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19)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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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고개를 끄덕인 그리페가 앞으로 나서면, 그의 뒤로 협회 측 센티넬이 뒤를 따랐다. 기다렸다는 듯 이쪽으로 밀려드는 피 웅덩이는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닌 것 같았다.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이능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기색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피아식별이 불가능하다는 점, 센티넬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점, 또한 다소 맹목적인 구석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아마 수조 속의 저것은 이능이 폭주한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팔마가 단순히 질 낮은 범죄 조직으로 여겨지는 사이, 그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지나치게 발달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일을 벌였고, 끝내 다른 이들마저 공격하려 든다면 박멸하는 수밖에. 비정형의 공격은 언제, 어느 방향에서 짓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속도를 늦추면 저것에 더 많은 기회를 줄 뿐이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전투화가 묵직한 소리를 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그들 중 하나가 날카로운 결정에 찔리면, 순식간에 결정이 그 크기를 불렸다. 상처에서 피를 모조리 빨아내는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이가 비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이미 예상한 바 있는 피해였다. 제가 지닌 이능은 이러한 전투에서 유용하지 않았다. 목표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였다.

얇게 깔린 피를 밟을 수는 없었다. 천장은 높았고, 난데없는 공격에 노출될 걱정은 없었다. 이렇다 할 도구도 없이 공중전에 익숙해져야만 했던 수많은 전투에 찬사라도 보내야 했는지. 거의 나는 듯 뛰어올라 다시금 수조 앞에 선 그리페는 투명한 관 너머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생기 없는 눈은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라 움직였다.

눈을 감고 있다면 미라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로 마른 사람, 피에 젖어 볼품없이 들러붙은 머리칼은 기이하게 길었다. 근육이 다 빠진 듯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몸뚱이는 이따금 움찔거릴 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본신의 초라함과는 별개로 가까워진 만큼 격렬해진 공격은 매서웠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면, 전투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상으로 돌아올 테다.

수조 안에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은 액체는 끓는 듯 끊임없이 부글거렸다. 이 관을 깨는 순간, 지근거리에서 공격을 마주하게 되리라. 숨을 들이켰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아직은 크게 다쳐도 되는 때가 아니었다. 이 전투가 마지막일 리 없었으므로. 아주 잠깐 생각을 곱씹는 사이에도 누군가 숨죽여 앓는 소리를 흘렸다.

창대를 고쳐 쥔 그리페가 움직였다. 공격은 찰나 이루어졌다. 창끝에 맺혔던 힘이 모조리 투명한 벽 위로 전해지고, 일반적인 유리와는 다른 모양새로 수조 전면이 산산이 깨졌다. 비산하는 파편, 그보다 더 빠르게 앞에 선 이의 목숨을 노리고 다가오는 붉음. 파도처럼 솟아오른 액체는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그리페의 머리 위로 덮쳐왔다. 위험한 수보다는 안전을 선택한 그리페가 뒤로 물러서고, 바닥이 유리 파편과 피가 뒤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치솟아 오르는 공격은 이전보다 맹렬했다. 액체의 특성 그대로 흩뿌려지다가도, 일순간 기이한 움직임으로 살갗을 파고들려 했다. 무뎌진 코에 이제 비린내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창을 휘둘러 공격을 쳐내다 보면 어느새 수조와의 거리가 꽤 멀어져 있었다. 저것이 조정하는 피를 통째로 치워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이곳에는 이 정도로 대량의 액체를 무력화할 능력을 갖춘 이가 없었다.

“헬리온!”

“알아!”

