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8)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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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여느 때처럼 느지막하게 눈을 뜬 이리트는 이불 속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꾸물거리는 것도 잠시, 도로 몸에 힘을 뺀 이리트는 눈만 깜박였다. 커튼 탓에 어둡고 고요한 실내, 닫힌 문 너머에서 희미한 생활 소음이 들려왔다. 손만 길게 뻗어 뒤집힌 채 놓여 있던 기기를 끌어온 이리트가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 십육 분, 평소와 같았다면 그리페는 진작 본부로 향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밖 기척의 주인이 그리페가 아닐 리가 없었다. 나가지 않았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이리트가 실내화를 끌며 욕실로 향했다.

끝자락이 젖은 앞머리를 대강 털어내며 문을 열어젖히면, 집안일에 여념이 없는 그리페가 바로 보였다. 어제까지도 적진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금세 제 기척을 알아챈 그리페는 밀대를 벽에 기대 놓고 얼른 이쪽으로 다가왔다. 잘 잤어요?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리트는 두어 걸음 더 다가가 그리페를 끌어안고,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을 잃은 채로 보냈던 시기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많은 정신적 문제가 그러하듯.

“하던 것만 얼른 끝낼 테니까 같이 밥 먹어요.”

“응……. 근데 출근 안 했네.”

“당신 잠든 사이에 가면 또 걱정할까 봐.”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이는 아니지만…… 어린 건 맞잖아요, 이리트.”

때때로 이리트가 너무 어리게 느껴져서 곤란할 때가 있었다. 이리트가 어리게만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걸 알아, 한 번도 직접 얘기한 적이 없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이리트가 제게서 떨어졌다. 어떻게 봐도 불만이 있는 듯한 태세였으나, 그러면서도 부정하는 말을 뱉지는 않았다. 묘하게 불퉁한 표정을 마주하면 막을 틈도 없이 웃음이 샜다. 이리트가 물러선 만큼 다가서서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리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밀대를 쥐고 거실 바닥을 닦아내었다.

제 옆얼굴에 와 닿는 시선. 시야 구석에 자꾸만 걸리는, 불만을 담고 휘적거리는 까만 꼬리. 이리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서도 그가 지금 제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서둘러 바닥 청소를 마무리한 그리페가 찬물에 걸레를 문질러 빠는 때, 셔츠 속으로 손이 밀려 들어와 복근을 더듬었다. 이리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던 탓에 새삼 놀라지는 않았지만, 대뜸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을 줄은 몰랐는데.

“이리트.”

“응.”

“손.”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손이 외려 더 노골적으로 살갗을 더듬어 왔다. 깊숙이 파고든 손, 덩달아 말려 올라간 옷자락이. 잔뜩 쥐어짠 걸레를 한 번 털어 싱크대에 걸쳐 놓은 그리페가 손을 다시 씻어냈다. 그즈음 이리트는 옷 속으로 팔을 넣어 저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였다. 물기가 남은 손으로 이리트의 손을 붙잡으면, 이리트가 턱을 제 어깨에 괴어 왔다. 적극적으로 살갗을 더듬었던 것 치고는 이리트는 쉬이 저항을 포기했다.

“그렇게 어리지 않거든.”

투정처럼 보일 것을 알면서도 이리트는 끝내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그리페가 종종 자신을 어린애 어르듯 대하는 것도, 제가 자주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리페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로 그 차이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서. 이리트는 그다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와중에도 선명한 굴곡을 손끝으로만 슬 문질렀다. 제 손목을 감은 그리페의 손은 드물게 찬기가 느껴졌다.

따듯한 살갗으로부터 제 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뒤돌아선 그리페가 목덜미를 감싸고 입술을 부딪쳤다. 그리페가 떼어낸 채로 허공에 떴던 손이 자연스레 그의 허리를 감고,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뒤섞이는 타액, 감은 눈꺼풀이 미약하게 떨렸다. 아슬하게 들이켠 숨이 끝내 엉켜 그리페의 옷자락을 뒤로 당길 때까지. 젖은 입술을 핥고 떨어진 그리페의 얼굴 위로 웃음이 퍼졌다.

