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밤 기온 27℃
이현이랑 로한이가 사귄지 얼마 안되었을때 이야기
여름은 언제나 외로워져. 네가 없음을 통감하는 첫번째 계절이었거든.
왁자지껄 떠드는 주점 안의 공기가 유독 탁했다. 끊임없이 구워지는 불판 위의 고기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로한은 양손으로 맥주잔을 꼬옥 쥐고만 있었다. 힐끗 시선을 들어 이현이 있는 쪽을 살펴보니 그는 옆의 어떤 여자가 걸어오는 말에 대답하느라, 주변을 살피다 잔을 채워주는 걸 또 받느라… 하여튼 여러모로 바빠 보였다.
‘내가 이현이 옆에 앉고 싶었는데…’
응당 여자친구라면 당연히 요구받아야 할 그의 옆자리마저 로한은 쟁취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현의 전공 과 회식에 눈치도 없이 이렇게 앉아 있는 것부터 잘못한 일일지도. 로한도 나름대로 억울했다. 그저 사귀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애인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고, 몰래 찾아가서 놀래켜 주고 싶은 장난기도 발휘했을 뿐이었다.
‘그게 어쩌다가…’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닥 재미가 없나? 괜히 오게 한 거 같아서 우리가 미안하네.”
옆의 남자가 로한의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주며 싱글거렸다. 로한이 이현의 강의실에 찾아갔을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냥 가겠다고 했을때 굳이 붙잡아서 와도 괜찮다고 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이런 자리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무용과는 회식 같은거 잘 안하나봐?”
서스럼없이 타과 학생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걸 보면 이현이랑 친한걸까. 하긴 자신이 아는 은이현이라는 아이는 어디에 있던 중심에서 웃고 있던 사람이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찾아준 유일한 사람. 그런 이현과 친한 사람이라면 그리 나쁜 이는 아닐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로한이 지금의 이현에게 더 잘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대학에서의 이현은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숨기고 있는 걸 일부러 파헤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제 연인인걸.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음, 그런 편이긴 해요. 다들 체중관리도 해야 하고…”
“아~ 또 그런 어려움이 있구나. 그래서 술 잘 안 마시는 거예요?”
미안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가 홱 로한의 잔을 뺏어들더니 꿀꺽꿀꺽 안에 든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어어? 잔을 뺏긴 로한이 당황해선 눈만 꿈뻑거리자 그가 씩 웃으면서 그녀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마시기 힘들면 마시지 말고. 이현이하고는… 무슨 사이?”
“아, 그게…”
로한이 다시 고개를 살짝 돌려 이현이 있는 쪽을 보았다. 쭉 곤란해 보이던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잠시 화색이 도는듯 하다, 금방 다시 굳어졌다. 나를 보고 기뻐한 게 아니었구나. 그런 슬픈 착각을 할 정도로. 로한은 아직 자신이 이현에게 어울리는지 어떤지 자신이 없었다. 스멀스멀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기분에 앉은 원통 의자가 더 불편해졌다. 가게 안은 에어컨 바람을 너무 세게 틀어 놓아 서늘한 기운이 그대로 검고 얇은 스타킹을 뚫고 들어왔다. 가방 아래 조금 말려 올라간 원피스 자락을 내리곤 고개를 숙이고 있자 손등에 툭, 옆에 있는 남자의 체온이 닿아왔다.
“역시 그런 사이야?”
“…네?”
갑자기 귓가에 대고 소근거리는 말소리에 놀라 로한의 어깨가 움츠러들며 경직되었다. 그보다, 그런 사이라니? 이현이가 자신과의 관계를 이 사람에게는 말한 것일까? 그렇게…까지 믿을만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자신의 편견 때문인건지 아니면 이현이가 자신과의 관계를 조금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인지. 로한은 술도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리며 불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네가 걔 타입으로는 안보였거든. 오히려 내 스타일이랄까?”
“아, 그… 게, 무슨…”
미묘하게 좁혀진 거리감이 답답했으나 옹기종기 붙어 앉은 탓에 로한은 의자를 조금 뒤로 빼거나 몸을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것밖엔 별 방도가 없었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로한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남자의 손목을 꽉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이제 그만하시죠?”
