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 1
EP. 취동(01)
2022.01.08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약속한 기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진작 연락이 되어야 했을 이는 세상에서 그대로 사라진 것 같았다. 급박한 일이 생겼거나,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걸 테지. 최근 정부와 정부군 측은 큰 움직임이 없었으니 그는 분명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며, 그의 종적을 이곳에서 모조리 지워내는 데에 채 십 분이 걸리질 않았다.
서늘한 비가 내렸다. 진회색 구름은 멎을 줄 모르는 눈물을 흘리고, 황폐한 대지는 물을 받아 마시지 못하고 모두 흘려버렸다. 처마 아래 기대선 이리트는 메케한 연기를 깊숙이 들이켰다. 가는 담배의 끝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들이마신 만큼 긴 숨을 내뱉으면 하얀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이런 식으로 스러진 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이리트는 더 이상 부를 일이 없는름을 찬찬히 되새겼다.
애초에 단 한 명도 죽게 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권력과 부를 모조리 거머쥔 이들에게 저항하는 일은 농담으로도 쉽다 말할 수 없었으므로. 제가 그러하듯, 그들 또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희생은 마냥 고결하지 못했다. 처절하고 서러운 일이었지.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가.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에는 꾸물거리는 구름만이 잔뜩 끼어, 태양이 보이질 않았다.
한 명이 죽어 나자빠졌으니, 또 다른 누군가가 정부군 측의 끄나풀로 잠입해야 할 터였다. 벗어날 길 없는 외통수였다. 절대적인 열세, 정보까지 부재할 때 다가오는 위기는 조직 존재의 근간부터 뒤흔들 수 있는 탓이었다. 필터 코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지져 끈 이리트는 한참이나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좁은 실내에 모여든 이들의 낯 여기저기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 얼굴도 크게 다른 꼴은 아니겠지. 이리트는 괜히 뺨을 쓸었다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버석한 인사 뒤를 잇는 한숨이 무거웠다. 채 다 꽃피우지 못한 젊은 청년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그들은 또다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대상을 정해야 했다.
“……내가 갈 겁니다.”
수십 개에 이르는 눈동자가 말을 꺼낸 이를 향했다. 색도, 형태도 제각각인 눈이었으나 담겨 있는 감정은 대동소이했다. 당혹스러움과 걱정, 불안 따위가 뒤섞여 흔들리는 시선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혁명군 내에서 이리트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므로.
“무슨 생각들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를 대체할 인력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정부군에 잠입할 사람은 어떻습니까?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효율을 따지자는 이야기에요. 지금 시점에 나만큼 적절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리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들의 가슴을 내리쳤으나, 주저앉아 울 사람들이라면 처음부터 혁명군에 몸을 투신하지 않았으리라. 누군가는 침음하고, 누군가는 형형한 자색 시선을 피했다. 적막이 실내를 감돌았다. 답은 이리트가 입을 열었을 때부터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푸르른 들판을 거닐고 싶다던, 이미 죽어 버린 동료의 말버릇이 이 순간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이곳은 긴 전쟁 끝에 대지가 메말라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척박한 땅이 되었다. 분명 전쟁의 시작 즈음에는 그럴듯한 명분과 정당함이 있었을 텐데. 내부에서 벌어진 알력다툼과 욕심이 많은 것을 망쳤다. 잃은 것뿐인 승리를 마침내 쟁취한 이들은 뒤늦게 폭격으로 망가진 땅과 말라버린 자원을 마주해야 했다.
