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로한

손의 온기

  1. 마른 여름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래 전의 일 같으면서도 어젯밤 꿈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법이다. 마치 어항 속 금붕어를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꼭 놓치는 것처럼, 그래서 되려 나풀거리는 주황빛 지느러미가 햇빛에 반사된 물결에 반짝이는 장면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라는 계절이라 더 그랬을까. 이현은 드물게 그날의 일을 아지랑이에 비춰 보았다가 차가운 현실을 끼얹어 잊어버리곤 했다. 그에게는, 이미 다른 악몽도 많았기에.

12살의 7월이었을거다. 자신의 집 앞의 문방구를 지나고, 색이 다 바래 빨갛다기보단 이젠 벽돌색에 가까운 우체통을 지나면 나오는 하얗게 페인트칠을 한 격자로 된 나무 울타리로 둘러 쌓인 집. 그림책에서나 볼 법한 지붕이 있는 2층 집에 사는, 역시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하게 생긴 여자아이. 자신과 같은 반인 그 애가 한달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현은 그 아이를 잘 알았다. 소녀의 이름을 알았고, 곱슬거리는 벚꽃색 머리칼을 알았으며, 무엇보다 그 애가 울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에도 몇 번 놀러 가봤는 걸. 이현은 로한이 학교에 나오지 않던 첫째날부터 매일 같이 그 집 대문 앞에 출석 도장을 찍었으나, ‘로한이는 지금 많이 아프니 다음에 와주겠니?’ 라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말만 듣고 나와야만 했다.

얼마나 아픈걸까? 자신은 독감 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솔직히 무서워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마는데.

그렇게 쫓겨날 때마다 어린 이현은 마찬가지로 어린 로한이 있을 그 예쁜 집의 2층 창문 언저리를 올려다 보며 빨리 나으라고,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었다. 빨리 나아서, 예전처럼 같이 학교에 가자고. 크게 외치면 이웃집의 검은 도베르만이 컹컹 짖을까봐, 로한이는 그 소리를 되게 무서워 했으니까... 그래서 이현은 고개가 뻐근해질 때까지 로한의 방 창문만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방학식에도 로한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다들 즐겁게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도 이현은 그게 못내 섭섭했다. 축구하러 가자, PC방 가자는 애들의 말도 마다하곤 이현은 가벼운 책가방을 들고 털래털래 교문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안된다고 해도 그냥 들어가야지. 굳은 결심을 하니 선생님께 불러나갔을 때처럼 몸이 뻣뻣이 긴장되었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니 늘 보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나오고,

“... 로한이 친구니?”

뒤에서 눈가가 벌개진, 로한을 닮은 여성이 나왔다. 이번에도 쫓겨날 줄 알았던 이현은 의외로 손쉽게 집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쨍한 여름 햇살이 거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와 가죽 소파의 윤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엉거주춤 들어오는 자신을 두 명의 아저씨가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위험...”

“얼마나 가능성이...”

“애초에 그 약을...! 당신들이...”

“마음의 준비를...”

띄엄띄엄 들려오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험악하고 침울하여 어린 이현은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얼음이 든 아이스티를 갖다 주었지만 왠지 이현은 손이 가지 않았다. 구석에 틀어져 있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찬 것도 같았다.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엔 그리 걸리지도 않았는데... 순간 커다란 텔레비전 옆의 고풍스런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린다고 생각되면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결국 조심스레 말한다.

미안하지만, 얘야... 오늘도 로한이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화장실 좀 들렸다 가도 되냐고 물으니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타이밍 좋게 전화가 울렸다. 다시 어른들이 바빠지자 이현은 조용히 거실을 빠져나가서, 화장실이 있는 곳을 지나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로한의 방문에는 팻말이 걸려 있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현은 손바닥에 벤 땀을 바지에 한번 닦아내고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텐이 쳐진 방의 세피아 톤이 부드러운 침대의 이불과 둥글게 깎여진 장롱 책상과 책장 등을 물들이고 있었다. 침대 옆의 길다란 철제 기둥, 수액이 걸려있는 링거만이 이질적으로 반짝였다.

쿵. 쿵.

