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10)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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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괴수를 상대하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같을 수 없었다. 싸움의 방식도, 자신의 마음가짐도. 상대 또한 인간 이상의 힘을 지닌 센티넬이라 한들 매한가지였다. 꺼져가는 목숨, 그 틈 사이로 무심결에 새어 나온 상대가 아끼는 이의 이름 따위를 들어야만 했으므로. 그러나 제게는 후퇴가 허락된 적 없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유일했다. 패배하는 것. 그마저도 저는 고려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자신이 패배한 이후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될 테니.

센티넬은 협회의 칼이다. 칼에는 감정이 없다. 그것을 쥐고 휘두르는 사람의 의지만 존재할 뿐. 그러니까 저 또한 우습지도 않은 동정심에 휩쓸려서는 안 됐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리트를 만난 이후로 그의 능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동급의 센티넬이 아닌 이상 호적수가 없었다. 민간인과 S급 미만의 센티넬을 상대하는 건 그리페에게 있어서 크게 다름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람은 괴수와 달라서, 창을 한 번 휘두르면 목숨 하나가 스러졌다. 설령 그게 한 끗발 한다는 이능의 소유자라고 한들. 팔마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B급 이하 센티넬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절명했고, A급은 몇 번쯤 저항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리페의 걸음은 곧 패도였으며,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는 핏빛이었다.

팔마의 저항은 격렬했다. 구역을 지날 때마다 수없이 많은 센티넬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막아섰다. 길을 뚫고 나면, 건물 내에서 같은 구역을 몇 번이고 맴도는 일이 반복되었다. 환각을 보이게 하는 것이거나, 어쩌면 인지능력 자체를 건드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상황을 지각한 즉시 멈춘 그리페는 스스로를 점검했다. 마치 오류가 난 부품을 찾듯. 잠시간 시간을 들인 끝에 인지력에 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이는 주위를 살폈다.

이능을 사용했거나, 건물 내 특정한 장치를 설치했거나. 혹은 둘 다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질감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이니 파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페는 의식적으로 깊게 호흡했다. 술수를 부리고 있는 이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고, 이제 와 기척을 숨기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돌아설 곳도 없지. 그리페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면 약속이나 한 듯, 팔마에 소속된 이들이 나타나 그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총구는 까맣고 깊다. 체술로 따지자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그리페였으나, 사람인 이상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탄환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미 절명한 이의 몸을 걷어차 띄우면 힘을 잃은 살덩이가 총탄의 충격에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 망설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근처에 살아 숨 쉬는 존재라고는 모조리 적뿐인 공간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후일 기억에 목이 졸려 몸부림치게 되더라도.

앞을 가로막는 이가 누구인지, 무엇을 들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페에게 주어진 목표는 하나였다. 그와 그 외의 인원으로 나누어진 양동작전, 작전의 가장 중요한 한 축으로써 팔마의 근거지를 점령할 것. 이제 와 손속에 자비를 남겨둘 수도 없었다. 제 손으로 죽인 이들의 시신마저 도구로 사용해 가며, 협회의 S급 센티넬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천장이 막히지 않은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높이 날아올라 괴수의 머리부터 가격할 수 있는 이는, 그 힘을 담아 길을 막는 상대를 걷어찼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대응하기도 전에 복부를 걷어차인 이는 시뻘건 피를 토하며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기껏 든 총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힘에 맥없이 구겨져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다.

창이 긴 궤적을 그리면, 그 뒤를 잇듯 피가 튀었다. 누군가는 옷자락을 베이는 정도에 그쳤으나, 누군가는 무기를 쥔 손목이 통째로 날아가고 또 다른 이는 목이 떨어졌다. 단면이 깔끔하게 잘린 신체가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괴물 새끼. 불현듯 귓가에 쑤셔박힌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였는지. 그러나 그리페는 제게 욕을 뱉은 이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며, 누가 무슨 말을 지껄였든 여기 있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는 탓이었다.