회복에 집중했다면 분명 꽤 살 만한 세상이 돌아왔을 테지만 부패한 권력자들은 제 손에 떨어질 것이 줄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인류의 빛나는 기술력은 모든 상황을 겪어내고도 건재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타 행성을 빼앗을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그들은 무너진 세상을 최소한으로 복구한 뒤, 그 땅에 저들끼리 모여 터를 잡았다. 알파라 이름 붙인 도시가 곧 재력이며 권력의 상징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은 당장 먹을 것을 구하는 일조차 버거워 신음했다. 그들이 노린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목숨 줄을 붙잡고 몸집을 불렸다. 정부 소속 군인이 되면, 안전한 거처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당장 오늘 죽지 않으면 다행일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배를 곯으며 천천히 죽어가거나, 전쟁에 동원될 군인이 되어 적어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게 되거나. 그나마도 수가 많지는 않았다. 함선을 이용해 싸우는 것이 전쟁의 주류가 된 때에, 수많은 보병은 불필요한 존재가 된 탓이었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목숨을 부지하고자 이를 악물고 땅을 개간해 온 이들은 중심이 아닌 땅도 그럭저럭 사람이 살 수 있을 공간으로 만들었다. 알파의 뒤를 잇는 거주구들 또한 정부의 손길에 멋대로 재단되어 순서대로 이름이 붙었다. 더불어 약소한 행성 몇몇을 집어삼킨 이들은 기존 행성의 주민 절대다수를 몰살하고, 목숨을 붙여 둔 소수는 노예로 부렸다. 그 모든 일이 완료되면 그들은 약탈한 땅에마저 제 입맛대로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비대하게 부푼 몸집을 더 늘일 수 없을 때까지 주위를 집어삼킨 정부는 삐걱거리는 듯하면서도 오랫동안 건재했다. 더불어 정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묘한 구조는 점점 더 변형되고 뒤틀렸다. 더 이상 외부와 전쟁을 벌일 일도 없는 군부에 몸을 투신하는 건 이제 와서는 생존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제복을 입은 이들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길을 걸었으나 조직 내에서는 그들이 알파 구역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일이 흔했다. 늦게 개발되어 뒤 순서의 이름을 지닌 지역에 사는 이들일수록 비웃음을 사고, 진급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은 모멸감에 쉬이 깎여나갔다. 그럼에도 희망을 꿈꾸는 이들은 끊임없이 충성을 맹세하고, 그 사이 갈려 나간 이들은 망가진 부품처럼 손쉽게 교체되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인원을 갈아치우는 탓에 정부군에 잠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신원마저 멀쩡하니 더더욱. 그들의 위상을 자랑하려는 듯, 언제 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갈지 모르는 훈련병에게 제공하는 의복조차 질이 꽤 좋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바깥의 이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건만, 재물을 쥔 이들은 그들의 손에 떨어질 몫을 더 늘리려는 목적으로만 돈을 뿌려댔다.
이리트는 여느 젊은 청년들이 그러하듯, 희망에 찬 표정을 꾸며낸 채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설을 들었다. 고루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이의 뒤에 선 장교들의 면면을 살피는 이리트의 눈이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럴듯한 하얀 정복 차림새로 굳건히 선 이들은 한 명을 제외하면 나이가 지긋했다.
이미 간부급 인사의 정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페 하랄트, 유난히 젊은 장교의 이름이었다. 이리트의 눈길이 조금 길게 그에게 머무를 때, 일순간 시선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착각일 테지. 거리도 멀었고, 이쪽엔 수많은 이들이 도열해 있다. 급히 시선을 돌린 이리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본적인 훈련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리트에게 한정되는 이야기였다. 그는 이미 총화기를 다루는 법이며 병법 따위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했으므로. 눈에 띄는 일은 달갑지 않았으나,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 그리하더라도 심부까지 접촉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이리트의 신경을 자꾸만 긁어 놓는 것은 사람의 체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내는 훈련도, 한계에 다다라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능력을 은닉하는 것도 아니었다. 출신 지역을 따져 가며 사람의 급을 나누어 놓는 이들이었지. 제게 향하는 시기와 질투를 담은 시선이며 시답잖은 견제가 다른 그 어떤 것보다 피곤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세상에 나고 자라 배운 것이 모조리 그런 식이었을 뿐이다.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욕지거리와, 메케한 연기에 대한 갈증을 꾹 내리누른 이리트는 내내 무심한 태도로 훈련 과정을 모두 버텨 내는 데에 성공했다. 처음에 비해 인원이 반의반으로 줄었으나, 이리트는 그중에서도 수석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했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은 지역 출신의 인사로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알파 외의 구역이라면 출신 지역을 속일 수도 있었으나, 괜한 위험요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자잘한 곳에 손을 대지 않더라도 수석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이리트는 그를 사실로 만들었다. 변수는 그 뒤에 있었다. 막 훈련을 마친 이들이 향하는 일반 부대로 향했어야 할 테지만, 그와는 동떨어진 곳으로 배정받았다.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으나 이리트는 얼핏 이전에 제 의사를 물어 왔던 이의 얼굴을 기억했다. 애매한 질문 탓에 그저 자신을 떠보는 줄 알았건만.