심장이 무겁게 뛰는 것을 느끼며 이현은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소년의 불길한 예상대로, 로한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커튼 틈새로 나온 하얀 빛이 소녀의 뺨을 한줄기 쓸었으나 여름의 생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 같이 새하얀 뺨은 톡 건들이면 깨질 것 같았고,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분홍빛 머리칼은 그대로 굳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버석거리는, 뜯어진 곤충 날개 같은 입술은 닫혀져 있었고 이불 바깥으로 나온 팔은 죽은 뱀 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이현은 봐서는 안될 것을 들춘 기분이었다. 로한이 쭉 감추고자 한 비밀을 억지로 뺏어 열어버린 죄책감과 두려움이 이현의 등을 두텁게 그림자처럼 덮쳐 내리 눌렀다.

숨은 쉬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은 걱정보다는 의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현은 로한을 소리 내어 불러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기 누워있는 애가 로한이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얼른 이 방에서 나오면 될 텐데. 발바닥이 모래수렁에 빠진 것 마냥 움직여지지 않았다. 땀이 너무 많이 흐른다고 느끼고 나서야, 이현은 퍼특 이 방은 에어컨 대신 선풍기만을 틀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 앞의 로한이 더운 기색 없이 잠들어 있다는 것도. 이 방은 너무 깨끗하다는 것과, 코끝에 미약한, 양호실에나 맡던 냄새가 난다는 것이... 모두 자신이 생각했던 '방'과는 달랐다.

로한이는 이것이 일상이었던 걸까?

“누구...”

그때, 작게 달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이현은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나비가 박제 된 것마냥 움직이지 않던 긴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파인애플 맛 사탕 같은 색깔의 눈동자. 이현이 기억하는 로한의 눈이 데굴, 굴러가더니 이현을 비춰내고는 입가를 움직여 미소를 보였다. 그제야 이현은 다시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창백하지만, 역시 로한이었어. 숨 쉬고, 움직이는... 평소의 로한이.

“나야. 이현이.”

“아... 이현이구나...”

길게, 끊어지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로한은 팔을 흐느적거리더니 이현에게로 손을 뻗었다.

“여기까지..오게... 해서, 미안해.”

이현은 로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얼굴을 바짝 베개로 가져다 댔다. 소녀의 목소리는 평소에도 작았으나, 오늘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 같아서...

“아니야... 아팠다면서? 이제 괜찮아?”

“응... 괜, 찮아.”

“.....”

거짓말. 로한을 잘 아는 이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소녀의 말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이현은 울컥 그것이 짜증이 났다.

“거짓말! 학교에 계속 안 나왔잖아.”

“으응... 미안...”

“오늘 방학식이었는데... 반 애들 다 같이 사진 찍었는데 너만 또 안 찍혔어.”

“그렇, 구나...”

아, 사진 얘기는 하지 말걸. 금방 어두워진 소녀의 얼굴을 보며 이현은 후회했다. 또 울어버리면 어쩌지? 이 날의 이현은 아직 우는 로한을 달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고는

“이현아... 내가, 사진에 없어도... 날 기억해 줘야 해?”

서글퍼질만큼 간절하게 물었을 뿐.

“...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나는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았다.

“나, 없어질지도 모른데...”

“그게 뭔데? 어디 이사 가? 전학 간데?”

“아니... 죽는 거. 그게 없어진다는 거야.”

배시시 로한이 웃었다. 이현은 로한이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아 소녀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소름끼칠만큼 차가웠다. 로한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마른 입술만을 움직여 말을 이었다.

“내가 죽어도, 나를 기억해 주라... 응?”

공중에 떠 있던 소녀의 팔이 툭, 썩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풀썩 이불에 내려왔다. 이현은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로한의 호흡이 너무 고요하다는 것도.  고요해진 방안의 열린 창문 너머로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커텐을 뚫고 들려왔다.

“... 싫어.”

이번에도 소녀는 자신의 말에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힘겹게 눈을 떠선, 소년을 바라봤을 뿐.  이현은 그것이 불쾌했다.  눈 앞의 소녀는 벌써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고, 그것이 익숙한 것 같았다.  “그렇구나...” 로한은 이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나는, 못 잊을 것 같은데... 이현이랑... 도현이랑... 모두랑.. 같이, 놀았던 거...”

“없어지지 마.”

이현이 다시 로한의 손을 잡았다.  소녀의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커졌다. 꺾인 나뭇가지처럼 차갑게, 메말라가는 손. 이현은 다른 손도 들어 기꺼이 로한의 손을 맞잡았다.

“계속 같이 놀기로 했잖아.”

생각해보면, 소녀와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물가물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어찌해야 했을까.  없는 약속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소녀가 영영 없어진다는데. 사라진다는데.

“같이 바다에 놀러가기로 했잖아. 수영장도 가기로 했고... 놀이동산도. 영화관도 우리끼리 가보기로 했잖아.”

