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적기花事適期

축적가학미학론

 

 

화사花事 [huāshì]

 

1. 꽃이 피는 상황. 개화 상황.

2. 봄에 꽃을 감상하는 일.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을 유리 다관에 쏟아붓자 그 안에서 일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찻잎이 춤추었다. 붉게 우러난 물을 곧바로 따라내고 끓는 물을 다시금 다관에 채워 넣는다. 원래 오랜 시간 동안 따뜻하게 즐길 수 있는 자사호가 제격이나, 이 유리 다기는 내부가 투명하게 비쳐 보여 맑은 물에 붉은색이 섞여가는 모습을 감상하기 좋았다. 수주 역시 상등품이라 물 따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았지만, 청년은 물 흐르는 소리를 좋아했다. 물소리를 내기 위해 유리 다관을 다시 채우는 손이 다소 성급하게 수주를 기울이다가,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자 흠칫하더니 다시 각도를 완만하게 되돌렸다.

차를 우리는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고 섬세해야 한다. 정성 들여 우려낸 차는 시간이 더해진 만큼 깊은 맛을 낸다고 등 뒤의 남자는 거듭 강조해왔다. 차를 우리는 청년의 등에 가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천천히 양팔을 뻗어 청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물이 넘치고 있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정신이 팔려 이 뜨거운 물이 흘러넘치는 것도 몰랐다. 남자는 청년이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손에 조금 힘을 넣어 단단하게 붙잡더니 수주를 탁자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작게 울리는 툭 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온 타르탈리아가 머뭇머뭇 뒤돌아보았다. 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가 일어나 넘치는 물에 고급 찻잎이 소량 손실되었다 해도, 다른 데 정신이 팔려 펄펄 끓는 물의 온도가 다소 내려갔다고 해도 평범한 이에게라면 별문제 될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등 뒤의 남자는 완벽주의자라 성가실 정도로 모든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서 마주한 호박색 눈동자에는 책망의 빛이 없었다. 자신의 기척에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했는지 날카롭던 눈매가 가늘게 좁혀지기까지 했다. 타르탈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종려는 수주를 내려놓은 손으로 뚜껑을 집어 들어 다관에 얹은 뒤 꾹 눌렀다. 다관 윗부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표면장력은 위에서 압박하는 힘에 맥없이 무너져, 뜨거운 물이 유리 곡선을 타고 작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떨어지는 물이 비명처럼 토해낸 가느다란 수증기가 종려의 손가락을 휘감았을 때 서로의 뒤섞인 숨결이 기도로 스며들었다. 폐부를 거쳐 상승한 혈류는 머릿속을 자욱하게 흐려놓았다.

 

겹쳐졌던 종려의 손이 타르탈리아의 팔 윤곽을 그리듯 천천히 타고 올라가다가 이내 상의 아래쪽의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맨살을 드러낸 채 밖을 활보한다 해도 지금처럼 무방비하게 접촉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손가락 마디 끝으로 덧그리듯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은 그와의 방사房事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자극을 주어서, 반사적으로 긴장한 신경이 촉각을 증폭시켰다.

 

종려는 타르탈리아의 섬세한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여전히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지척에서 내려다보았다. 농밀하게 천천히 흘러내리는 시선을 다시금 의식하고 턱을 들어 뒤얽히는 호흡의 간격을 좁힌다. 아주 조금, 종려가 아주 조금만 고개를 숙여준다면 이대로──.

 

“지금은 안 돼.”

 

낮은 목소리가 그렇게 고했다. 종려는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기분이 언짢을 때면 타르탈리아를 향해 평어를 사용했다. 제지하는 말은 어린아이를 어르듯, 엄하지만 부드러운 것이었다. 실컷 분위기를 잡아놓고 애만 태운 채로 그만두겠다니, 타르탈리아로서는 어이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종려에게 안겨 고개를 든 자세 그대로 무언가 항의의 말을 하려고 입을 연 그때.

 

“말 들어야지.”

 

타르탈리아의 다음 행동을 내다보았다는 듯 못 박으며 옷 속으로 파고들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차가 다 우러났으니 다과를 꺼내 오란다. 마치 애완동물을 대하듯 허리를 툭툭 두드리기까지 하면서.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당황하는 타르탈리아의 모습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대낮이고 타르탈리아가 숙소로 사용하는 이 방 밖에는 부하들이 대기하는 중이었으며, 명목상 일 때문에 만나 대화하는 자리였으므로 분위기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행위에 몰두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의 판단이 옳다.