공교롭게도 제 눈앞에 선 이는 젊은 장교, 그리페 하랄트였다. 저를 향하는 오만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이리트는 당혹스러움과 미약한 불쾌함을 숨긴 체 짐짓 태연하게 경례했다. 그리페의 손이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간 후에 제 손을 내린 그는 시선을 마주했다.
이리트는 훈련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이름이 알려졌다. 이전까지 이런 신병은 없었다느니, 어디서 구를 대로 구르다 온 군인 같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소문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것은 그의 출신지였다. 오메가조차 되지 못해, 그럴듯한 이름 하나 얻지 못한 작은 구역. 그저 외곽 지역이라 모조리 싸잡아 부르고 마는 곳은 대개 황무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때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관용구를 사용했었다. 실낱같은 물줄기마저 끊긴 이후로 사장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 앞에 선, 저보다 반 뼘은 더 큰 이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시점의 군대에는 수많은 보병이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소수의 정예였고, 그 원석을 걸러내고자 치르는 선발은 혹독했다. 성장 환경에서부터 부족함이 있는 외곽 출신들은 대개 초장부터 나가떨어지기 마련이었건만.
경례한 이후, 이리트는 그저 굳건히 서 있었다. 온갖 풍문과 달리 무표정한 신병의 얼굴에서는 아직 앳된 티가 났다. 저를 마주하고도 흔들림이 없는 이유는 심지가 굳기 때문인가, 혹은. 그리페는 제 속에 피어난 의심의 싹을 인지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알파 구역의 구축 이래 외곽은커녕 이름이 붙은 도시에서조차 이렇다 할 인재를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별안간 나타난 이리트는 혹독한 훈련을 통과하는 것도 모자라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다.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득 그리페는 몇 달 전 죽어야 했던 청년을 떠올렸다. 특출한 곳도 없었으나 모난 곳도 없던, 그저 평범한 이는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다. 정보를 빼낸 흔적이 들통 난 그는 모진 추궁에도 입을 열지 않았고, 정부는 그 이상의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본보기로서 그를 효시했다. 늘 싹싹하던 이는 그 모습이 모두 가짜였던 듯, 고초로 핏발선 눈으로 절절히 뒤끓는 저주를 내뱉고 영원히 침묵했다. 이 순간, 제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이가 떠오른 이유를 알았다.
증거조차 없이 사람을 무작정 의심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정말 뛰어난 인재라면 군 전력에 힘이 되리라. 게다가 몇 달 전 그 청년을 마지막으로, 애초에 세력이 줄어가고 있던 반역자들은 단단히 숨어들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슴께에 자리한 단출한 약장을 보던 그는 이리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처음부터 직접 지켜볼 요량으로 데려왔으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주의할 것을 일러준 후에, 그리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했다.
