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11)
2023.04.07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후방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고 부상자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늘 그랬다. 가만히 앉아 마냥 기다리는 일은 언제 겪어도 피로했다. 누가 언제 후방으로 빠질지 모르기에 더욱. 듣기로, 그리페는 홀로 별동대가 되어 본관 내부를 헤집는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팀을 애매하게 나누느니 그게 차라리 효율이 좋다고 했던가.
이따위 작전을 계획한 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리페는 애매하게 웃으며 답을 피했다. 몇 번의 경험 끝에 이리트는 이제 그 웃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발의한 게 누구였든 혼자 움직이겠다고 자청한 건 그리페, 그 자신일 터였다. 사람과 싸우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에. 이리트는 한참이나 그리페가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다, 제 대기 장소로 지정된 작전 차량에 올라탔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이가 제 뒤를 따르며 어설프게 인사를 건넸다. 정보부를 벗어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오랜 기간에 거쳐 체화된 버릇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상대를 티 나지 않게 관찰하는 건 어렵지도 않은 탓에. 문제는 지금 제 근처에 있는 센티넬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이리트는 짐짓 무심한 태도로,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고쳐 앉았다. 이미 몇 번쯤 얼굴을 본 적 있는 B급 센티넬, 한은 후방이 습격을 대비해 가이드인 자신과 함께 대기했다.
센티넬 대다수에게 제가 편한 상대는 아니라지만, 그들과 자신이 수직 관계에 있는 건 아니었다. 설령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지은 죄도 없이 자꾸만 제 눈치를 살피거나, 손을 자꾸만 주무르는 게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바깥이 춥다 한들 차 안이 손이 얼 만큼 춥지는 않았고, 이는 분명 명백한 긴장감의 표출이었다. 못 본 척하고 넘어가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았다.
작전이 시작된 이상 지정 장소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무슨 핑계든 대고 차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전 종료 시각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부러 긴 한숨을 내쉬면,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피곤이 몰려왔다. 이쯤 되면 스스로가 과민반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행동거지가 어설프고, 감정을 숨기는데 미숙하며,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
그러나 한과 이렇다 할 접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몇 번쯤 현장에서 마주쳤을 뿐이었고, 단 한 번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 없었다. 한숨을 삼킨 이리트는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이 이상의 생각은 별 의미가 없을 게 뻔했다. 먼저 의심을 산 건 그쪽이었다. 실패하면 제가 조금 더 위험해지겠지만, 죽여 없앨 것이었다면 진상을 깨닫기도 전에 살해당했으리라.
가이드에게는 센티넬로부터 일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장비가 지급되었다. 진정제, 권총과 테이저건 같은 것들. 이리트 또한 현장에 나올 때면 그런 종류의 무기를 늘 지니고 있었다. 여타 가이드와 다른 점이라면, 이리트는 꽤 오랫동안 전투를 위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 정도.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망설임이 길어지면, 상대 쪽에서 알아챌 가능성만 커졌다. 일단 제압하는 게 먼저였다. 그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았다.
결백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딴청을 부리는 한의 모습에 차라리 웃음이 샜다. 차 안은 답답할 정도로 좁아 따로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는 큰 힘도 필요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늘이 그의 몸을 파고드는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을 맞이한 몸뚱이가 볼품없이 떨렸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바닥으로 무너지면, 이리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를 밟고 진정제 주사를 쑤셔 박았다.