12살의 이현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즐거운 일들을 소녀 앞에 늘여 놓는다. 그것이 소녀를 이곳에 묶어 놓을 수 있는 것 마냥, 희미해지는 것에 초연해진 소녀에게 감히 삶에서 벗어나는 두려움을 안겨 주리라는 듯이. 소년의 눈빛은 결연했다. 손만이, 땀으로 축축해진 두 손만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라지지 마...”

로한은 말이 없었다. 그것이 불안해져 이현은 로한의 두 손을 더 꽉 잡았다. 왜, 그렇게까지... 소녀의 입술이 작게 그리 달싹거린것 같았으나 확실하지 않았다.  얼음물 속에서 갓 나온 것처럼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세차게 기침을 했다. 콜록이며 어깨를 흔들리는 모습이 곧 부서져 가루가 될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 기침하던 소녀의 얼굴이 천천히 돌려져 소년을 마주 보았다.

“응... 그럴, 게”

소녀가 그제야 평소처럼 울먹였다. 살랑, 약한 바람이 커텐을 건들여, 하얀 빛이 소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소년은 잠시 그 광경을 넋놓고 지켜보았다.

곧이어 어른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이현이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나오자 집 앞에 구급차가 세워져 있었다.

이현은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려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로한이가 싸우고 있는데 자신이 무서워해선 안된다.

그 상대가 설사 죽음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믿고 기다려야 했다.

이현은 12살에 처음으로 무력감이라는 걸 배웠다.

2. 젖어가는 봄

“그 선배하고는 말하지 말라고... 내가 그랬잖아.”

로한은 힐끗 이현의 눈치를 보았다. 한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모양새. 눈가의 다크셔클이 조금 진해져 있었다. 딱 봐도 피곤한 모습. 금세 미안해지다가도 로한은 방금 전 이현의 선배가 자신에게 말해준 내용을 떠올렸다.

‘로한이 넌 힘내야겠네~ 이현이 취향 다 받아주려면... ’

‘아, 너는 순진해서 그런거 잘 모르나?’

‘무슨 얘기냐고? 하하, 이걸 알려줘야해, 모른 척 해야해?’

‘착한 로한이가 이해해줘~ 알지? 남자라는 것은 다...’

그는 농담인양 말했으나 로한은 자연스레 웃을 수 없었다. 그 선배라는 사람도 아는 후배의 여자친구와 가볍게 얘기나 하자는 어투는 아니었다. 얼굴은 웃고 있으나 말에서 천박함을 뚝뚝 묻혀내는 사람. 그쪽에서 먼저 자신이 이현의 친한 형이라고만 안했어도 로한도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로한은 그저 자신이 모르는 학과에서의 이현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지금껏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애인에 대해서 좋은 얘기들만 해줬으니까. 로한은 사람들에게 이현의 칭찬을 듣는 것이 좋았다. 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날 사랑해주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면 행복해서 또 울것만 같았다. 그런 붕 뜨는 기분이 자신의 경계심을 약하게 만들었던걸까. 중간에 이현이가 오지 않았으면 그 남자는 자신을 붙잡고 한참, 기분 나쁜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로한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 선배는... 자신이 너랑 친하다고, 했는데?”

“뭐?”

일순 이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가, 로한이 앞에 있다는걸 깨달았는지 얼른 풀어졌다. 하지만 로한은 그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져 있다는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스멀스멀 마음 깊은 곳에서 쓰고 신 물이 올라왔다.

“... 아니야. 나 그 인간, 아니, 선배 잘 몰라.”

이현이 습관처럼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아차, 얼마 전에 끊는다고 다 버렸지. 초조해진 마음에 혀를 차니 조금 뒤로 몸을 물리는 로한과 눈이 마주쳤다. 애써 입가를 풀어 웃어보였으나, 어쩐지 공기가 냉랭했다. 3월이라지만, 그래도 지금은 초봄일텐데.

“그럼, 그 선배가 했던 말도... 다 거짓말인, 거지?”

이현이 멍청하게 입술을 벌렸다. 로한은 곧바로 긍정의 말을 해주길 바랬으리라. 본인도 그리 하려고 했었다. 상대가 로한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솔직해지리라 다짐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마른 입술에 침도 안바르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정히 속삭였을텐데.

“그... 어떤 말?”