그리페가 소속된 여단, 패스파인더는 일반적인 부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정복 전쟁을 준비하기 이전부터 그 누구보다 실제 전장을 가까이했다. 수시로 일어나는 내전이나, 악조건을 뚫고 어떻게든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따위를 상대하며. 그렇기에 조직된 이래로 단 한 번도 갓 훈련을 마친 햇병아리를 충군한 적 없었다. 이리트의 이름 뒤에는 온갖 예외의 꼬리표가 달리게 된 셈이었다. 애초에 타이밍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신병이 될 이들의 훈련 과정을 지켜볼 일부터 없으니, 이건 수많은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데려오는 게 나았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대개 외곽 출신들은 이곳에서 오래 버텨내질 못했으니. 특혜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제 선에서 갈무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 쉬이 스러지고 마는 이들에게는 기대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건만. 그리페는 여러 가능성을 재어 보았다. 제 지위를 알았을 이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에게 따라붙는 소문이 모조리 과장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의사를 물었으니 어쩌면 일반적인 자대 배치가 아니라는 사실도 이미 알 터였다. 알아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대원을 보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고.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테지만, 미리 언질을 해두었으니 큰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그리페는 이런저런 상념에 멈춰 버렸던 손을 움직여 잔뜩 쌓인 일감을 처리했다.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숙소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독방이라는 것 정도. 훈련병 때에는 십수 명이 한 장소를 썼다. 그러한 사실은 일반 부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상 밖의 일이었다. 패스파인더가 지닌 위상을 생각하면 당연한가. 어쨌든 제겐 좋은 일이었다. 잠깐이었으나 훈련병 숙소의 단체 생활은 여러모로 끔찍했다.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오늘은 일정이 모두 끝난 시간이니 우선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다 말한 상관은 미련 없이 떠나 버렸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이리트는 찬찬히 방안을 살폈다. 일인용 침대 하나, 작은 책상과 의자 하나로도 모자라 개인 욕실까지 달린 공간이었다. 훈련병이 이용하는 시설이나, 이곳에 오기 전 썼던 곳과는 달리 안락한 분위기가 제게는 너무도 낯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 위를 길게 쓸면, 손끝을 스치는 천이 걸리는 곳 하나 없이 부드러웠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선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밤이 찾아들었다. 여기저기 켜진 전등은 창 너머까지 빛을 발하고, 거리는 창백한 가로등 빛 아래 훤했다. 이곳의 사람들이 호의호식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더 이상은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으려 벌인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흠 하나 없는 침구도, 어둡지 않은 밤의 풍경도 제게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우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리트는 익숙하지 않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두 눈으로 확인한 현실이 어떠했든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패스파인더로 오겠냐는 제안을 받은 건 상부, 혹은 적어도 간부 하나에게는 눈에 띄었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신병 대다수가 배치되는 일반 부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는 질이 훨씬 좋을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걸리는 점은 분명 존재했다. 하얀 정복을 입고 있던 간부, 그리페 하랄트. 젊은 장교의 눈 안에 미약하게나마 내비치던 감정은 그저 훌륭하게 생각하는 신병에게 향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의심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의아하게 여기고 있을 테지.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의심의 싹을 꺾어 내 버릴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커튼 틈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비칠 즈음, 비척비척 일어난 이가 눈을 거의 뜨지도 않은 채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이 다시 열리면 하얀 수증기가 쏟아지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이리트가 이전과 달리 또렷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았다. 삼십 분 후에는 어제 보았던 상관이 찾아올 예정이었다. 느긋하게 머리를 말리고 옷을 챙겨 입으면 시간이 얼추 맞을 터였다.
상관은 부대의 기본 시설 따위를 알려주었다. 더불어 신병이 배치된 건 처음이라는 사실까지도. 염두에 두었던 사실이었으므로, 이리트는 큰 반응을 내보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건 그저 능력을 높이 사는 모양새가 아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확실하게 의심받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제 출신지와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 균열의 시작이 되었다. 사다리를 걷어차 쓰러트린 건 그들이었음에도.
패스파인더에 편입되었다 한들,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해진 일과표는 쳇바퀴처럼 돌고 돌았다. 차이점이라면 훈련의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는 것 정도였다. 저녁 이후 주어지는 자유 시간에는 무언가를 할 힘조차 남지 않아 대개 휴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악을 쓰는 소리도, 군화가 바닥을 박차는 소리도 사라진 병영은 적막했다.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던 이리트가 일어나 편지지를 꺼내 왔다.
보급품으로 지급된 기기가 있었지만, 외곽 지역에서는 수발신이 불안정해 확인이 어려웠다. 그러나 집배원이 알파 지역에도 남아 있는 이유는 그들의 덧없는 로망 때문이라 했다. 신세 좋은 인간들. 비아냥거린 이리트는 펜을 들었다. 백지를 마주하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했다. 조만간 패스파인더가 출정하니, 그에 대한 소식을 전하려는 것뿐인데도.