빠르게 꺼져가는 의식을 잡으려 애쓰며, 가물거리는 눈으로 한은 이리트를 노려봤다. 단순한 가이드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은 이런 일에 더없이 익숙한 사람의 것 같았다. 자꾸만 힘이 풀리는 몸을 움직이려 들면, 그는 태연하게 허벅지에 권총을 겨누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사람을 제압한 이리트였다. 제 옆에서 과다출혈로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리트의 성격이 다소 좋지 않은 편이라는 것쯤이야 협회 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테이저건부터 쏴 갈기는 미친 새끼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던 게 문제였을까. 보통의 가이드들 또한 지급되는 장비를 사용하기 위한 기본 훈련은 이수한다지만, 그렇다고 그걸 쏴 갈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애초에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해하는 데에 망설임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선 이는 어째서. 약물이 자꾸만 정신을 잡아 눌렀다. 한없이 차가운 자색 눈은 끝까지 자신을 지켜보았다. 저게 센티넬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한이 끝내 약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는 것과 동시에 차량의 뒷문이 열렸다. 작전이 시작된 지 약 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가정하면, 슬슬 이능의 반동을 겪는 센티넬들이 후방으로 빠질 시점이긴 했다. 그러나 자연스레 차에 올라탄 사람의 얼굴은 낯설었다. 이리트는 이번 작전에 차출된 센티넬을 얼추 확인했을 뿐 아니라, 현재 본부에 소속된 센티넬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아챘으나, 이름 모를 센티넬은 이미 제 발밑을 구르는 센티넬을 목격한 이후였다. 뒷문이 닫히며 울리는 소리가. 아무도 이곳의 이변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박동했다. 상대가 설령 C급이라고 한들, 근접전투계라면 이 상태로 이길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믿을 건 제 손에 쥔 총뿐이었다.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조준이 무의미할 만큼 가까운 거리.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이쪽으로 달려든 괴한이 제 손목을 붙잡아 올렸다. 탄환은 천장을 빗맞히고, 그 와중에도 이쪽을 보는 희번덕거리는 눈이며 길게 찢어진 입술이 불쾌하게 히죽거렸다. 잡힌 손목이 아팠다. 빌어먹을. 욕을 짓씹어 삼킨 이리트가 이를 악물고 급소를 걷어차면, 그는 예상한 듯 다리를 막더니 제 팔을 잡아 꺾었다. 치미는 통증, 손에 힘이 풀려 총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싸우는 데에 익숙한 상대였다. 총성이 바깥으로 새긴 했을까. 그랬다면, 이쪽에서 터진 폭음임을 알았을까.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팔마가 곱게 죽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후방을 곧바로 습격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단단한 주먹이 뺨을 후려갈긴다. 삽시간에 입 안이 터져 비린 맛이 퍼진다. 잡힌 손목을 어떻게든 떨쳐 내는 순간, 이리트는 상대가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자식은 그저 장난을 치고 있는 것뿐이다. 저 하나쯤은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어떤 것보다 짜증스러운 건 누군가 차 뒷문을 열지 않는 이상 정말로 그에게 제대로 대항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가 맞이할 결과가 하나뿐이라면 조용히 숙여 줄 생각은 없었다.
몸싸움을 달가워한 적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을 모욕할 생각으로 가득한 이를 상대해야만 하는 건 더더욱. 몇 번쯤 제대로 주먹이 꽂혔으나, 상대는 맷집마저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 치명적이지도 않았던 유효타를 꽂은 대가로 얻어맞은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연이은 충격 탓에 시야가 이지러졌다. 어지러워. 제 앞에 선 사람은 웃고 있는 건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건지. 숨을 들이켜며, 이리트는 자꾸만 흐르는 피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조금씩 물러선 이리트는 일순간 손을 뻗어 운전석의 경적을 내리쳤다. 돌발행동은 눈 깜박할 사이에 제압당했으나 바깥의 누구 하나쯤은 들었을 게 분명했다. 총성은 바깥의 소리에 뒤섞여 묻혔을 수도 있지만, 경적을 혼동하지는 않을 테지. 막을 틈도 없이 몸통 위로 꽂힌 주먹, 일시에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워졌다. 헛숨을 삼키면 통증이 치밀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이리트는 구역질하듯 마른 기침을 뱉었다. 정보부에 소속되어 여러 훈련을 견뎌냈다 한들, 일신의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과 실전은 다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무차별적인 폭력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어서.
“얌전히 따라오면 너도 좋을 것 아냐.”
