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04

레토릭 by 박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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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기는? 어차피 넌 맞선을 보고 싶어하지도 않았잖아? 그 시간에 대신 암왕제군께 스네즈나야를 구경시켜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라는 것뿐이야. 사실 별로 다르지도 않은 일이지.”

“왜 나를 형 마음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거냐고!”

“아약스! 너야말로 대체 왜 이러는 거냐? 그럼 내가 그 자리에서 암왕제군께 네가 당신을 싫어하니 초대할 수 없다고 말했어야 했니? 맞선도 싫다, 접대도 싫다, 뭐 어쩌라고? 너 그렇게 어리광 부릴 나이냐? 행여 토니아의 일로 암왕제군께 앙금을 품었다고 해도, 우리 가문이 그 분께 빚을 진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암왕제군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너한텐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냐? 이 씰을 봐라. 여왕님께서 친히 서신까지 보내셨어. 암왕제군을 잘 대접하라고. 난 가주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야! 그런데 넌 뭐야, 아약스. 무조건 싫다, 안 된다, 하지 말라. 차라리 이 형을 납득시켜. 이해를 시키라고! 내가 네 이야기를 안 듣겠다는 게 아니잖아!”

타르탈리아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침묵했다. 뒷짐을 진 채 벽난로 안을 들여다보던 디오는 몸을 휙 돌려 아약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혹시 나한테 말하지 못한 비밀이라도 있는 거니?”

“….”

“…네가 밖에서 ‘타르탈리아’로서 고생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 저택에서 넌 ‘아약스’일 뿐이야. 그러니 가문과 가족을 위해 협조해라.”

“…알겠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에 디오는 서재에서 나갔다. 타르탈리아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힐끗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윽고 그는 서재 문을 살짝 열었다. 시린 바람이 들어오자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는 소복소복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토니아가 종려와 결혼하면 3년 뒤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면 제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미친놈 취급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아예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원천 차단하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막고 싶었는데…. 사랑에 빠지는 토니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안이 썼다. 그 마음을 온전히 축복해줄 수 없는 마음이 미웠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의 마음을 부정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응원하고 격려만 할 줄 알았지, 탐탁지 않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토니아는 이제 겨우 성인이다. 종려 같은 남자를 보고 설렘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미안하지만, 그 감정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아픈 첫사랑으로 남아야 했다. 이 타르탈리아가 그렇게 되도록 전력으로 방해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토니아는 상처 받고 누군가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다.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만큼은 피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희뿌연 연기를 천천히 뱉으며 창틀에 비스듬히 앉는다. 짐승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너른 정원을 바라보던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털다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형?”

기척이 느껴졌다. 디오가 무언가 놓고 가서 다시 온 줄 알았더니만 상대가 아무 대답도 없자 타르탈리아는 잽싸게 담배를 등 뒤로 숨겼다. 아직 안톤이나 테우세르에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방어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종려였다. 안도의 한숨이 가볍게 흘러 나왔다.

“놀랐잖아요.”

“궐련을 태우십니까?”

오히려 놀란 것은 종려처럼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서재 안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손에 들린 담배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그대로 담배를 문 타르탈리아의 입술을 빤히 바라본다.

“한 대 피울래요?”

“리월에서 담배는 보통 곰방대로 태웁니다. 네, 연초라고 부르지요. 정제하지 않은 마약류의 잎사귀를 곧바로 태우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독해서 어린 청년에게는 권유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관지 치료를 위해 약재를 태우고 그 연기를 마시기도 하죠. 그래서 리월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공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피우다 걸리면 벌금을 냅니다. 스네즈나야의 담배는 궐련이군요. 보통 군인들은 이렇게 종이 담배를 선호한다고 하던데 진짜인가 보네요. 아마 곰방대나 파이프는 소지하고 다니기 귀찮아서 그런 것이겠죠. 그렇다면 다른 귀족들도 이렇게 종이 담배를 선호합니까? 오, 이건. 라이터네요! 아아, 종이 담배기 때문에 라이터가 훨씬 더 편하긴 하겠군요. 곰방대처럼 구멍이 있어 그 안으로 불씨를 집어넣지 않아도 되니까. 이 라이터의 만듦새를 보아 하니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왜 스네즈나야가 제조업에 강세인지 알 것 같군. 아주 섬세하고 정교하네요. 특히 이 부분이….”