출정 일자는 급히 전해졌다. 물론 물류의 흐름이나, 알음알음 들려오던 소식 따위로 조만간에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알았다. 더불어 이 계획은 행성 하나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래전 집어삼킨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아주 갑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풍요로움을 독식하며 그들의 인구수는 이전보다 몇 배나 늘었고, 죽는 이보다 새로 태어나는 이가 더 많았다. 더 이상 혈연이며 지연 따위를 핑계로 쥐여 줄 자리도 없는 탓일 게 분명했다.
종이 위에 오래 머문 펜촉에서 잉크가 번졌다. 뒤늦게 펜을 떼었으나 이미 까만 흔적이 글씨를 덮었다. 굳이 고칠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봉인은 내용 검수를 위해 풀릴 게 뻔했으나, 이리트는 이름을 써넣고 편지를 단단히 봉했다. 특별히 문제 될 내용은 처음부터 쓰지 않았다. 단지 타지에 있는 가족과 같은 이들에게 소식 겸 안부를 전하려는 것으로 보이리라.
지금 당장은 혁명군이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아직 그 정도의 힘을 얻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전쟁은 장기전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불어 주축이 되는 부대인 패스파인더의 발목이 묶인다면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리트가 이곳에 오기 한참 전부터 혁명군은 산발적인 전투며 대외 활동을 천천히 줄여나갔다. 정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반란군이 꾸준한 전투 끝에 괴멸한 것으로 보이자 오만한 정부는 다행히도 쉽게 눈을 돌려 줬다. 그들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타 행성 정복으로 손을 뻗쳤다.
답장이 돌아올 즈음에 자신은 저 높은 하늘 너머, 드넓은 우주에 있을 터였다.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게 있어서 하늘과 우주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였던 탓이었다. 지금의 하늘에서 은하수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드물게 환한 별로 보이는 것은 예외 없이 인공위성이 발하는 빛이었다. 전함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일어날 일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실없는 감각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패스파인더에 온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이리트는 자연스레 여단에 스며들었다. 부대의 특이성 때문일까. 그들은 제각각 어디에서든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음에도 그다지 위계에 연연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때에는 소속 없이 자유로운 용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건, 자신은 결국 모두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했으므로. 이제 와 그들에게 동정심이며 죄책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제 결심이 흔들린 적도 없었다. 단지 가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 뿐이었다.
격렬한 진동이며 온몸이 짓눌리는 것만 같은 감각을 견뎌 내면, 어느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궤도에 안착한 듯, 작은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은 선체가 낯설었다. 함께 있던 이들은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지 단단히 메었던 안전벨트를 풀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각자 할 일을 찾아 자리를 떴다.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제게 메인 벨트를 풀어내면 상관이 다가왔다.
“이상하지?”
“괜찮습니다.”
“하하, 도착할 때까지는 편히 쉬어 둬. 도착하면 쉴 틈도 없을 테니까.”
대답을 꺼낼 틈도 없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상관은 자리를 떴다. 팔을 죽 뻗어 기지개를 켠 이리트가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훈련을 거치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마냥 그렇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한창 시끌시끌한 곳을 벗어나, 길게 뻗은 복도에 멈춰 선 그는 홀린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검은 공간 위에 점처럼 작은 빛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빛은 흐렸고, 어떤 빛은 선명했으며, 색이며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이토록 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들은 그 작은 땅덩어리로 출신을 구분 짓고 있던 거였다. 그까짓 게 대체 뭐라고. 이리트가 상념에 빠진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차분한 발걸음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리트는 다가오는 기척조차 깨닫지 못한 듯, 내내 바깥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무던한 신병의 자색 눈에 언뜻 강렬한 열망이 비친 것 같았다. 처음 두 눈으로 마주하는 우주의 풍경 탓일까. 고요한 응시 끝에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 이름 대신 계급 명을 부르면 퍼뜩 고개를 돌린 이리트가 경례를 해 왔다. 마주 손을 올려 인사하고 나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는지, 일순간 망설임이 앞섰다.