쓰러트린 이가 몇이나 되는지 세는 건 진작 포기했다. 수로 실적을 따질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간혹 같은 장소를 맴돌았으나, 알아채지 못했을 때보다는 그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길이 반복될 때마다 쌓여가는 시체는 더미가 되어 그 자체로 이정표가 되었다. 진득하게 흘러내린 피가 바닥 타일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청소하려면 애 좀 먹겠다고, 부러 생각을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이들이 부리는 술수는 완벽하지 않았다.

느리지만 확실한 전진. 그럼에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이 정도 속도로는 무의미한 소모전만 길어질 뿐이었다. 더 빠르게. 더욱 힘을 아낄 수 있는 방식으로. 내뱉은 한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페의 주 무장은 웬만한 사람보다 더 긴 창이었고, 그 외에도 단검을 비롯한 근접 무기를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았다. 물론, 센티넬의 의무 훈련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총기류 전반을 다루는 법 또한. 괴수를 주로 상대하는 평시에는 필요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발치에 쓰러진 고깃덩어리의 어깨에 달아맨 소총을 쥐었다. 끈질기게 매달린 총끈은 피와 살점으로 이미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끈의 연결부를 풀어내는 대신, 제 허벅지에 고정된 칼집에서 단검을 꺼내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고정용 끈을 끊어 버렸다. 딸려 왔던 몸체가 툭, 떨어지며 무게감이 한결 줄어들었다.

시험 삼아 개머리판을 얕게 견착한 그리페는 조준경 너머로 정면을 응시했다. 영점이 맞지 않았으나 사격의 정밀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쯤이나 되는 이가 경기관총의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총구 끝이 흔들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제대로 된 보호 장비를 착용한 적은 손에 꼽을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겨우 상체를 보호하는 데 그쳤다. 팔이며 다리 정도만 맞춰도 제압은 몇 배로 쉬워지기 마련이다. 소총을 견착한 그대로 그가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빠르게 정면을 확인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총구가 쉼 없이 불을 뿜고, 탄피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탄창이 완전히 빌 때쯤엔 이미 대다수가 무력화되어 바닥을 구른다. 텅 비어 가벼운 탄창을 버리고, 여분의 탄창을 장착하는 손이 일순간 미약하게 떨린다. 후환을 남길 수는 없다. 바닥을 짚어서라도 기어 도망치는 이의 등을 밟고 뒤통수에 총탄을 박아 넣으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이의 숨이 스러진다.

피비린내도 화약 냄새도 무뎌질 즈음, 이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곳은 팔마의 본거지였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인원이 많다 하더라도 이토록 많은 이들을 상대할 때까지 제대로 된 강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은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몰려와 몸을 숨기는 은신처와는 달랐다. 주위가 이렇다 할 소음조차 없이 적막했다.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중요한 건, 상황이 변한 지금 제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탈출이라는 사실이었다.

침잠한 벽안이 주변을 훑었다. 병적으로 하얀 벽에는 그와 싸운 이들의 피가 아무렇게나 튀어 있었다. 때때로 어느 문이 열리며 병력이 쏟아져 나왔고, 열리지 않는 출입구도 다수 존재했다. 단조로운 복도는 특징이라 할 것이 없었다. 자신의 위치조차 특정할 수 없고, 구조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복도에는 창조차 나 있질 않았다. 뒤로 돌아가는 길은 무의미했다.

