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09)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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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그리페는 이후로도 여전히 바빴다. 일이 조금은 줄었다고 하나 확실히 체감될 정도는 아니었다. 때때로 크고 작은 부상을 얻어왔으며, 그런 채로도 이리트의 앞에서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리트는 괜히 그리페에게 잔소리하는 대신 하루라도 더 빨리 레만을 끌어내리기 위해 매일 단서를 찾으려 애를 썼다.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그 사이 그리페와 함께하는 일상이 당연한 일처럼 익숙해졌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 그리페가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이리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두어 페이지쯤 더 읽어내린 이리트가 결국 책을 덮고 시선을 맞춰올 때까지, 그리페는 눈도 거의 깜박이지 않고 책 틈새로 이리트를 응시했다. 책을 읽을 때만 볼 수 있는 안경 쓴 얼굴을. 왜. 이리트의 물음은 더없이 짧고 간결했으나, 그것이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잘 아는 그리페는 시원하게 웃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되묻지 않는 이리트가 말없이 그리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봐요. 서재 정리하다 찾았는데……”

그리페의 손에 암적색 가죽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듯 새것 같은 서류철에는 그리페의 손가락에 가렸음에도 협회의 상징이 선명했다. 제게 익숙한 물건이었으나, 익숙한 만큼 의문이 컸다. 무엇보다 그리페가 익히 아는 것처럼 보여서. 그러나 이 파일을 집으로 가져온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이게 왜 여기 있어.”

“당신이 직접 내게 보여줬던 거예요. 이유도 모른 채로 팔마와 싸우고 괴로워하는 내가 보기 안 좋다고.”

냉큼 파일을 집어 든 이리트가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그는 단숨에 내용을 파악하고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분명 그리페가 알지 못하길 바랐을 정보였다. 기억이 없다고 한들, 자신의 근간은 바뀐 적 없으므로 이리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내어줬다는 건. 당시에 그리페가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

“내게 보여준 후에는 파기하겠다더니, 서재 한쪽에 꽂혀 있길래…… 지금이라도 없앨까, 싶어서 가져왔죠.”

“이런 걸 잊을 만한 일이 있었나.”

“모르겠어요. 그때 긴급 호출이 와서 불려 나갔던 터라.”

이리트의 손끝이 암적색 가죽 위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서서히 멈췄다. 빠르게 서류철을 펼치고 내용을 되짚은 이리트는 서류를 그대로 그리페에게 내밀었다. 내용, 그때랑 바뀐 것 없지? 묻는 목소리에 언뜻 급한 티가 나는 탓에, 그때까지도 편하게 누워 있던 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페는 기억을 되짚으며 빼곡한 글자를 읽어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분명 주요한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정확하다고는 장담 못 하지만, 어긋난 부분은 없어요.”

그리페의 대답을 듣는 순간, 무표정한 얼굴 위에 얼핏 웃음이 스쳤다. 서늘함에 가까운 표정은 착각이라도 한 듯 빠르게 사라졌다.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던 이리트가 금세 몸을 일으켰다. 점심쯤까지만 해도 허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던 이는 통증을 잊기라도 했는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카펫 위를 스치는 소리, 멍하니 이리트의 등을 보던 그리페가 얼른 이리트의 뒤로 따라붙었다.

“왜 그래, 이리트?”

“레만, 그 개자식이 내 집을 한 번쯤은 뒤져 볼 줄 알았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리페의 걸음이 일순간 멈췄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트는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문을 열어젖혔다. 전투계 센티넬이 그 본인의 행동으로 협회 내에서 요주의 인물로 점찍히더라도, 협회가 당사자의 사택을 멋대로 살필 수는 없었다. 그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리트는 그런 일이 당연하게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랬더라도 본인이 나서지는 않고…… 제 아래 것들을 썼겠지만. 태연하게 덧붙이는 말에 그리페는 끝내 헛웃음을 쳤다. 레만이 직접 나섰든, 부하를 부렸든 잘못된 일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레만이 당신 집을 왜.”

“너를 따라 현장에 나가니 집은 자주 비어있을 테고, 레만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어.”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레만이 원하는 정보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기억은 레만이 직접 날려 버렸지만…… 어쨌거나,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집이든 어디든 기록을 남겨뒀을지도 모를 일이지.”