짧은 정적이 스치고, 그리페는 실없이 웃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웃음을 조금 덜어낸 그는 이리트가 바라보던 창밖에 가벼이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도 처음 우주에 나왔을 때에는 이리트처럼 바깥을 바라보곤 했었다.
“이쪽으로 와 봐요.”
가벼운 손짓과 부드러운 말씨는 정말로 군인과는 어울리지 않건만, 그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건 꽤 흥미로운 간극이었다. 그의 앞에서 티 낼 수 없는 일이었고, 이리트는 풀렸던 표정을 가다듬었다. 발을 움직여 그리페가 선 쪽으로 다가서자, 그는 몸을 움직여 반대쪽 창을 가리켰다. 다른 것보다 유난히 가까운 행성은 분명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여러 색이 뒤섞인 행성의 이름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보고 있자니 옛날의 내가 생각나서.”
이리트는 패스파인더에 온 뒤로 늘 품고 있었던 의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곳에 배치되며 제 계급이 하사가 되었다 한들, 지휘관쯤 되는 인물과는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이 없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그리페는 왜 자꾸만 제게 얼굴을 내비치는가. 직접 물어보기에도 어려운 문제였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면 저에 대한 의심 정도일까. 걷어붙인 소매 아래, 갖가지 흉터가 새겨진 몸과는 달리 그리페의 얼굴은 깨끗했다. 실없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전에 그는 눈을 돌려 바깥을 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기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이리트는 저를 피하는 듯이 눈을 돌려 버렸다. 제 계급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막연한 두려움까지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당장 그 이상을 욕심내기는 어렵다. 바깥의 빛에 하얀 반사광이 비치는 검은 비늘을 보았다가, 그리페는 적당한 인사말을 건네고 자리를 떴다.
전반적인 점검을 마치고 제 개인 공간으로 돌아온 그리페는 유난히 답답한 정복을 끌렀다. 패스파인더에 속한 이들은 오로지 능력만을 위시하여 선발된 이들이므로, 특별한 검증 없이 들어온 이리트를 곱게 보지 않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리트가 오기 전에 이미 엄중하게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리트는 놀라울 만큼 잘 적응했다. 분명 제 경고의 영향이 있었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적응력의 빛이 바래지는 않았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이는 없어 보였으나, 이건 그저 그의 성격 같았다. 훈련병 시절 같은 소대였던 이들을 통해 알아보았을 때에도 친분이 있노라 말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리페는 제 생각을 되짚었다. 의심으로 시작된 관심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여태껏 지켜본 이리트는 훌륭한 병사였으며, 그저 군인이 아닌 인간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굳은살이 박여 거친 손이 제 눈가를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고작 이 정도의 냉정한 평가로 단언할 수 없는 감정임을 알았다. 정확하게 무어라 정의내릴 수 없었으나 둘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이리트, 이제 처음 실전에 투입되는 이에게는 더더욱.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인가, 혹은 외면했던가. 눈을 돌린 사이에 뿌리내린 감정은 의심보다도 질겼다. 뿌리를 뽑아내기엔 이미 늦었으니, 크기를 더욱 키우지 않도록 억제해야 했다. 뛰어난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을 법한 호감에 그치도록.
겨우 석 달이었다. 이리트가 훈련병이었던 시절까지 끼워 넣어도 반년에 채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간. 훈련 기간에는 간혹 멀리서 본 게 다였고, 그건 이리트를 보았다기보다는 전반적인 상태 체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대에 온 뒤로는 몇 번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태를 봐주었다. 지휘관과 사병 사이의 거리치고는 가까운 게 사실이었으나 크게 문제가 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창 앞에 선 그리페는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제 꼴이 우스웠다. 무릇 감정의 교류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마련이다. 혼자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여태껏 그에게 있어 연애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능력이며 외모와 같은 배경에 홀린 이들은 두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그리페는 그만큼 짧고 강렬한 연애를 즐겼다. 그런데도 지금 이 감정이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건 단지 이리트가 제 휘하의 부하이며, 계급 차가 적지 않기 때문인가.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한 시선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상황에 사적인 감정은 사치였다. 그리페는 상념을 밀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도착하기 전에 확인을 마쳐야 할 일이 많았다. 큼지막한 화면 안에 뜬 글씨는 곧 도착할 곳, 행성 7119-B2의 정보를 가득히 담고 있었다. 환경이며 살고 있는 종족, 심지어는 문명의 발전 정도까지도.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속에 매장된 자원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으므로, 다시금 시작된 정복 전쟁의 시발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함선은 7119-B2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여전히 정복을 입은 그리페는 차분하되 힘 있는 목소리로 부대원을 독려했다. 현대의 전쟁은 군인의 선혈로 성립하지 않았다. 그들보다 더 앞선 곳에 선 것들은 표준화된 전투 로봇이었다. 우뚝 선 기체에서는 조금의 동요나 불안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지능에 인간을 흉내 낸 감정을 넣어둘 필요가 없었기에.