그리페만큼이나 오래 전장에서 구른 이에게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공격을 막아내는 그의 옆으로 지나치는 한 줄기 섬광. 이미 금 가 있던 유리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으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리면 유리 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수조 속 인물은 끈질기게 그리페를 목표로 삼았으나, 그렇다고 자신을 노리는 상대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폭주라기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 그렇다고 제정신인 것 같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게 문제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 엮인 뒷면을 알아보는 건 제가 할 일이 아니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정보부의 몫이었고, 자신을 비롯한 전투계 센티넬은 작전을 승리로 이끌면 그만이었다. 이럴 때면 차라리 명확한 명제가 있어서 다행이라 해야 하는지. 헬리온에게 향하는 공격, 다시금 집중한 그리페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온통 새카만 눈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튀는 혈액, 철퍽거리는 소리와 공격을 받아내는 이들의 신음. 반쯤 굳은 피 탓에 발밑이 미끌미끌했다. 잘 단련된 근육이 잔뜩 수축했다가, 폭발적인 힘을 내뿜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 서슬 퍼런 창날이 희미한 빛을 반사해 번뜩였다.

가라앉은 벽안은 목표한 지점에서 시선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울대를 찌를 때까지도. 미약하게 흐트러진 호흡, 숨을 들이마시는 짧은 순간에 칼날의 형태를 이뤘던 피가 다시금 액체로 화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그리페는 무기를 거두었다. 창날이 빠져나가며 희끄무레한 뇌수가 흐르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뚱이가 맥없이 무너졌다. 목 앞쪽에 스친 압박감의 잔재, 그리페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한 번쯤 목을 매만지고서 몸을 돌렸다.

“괜찮습니까?”

“내가 할 말을 하는군.”

“아군의 피해는,”

“하랄트. 뒤돌아볼 때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필연적이었다. 이전에 벌어진 대다수의 전투가 그러했듯. 모든 상황이 종료된 이후라면 쓰러진 이들을 수습하고 애도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페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또한 제 반응으로 이미 희생자가 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럼에도 굳이 자세한 현황을 전달하지 않는 이유는. 다만 그리페의 어깨에 더 많은 짐을 싣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알겠습니다.”

가라앉은 벽안이 긴 시간 이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도 넘어가는 것이 분명한, 체념에 가까운 반응. 헬리온은 허벅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최적 수준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뒤돌아선 그리페는 창을 휘둘러 오물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지치지도 않은 듯 묵직한 걸음은 더없이 단단했으나, 침잠해 짙은 시선이 머리 한구석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입구의 반대쪽 끝, 정면에서는 볼 수 없는 위치에 문이 있었다. 앞의 것과는 달리 이렇다 할 특징이라고는 없는, 묵직한 목재 양개문. 금장 손잡이를 붙잡아 당기면, 세밀하게 새겨진 장식 틈 사이로 피가 배어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페는 멈추지 않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듯 뻑뻑한 경첩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울렸다.

드러난 내부는 기도실처럼 보였다. 이곳에 들어설 때 목격했던 풍경처럼. 차이점이라면 장막으로 가려진 상석 정도일까. 반투명한 베일 너머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부러 조명등을 난잡하게 설치했는지, 여러 갈래로 드리운 그림자에서는 이렇다 할 정보 값을 읽어낼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얇은 천 너머에 자리한 사람이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었다. 저 하나야 어지간한 돌발상황도 몸으로 때울 수 있다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생각보다 빨리 왔네. 거기서 죽어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어딘가 비식거리는 웃음기가 느껴지는 느슨한 말투는 분명 자신을 비숍이라 소개한 이의 것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비죽거리는 이의 말을 들어주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페는 대꾸하는 대신 조용히 장막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실은, 가늠조차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곳이 넓은 편이라 한들 결국 일반적인 실내 공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너를 꽤 자세히 관찰했거든. 협회 센티넬의 정보를 슬쩍하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리페 하랄트, 너 같은 행보를 보이는 경우는 드물어.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협회는 너를 앞세워 우리를 처리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떠들기나 하고.”

비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한 일임을 확신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팔마가 작정하고 숨어들었다면 그게 사실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바깥으로 티 나지 않게 이를 꽉 문 그리페는 짐짓 침착하게 호흡했다. 네 가이드가 잠시간 우리 손에 떨어진 적도 있었지.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까?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비숍의 목소리에 저열한 희열이 깃들기 전까지는.