대답도 하지 않고 이쪽을 노려보는 자색 눈이 형형했다. 다문 입술 새로 핏기가 비치고, 창백한 낯에 피가 흐르고 번져 엉망인 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이드라면 대개 보통의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최소한 몸을 사리기라도 하기 마련이건만. 익숙하게 무기를 다루는 것 하며, 단련된 티가 나는 몸을 감안하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긴 했다. 멀쩡하게 살려서 잡아 오라는 명령이 거슬렸다. 남자는 이리트의 뺨을 괜히 툭툭, 건드렸다.
“한을 쓰러트린 건 놀랍지만…… 네가 그래 봤자 가이드지.”
가까운 곳에서 싸우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들렸다. 팔마 쪽으로 전향한 이들의 수가 생각한 것보다 많거나, 팔마 측에서 보낸 별동대가 있거나. 이리트는 드물게 간절히, 배신자의 수가 적기를 바랐다. 후방에 대기하는 이들 다수가 2군이라고는 하나 분명 협회의 전력이며, 또한 그리페를 지키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 존재였다. 끝까지 상대를 노려보고 있자면, 다가온 이가 굳이 떨어진 권총을 주워 그대로 휘둘렀다.
모르지 않았다. 협회 내에는 추적에 능한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자신은 전방에서 싸우는 데 익숙할 뿐, 남은 흔적을 되짚어 추적하는 데에는 미숙했다. 하지만 협회 내의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반나절 전에 확정된 사안이 그대로 새어 나간 게 명백한 상황에서. 그리페 하랄트.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불안과 분노, 의심 따위로 굳어 버린 머릿속에서 겨우 건져 올린 이름을.
“웨이드.”
[추적은 우리가 할 테니,]
“정보가 샜습니다.”
[이쪽을 믿어 줄 수는 없나? ……헤르데를 생각해서라도.]
웨이드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웨이드가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이리트를 바라보는 것을 알기에 믿을 수 있었다. 그런 눈을 한 사람은 감히 상대를 배신할 수 없다. 자신이 그랬고, 웨이드 또한 그럴 테다. 그렇다 한들. 그리페는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듯 눈을 내리감았다. 협회 내에서 정보부만큼 추적에 능한 이들이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담배가 말렸다.
“나도 압니다. 내가…… 이리트를 구하러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내게 전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이를테면, 마침내 지상에 발을 딛고 선 괴수를 막는 것. 이리트가 돌아오면, 그때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도 늦지 않았다. 포장된 도로에는 원래 차가 서 있던 흔적 같은 건 남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페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텅 빈 자리를 더듬다가,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뒤돌아섰다.
거인이라는 별칭에 걸맞도록, 괴수의 거체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붉은 거인은 기이하게도 여타 괴수들과는 달리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괴수가 크게 울부짖으면, 그것만으로도 건물의 유리창이 깨져 나갔다. 저것을 상대하기 위한 이들은 지금쯤 현장을 향해 출발했을 터였다. 지금도 근방 민간인의 대피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괴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이쪽이 먼저 나서야 했다.
그리페는 문득 제 창을 살폈다. 직전의 전투로 이가 빠져 너덜거리는 날을. 꽤 오랫동안 잘 써왔던 무기였으나, 아마도 이번 싸움이 지나고 나면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겠지. 그래도 당장 싸울 수 없을 수준으로 망가진 건 아니니 괜찮았다.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버티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제가 오랫동안 버티며 괴수의 체력을 빼놓는 만큼 피해는 줄어든다. 어깨가 무거운 건 하루 이틀 사이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버겁게만 느껴졌다.
거무죽죽한 살갗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밝은 노란 빛으로 끓는 마그마가 비쳤다. 괴수는 내부의 열기를 그대로 내보이는 듯 검붉은 빛으로 빛났다. 주변이 어두웠다면 그 자체가 광원의 역할을 했을 테다. 그러나 붉은 거인은 그 외형만으로 붙은 이명은 아니었다. 불과 용암을 이용해 공격해 오는 데다, 거인이 나타난 곳마다 화재가 이는 탓에 붙은 별칭이었지. 그리페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저 거인에게는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느껴졌다. 한겨울, 살을 애일 듯 차가워야 마땅할 바람이 거인이 내뿜는 열기에 달궈졌다.