최종 점검을 마친 함선이 다시금 움직였다. 먹빛 함선은 대기권을 쉬이 뚫고 그들의 하늘에 위용을 드러냈다. 반경 3,000km에도 채 이르지 못하는 작은 혹성의 대지 위로 다탄두 미사일이 힘차게 쏘아졌다. 선전포고를 비롯한 일말의 경고도 없이 이루어진 공습은 효율을 중요시하는 그들의 의도였으며, 민간인을 신경 쓰지 않는 작태였다. 행성 거주인의 귀를 먹게 만들 폭음과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흙먼지 섞인 연기 따위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되었다.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땅이 까뒤집어지고, 그들만의 양식으로 지어 올린 건축물이 삽시간에 형체를 잃고 무너졌다. 폭발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 때마다 수십, 수백의 사람이 목숨을 빼앗겼다. 누군가는 사람의 몸으로 미사일을 맞아 증발했고, 누군가는 건물이며 땅의 파편에 깔려 곤죽이 된 채 죽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즉사한 이들을 차라리 부러워하며 고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전쟁은 어렵지 않았다. 이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전쟁보다 학살에 가까운 탓이었다. 함선에 탄 채 몇몇 버튼을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기가 목표한 곳으로 떨어진다. 미사일 하나에 스러진 목숨은 몇 개인가. 그 여파로 죽거나, 죽게 될 이들도 탄두에 걸린 목숨이라고 볼 수 있을까. 냉정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리페는 함선의 심장부에 선 채 커다란 화면에 비치는 전장을 응시했다. 그 순간, 레이더에 적기가 포착되었다.
전투기의 성능은 이쪽이 훨씬 더 우세했다. 그들의 공격 수단이 유효 사거리를 확보하기 전에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그리페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격발을 명하고, 맹렬히 날아오르던 기체는 기우뚱거릴 새도 없이 추락해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불붙은 연료가 폭발하며 주위 건물의 외장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폭발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끔찍한 공격이 다시금 이어졌다. 큼지막한 건물 파편 사이 숨어, 머리를 감싸 쥔 채 두려움에 떠는 이들 위로 눈먼 미사일이 떨어졌다. 굉음에 막 잠이 깬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우는 아이를 애써 감싸 안은 부모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그들의 신세를 깨닫고 망연히 하늘에 자리 잡은 검은 재앙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을 타고 불어온 바람에 피 냄새와 코가 시큼하도록 독한 화약 냄새가 섞였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가. 아이의 벌린 입에선 숨이 넘어가는 울음소리가 샜다.
7119-B2의 수도가 무력화되는 데에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움푹 파인 자국이 남은 땅 위로 전함이 부드럽게 착지했다. 약간의 간극 후에, 함선의 입구가 열리고 기계 병정이 일사불란하게 내렸다. 지구의 것과 다른 대지를 밟고 선 전투 로봇은 무기를 쥐고 도열한 채 이어질 명령을 기다렸다.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는 간단했다. 행성 7119-B2를 무력화하고, 주요 시설을 차지할 것.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게 되리라. 정부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고,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그들을 짓밟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임을 알았다. 그리페는 화면 너머 참상을 응시하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전군 전진. …생존자를 확보하라.”