“입 다물어.”

“아, 가이드를 꽤 아끼는 모양이지. 하긴, 그런 가이드는 드물어. 무슨 짓을 해도 입을 다물고 있었거든. 눈빛 한 번 죽는 법도 없이. 너희 쪽에서 그걸 구출하러 오기 하루 전 즈음엔 우리 쪽 착오로 웬 비전투계 센티넬을 잡아 온 건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로…….”

상대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알 바 아니었으나 이리트에 대해 멋대로 떠드는 꼴을 묵인할 수가 없었다. 악문 이가 맞물리며 까드득,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참아, 들을 가치라고는 없는 헛소리잖나. 낮게 속삭이는 헬리온의 목소리는 저를 붙잡으려는 의도일 터였다. 모르지 않았다. 상대하는 적이 사람인 이상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허점을 내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헬리온은 물론, 지금 이 깊숙한 지하에 있는 협회 소속 어느 센티넬도 이리트의 부상이 어땠는지 정확히 아는 이들이 없었다. 헛소리라니, 우습게만 들리는 말이었다. 이리트가 여느 나약한 이들처럼 처음부터 고개를 숙였다면 그만큼 참혹한 꼴이 될 일도, 끝끝내 남은 상흔으로 때때로 공포에 질리고, 악몽에 몸부림칠 일도 없었으리라.

이리트는 오래전부터 센티넬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과 관련된 일을 어지간해서는 언급하지 않고자 했으며 저 또한 이리트의 뜻을 따랐다. 그러므로 그들의 몰이해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한들 비숍이 떠들어 대는 사안은 오롯이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헬리온, 우리는 이번 기회에 팔마를 끝장내려고 이곳에 온 겁니다.”

“무턱대고 움직일 수는 없다. 충분히 기회를 본 뒤에,”

“언제는 우리가 유리한 구석이 있었습니까? 아니, 이곳에 진입한 뒤로 아군이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낸 것이 있기는 합니까?”

“하랄트.”

“감정적이라고 탓하셔도 좋습니다. 이 일이 끝난 후에 제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자신이라고 이리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협회 소속 인원에게 각종 제약이 걸려 있다지만, 협회 내에서 퍼지는 소문까지는 상부에서도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리트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던 소식을 바람결에 전해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 자신의 부상에도 오래 쉬는 법 없던 그리페가 이례적으로 꽤 긴 휴가를 신청했다는 사실 역시도. 그리페를 말리기 위해 뱉은 말이 그를 긁어 놓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끝내 침착함을 가장하는 이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페는 언제나 그린 듯 모범적인 협회 소속의 센티넬이었다. 이성적이고, 헌신적이며 또한 올곧은 이. 기실 이번 작전에서의 지휘관이 자신일 뿐, 그리페는 자신의 하급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행동하기 전에 말을 꺼내는 건, 저를 존중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상황에서조차. 헬리온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그 앞에 선 이는 굳건하게 이 작전의 지휘관을 응시했다.

“……책임은 내 몫이다. 마음대로 헤집어 봐.”

내내 조용하던 비숍이 그 순간 광소했다. 강렬한 박수 소리, 어딘가 맛이 간 것처럼 웃어대며 눈가를 찍어 닦아내는 시늉은. 그는 흥미진진한 장면을 관람하듯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게 분명했다. 너희 중 누구도 책임질 필요 없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 뒤로, 기이한 압박감이 근방을 짓눌렀다.

일순간 목을 붙잡힌 듯 틀어 막히는 호흡, 저도 모르게 제 목을 감싸 쥔 그리페가 어떻게든 숨을 들이켜려 입을 벌린다. 아니, 이건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다. 목에 닿은 압박감도, 목이 붙잡혔다고 느끼자마자 숨이 막히는 것도 분명 머리가 착각을 일으킨 것뿐이다. 아마, 장막 너머 숨은 비숍의 이능으로 인해. 그렇다 한들 가짜 고통 앞에서 무너질 수는 없다.