로한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두텁게 짜인 니트를 입었음에도 뼛속까지 몸이 시려왔다. 네가 다른 사람을 쭉 쫓아다녔다는 소문이라던가, 매일 밤 다른 상대랑 자고 다녔다는 말이라던가를... 로한은 자기 입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현의 입으로 증명받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난 사람을 이런 일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런 말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현이가 자신에게 거짓말이라도 해주길 바란걸까? 자신은 이현이를 불신하는걸까?

로한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면, 연애라는건 그걸로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질끈 두 눈을 감으면, 자신보다 훨씬 예쁘고 멋진 사람과 손을 잡고, 키스하며... 옷을 벗고 서로 껴안는 이현이가...

“...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얼굴이 아니잖아. 그 인간이 무슨 말을 했는데. 응?”

불쑥 두려워진 마음은 그가 가장해야 할 여유를 지워냈다. 살짝 허리를 낮춰 고개를 숙인 로한과 마주치는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별 말, 안 했어...”

“로한아,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왔을 때 너 표정 완전 안 좋았잖아.”

“아니야... 그냥, 내가 나중에 따로 물어볼게...”

“아니긴 뭐가... 잠깐만. 따로 물어본다니 뭘? 누구한테?”

“... 그 선배한테.”

“내가 그 인간은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이런. 울컥 터져나온 감정이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숨기고 있던 과거를 로한이 알아차리는 것도 그랬지만, 그 질 나쁜 남자와 로한을 다시 마주치게 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그 인간과 철없게 몇번 어울렸다가 싸운 것이 이렇게 되돌아올줄 누가 알았을까.

“그, 로한아, 그게 아니라...”

그러나 쏟아진 물도, 내뱉어진 말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 역시 나한테 숨기는거 있지...?”

작게 웅얼거려진 말에 물기가 어려있다는 것을 이현은 금방 눈치챘다. 그 원인이 자신이 되다니...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하는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 하니 잘 움직이지 않았다.

“수업 들어가. 먼저 집에 갈게.”

기특하게도 로한은 눈물을 꾹 참아냈다. 하지만 이현은 그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참담했다. 로한은 이제 혼자 있을 방 안에서 훌쩍거릴 것이다. 홱 뒤돌아 재빨리 사라지는 로한을 이현이 다급히 뒤따라갔으나, 강의 시작시간이 가까워지는 교양 건물에는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멍청한 새끼. 좀 제대로 살지 그랬냐.

이현은 너무 늦은 후회를 하며 건물 밖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담배를 끊은지 좀 되었는데도 입안이 썼다.

“담배... 한갑...주, 주세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편의점 직원의 말은 무미건조하게 친절했다. 로한은 퍼특 고개를 들었다가 꾸물꾸물 입술을 우물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직원은 힐끗 자신을 보더니 무덤덤하게 자신의 뒤에 있는 담배 진열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초보자용, 좀 순한 것들이구요, 여기 있는건 인기가 많은것들이에요.”

이현이가 어떤 담배를 피웠더라? 이현이는 자신과 사귀기 전에도 담배를 피운다는 걸 철저히 숨겼다. 아니, 일부러 숨겼다기 보다는, 자신의 앞에서 담배냄새가 나지 않게 조심했다는 것이 옳았다. 로한은 이현이 자신에게 덮어준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발견했을 때 이현이 당황하던 것을 떠올렸다. 역시 이현은 자신을 연애대상이 아닌 지켜줘야 하는 소꿉친구로 밖에 안보이는 걸까... 울컥 터져나온 울분은 충동을 부추겼다.

“제일... 독한 걸로, 주세요!”

눈썹에 힘을 줘선 말하니 직원이 고민하다 맨 왼쪽, 윗칸에 있는 담배를 꺼냈다. 카드를 넘기는 손이 살짝 떨려왔다. 쿵,쿵,쿵. 기분나쁠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편의점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혼자 술을 사셔 마셨을 때도 이렇게까진 아니었는데.

그때와 지금이 다른게 있다면,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점일까. 자신은 성인이었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다면 아마 다른 쪽이겠지...

니코틴이라던가, 타르라던가... 익숙하지만 낯선 화학물질이 자신의 심장과 폐를 어떻게 오염시킬지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금연교육시간에 다른 애들은 딴청을 피웠지만, 로한은 그럴 수 없었다.

진짜 죽음을 목전에 둔다는 느낌을 알았으니까.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다 나았다고 했어. 벌써 그게 몇년전 일인데... 흡연구역을 찾는 발걸음이 한참을 머뭇거렸다. 주머니에 꽉 움켜진 라이터에서 당장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것 같았다.