좁은 행성 위에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했다. 육지의 대부분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인 지구와는 다르게. 공습에 당한 이곳은 행성 내의 가장 거대한 국가이며, 많은 상황에서 7119-B2를 대표했다. 그건 이 외의 국가에는 이만한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출력을 조절한 광자포로 땅 위를 지져 버릴 계획을 세우며, 그리페는 지휘석에 기대앉은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피곤함이 어깨에 매달린 것만 같았다.
마냥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계 병정은 지칠 줄 몰랐고, 너른 공터 위로 살아남은 이들을 속속들이 모아 놓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함선에서 내리는 그의 뒤로 상황실에 있던 부대원이 열을 맞춰 따랐다. 타의로 모인 이들 대다수는 부상으로 신음하기 바빴고, 그나마 운신이 가능한 이들조차 두려움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잠깐 사이 피가 묻은 전투용 로봇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주위를 넓게 둘러싼 채 멈추었다.
넉넉히 세어도 백을 조금 넘을 숫자였다. 이들을 모두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 옛날, 오래전의 전쟁과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랐기에. 각 국가의 수도를 제외한 그 외의 지역에서 사람은 거의 죽지 않으리라. 물론, 새롭게 들어설 정부에게 반기를 들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다소간의 출혈이 일어날 것이 뻔했으나,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무력의 증인이자, 행성 전체를 담보로 한 인질이었다. 흙바닥에 너부러진 이들 중에 권한이 있는 권력자를 골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받았던 정보 속에 있는 얼굴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상처가 난 얼굴이라 해도 특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나둘 끌려 나올 때마다, 내심 희망을 품었던 이들의 낯이 거멓게 죽어갔다.
며칠 뒤면 이곳에 사는 모두가 알게 될 일이지만 미리 알릴 필요는 없었다. 함선 내부 적당한 곳에 그들을 모아놓고, 그리페는 그 앞에 섰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가 이곳의 총책임자임을 깨달았다. 부상 탓에 자세가 흐트러졌던 이도,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페는 설사 그들이 바닥에 누워 있다고 한들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행성에 들어서자마자 미사일을 쏴 갈긴 이들의 심기를 누가 거스르고 싶겠는가.
그리페의 선언은 간략했다. 일말의 흔들림조차 내비치지 않는 무기질적인 목소리는 7119-B2의 찬란한 해가 저물었음을 공언했다. 그들이 채 반문하기도 전에, 하얀 정복을 입은 남자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걸음걸이에 맞춰 흔들리는 긴 망토 자락은 왜 그렇게나 매정해 보였는지. 한때 권한이며 권력을 손에 쥐었던 이들은 여태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역사가, 왕가로서의 격이, 모조리 압도적인 힘 앞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바로 어제까지도 안락한 삶을 살던 이들이 내심 내보이던 희망의 무게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한 왕가의 왕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무능함에 몸서리를 쳤다. 생각은 끊이지 않고,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수렁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그들은 원한다면 이 행성 위의 대지 위에 불을 놓고, 이곳의 사람을 빠짐없이 죽여 버릴 수 있으리라. 오늘 벌였던 일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안 돼, 그것만은……”
그런 식으로 인간이 인간을 밟아 버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리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세상이라 한들, 그래서는 안 됐다. 나는,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씹어 뱉듯 중얼거린 이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협상의 여지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의 바짓단을 붙잡고 빌기라도 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만은 살려 달라고. 이를 악문 이가 움직이는 자리마다 새빨간 핏자국이 스쳤다.
그의 앞길을, 군복을 입은 이들이 막아섰다. 출입구 앞에 선 이리트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정부군의 방식은 그야말로 야만적이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 행했던 전쟁도 이런 식이었을 테지. 꽉 쥔 주먹, 잘 다듬어진 손톱 끝자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모성에 남아 있을 이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 상황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었다. 몇 달간 함께 했던 부대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이후의 상황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지구에 잔류한 이들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눈앞의 참상을 견디지 못하면 제가 아닌 누군가가 또 이 역겨운 곳에 발을 들이게 되리라. 그것을 막고자 스스로 이곳에 왔다. 이리트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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