그래도 놀아난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데서 피어오르는 짜증을 뒤로하고, 타르탈리아는 방 한쪽에 놓인 수납장으로 향했다. 문갑을 열자 어두운 바탕에 금색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예상꽃 모양으로 빚은 다과가 두 개 들었는데,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공예품이라 하루에 한정된 수량만 파는 것이었다. 예약까지 한참 차 있다는 걸 고상한 연인과의 다회를 위해 웃돈까지 주고 구해 온 타르탈리아였지만, 저렇게 귀여운 구석이 없어서야 노력하는 만큼 보람이 있을지 어떨지. 그래도 이 아름다운 다과를 보고 감탄한 연인의 입에서 흘러나올 탄식을, 장인의 예술품을 눈앞에 두고 변화할 눈빛을 상상하니 조금은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상자를 들고 종려가 앉아 있는 탁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타르탈리아를 등진 채로 곧게 앉아 다완에 차를 따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 두 개를 다 채웠는지 다관을 옆에 내려놓느라 약간 고개를 튼 뒷모습에 위화감이 비쳤다.

 

“……?”

 

타르탈리아는 상자를 든 채 걸음을 멈추고 종려의 뒷덜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틀며 셔츠의 깃이 미세하게 내려갈 때 그의 목에 불그스름한 무언가가 비쳐 보였다. 황금을 달구면 저런 색일까. 옷으로 가려질 정도이니 그렇게 큰 건 아닌 듯한데, 원래 없었던 흔적이 몸에 보이면 연인된 입장에서 당연히 신경 쓰이는 법이다.

잠시 생각한다. 내가 남겼나, 하지만 종려는 타르탈리아에게 좀처럼 등을 보이는 일이 없다. 평소에는 단단히 껴입고 있는 데다가 둘만 있을 때는 거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 등을 본다 해도 목덜미는 머리카락에 가려 자세히 보지 못했다. 여유도 없었고. 게다가 관계 도중에 타르탈리아가 그의 몸에 흔적을 남기더라도 치유력이 인간과 달라 곧바로 피부는 깨끗해졌다. 저 붉은 흔적은 분명 위화감을 가진 무언가였다. 종려의 몸에, 어딘가 이상이 생겼다.

 

타르탈리아는 유대로 묶인 관계를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했으므로, 이 결론에 도달하자 사고가 거의 정지하기에 이르렀다. 가족이 아플 때 느꼈던 불안과는 달랐다. 인간으로서 대하고 있지만 종려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타르탈리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따라서 종려의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 한들 타르탈리아로서는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다. 병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 고통을 느끼는지, 언제쯤 낫는지 하는 보편적 경험이 전혀 쓸데없기 때문이다. 비인간적 존재를 사랑하면서도 여태까지 별 탈이 없다 여겼는데, 잘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심장을 내주어서 어딘가 문제가 생긴 걸까. 변치 않고 영원히 그대로일 것만 같던 그에게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니, 발견한 이상 가만있을 수는 없다.

 

퍼뜩 정신을 되돌린 타르탈리아가 성큼성큼 걸어 탁자에 나무 상자를 떨어뜨리듯 내려놓았다. 원목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종려가 무표정하게 올려다본다. 타르탈리아는 떨림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목에 그거, 뭐예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지, 아니면 정말 의식을 못 했는지 종려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목?”

“목 뒤에 붉은기가 보여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뒷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듣던 종려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평소의 무표정을 무너뜨려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별것 아닙니다. 마음 쓰지 마시오.”

 

무심한 대답과 함께 손가락으로 셔츠 깃을 우아하게 잡아 올린다.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는 반응.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이고 말았다는 듯한 당황의 기색. 종려가 당황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우려가 확신으로 바뀌는 그의 반응에 타르탈리아에게서 다소 격양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는…….”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까. 이제 인간이라고 아무리 되뇐다 한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짧게 한정된 인간의 시간과 달리 그는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와서 무딘 걸지도 모른다.

 

“……모르잖아요, 당신에게 이상이 생겨도…….”

“타르탈리아.”

“나 따위에겐 못 알려주겠어요?”