대열을 갖춘 센티넬들이 접근하면, 괴수는 그들을 향해 불을 내뿜는다. 대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그들은 각자의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여느 때처럼 괴수의 몸 위에 올라앉을 수는 없어, 그리페는 호쾌하게 창을 내질러 괴수의 발목을 찢는다. 괴수의 몸체에는 피 대신 마그마가 흐르고, 단단하게 굳은 암석의 겉면을 부수어 상처를 내면 화산이 터지듯 용암이 흘러나왔다. 괴수의 크기에 비하면 긁힌 것이나 다름없는 상처인 탓일까, 거인은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다시금 불을 쏘아낸다. 조경을 위해 심어 두었던 나무에 불이 옮겨붙는다. 건조한 대기는 쉬이 불길을 키우고, 냉기가 물러서는 만큼 괴수는 더 강력해진다.
거인이 곤봉을 휘두르면 돌풍이 일었다. 막 뛰어들던 센티넬 하나가 볼품없이 나동그라지고, 그나마 멀쩡히 서 있던 이들도 중심을 잡기 위해 바닥을 디딘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어야만 했다. 물리적인 타격은 큰 역할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느 때처럼 괴수의 몸체 위에 올라타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상성이 나쁜 적을 상대하는 건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벅찬 것은 이리트가 자꾸만 걱정되기 때문인가. 건조하게 마른 입술에 피가 번졌다.
누적된 전투로 이미 반동이 스멀스멀 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자꾸만 숨이 찼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탓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리트의 부재는 더없이 확실하게 제 수행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창대로 몸을 지탱한 채 숨을 고르는 사이에도 괴수는 쉬지 않았다. 이렇다 할 전조조차 없이 화산탄이 터져 나왔다. 작게는 주먹만 한 것부터, 크게는 사람의 머리통만 한 것까지. 겉만 겨우 굳어 금빛이 스치는 파편에 직격당하면 장비 위로 용암이 들러붙었다.
대충 용암을 털어내면 장비는 그을음이 생기고 말 뿐이었다. 그러나 닿은 부분의 열기는 조금씩이나마 누적되는 데다, 주변의 기온이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무엇보다 화산탄의 충격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조라도 보였다면 대비를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화산탄은 특별한 기미도 없이, 괴수의 몸 어디에서나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그리페는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 들었던 팔을 털어내며 이를 갈았다.
삭풍에 말라 버린 잔디밭 위로 덜 식은 화산탄이 떨어지면 불이 붙었다. 메케한 연기가 치솟아 눈이 따끔거리고, 한겨울임에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발을 붙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괴수의 발치는 이미 상처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들끓고 있었으나 괴수는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주위가 반쯤 굳은 암석으로 난장판이었다. 몇 번의 공격 끝에 이제는 발을 디디는 것도 어려웠다.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는 장비라 한들, 덜 굳은 용암을 밟았다가 빠지게 된다면 부상을 피하지 못하리라.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부가 익어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흘러내린 땀은 턱을 타고 흐르고,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면 아지랑이가 피어 시야가 왜곡되었다. 어지러움은 지독한 열기 때문인지, 이능의 후유증인지. 이미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거인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 이 인원으로는 답이 없다. 괴수를 바라보는 그리페의 푸른 눈에 불길이 반사되어 일렁였다.
괴수는 인간의 몸으로 견디기에는 더없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나, 철을 비롯한 합금으로 이루어진 창을 녹일 수 없다.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숨을 쉴 때마다 호흡기며 가슴 속이 온통 화끈거리고, 온몸이 통째로 익어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연이은 이능 발출의 대가로 자꾸만 치솟는 핏물을 삼키면서도 그는 또다시 발을 내디뎠다. 후퇴가 허락된 적 없었으므로. 속이 익어 버린다면 끊임없이 치밀어 오르는 피가 멈출까. 자꾸만 흐트러지는 집중 속에서, 그리페의 머릿속에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쳤다.