이리트의 말이 여상히 이어질수록, 그리페는 점점 더 말을 잃어갔다. 모르지 않았다. 협회의 정보부가 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수집하는 정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그렇다 한들, 그런 식의 정보 수집이 이렇게 쉽게 내부를 향할 가능성 같은 건, 자신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리트는 달랐다. 이리트에게는 그게 내일 해가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트가 살아온 세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종종 이리트에게서 비치는 결여된 인간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그리페가 이리트의 등 뒤에서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페의 안색이 일변하건 말건, 이리트는 서가를 훑었다. 이미 종이 위에 기록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나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여러 일이 있었다지만, 한동안 머리가 어떻게 됐던 모양이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자신을 힐난한 이리트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정보부에 속했던 시절부터 자신은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었다. 필요한 정보는 모조리 암기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일기 따위를 쓰기에는 일상이 단조롭기 그지없었으므로. 레만도 그걸 모르지 않으니 집까지 뒤져 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은 몇 달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어 괜한 인력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거나. 어느 쪽이든 제겐 잘된 일이었다.

머리가 굵어졌을 때부터 레만을 신뢰한 적 없었다. 연고 없는 어린애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빙자한 훈련을 시키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그리페를 만나기 전의 자신이야 무엇을 잃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테니 아무런 방비 없이 협회에 갔으리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리트는 확신했다. 제가 아무런 대비도 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천장까지 가득 찬 책은 이리트가 드물게 의욕적으로 수집하는 품목이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드물게 비어있는 서가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테지만, 이곳을 직접 꾸민 이리트는 달랐다. 머리 위의 공간부터 발아래까지 훑은 이리트는 배치가 달라지거나, 제자리가 아닌 곳에 꽂힌 책을 하나씩 빼 들었다. 그런 책은 책장 한 구간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했으므로, 그 수는 적었으나 하나같이 두께가 만만치 않아 그리페는 이리트의 손에 들린 책을 얼른 받아 들었다.

“이리트, 갑자기 이 책들은 왜 꺼내는 거예요.”

“팔마를 무너트리고, 협회의 기밀을 내 머릿속에서 지우는 게 처음 계약의 조건이었어.”

“그건……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레만을 안 믿었거든. 단지 정보부 직속이라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인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건 내가 레만을 비롯한 수뇌부의 치부도 알았다는 사실이지.”

“그런데?”

그리페는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다. 혹은 설명하지 않고 행동부터 하는 제가 걱정스러웠거나. 서재 안을 한 바퀴 돈 이리트도 책을 여럿 든 채였다. 레만은 자신의 완벽한 커리어에 어떠한 흠결도 남지 않길 원했다. 그가 원하는 건 그야말로 이상향에 가까운 리더였다. 고아들을 데려다 정보부의 도구로 키워내는 것까지는 눈과 귀가 많이 닿으니 결국 알려졌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건 극히 소수였고, 그렇게 자라난 것들은 죄 충실한 개가 되어 입을 꾹 다무니 흠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수습에 목을 매느니 처음부터 더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심드렁하게 생각한 이리트는 코웃음을 쳤다. 권력이며 명예에 취한 이들의 속내를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이리트는 책상 한쪽에 책을 올리고, 그리페는 한 박자 늦게 책 한 무더기를 나란히 얹었다. 책상 위의 스탠드 조명 스위치를 누르면, 은은한 빛이 밝게 책상 위를 비추었다. 어떤 수단을 쓰든, 기록을 남겨 그리페에게 넘겼다면 그리페는 가타부타할 것 없이 제 물건을 챙기듯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제가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다. 애초에 그건 그리페에게 위험부담을 떠넘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만이 그리페라고 건드리지 않을 리 없었으므로. 게다가 뭔가 맡겨둔 게 있다면 그리페 쪽에서 먼저 제게 말을 꺼냈으리라.

그 외에 친분을 다진 이들, 특히 웨이드나 르네는 그럭저럭 믿을 만한 상대였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리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제 선에서 해결할 것. 전반적인 삶에 의욕적이지 않았던 만큼, 이리트는 가진 것이 적었다. 가진 것은 돈뿐이었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 테지만, 통장 안에 차곡차곡 쌓인 돈 대부분이 생명 수당이었다. 정보부에 속했을 때도, 가이드가 되어 현장에 파견되거나 폭주한 센티넬을 가이딩해야만 했을 때도. 권력도 명예도 원치 않는 저에게 레만이 명분으로 내밀 수 있는 건 계약 조항과 금전뿐이었으므로. 그렇게 쌓은 돈으로 적당한 구역에 저만의 안식처를 마련한 게 고작 몇 년 전이었다.

언제, 어떻게 필요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정보였으니 누군가에게 자료를 전달할 때 쓰곤 하는 수단을 가져다 쓸 수도 없었다. 자신의 집 외에 이용할 수단은 드물었으나, 협회는 제 주소지를 알았다. 이리트는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제집에 침입할 수 있음을 알았음에도 이리트는 최소한의 방비만을 해 두었다. 혼자 살던 공간, 있는 것이라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책이 전부였으므로.