“어리게만 생각했으면 이런 짓 못 하지, 이리트.”

그리페의 손이 닿아 있던 목덜미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페의 손이 제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떨어졌다. 식사부터 해요.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물어오는 그리페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이리트는 짐짓 제 입술을 매만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매번 별로, 그다지, 따위의 비슷비슷한 대답만 돌아온다는 걸 그 또한 알면서도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끔은 궁금했다.

“실망한 적 없어?”

“응?”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을 때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 없잖아.”

“실망 안 해요. 당신은 챙겨주면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기도 하고…….”

“음…… 그래.”

“매번 당신이 궁금한 것뿐이에요. 부러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뺨에 입을 맞춘 그리페는 냉장고를 열고, 이런저런 재료를 꺼내었다. 평소라면 얌전히 기다렸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방해임을 알면서도 이리트는 그리페의 어깨에 턱을 괴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예상한 그대로 그는 저를 밀어내지도 않고, 태연하게 움직이며 요리를 준비했다. 등에 붙어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건 꽤 즐거웠으며, 그리페는 이따금 손질한 재료의 자투리 부분을 제 입에 넣어 주었다.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건만 어느새 그리페는 완성된 요리를 그릇에 옮겨 담았다. 요리를 완성할 즈음에야 떨어진 이리트는 수저를 꺼내 두고 자리에 앉았다. 막 만들어 김이 오르는 음식은 얼핏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무엇 하나 맛없는 것이 없는 식사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따금 울리고, 이리트는 느긋하게 그리페의 정성이 담긴 요리를 하나하나 씹어 삼켰다.

“아, 그렇지. 이리트, 어떻게 현장까지 직접 왔던 거예요? 위험했을 텐데.”

“너희 팀원들이 직접 너를 구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그 요청이 상부에 받아들여지질 않았어.”

“그게 무슨……”

“웨이드가 내게 연락했어. 협회에 오지 말라고. 그러더니 널 찾으려 드는 네 팀원을 내 쪽으로 보냈지. 그래서 같이 갔어. 따라가지 않는 게 맞는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

“납치됐던 동안 뭔가 이상한 건 없었어?”

“그 사람들 태도가 이상하긴 했어요. 무력으로 못 이길 걸 모르지는 않는 눈치였는데, 그렇다고 나를 제대로 제압하려 들지는 않았어요. 얼핏 들리는 말로는 꼭 사주를 받은 것처럼. 게다가…… 당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도 했고.”

“이제 일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겠지.”

이리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일을 벌인 이는 결국 또 레만이었다. 그리페의 손끝이 테이블 위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어쩌면 제 동료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저를 구한 것 자체야 겉으로 보기에는 결과가 좋으니 큰 징계를 내릴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상부가 그들이 직접 구해내겠다는 것을 막지 않았나. 레만은 제게 오점이 남기를 원치 않는 이였으며, 이번 일은 그들이 상부에 의심을 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전부터 이어진 정보부의 부진도 한몫할 테지.

“무슨 생각해.”

“팀원들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이리트?”

“……큰 문제는 안 생길 거야.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어제 자 기억이 조금 조작되는 정도.”

“그게,”

“물론 내가 겪었던 문제를 제일 먼저 떠올릴 법도 한데, 그래도 내 경우는 논외로 쳐야지. 상황상 기억을 통째로 날려 버리면 오히려 문제가 커지니까, 기억을 조작한다고 해도 상부가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전제만 건드릴 게 분명해.”

“관계자 수가 적지 않은데, 전부를요?”

“딱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한데…… 레만이 성능은 꽤 좋은 편이긴 하거든. 이 정도의 작은 범위는 그 자식한테도 그렇지만, 네 동료에게도 별 타격이 없을 거야. 예민한 편이라면 이질감 정도는 느낄지 몰라도.”