“…그래서 한 대 줘요, 말아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타르탈리아 씨가 피우는 모습을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시든지요.”

정말이지, 이 남자는 말이 굉장히 많다. 심지어 그 불청객은 보란 듯이 타르탈리아를 훑어본다. 그는 부드럽게 머리를 헤집으며 연기를 내뱉으며 일부러 못 본 척 하다가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에 기어코 눈을 마주한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형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타르탈리아 씨가 제가 머무를 방을 안내해줄 거라고 하시던데요.”

“…아. 깜빡 했어요. 가시죠.”

“괜찮습니다. 급할 것도 없고. 천천히 피우세요.”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려던 타르탈리아는 연기를 천천히 내뱉으며 흘러내린 멜빵 끈을 고쳐 맸다. 그 사이에 종려는 여전히 타르탈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이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

뭐라고? 타르탈리아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남자 손이 아닌가. 아니, 평범한 쪽은 아닐 것이다. 우인단에 징병된 이후 누구보다 혹독하게 지내와서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다고 할 수 있는 손은 아니었다. 손마디가 두껍고 핏줄이 불거져 보이는데다 쓸데없이 기름하기만 해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에게 종려가 다가왔다. 그는 일부러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창문 밖으로 연기를 훅 내뱉었다. 그러나 가까워진 종려는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까워…. 불현듯 지난번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었던 종려가 생각나서 속에서 열이 났다. 그런 분위기에 갑자기 키스하는 **가 제정신일 리 없다. 심지어 난 남자인데! 역시 멀리 하는 게 상책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타르탈리아는 휴대용 재떨이의 뚜껑을 닫을 뿐 차마 그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탓이다.

“아까 피아노 연주, 정말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연주하신다더니 실수도 거의 없으셨고. 피아노 치실 때 손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연설 이야기는 또 뭔가요? 어디 무대에 오르시는 겁니까? 저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다 옛날 이야기라니까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어떻게 해야.”

갑자기 가라앉는 분위기에 타르탈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종려의 손가락이 천천히 타르탈리아의 손등을 두드린다. 이윽고 그는 타르탈리아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집어넣는다. 자연스럽게 재떨이를 창가에 내려놓으며 몸을 비틀지만, 종려가 따라붙는다.

“어떻게 해야 내게 세운 벼려진 칼날을 무디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글쎄, 가깝다니까…!!! 타르탈리아는 일순 미간을 좁히며 종려를 바라본다. 혈관이 터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어 살결이 비틀리는 것이 느껴질 때였다. 그의 귓가로 집행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뺨을 후려치던 아를레키노, 사악하게 속삭이던 도토레, 그리고 자신을 비웃던 스카라무슈까지. 그를 또다시 속 시원하게 패려던 타르탈리아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형으로부터의 전언이다.

이건 별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야. 치욕스럽지도 않고, 모욕감을 느낄 만한 일도 아니야.

자신에게 세뇌하며, 타르탈리아는 도망가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대신 그는 천천히 호흡하며 종려를 바라보았다. 종려의 시선은 타르탈리아의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야말로 궁금한데요,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을 갖는지. 이유가 있어요?”

“귀공자께서는 그것이 궁금한가?”

“….”

“흠. 일단은 원래 용은 예쁜 것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해두죠.”

황금색 눈동자가 번뜩일 때였다. 그는 마치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이 곧장 타르탈리아에게 입술을 붙였다. 어찌나 거친 입맞춤인지 허리가 꺾일 정도였다. 남자의 입술이라고 하기엔 무척 부드러웠으나 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우악스러웠다.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타르탈리아를 잡아당긴다. 타르탈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비틀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종려의 팔을 붙들었다. 그것이 자신을 원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곧장 바지를 붙들고 있는 타르탈리아의 멜빵을 풀어버렸다. 탄력이 있는 끈이 튕겨져 오르고 느슨해진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신기한 담배네요. 박하향이 나요.”