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들 분명 자신을 비롯해 헬리온까지 타격을 입었다.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분명 비숍 또한 S급일 터였다. 장막 너머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던가. 제게 가해지는 압력이 일시에 사라지는 순간, 등 뒤에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뒤에 선 이들은 모조리 아군이었다. 이제 와 팔마 쪽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리 없었다. 다가오는 기척도, 늘어난 기척도 존재하지 않았다.

S급의 정신을 완벽하지 않게나마 파고들 수 있는 이능이 그 이하 등급의 센티넬에게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돌아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단련된 오감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상황을 읽어내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그가 아닌 그 누구라도 등 뒤에서 일어난 일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터였다. 그리페는 베일에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시선을 돌려 상황을 온전히 마주했다.

크게 다친 이들은 진작 위로 올려보냈지만, 남은 이들이라고 처음처럼 멀쩡하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묻은 피, 아무렇게나 구겨진 전투복, 어떻게든 태연함을 가장하는 태도 너머로 비치는 피로감까지. 그럼에도 군소리 한번 없던 이들이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은 지근거리의 아군이 철천지원수라도 된 듯 매섭게 주시했다.

맞닿은 채 떨리는 날붙이는 실낱같은 이성의 표출인가, 혹은 단순한 힘겨루기의 산물인가. 적의 본진에 뛰어들며 피해가 없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한 번 망설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신계 이능을 지닌 이는 극히 드물었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정신계 이능을 발현한 이들의 대다수가 낮은 등급에 머물렀고, 강력한 이능을 가진 경우에는 제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미쳐버리기 일쑤였다. 고등급 정신계 중에는 곧 미칠 사람과, 이미 미친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 관용구처럼 퍼져 있을 정도로.

더불어 그들의 이능이 소리소문없이 타인의 정신을 헤집거나, 심지어는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은 특히 격렬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정신계 이능을 지닌 고등급 센티넬이란 대개 미치광이로 취급받기 마련이었으며, 협회 내의 어떤 센티넬보다도 많은 제약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협회에 알려진 적 없었다. 고삐 없는, 동시에 가장 높은 등급의 정신계 센티넬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 분명한 상대. 그가 움직이는 목적을 생각하면, 비숍은 이미 오래전에 이능에 잡아먹혀 제정신이 아닐 것으로 여겨야 했다. 완전히 정신이 뭉개져 버렸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페는 부질없는 가정을 곱씹었다. 양아치 짓이나 일삼던 팔마가 차라리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무의미한 짓은 관두지.”

여전히 차분한 헬리온의 말이 뚝, 떨어지면 어딘가 어설픈 움직임으로 서로를 공격하던 이들이 동시에 멈췄다. 십수 개의 눈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이 순간,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길을 가로막은 이들이 떠오르는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닐 터였다. 이제는 아군이라 부를 수 없을 이들은 무기를 단단히 부여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지못해 창대를 고쳐 쥔 그리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숨만 붙여 놔. 그러다 죽더라도 네 잘못은 아니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에 이러한 상황까지도 포함이 되는 걸까. 옆모습을 힐끗, 바라봤으나 헬리온은 이렇다 할 표정 변화도 없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였다. 여유로운 듯 선 모습의 실상은 언제든 공격하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이전의 어설픈 움직임은 장난이었던 것처럼 달려드는 이들. 누군가는 죽어, 따위의 기합을 내뱉었으나 그리페의 귓가에는 닿지 못했다.