그들이 어떤 식으로 상부에 요청을 전달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상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 레만의 행동 방식은 일관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리페가 이렇게 빠르게 구출된 이상 레만 또한 정보가 새어 나갔음을 알았을 테니, 과격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그의 팀원을 눌러 놓는 일 따위로 제힘을 빼지는 않으리라. 앞으로 레만의 행보가 어떠하건,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째서……”

“응?”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그에게 부족한 게 있나, 싶어요.”

잠시간 입을 벌렸던 이리트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뱉든 레만을 향한 비아냥밖에는 튀어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레만은 그린 듯 성공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능력으로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라, 돈이며 권력, 심지어는 명예까지도 얻었다. 그가 지닌 고질적인 문제라면 오로지 만족을 모른다는 점 하나였다. 그건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며, 동시에 끝내 무너지는 이유가 될 테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리페의 손을 끌어당겨 붙잡은 이리트는 가라앉은 벽안을 마주했다.

“욕심이 원래 끝이 없잖아. 자제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갉아먹는 줄도 모를 만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해할 필요 없어. 그러지 않으면 좋겠고. 어쨌든,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 레만도 정보가 새어 나간 걸 알 테니, 느린 쪽이 패배하게 될 거야.”

“……당신이 이렇게,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에요.”

“왜.”

“혼자 싸우게 하는 것 같아서 그래, 이리트.”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는 거지. 못 해 먹겠다 싶을 때가 오면 도와달라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차라리 애처럼 굴어 주면 좋을 텐데. 그리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리트의 손을 붙잡아 입을 맞추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빈 접시를 치우고, 그리페는 다시금 팔을 걷어붙였다. 설거지는 내가 할까. 괜찮아요. 네가 너무 다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익숙하기도 하고. 이리트는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금 제 허리를 끌어안고 등에 기대었다. 체온과 체온이 맞붙고, 그건 이내 따스함이 되었다.

“어제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온갖 생각을 다 했어.”

“무슨 생각을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네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원래의 나였다면 증거를 들이밀었다고 해도 덜컥 믿지는 못했을 텐데, 싶어서.”

“싫었어요?”

“아니, 그냥 신기했지.”

“나도 그래요.”

“뭐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 말이에요.”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보는 그리페는 늘 큰 변화가 없어 되물으면, 그는 대답은 없고 웃기만 했다. 제게 영향을 받아 좋을 게 없는 것 같은데. 뭐야, 하고 말을 꺼내도 그리페는 하던 설거지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호기심에 더 캐묻는다 한들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 맞춘 이리트는 그리페를 놓아주고, 한쪽에 놓인 커피 머신의 전원을 켰다.

“아침부터?”

“새삼스럽게. 마실 거지?”

“……조금만요.”

 


 

쉴 수 있는 건 하루가 전부였다. 실상 그마저도 겨우 시간을 낸 셈이었다. 레만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제는 정말로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가 승리하게 될 터였으므로. 그리페는 제 팀원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더 미루지 않고 본부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본부로는 발을 들이지 않은 이리트는 뒷골목으로 향했다.

이리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긴 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옷자락 틈새를 파고드는 사나운 칼바람, 깊숙이 눌러쓴 모자를 고쳐 쓴 이리트가 좁은 골목에 자리한 금은방으로 들어섰다. 낡은 종은 어딘가 망가진 듯 그리 맑지 않은 소리를 울리고, 매대 뒤 구석 언저리에 앉아 있던 이가 시선은 이쪽으로 주지도 않고 웅얼거리며 대충 인사를 건네 왔다. 내부는 보석상보다는 골동품점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한 광경이었으나, 이리트는 매대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줄줄이 놓인 귀금속과 보석, 그 위를 덮은 유리 케이스에 팔을 걸친 이리트가 매끄러운 표면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하로 가고 싶은데.”

애초부터 응대를 제대로 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 이는 제 말을 듣고서도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이쪽을 응시했다. 원경 너머로 넌지시 건너다보는 눈은 꼭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번 거치는 절차는 익숙했다. 주문 제작은 받지 않는 모양이지. 평이한 어조로 말을 뱉으면, 그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시오.”