이곳이 지하 벙커도 아니고,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공간이니 어디에든 창문은 있을 테다. 복도에서 볼 수 없는 곳. 드물지 않게 보이는 잠긴 문. 일순간 새카만 전투화가 문고리 아래를 걷어찼다. 사람이 걷어찬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경첩까지 망가지지 않은 게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우그러진 철판, 멀쩡하게 붙어 있던 문고리가 한순간에 덜렁거렸다. 방 안에 있던 사람은 허옇게 질린 낯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얼빠진 소리나 지껄이는 꼴이며, 등 뒤로 파랗게 빛나는 모니터가 자리한 것을 보아하니 전투와는 거리가 멀어도 지나치게 먼 상대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 한들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 대충 끼고 있던 총을 들어 겨누면, 상대가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찬 공기가 그리페의 뺨을 스쳤다.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돌린 시선 끝에서, 두꺼운 커튼 자락이 흩날렸다. 끝단이 바람에 밀릴 때마다, 햇빛이 비쳐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비전투 요원에게 손을 쓰는 건 팔마 소속 인사라 한들 꺼려졌다. 총은 처음부터 위협용일 뿐이었고, 기절시켜 두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이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아는 건 죄다 불겠다고, 살려만 달라고 빌어 왔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했을까. 그랬다면 한순간에 눈앞에 나타난 이의 손에 상하체가 분리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배신을 입에 담다니, 배은망덕한 것!”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이는 화려한 옷으로 온몸을 감싼 채였다. 사치스러운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차림새며 과장된 어투는 꼭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그의 발아래가 두 동강 난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피로 젖어 들었다. 모니터는 생을 구걸하던 이와 함께 잘려 나가 기이한 모양새로 빛을 발했다. 그리페는 거추장스러운 총을 내버리고 상대를 응시했다.

팔마의 유명 인사, 소위 공작새라 불리는 센티넬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공작새라는 이명조차 전장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과 연극적인 어투로 인해 뒤늦게 붙은 것이었다. 추정되는 무력은 최소치로 잡아도 S급에 근접하는 A급 이상으로, 일반적으로는 S급으로 취급되었다. 얼굴 면적의 절반 이상을 가리는 가면, 그 아래로 드러난 새빨간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그는 보란 듯 양팔을 펼쳤다. 한 손에 쥔 채찍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위선자여, 너는 이곳에서 걸어 나갈 수 없을게다.”

저들이 떠드는 말은 어떤 종류이건 들을 가치가 없다. 그리페는 다만 창을 고쳐 쥐었다. 제가 지금 이 건물을 탈출하면 곤란해지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다른 경우를 생각하기엔 타이밍이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게다가 끊임없이 길을 꼬아 대던 이능은 약해졌을지언정 끝까지 저를 방해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의 위치를 찾지 못해 직접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아닐 터였다.

그들 스스로 저 바깥에 진짜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 꼴이었다. 목표는 늘 그렇듯 명확했다. 여유를 부릴 필요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리페는 단숨에 공작새에게로 접근해 창을 휘둘렀다. 공작새가 뒤로 물러서며 긴 채찍을 휘두르자, 충격파가 퍼졌다. 무감한 눈은 차분하게 상대의 무기를 분석하고, 오랫동안 쌓인 경험은 쉬이 상대의 전투 형태를 읽어냈다.

연병기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자신에게도, 무기를 사용하는 이에게도. 채찍의 사거리는 의외로 길지 않은 편이었으나, 금속 실을 땋아 만든 채찍을 끊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채찍 길이의 절반 안으로 접근하면 반드시 이긴다. 결론을 내린 그리페의 기세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에 발맞추듯 공작새가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리며 먼저 채찍을 휘둘러 왔다. 대체 어떻게 웃음소리마저 귓가를 긁는 듯 거슬릴 수가 있는지.

수없이 많은 가닥이 꼬인 금속 사슬과 창이 부딪히면 불티가 튀었다. 그리페가 한 걸음 다가서면 공작새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실내, 그것도 방 안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방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도는 형국이었다. 채찍이 스치는 곳마다 가구가 맥없이 부서진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널려 있던 종이가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창에 몇 번씩 금속 끈이 부딪히면 잘 갈려 있던 날의 이가 빠졌다. 처음에는 미약한 정도였으나 이제는 얼핏 보기에도 창이 너덜거렸다. 그러나 승기는 그리페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공작새가 어떤 시각에서 완전한 S급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이유가 전투가 길어지며 여지없이 드러난 탓이었다.