이들이 아군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리페를 머뭇거리게 할 수 있는 요소는 없었다. 그리페와 헬리온, 두 명의 사령탑을 필두로 하는 팀의 최대 전략은 마찬가지로 그 두 사람인 탓이었다. 이곳까지 데려온 이들의 절대다수가 A급이며 동시에 오랫동안 온갖 전장을 구른 이들이라 한들, 등급의 격차는 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리페에게는 이들이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비숍이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쩌면 이 사실 자체가 비숍이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할 만큼의 이성을 지니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상대를 찢어발기려는 목적으로 움직이는 날붙이를 쳐내면 그 틈을 타고 또 다른 이의 공격이 짓쳐든다. 검신을 붙잡아 비틀면 상대의 손목이 꺾이며 일순간 검을 놓친다. 무기를 잃은 이의 복부를 걷어차고, 빼앗은 검을 고쳐 쥔 그리페가 그대로 손에 쥔 것을 던진다. 날아오던 투사체와 부딪힌 검은 거칠게 튕겨 나가며 바닥을 구르고, 이 와중에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부하의 모습에 그리페의 낯에 얕은 실금이 간다.

전투 중에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말라고 분명 몇 번이나 강조했건만. 정신계 공격에 당한 시점에서 이미 그른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놀라는 것조차 비숍의 농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겨우 정신을 차린 이가 다시 한번 석궁의 시위를 당길 때, 뛰어오른 그리페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단번에 의식을 잃은 이가 바닥에 맥없이 쓰러지면, 그리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뒤편에 서 있던 이들을 하나씩 무력화했다.

달려드는 이를 걷어차고, 움직임을 좇지 못해 멈칫거리는 이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기절시키는 일련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죽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탓에 다소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이제 와 자잘한 상처 따위가 새삼스레 아픈 것도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한 듯 머뭇거리는 이들을 앞에 둔 채 숨을 고르는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하는지. 휴식은 찰나였다.

그리페는 다시금 창을 들었다. 날카로운 이명이 울리고, 손이 떨렸다. 열이 오르기라도 했는지 서늘한 냉기가 목을 스쳤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호흡이며 온갖 고통은 분명 이능의 부작용이었다. 몸뚱이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그는 한 번 멈칫거리는 법이 없었다. 찰나의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전투에서 몇 번이고 살아남은 이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둔탁하고 묵직한 타격음이 터질 때마다 사람 하나가 쓰러졌다. 그리페는 제 키보다 긴 창을 오로지 공격을 막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창날이 신체 어느 한 곳을 꿰뚫는 순간 상대가 그대로 절명하거나, 살아남더라도 출혈로 촌각을 다투게 될 터였으므로. 오랫동안 몸에 익은 동작은 하나의 흐름처럼 창을 내질러 적을 찌르려 했다. 의식적으로 제 공격을 틀어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페가 가장 앞에서 싸우는 데에 익숙해진 만큼, A급과 그 이하의 센티넬들은 협공을 연마해야만 했다. 그게 그들의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은 선택지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협공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를 악문 채, 치밀어 오르는 피를 눌러 삼킨 그리페는 끈질긴 이들을 쳐냈다.

두 발 딛고 선 이는 이제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에게서 사나운 기색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묵직한 군홧발이 한 걸음 다가서면, 움찔거리면서도 차마 물러서지는 못하고 그리페를 쏘아봤다. 격하게 달려드는 마지막 하나를 처리한 헬리온이 단박에 다가왔다.

“괜찮나? 상태가 나빠 보이는데.”

“문제없습니다.”

“엄살이라도 좀 부리지, 그래.”

“그럴만한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엄살 피우기에 좋은 상황이 있기는 한가?”

딱 하나가 있긴 했다. 이미 해 본 적도 있었지. 다 알고도 태연하게 받아주던 이리트를 떠올린 그리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말을 삼켰다. 헬리온은 이내 고개를 돌려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일 때도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던 이들을 응시했다. 그들이 도망치지 않는 건지, 그러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늠하는 듯 가늘게 뜬 눈, 그들은 천적을 앞에 둔 듯 떨었다.

비스듬하게 선 발은 언제든지 뒤로 돌아 뛸 것처럼 주춤거렸으나, 이상하게도 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거칠게 뛰는 박동의 주인은 누구였던가. 동료를 모두 쓰러트린 이들은 아무 타격도 받지 않은 것처럼 잡담을 나누다가, 이쪽을 응시했다. 이 난장판을 만들고도 피를 거의 묻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항복해야만 했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는 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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