로한의 금안이 동그래져선 그의 얼굴을 담아냈다. 은이현이었다. 미간이 팍 구겨진 모습이 로한에게는 낯설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 일으키는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러웠지만. 남자와 로한의 사이에 서선 말없이 그녀의 가방을 챙겨드는 이현을 보며 선배라는 작자가 코웃음을 쳤다.
“왜 이래? 내가 뭐 얘를 망치기라도 할까봐?”
남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현이 그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앉아있던 사람들 몇몇이 일어났고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며 소근거림으로 변했다.
“그만 하라고.”
“이, 이현아… 나는, 그… 괜찮은데..”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가 옆으로 굴려 로한을 보았다. 쭈뻣거리며 불안해하는 호흡에 이현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홱 남자를 놓고는 얼른 로한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감싸쥐자 한기와 함께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내가 또 무슨 짓을. 이현이 두 눈을 감고 한숨을 쉬자 로한이 아래를 보던 시선을 위로 들어 이현을 응시했다. 그제야 이현이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그가 로한의 손을 잡고 술집을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야, 갑자기 고상한 척 하지마!”
이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에 따라 로한의 시선도 이현에게 향했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쥔 그의 손의 악력이 서서히 강해졌다. 바깥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둘의 피부를 따듯하게 덥혀온다. 꾹 다문 입술과 매서운 눈빛… 로한이 본 적 없은 이현의 얼굴이었다.
밤거리에는 차들이 도로를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빨갛고 노란 전조등의 불빛만이 가득했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한번 바뀌었음에도 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로한의 손을 잡은 힘만이 여전했을 뿐.
“이현아…”
로한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둘이 같이 있으면 항상 먼저 조곤조곤 말을 건내주던건 언제나 이현이었기에 로한은 이럴때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자각하고 있었다. 옆에서 울리는 자그만한 목소리도 익숙한듯 이현이 표정을 풀어내며 입꼬리를 겨우 올렸다.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살짝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춰낸다.
“… 왜?”
약간 잠긴 목소리에 로한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방울진 눈물을 떨어트릴듯 젖어갔다. 이현이는 다정하니까, 그래서 내가 싫어져도 곧바로 밀어내질 못하는거야. 눈물을 꾹 참아내야 할 텐데, 로한은 이현의 앞에서는 늘 눈물샘이 약해지곤 했다. 같이 손을 잡고 등교길을 거닐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미안해…”
그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로한은 그저 다른 손으로 이현의 반대쪽 손을 손가락으로 한올, 한올 엮어내듯이 잡아냈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뺨을 살며시 감싸오는 약간 까슬한 감촉에는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아니야, 로한아… 왜, 왜 네가 사과해…”
어둑한 밤공기가 묻어선 얼룩덜룩하게 애달픔이 적셔 있는 얼굴. 심장이 살 죄어오는 아픔에 로한도 손을 뻗어 이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여름 밤의 공기는 축축해서 둘의 뺨은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미약하게 끈적거렸다.
“그냥,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 분위기 안 좋아지게 만들었잖아.”
“네 탓 아니야. 그 자식… 아니, 그 인간이 이상한거지.”
이현의 말투가 빨라졌다가 로한이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을 보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젠 그 자식하고 다신 말섞지 마.” 한숨을 푹 내쉬는 이현을 곁눈질로 살피던 로한이 손을 내려선 이현의 허리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 작은 힘에 이현은 기꺼이 시선을 로한과 맞춘다. 차가 도로를 쌩 달리는 바람결에 로한의 긴 머리칼이 낙화처럼 흩날렸다.
“우리가… 그런, 사이냐고 물어봤어.”
로한의 눈동자 안에 이현의 당황한 표정이 담겼다. 무슨 뜻일까. 로한은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이현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술렁거리곤 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시절의 이현이. 내가 몰라야 하는… 이현이. 로한은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현을 믿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의 어린 과거와, 현재에만 존재하는 그를.
“… 미안해.”
“왜, 사과해?”
설명할 길이 없어 내뱉은 말이 되려 로한의 목소리를 젖어가게 만들었다. 그 새끼는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야. 나랑 같이 사람 가리지 않고 나뒹굴던 쓰레기 새끼야. 우리를 그런 사이로 본거야. 감히, 감히 너를…
말은 언제나 빙빙 돌았다. 꼭 해야 할 말일수록 그랬다. 후회와 질투와 미련과 집착이 별로 마시지도 않은 술과 함께 위장에서 섞여들다 욱, 하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니글거리고, 역겨운 기분… 모두 자신이 벌인 일이라는 게 또 헛웃음만 나온다.