이능의 효율성, 즉 연비에 관한 문제였다. 물론 센티넬은 엔진과 달리 끊임없는 단련으로 효율을 높일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러니 비록 그 자신은 원치 않았을지언정 극한 상황에서 힘을 사용해야 했던 그리페가 힘의 효율로 누군가에게 밀릴 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소모로 가능한 한 큰 승리를 얻어내어야만 했던 이와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서 사람을 부려 가며 싸우는 것으로 악명을 떨친 이가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끝이 흔들린 채찍이 두꺼운 커튼을 찢어발기고 창을 깨부수었다. 그 순간, 내내 조용하던 귓가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팀장님이 연락이 안 돼! 팔마의 함정, 균열이, 후방을 누가, 제기랄!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벽이 무너지는 때부터 낭패라는 듯 일그러졌던 입술은 그리페의 금 간 표정을 마주하자마자 다시금 길게 휘어졌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새빨간 입술은 짐짓 여유롭게 그를 업신여겼다. 이 조잡한 악인을 상대하는 데 시간을 더 들여선 안 됐다. 그리페는 이능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뻐근하도록 퍼지는 힘, 그가 창을 휘두르면 하얀 궤적이 스치는 곳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공작새는 이제 대놓고 그를 피하며 시간을 끌려는 기색을 내보였다.

조금씩 밀리면서도 고아한 척 구는 데 여념이 없는 공작새와 달리, 그리페에게는 아무 거칠 것이 없었다. 애초에 전투 중의 아름다움에는 어떤 무게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승리, 끝없는 승리만이 그리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바닥을 구를 수도,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다. 구차하다고 해도 괜찮았다. 종내에는 승리를 거머쥐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할 것이므로.

그러니 제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에게 언제까지고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얼핏 전해 들은 바깥의 상황, 초조함으로 흐려졌던 얼굴이 다시금 차갑게 굳는다. 불안감으로 미약하게 어긋나던 창끝이 정렬되고, 내딛는 발걸음에 확신이 깃든다. 깊숙이 들이마신 숨, 대양을 담은 눈동자는 당장 눈앞에 자리한 적을 잡아먹을 듯 형형한 빛을 발한다.

오가는 공방은 점점 더 일방적인 형국이 되어갔다. 쇠줄에 창날의 이가 빠져 너덜거려도 상관없었다. 그래 봤자 상대하는 건 인간인 탓이었다. 심지어는 창머리가 날아가 창대만 남는다 해도 사람에게 타격을 입히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공작새는 더 이상 물러서지도 못한 채, 채찍을 반으로 접어 휘둘렀다. 날아오는 긴 줄의 궤적, 그 한중간에 창을 밀어 넣으면 채찍이 얽혀들었다.

제 완력이 공작새의 우위임을 확인한 후에 벌인 일이었다. 창대를 타고 묵직한 충격이 전해져 왔지만, 그뿐이었다. 채찍과 함께 얽은 무기를 회수하려 움직이는 찰나, 그리페가 함께 뛰어들었다. 저항감 없이 제 쪽으로 회수되는 채찍과 그 뒤를 잇는 맹수의 안광. 찢어진 커튼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허벅지를 훑어 빼낸 단검이 들이치는 오후의 햇빛을 반사했다.

그 단검이 노리는 목표가 자신임을 알면서도 공작새는 대응은 않고 홀린 듯 그리페를 응시했다. 색 옅은 머리칼이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일순간 흔들렸다가도 다시 일어나 굳은 심지를 불태우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핏 보기에도 단련된 몸은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깔끔했다. 공작새는 그가 가로 그은 단검에 목의 절반쯤이 잘려 나가는 순간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협회의 가장 밝은 불꽃을 관망했다.

단숨에 끊어진 경동맥에서 피가 솟구쳐 하얀 천장을 더럽혔다. 단검이 지나간 곳에서는 견딜 수 없이 뜨거운 열기가 들끓었다. 치솟는 아드레날린 탓에 응당 있어야 할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이토록 치열하게 빛나는 이가 팔마에 적을 두었다면, 그랬다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찰나지간의 미련은 의식이 날아가며 함께 스러졌다.

