 그에 뒤따르는 책임이나 감정은 오롯이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법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래……”

잠깐 웨이드는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평소의 당당함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음울한 낯, 구부정한 자세 따위가. 그를 살피는 것도 잠깐이었다. 문득 시야 안에 들어온 시계는 오후 세 시 사십 분을 가리켰다. 배웅하겠답시고 나와 놓고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다. 곧 이리트가 저를 찾으러 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짧은 인사로 축 처진 이를 일별한 그리페는 세단의 문을 닫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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