 

걱정은 점차 서운함으로, 분노로 바뀌어갔다. 이 관계에서 항상 휘둘리는 쪽은 타르탈리아였다. 종려는 고자세로 내려다보며 온정을 베풀듯 무표정으로──.

 

──무표정이어야 하는데.

고개를 들고서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종려를 바라본 타르탈리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에 없이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굳게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호박색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깐다. 타르탈리아의 원망 어린 시선을 피하듯이. 입술이 한 번 달싹였다가 다시 굳게 닫혔다. 왼손을 들어 턱에 대고 짧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종려는 주저주저하며 시선을 타르탈리아에게로 맞추고 입을 뗐다. 빨려들 것 같은, 고농축된 벌꿀처럼 달콤해 보이는 광석이 타르탈리아의 망막에 맺혔다.

 

“…………혼인색婚姻色입니다.”

“……네?”

돌아온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타르탈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종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종려가 그 반응을 지켜보더니 다시 쓰디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인을 곁에 두는 건 아주 오랜만이라. 곧 사라질 테니 걱정 안 해도 되오.”

 

혼인색.

흔히 번식기의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적 체색변화이며, 수컷에게 한정 발현되어 생식 작용을 촉진한다는 그것.

 

“종려 씨, 발정기예요? 저 때문에?”

“……말 좀 가려서 하지. 그대 때문인 건 맞소.”

 

아까 차를 내릴 때 왜 제지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너무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했다. 반려를 곁에 두어 혼인색이 몸에 올라오는 체질이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원래는 용과 기린을 섞은 신수의 모습이니 인간과 다르게 혼인색이 나타난다 해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종려의 경우는 목 뒤가 붉게 물들었으니 갈기 근처이려나. 자세히 보고 싶어진 타르탈리아가 한동안 종려를 졸라보았으나 그는 결단코 거절했다. 연인 사이이니 스스럼없이 보여주면 좋을 것을, 자신의 동물적인 면을 보이는 일이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히 사라질 겁니다. 척추부터 타고 올라오는데, 목 부근까지 보일 줄은.”

“함께 지낸다는 건, 요컨대 자자는 말 아닌가요?”

“……말하자면 그렇지.”

“안 보여준다면서요?”

“…….”

종려가 다시 입을 닫았다. 몇 번째일지 모를 무거운 한숨 소리가 타르탈리아를 즐겁게 했다. 이렇게 곤란해하는 종려를 보기는 처음이어서, 타르탈리아는 연인끼리 흔히 주고받는 농담을 건네보기로 했다. 이 남자는 분명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한 반응을 보여줄 테니까.

 

“굶겨야겠네.”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버렸지만 종려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능숙한 그라면 이렇게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발정기의 수컷이라는 기간 한정 특수성 때문인지 이 민감한 화제에 관해서는 어딘가 고장 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묵직한 종려의 시선이 타르탈리아에게로 향했다. 거기에는 아주 약간의 원망까지 섞여 있어서 타르탈리아는 소리 내어 웃고 싶어졌다. 아마도 앞으로는 다시없을 기회, 귀엽지 않은 연인의 귀여운 반응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타르탈리아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짐승처럼 발정이나 하다니, 볼만하네요.”

종려 선생님.

 

일부러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붙여 부르면서 그를 도발한다. 품위 없는 단어와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불균형을 자아내어 둘 사이의 공기에 섞였다. 항상 종려가 주도권을 가지던 관계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맛보는 흥분이었다. 색다른 희열은 눈앞의 연인을 더 갈구하게 했다. 타르탈리아가 돌아올 반응을 기대하며 환희에 기뻐하는 사이, 종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귀공자」 타르탈리아.”

 

종려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타르탈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묵직한 하중을 감당하는 나무 바닥이 작게 소리를 냈다. 코앞까지 다가온 종려의 시선이 짓누르듯 내려앉았을 때 주도권도 원래 위치를 되찾았음을 타르탈리아는 직감했다.

“뒷감당이 두렵지 않습니까?”

종려의 두 팔이 타르탈리아의 허리에 감겼다. 쏟아지는 시선이 고압적이어도, 몸에 닿은 높은 체온이 호흡을 방해해도, 온몸을 지배하는 그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짓눌릴 것 같아도 이것은 종려의 구애였다. 그의 평정심을 무너뜨리고 적나라한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만족감에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호흡은 뒤섞이고 마침내 입술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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