모든 걸 네게 털어놓을 결심도 없이 너를 사랑하고 만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을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사과하지 마… 그 사람이 말하는 게 뭔지는 나, 모르지만…”
로한이 아래로 떨어트렸던 고개를 애써 들어올렸다. 가늘게 떨려드는 손을 이현이 꽉 잡아낸다. 어떤 말이라도 들어야 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역동했다. 쏴아- 또 차가 지나가면서 바람이 불어왔다. 한여름으로 접어드는 밤기온은 끈적거리고 습했다. 그럼에도 로한은 손이 떨렸다. 손만 떨린 것은 아니었다. 어깨가, 눈가가, 마음이… 차오르는 불안을 이겨내고 싶어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꺼풀을 깜박거리면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약간 쳐진 눈꼬리가 젖어든다 싶으면 하얀 뺨 위로 눈물길이 만들어진다.
“나는, 이현이 네가 하는 말만 믿으니까…”
키스하고 싶어. 이현은 로한의 말에 아연해지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욕구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안심시켜주고 싶어. 이제 난 너밖에 없다고 속삭여주고 싶어. 하루종일 널 껴안고, 네 뺨부터 팔까지 쓰다듬고 너를…
“로한아… 나를 믿어?”
그러나 입술 밖으로 나온 질문은 제 옹졸함이었다. 어디까지 넌 나를 믿을 수 있는지, 네가 알던 은이현이란 사람은 아마 없어진지 제법 되었을 터인데도… 8월의 파란 하늘만 아래서 서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웃을 수 있었던 자신은 이제 없다.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그때의 자신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만든 건 오로지 로한이 주는
“응. 난 언제나 너 믿어.”
이 항상성 뿐이었다.
“… …”
이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폐부를 차오르는 공기는 열대아답게 답답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속은 어딘가 뚫린 느낌을 받는다. 이기적인 자식. 자괴감과 기쁨은 동시에 차올랐다. 입가가 청량하게 올라가 버린 것은 그 때문이리라. 이현의 엄지가 로한의 젖은 뺨을 훑어냈다. 로한은 그의 뺨에 패인 보조개에 시선을 오랫동안 두었다. 자신이 아는, 자신만이 아는 이현의 웃는 모습이다. 그제야 안심이 들었다. 나도 참, 이기적이다. 서로 맞잡은 손의 온기가 이제서야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뜨겁게 얽혀 달라붙은 손들에서 올라온 체온이 그대로 로한의 두 뺨까지 물들였다.
로한의 분홍색 옆머리를 귓가로 넘기던 이현의 반대쪽 손이 목 뒤로 넘어간 것과 로한의 다른 쪽 손이 이현의 허리께 옷자락을 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르륵,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소근거리자 둘의 코 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다.
“… 키스해도 돼?”
보통의 이현이라면, 로한을 재회하기 전의 이현이라면 이런 초짜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장소에서도 하지 않는다. 입맞춤이란 분위기를 타기 위한 전조에 불과했으므로. 하지만 이현은 허락 받고 싶었다. 상대가 사로한이었으니까. 제게 늘 진심을 부딪쳐온 사람이었으니까.
금안을 데구룩 아래로 굴리던 로한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희미한 가로등 빛 아래서 입술만 또렷히 보였다. 이현은 인내할 수 있었다. 꼭 이 순간이 아니어도 좋았다. 로한은 자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먼 옛날 서로를 처음 마음에 품었을 때부터, 지금 이렇게 연인으로서 손을 잡고 마주보는 지금까지.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남자가 로한에게 들러붙던 게 생각나는 걸까.
“나, 자, 잘… 못하, 는데…”
푸하! 이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큭큭대는 소리가 커지자 로한이 귓가까지 빨개진 채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새침해진 표정, 샐쭉이는 입술에 또 시선이 닿고 만다.