삽시간에 의식을 잃은 몸뚱이가 쓰러지고, 금 간 가면이 바닥을 굴렸다. 가면 뒤, 마지막까지도 감지 않은 눈은 정확하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공작새의 악명이 아주 과장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페는 죽은 뒤에도 저를 향하는 끈질긴 시선을 외면했다. 너덜거리는 창을 집어 든 그가 부서진 창을 통해 바깥으로 향했다. 내리쬐는 볕, 그 아래 넓게 펼쳐진 현장은 난장판이었다.

전투 중에도 귓가를 스치던 말들. 구름조차 드문 맑은 하늘이 끝 간 데 없이 갈라지고, 후방에서 이능이 화려하게 터졌다. 후방에서. 그곳에는 이리트가 대기하고 있었다. 팔마가 후방을 친 거라면, 이리트의 안위는. 전황을 읽어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전투화가 땅을 박차고, 그는 나는 듯 달렸다. 그러나 그 근방이 그리페의 공격 범위에 들어오기 직전에, 이리트가 타고 있을 작전 차량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차마 이리트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리트가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마지막 순간, 차 위에 올라앉은 채 과시하듯 손을 흔들어 인사하던 이와 눈을 마주친 탓이었다. 가이드는 팔마에게도 필요한 인력이었다. 그러나 제가 연관되어 있다면 팔마는 이리트를 영입하며 그들에게 돌아올 이득보다, 저와 협회에 얼마나 큰 손해가 될지를 먼저 생각할 터였다. 그들이 언제 이리트를 죽이려 들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라진 이들을 쫓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는 상황을 되짚었다. 근거지 습격이 확정된 건 나흘 전이었고, 참여 인원과 배치 등의 세부 내용은 작전 시작 12시간 전에 전달되었다. 팔마는 이미 습격을 예상한 것처럼 주요 인사를 빼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확히 이리트가 대기하는 곳을 습격했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가이드는 이리트 하나가 아니었음에도. 정보가 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이리트가 제 가이드라는 것 또한 알 확률이 높았다. 시간이 없었다. 창대를 쥔 손에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이 들어가는 때, 등 뒤에서 괴수가 울부짖었다.

[A-2-03, 붉은 거인이……]

인이어를 타고 전해지는 망연함이. 붉은 거인은 2급 위험 개체였다. 1급으로 지정된 괴수는 첫 번째 균열의 괴수가 유일함을 생각하면, 나타날 수 있는 것 중 최악의 상대가 이곳에 발을 디딘 셈이었다. 어쩌면 이조차도 팔마의 술수는 아니었는지. 도망칠 곳은 없다. 패배할 수도 없다. 팔마의 근거지 내부를 헤집는 동안 끊임없이 되뇌었던 말은 족쇄가 되어 끝내 발목을 붙잡았다. 차라리 제가 조금 더 일찍 이질감을 깨닫고 기지 내부에서 탈출했다면. 무용한 가정임을 알면서도 그리페의 사고는 나쁜 쪽으로만 흘렀다.

이리트를 쫓아야 했다. 그러나 괴수는 이미 이곳에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었다. 작전의 특성상, 상황이 시작되기 직전에 좁은 범위에 한해서 시민을 대피시켰다. 현장으로부터 가까운 곳은 괴수의 공격 반경 안에 들고도 남는다. 게다가 2급이라면 지금 현장에 있는 이들만으로는 버티는 게 전부였다. 제가 빠지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무너질 터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호흡이 얕아지면, 숨이 막혔다.

저울 위에 올라간 건, 이리트의 목숨과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이다. 그러나 어떻게 걸린 목숨의 수로 그 무게를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그러할 자격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시끄러워야 마땅할 인이어는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모두가 제 선택을 주시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균열을 빠져나오는 괴수의 울부짖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뚝 선 그리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리트를.

‘이리트를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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