툭 뱉은 이는 한 번 뒤돌아보지 않고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색 짙은 커튼 너머 어둑한 복도에 두 사람분의 걸음 소리가 울렸다. 굳게 닫힌 문을 앞에 둔 이가 문득 멈춰 섰다. 무기를 지니고 있소? 긴 코트 자락 안에 늘 챙겨 다니는 권총을 꺼내 건네면, 그가 아래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보지요.”

한 시간까지 걸리지는 않을 텐데, 따위의 생각을 흘려보낸 이리트는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늑하게 꾸며진 골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쭉 빼고 집중한 이는 옆에서 사람이 접근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진. 이름이 불리고도 한참이 지나 고개를 돌린 이가 뒤늦게 놀라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네가 부탁한 건은 아직 마무리가, 조금……”

“변동 사항이 생겼어.”

느슨하게 뜬 눈이 깜박였다. 상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건 말건, 이리트는 그의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진은 단번에 서류를 집어 들지 않고 망설였다.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이리트는 서류 위에 큼지막한 상자를 하나 얹었다. 추가금. 섭섭하지 않을 만큼은 될 거야. 내려놓은 것을 다시 빼앗기라도 할까, 상자를 찔끔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진은 책상 속 서랍에 상자를 쑤셔 넣었다.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하는 데에는 현금만 한 수단이 없었다. 물론, 그는 제 일에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대했으므로 이 정도의 변동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한 보상은 그 자체로 동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진의 상황상 더욱 그랬으며, 애초에 질 좋은 정보 인력에 대한 투자로는 오히려 약간 모자란 것 아닌가 싶은 수준이었다. 이 이상은 부담스러워하니 쥐여줄 수 없을 뿐이었다.

느슨하게 힘이 풀려 있던 눈이 또렷해지고, 콧대 중간까지 흘러내렸던 안경을 밀어 올린 진이 똑바로 시선을 맞춰 왔다. 원하는 방향은 명확했다. 레만을 위주로 털어보라는 기조 자체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와 엮인 조직의 정보도 필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까지 얻어낸 자료가 허사가 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런 거라면…… 그만큼 줄 필요는 없는,”

“숨긴 상자부터 꺼내고 말해.”

“아니, 그건……”

“됐고, 최대한 빠르게 끝내주면 좋겠는데.”

“당연하지, 나만 믿어!”

추가금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진은 드물게 활기찬 어투로 말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대충 눈인사를 건네고 들어왔던 곳으로 발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 잠깐 사이 문제가 생겼을 리는 없는데. 약간의 의문을 품은 채 뒤돌아서자,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진과 눈이 마주쳤다.

“진짜로 할 거야?”

“그래.”

“위험할 텐데, 헤르데.”

“상관없어.”

“내, 내가…… 최대한 빠르게 알아내서 연락할게.”

레만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이면을 알아채고서도 살아있는 이가 두 손으로 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얼마 전, 오랜만에 연락해 온 이리트가 대뜸 레만과 관련된 정보를 모조리 알아내 달라는 말을 할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렇게 빠르게 이루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이리트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맞았다. 레만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방심했음은 이때까지 알아낸 정보만으로도 알 수 있었으나, 그가 지닌 위험성만은 여전히 의심할 바 없이 명확했다.

“죽지 마.”

“진, 요즘 나는 행복해. 과분할 정도로.”

“네게 과분할 게 뭐가 있어.”

“구질구질해도 좋으니 오래 살 거야. 그러니 날 걱정할 필요 없어.”

“……다행이다.”

이제는 아득할 정도로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 제게 레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 준 건 이리트였다. 레만에게서 도망치는 대가로 서류상 죽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제 어떤 점이 이리트의 눈에 들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어쨌거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터였다. 이리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드물고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행복하다고 말하며 웃는 이리트는 정말로 좋아 보였다.

“다음에 여기 직접 찾아오는 건…… 레만, 그 자식을 끌어내린 다음이 될 거야.”

“행운을 빌어, 헤르데.”

“그래. 나중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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