“그런거, 하나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지만…”
“내가 다 알려주면 되니까… 자, 봐봐…”
다시 천천히 이현의 고개가 로한에게 가까워져 갔다. 슬 기울여선 질끈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구경하다, 살며시 입술끼리 맞닿아선 꾹 눌렀다가 혀 끝으로 하순을 핥아 주었다. 어깨를 경직시킨 로한에게 이현이 작게 속살거린다.
“숨, 코로 쉬는거야… 입술은 조금 벌려두고…”
그의 말대로 코로 호흡을 들이키니 어깨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저절로 꾹 다물고 있던 입술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져 벌려졌다. 이현은 순간 안으로 거치없이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의 설육은 조심스레 앞니를 핥다가 틈새로 들어가 로한의 작은 입 안을 부드럽게 유영했을 뿐이었다. 달큰한, 아 늘 로한이가 쓰던 향수구나. 플로랄 계열의 향기가 이현의 코를 건들이자 목덜미를 움켜 잡은 손끝에 힘이 가해졌다. 하지만 이현은 더 일어나는 번뇌를 끊고 그녀의 입 천장을 간지르고 치열 까지만 훑어내었다. 여전히 어쩔 줄 몰라 경직된 귀여운 혀를 쪽 빨아 올린건 충동이었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물렸다.
“후우…하아-”
이 정도로도 벅차해선 색색거리며 입술을 벌린 채로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제 애인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상념이 뒤엉켰으나 이현은 참아냈다. 좀 덥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내내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이나 더 쥐여본다. 로한이 조건반사처럼 홱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겼다. 어어 이건 반칙이지? 심장이 그대로 팍 쪼그라드는 줄로만 알았다.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이제는 숨길 필요 없이 상대를 꽉 껴안아도 된다는 게, 연인이라는 관계의 가장 좋은 점이었다.
“감상 안 말해줘?”
“… 어려워…”
“그럼 많이 연습해야겠네. 나랑.”
“내가 너 아님 이런거 누구랑 해…”
아아- 그만! 더 이상 들으면 정말 로한을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데려다주고 싶어진다. 이현은 장난기 가득 웃으며 품 안에 가둔 로한을 요리 조리 살펴 보았다. 두 팔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다가도 제 시선을 느끼자 힐끗 저를 올려다 보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모든 새까맣던 감정이 저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다 잘될거라는, 붕 뜬 희망만이 자신을 잠식해 나간다.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 응.”
한참을 껴안고 있던 걸 풀어내어도 연결된 손만은 풀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버스정류장까진 대략 5분,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집 앞까지 데려다 줘야지. 그러면 좀 더 오래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무슨 닭살 커플 같은 생각만 튀어나오는 자신에게 이현은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라… 좋아서 웃는건데?”
허리를 숙여선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드는 이현이 로한은 부끄러웠다. 첫키스는 조금 쌉쓰레한 맛이 났다. 그때 술을 마신걸까? 맥주 맛이었나… 일부러 엉뚱한 생각을 하는건 방금 전 그 감각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이 앞선 것치곤 부드럽고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그건 필히, 상대가 은이현이란 남자여서 그랬으리라.
“나도… 이현이 네가 좋아.”
수줍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이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마침 정류장에 도착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로한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그녀가 언제나 똑바로 전해오는 진심에는 익숙해졌다고 자부했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낭패이기도 했다. 하루하루도 아니고 순간순간마다 좋아지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로한 이전에 매달려 왔던 사람에 대한 감정이 낡아지는 걸 체감하는 일이기도 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서글프고, 또한 무서웠다. 기저에 깔린 원인이 꼼짝없이 과거의 자신이라 더 그랬다.
그래도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 나랑만. 그런 거, 해야 돼…?”
동그란 금빛 구슬 두 개가 이현을 응시했다. 일순 같은 생각을 한거 같아 이현의 두 눈도 잠시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진다. 당연하지. 로한은 이현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추측했다. 자세히 떠올릴 수 없는 이유는, 곧바로 두 명의 입술이 다시 겹쳐 들었으니까. 버스 한 대가 빠르게 정류장을 지나쳐 나갔다. 후덥지근한 찻바람까지 기분 좋게 상쾌하게 느껴지는건 단순히 계절 탓만은 아니었다.
여름밤이 짧다는 상식을 나는 믿지 않아. 그날만큼은 온통 네 냄새가 축축하고 까만 바람에 적셔져 있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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