무너진 건물의 파편을 밟고 뛰어오르면, 메케한 연기를 뚫고 햇빛과 마주친다. 여기저기 그을음이 남은 창을 역으로 쥔 이가, 몸을 잡아 이끄는 중력을 따라 괴수의 등 뒤로 떨어진다. 날이 무뎌진 창은 그럼에도 암석을 찢듯이 헤집고, 불그죽죽한 용암이 괴수의 몸을 타고 흐른다. 대비할 틈도 없이 터진 화산탄은 방어를 포기한 몸을 마구잡이로 두들긴다. 견디기 어려운 열기에 마른기침을 토하면, 거인의 몸체 위로 떨어진 피가 삽시간에 끓어 눌어붙는다.
괴수의 등을 길게 가른 탓에 고점보다는 한참 낮은 위치였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오는 차량이 보였다. 분명 협회의 것이리라. 이 위에서 더 머무를 수는 없다. 흐르는 땀마저 정도를 넘어선 열기에 말라붙고 만다. 깊숙이 박힌 창을 뽑아내면, 괴수가 또 한 번 울부짖는다. 그사이 달궈진 창날이 붉은빛을 발한다. 이래서야 이가 빠진 게 문제가 아니다. 진득한 피를 대충 문질러 닦은 그리페가 다시금 괴수의 몸을 박차고 뛰어내린다.
아니, 뛰어내리려 했다.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괴수가 손에 든 곤봉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불시에 덮쳐드는 공격. 오랫동안 전장에서 구른 이는 본능적으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상대는 상식을 넘나드는 2급 괴수였다. 자세를 바로잡을 틈도 없이 바닥에 처박힌 몸이 반동으로 튀어 올랐다가 늘어졌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 그리페의 버석한 뺨 위로 새빨간 눈물이 흘렀다. 인이어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던 것도 같았다.
고통은 더없이 익숙하여 정신을 갉아먹을 수 없었으나, 거인으로부터 흘러나와 굳은 돌 더미 위로 부딪힌 몸은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페는 흐르는 피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담담한 낯으로 신체를 점검했다. 몇 군데쯤 뼈가 부러지긴 했지만, 당장 목숨에 위협이 될 법한 부상은 없었다. 단련된 강체는 그토록 큰 충격을 잘도 받아냈다. 제가 조금이라도 다쳐 올 때면 제가 더 아픈 표정을 짓던 이리트가 이 순간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운신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코부터 입, 심지어는 기도가 정말로 익어버리기라도 했는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목 안이 온통 따가웠다. 열원에서 멀어져 숨을 쉬는 것이 그나마 쉽게 느껴지는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한참이 지난 뒤 겨우 일어나 앉으면,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제 근처에 떨어져 구르는 인이어에서 희미하게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죽었습니다.”
[팀장님!]
“전투가 가능하다면, 작전을 속행하세요. 내 걱정은 말고.”
충격으로 빠졌던 인이어를 다시 착용한 그리페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 움직이지 못한 시간은 10여분 정도로 추정되니, 괴수의 몸 위에서 본 거리라면 그들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았으리라. 몸을 일으키기 전부터 차가운 바람이 열기로 익은 살갗을 스쳤다. 열기를 밀어내는 차가운 기운은 거인이 뿜어내던 열풍과 매한가지로 인공적이었다. 예상한 시간 내에 적절한 센티넬이 도착한 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긴장이 풀리면 통증이 온몸을 짓눌렀다. 이제는 물러설 수 있다. 그리페는 다 망가진 창을 지지대 삼아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걸음을 떼지는 못했다. 이능의 반동이 치솟은 탓이었으나, 이곳에 제 가이드는 없다. 이리트는…….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기 전에, 의식이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남은 의지는 몸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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