한개비만이야... 별일 없을거야. 그냥, 담배일 뿐이잖아...

건물 뒤편에 있는 흡연구역은 초봄의 찬공기만이 떠돌았다. 재떨이에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가 어떤 생물의 말라 비틀어진 뼈처럼 보였다.

긴장된 숨을 몇번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로한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을 할것 같은 걸 겨우 진정시키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뜯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갑자기 로한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예술전공 건물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아는 사람이 있을리 없는데. 자신을 말릴리도 없었고. 겨우, 담배 한 개비를 피운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리 없었으니까. 그만큼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일 사람도...

그러고보니, 이현이는 이젠 담배를 끊은걸까?

이렇게나, 자신은 이현이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손바닥의 기분나쁜 축축한 땀을 로한은 대충 자기 코트에 문질러 닦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쉬곤 천천히 내쉬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웅웅 울리는것 같았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틱, 틱!

라이터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현이랑 사귀는 애가.. 너야? 아...’

자신과 이현이 어울리지 않다는 눈빛도, 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왜.. 왜 이렇게 안, 켜지는.. 거야...”

뜨거운 물기가 눈앞을 흐려지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다리에 절로 힘이 풀렸다. 자신이 이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건, 옛적부터 깨닫고 있었는데. 많이 노력했는데. 그래도 부족하다면 뭘, 어떻게 해야...

“로한아!”

이현이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걸까.

로한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깜박여 가득 찬 눈물을 비워내고 나서야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이현이 선명히 보였다.

“이현이... 왜...?”

어느새 로한의 앞까지 온 이현이 달려오느라 숨을 몰아쉬었다. 녹빛의 눈동자가 로한의 입술, 그리고 양손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덜컥, 겁을 들이킨듯이 얼굴을 물들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현은 로한의 손과 입술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빼냈다.

“로한아... 이런 건, 또 언제 샀어.”

이현은 로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은 새하얬지만 손바닥은 발갛게 생기가 돌고 있는, 두 손. 그때하곤 다른다. 당연한 사실이었음에도 이현은 재차 확인하려는 듯이 로한의 두 손을 살며시 그러잡았다.

아.

로한의 손은 차가웠다. 이현은 꼭, 자신이 로한의 체온을 떨어트린 것만 같았다. 내쉬는 호흡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안돼. 아직 안돼...

“로한아... 들어가자. 응?”

사라지지 마. 흩어지지 마.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우리 들어가자... 여긴 너무 추워. 공기도 안 좋아. 손이, 왜 이렇게...”

없어지지 마.

“차가운 거야...”

까슬한 이현의 손바닥의 감촉이 로한의 식은 손등을 꽉, 덮었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이현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끌어 손끝에 입술을 몇번 맞추었다. 로한의 뺨이 화악 달아올랐으나, 지금의 이현은 평소처럼 그녀를 놀리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게 아니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로한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별로 억울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현이의 진심을 의심했으니까. 시험하러 들었으니까. 로한은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이현의 얼굴을 마주하더니 천천히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이현의 얼굴에서, 어릴 적 여름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로한은 문득 모든 것이 더없이 애달퍼지고, 덧없이 사랑스러워졌다.

로한은 얼굴을 이현의 품에 깊이 파묻고는 팔을 둘러 그를 껴안았다. 기다릴게. 어떤 것을 숨기고 있던 간에 너의 마음만은 믿을게. 그게 내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이니까. 귀한 것이니까...

내가 아직 살아 있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

이현의 손이 로한의 머리를 감싸안더니,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아, 이현이 담배 이제 안피우는구나. 로한은 그의 체향이 달라졌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이 뛰는걸 느낀 이현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하아, 내쉬었다.

“안으로 돌아가자. 곧 비가 올것 같아.”

그의 말대로 조금 세찬 바람이 하늘에 어두운 회색을 몰아왔다. 이제 겨울도 완전히 끝날거야. 이현의 중얼거림에 로한이 끄덕거렸다.

“꽃도 금방 피겠네.”

로한이 미소짓자 이현이 살며시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다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여린 분홍색은 몇번이고 피어났다. 그는 그것이 못내 감격스러웠다.

“벚꽃피면... 꽃놀이 하러갈까? 도시락 싸서, 도현이도 데리고.”

“정말?”

“응. 로한이 네가 좋아하는거 만들어 줄게.”

그렇게 또, 이현은 미래를 로한한테 약속했다. 자신은 몇번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깍지 껴 맞잡은 손의 온기에게만 가만히 속삭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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