“레만의 개들이야 뭔 짓거릴 해도 충정을 가져다 바치니 치부를 알아도, 알지 못하더라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경우가 달랐지. 그래서 그래.”

“차라리 처음부터 기억을 지웠다면,”

“이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네가 몇 번이나 겪어봤듯이. 그쪽 계통은 센티넬에게도 부담이 심하니 더욱 함부로 할 수 없지. 미치지 않은 정신계 센티넬은 그 자체로 희귀하니까.”

그런데도 레만은 당신의 기억 일부를 멋대로 잘라내지 않았나. 그날, 레만에게 짐짝처럼 들려가던 센티넬의 낯이 생기 없이 시퍼렇게 질려 있음을 기억했다. 한참 늦게 나온 이리트의 창백한 뺨이 온통 젖어 있던 것도, 늘 확신에 가득 차 올곧은 자안이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리던 것도. 이리트라고 그 순간을 잊었을 리 없건만, 그는 매번 제가 예상한 것보다도 더 담대했다. 이 모든 일이 마땅히 일어나야만 했던 것처럼 느껴지도록.

이리트는 빠르게 올바르지 않은 곳에 꽂혀 있던 책들을 훑었다. 이것 봐. 이리트의 손끝이 향한 곳에 새겨진 작은 표식들은 얼핏 책을 넘기는 것만으로는 존재조차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이리트는 표지가 세워진 글자를 기록할 필요는 없다는 듯, 평범한 책을 읽어내리듯 내용을 훑었다. 심지어는 책의 순서가 뒤섞이더라도 괜찮은 것 같았다. 이리트의 머릿속에서는 해체되었던 문자가 완성된 문장을 이루고 있을까.

빠르게, 그러나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보다는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이리트가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페는 가만히 앉아 이리트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이리트는 늘 저를 앞에 두고는 반쯤 풀린 느슨한 태도를 유지했으므로, 이처럼 집중하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책상 위에 한 번 이상 확인한 책이 더 많아질 때까지도 이리트의 자세는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조용한 실내에 종잇장이 팔락이는 소리만 이따금 울리고, 정자세로 앉은 이리트는 이따금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창문이 없는 지하 서재는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을 잊는 데에 모자람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저 이리트의 옆에 쌓이는 책으로 그것이 그리 짧지 않은 시간임을 되새길 뿐.

설명하기 어려운 부유감에 휩싸인 채 그리페는 생각을 거듭했다. 레만은 협회에 소속된 센티넬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정확히는, 그 하나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예순을 넘겼던가, 칠순이 다 되었던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실은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어쨌거나 레만이 협회장 자리를 차지한 지는 삼십 년이 조금 넘었다. 당시 레만은 촉망받는 새로운 시대의 인재 따위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실상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리트가 레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가 협회장으로 등극할 당시의 기사조차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제 선에서 찾아본 정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풍화되고, 파편으로만 남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레만은 세간에서 그럭저럭 훌륭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협회에 소속된 이들에게서는 이따금 상반된 의견이 나오지만, 그러한 논란이 협회 바깥까지 흐르는 일은 없었다. 보통의 민간인들에게 협회는 꼭 필요한 곳이었으며, 이따금 나오는 협회에 대한 불만조차 협회의 불필요성을 논하지는 않았기에. 그런 단체의 회장직을 몇십 년째 재임하는 건, 그만큼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리트는 단 한 번도 레만 혹은 협회 상부에 호의적인 적 없었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리트가 언제부터 협회에 소속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십 대, 혹은 그보다 더 어렸을 즈음 협회 휘하 보육원으로 적을 옮겼으리라 추측할 뿐. 그의 배경이 어떠하건, 그리페는 이리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이리트의 안목 또한. 게다가 이미 밝혀진 문제마저도 심각한 사안이었다. 레만을 잡으려 하는 데에는 분명 이리트의 사감이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협회 휘하의 보육원이 그런 용도이며 그것이 레만의 계책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저 또한 마냥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몸담은 단체가 티 없이 깨끗하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분명 존재하는 법이었으므로.

제 앉은키만큼이나 높게 책을 쌓았던 이리트는 끝내 그것들을 모조리 일독한 후에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책을 덮자마자, 이리트는 양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완전히 빠져들어 제가 잠시간 자리를 비워도 모르던 이리트에게 그리페는 대뜸 따뜻한 물을 담은 잔을 내밀었다. 그제야 저를 바라보는 이리트의 눈이 잠시간 동그래졌다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잔을 받아 든 이리트가 시선을 맞춘 채 물을 들이켰다.

“계속 기다렸어?”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몇 시야?”

“일곱 시예요. 그래서…… 원하는 건 얻었어요?”

“대충. 무슨 내용인지는 안 궁금해?”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데…… 필요하면 알려줄 생각이잖아요, 당신은.”

한 글자씩 조립해 읽은 문장은 대부분 협회, 즉 레만의 치부였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약점이 되기엔 부족함이 없는 정보였다. 필요 없는 부분은 처음부터 자르고 무기가 될 수 있을 법한 것만 남긴 게 분명했다. 그에게 그리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인간의 더러운 일면 같은 것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에게도 알릴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요 혹은 흐름 정도였지, 그들이 얼마나 더러운 짓까지 감행했는지 알 필요는 없었다. 잠시간 그리페를 응시하던 이리트는 유일하게 별 거리낌 없이 밝힐 수 있는 사실을 말하고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보다 오래 이걸 준비했더라.”

“당신과 협회에 가던 날까지도 당신이 별달리 무언가를 준비하는 낌새를 못 느꼈던 게 그래서였나, 싶어요. 정말 별일 아닌 줄 알았지.”

“그 자식이 욕심만 안 부렸어도 별일 아니었어. 그쯤 해 먹었으면 좀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사람 욕심이 끝이 없기 마련이잖아요. 너무 화내지 마, 이리트. 그런 데에 마음 쓸 필요 없어요.”

내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대충 내려둔 이리트가 제 콧잔등을 꾹, 눌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 말을 하는 대상이 그리페라는 점이 제법 우스웠다. 너는 차라리 욕심을 더 부리면 좋겠는데, 따위의 생각을 삼키며 이리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보가 있다고 당장 움직일 수도 없는 문제였다. 밑 작업 없이 정보를 터트려 봐야 비밀이 가진 힘을 깎아 먹게 될 뿐이었으므로.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이리트.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일으켜 줘.”

“응. 책은? 어떡할까요.”

“이건 내가 나중에 정리해도 돼.”

“정리할 때 불러요. 도와줄 테니까.”

들어설 때와 달리 이리트는 한층 느릿하게 걸었고, 그리페는 나란히 보폭을 맞추었다. 두터운 문을 밀어 열면, 어렴풋이 빗소리가 울렸다. 낮부터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끝내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계단 위에 올라선 이리트는 창밖을 살폈다. 비가 내린 지 한참이 지났는지 이미 창문에 빗물이 튀다 못 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리트는 뒤늦게 스치듯 본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올해 소식이 늦다 싶더라니, 이제야 제5의 계절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장마철은 정말 별로야.”

“왜, 이리트.”

“왜라니. 신발이며 바짓단이 젖는 것도 싫고, 우산 때문에 손 하나를 못 쓰게 되는 것도 싫고…… 내내 습하고 눅눅하기까지 하고. 하여간, 좋은 점이라고는 이렇게 집 안에 있을 때 듣는 빗소리뿐이라서.”

“음…… 지금 당신의 손에 핫초코가 들려 있다면 딱 좋겠어요.”

“또 어린애 취급이지, 그리페.”

“단 건 좋아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창밖은 그만 보고, 얼른 가요. 나 배고파.”

“말 돌리는 거 아냐?”

이리트의 시선을 마주한 그리페가 태연한 얼굴로 으쓱였다. 평소 저녁 시간보다 늦어진 건 맞았으므로 별달리 할 말은 없었다. 잠시간 그리페를 바라보던 이리트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먹고 싶은 것 없어요? 이리트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늘 그렇듯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는 탓이었다. 게다가 제가 늘 이런 식이어도 그리페가 불평 한번 한 적이 없기에 더욱.

“정말로?”

“음, 생각나는 게 딱히 없어. 네가 해준 건 늘 맛있기도 하고……”

이리트는 아마 영영 모를 테다. 처음 파트너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이리트가 미식은커녕 섭취 전반에 흥미가 없음을 깨달은 뒤로, 식사를 함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이리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는지. 어떤 것을 먹었을 때 미미하게나마 이리트의 표정이 풀어지는지, 어떤 그릇에 거의 손대지 않는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전반적인 식사량을 확인하는 건 물론이었다. 어느 시점을 지났을 때부터, 그리페는 이리트의 입맛을 그 스스로보다 제가 더 잘 알게 되었다. 제가 한 일을 말할 생각이 없는 그리페는 다만 시원하게 웃었다. 잘 챙겨 먹이다 보면 언젠가는 뭔가 먹고 싶다고 할 때가 오겠거니, 짧은 아쉬움을 삼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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