사실 타르탈리아는 무성애자에 가깝다. 대빙벽에서는 서로를 ‘군인’이자 ‘가족’ 취급했다. 그러니까 남성이나 여성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전우애가 깊어진 사람끼리 흘레붙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 행위는 성별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타르탈리아는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았다. 애초에 성욕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대빙벽은 생존 본능이 더 우선시되는 곳이었다. 그는 살고 싶었고, 살아서 가족들을 보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 스네즈나야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섹스는 허튼 짓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결혼하겠거니, 하는 정도였다. 형은 계속 선을 보라고 압박을 넣고 있었고, 아이들을 몹시 좋아하는 편이니 내가 낳은 자식이라면 더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이 모든 것도 막연한 망상일 뿐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1번째 집행관이자 대빙벽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자신에게 시집 올 여자 따위는 없을 테니. 그래도 남자와 섹스하는 건 한 번도 망상 해본 적 없지만.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샅을 붙이는 종려의 외설적인 행동에 일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누군가에게 비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보다는 역겨움에 가까웠다. 우인단에 징병된 이후 이런 무력함을 오랜만에 느낀 탓에 불쾌함이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심지어 상대는. 자신의 매부였던 사람이다. 별안간 토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그녀의 얼굴에 눈앞이 흔들거렸다. 여동생이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래도 되는 건가?

하지만… 빚을 졌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타르탈리아는 솟구치는 토악질을 가까스로 찍어 누르며 빠르게 말했다.

“하, 한 번이면 됩니까?”

그 말에 타르탈리아의 옷을 벗기던 종려가 멈추었다.

“한 번만 대주면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럼 빚이 청산되는 건가요?”


그러자 종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주다니, 굳이 말을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 그럼 대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난 당신의 몸을 원하는 게 아니야!”

“몸을 원하는 게 아니면, 좀!!!”

몇 번 티격태격했다. 타르탈리아의 허리를 잡아당긴 종려가 강하게 몸을 붙였다. 주춤거리던 타르탈리아는 허리를 몇 번 비틀었지만, 그저 민망하게 사타구니가 비벼질 뿐이어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의 품에 한아름 안긴 자세가 된 타르탈리아는 계속 그를 밀어냈지만, 애초에 책장을 등지고 있어서 밀리지가 않았다. 진퇴양난 그 자체다. 몇 번이나 몸부림쳐도 바뀌지 않는 형상에 제 화를 이기지 못한 타르탈리아가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

서서히 누그러진 타르탈리아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마지못해 종려를 바라보았다. 체념하여 얌전해지는 타르탈리아를 알아차린 종려가 차분하게 일렀다.

“힘으론 나를 못 이길 텐데요.”

“빌어먹을….”

짜증스럽게 한 번 더 종려의 어깨를 쳤지만, 그건 그냥 불만의 표시였을 뿐이다. 종려는 그런 타르탈리아의 손을 잡아 끌더니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가족을 제외하고선 이렇게 깊게 포옹해본 적이 없기에 타르탈리아의 자세는 엉거주춤 하였는데 종려가 더욱더 깊게 안아서 연인처럼 포옹하는 자세가 되었다.

일순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오소소 떨리는 팔의 흔적에 불쾌함을 느끼기도 잠시, 심장이 지끈거렸다. 쥐어짜내듯 아픈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타르탈리아는 본능적으로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종려의 옷깃을 꾹 잡았다.

단 둘뿐인 서재인데도 종려는 들킬 새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당신도 내게 관심이 있잖아요.”

“무슨 말이야? 내가 왜 관심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누누이 싫다고 말했어.”

“모르는 척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모르고 있는 건가요? 지금 흥분했잖아요?”

타르탈리아는 살짝 피가 몰려 고개를 치켜든 페니스 탓에 불룩해진 앞섶을 애써 무시했다.

“이, 이건.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억지로 나를.”

“비장한 남창처럼 굴지 마세요. 솔직하게 굴어. 정말 관심이 없었다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봐, 남창이라니. 나를 몰아세우는 건 당신이야. 이 모든 문제는 당신에게서 비롯되고 있는데, 왜 나를 그딴 식으로 묘사하지?”

“스네즈나야의 문화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나라는 너무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짊어져야 할 의무와 책임에 너무 얽매여있는 것 같아요. 좀 더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해졌으면 좋겠는데요. 나에게 관심과 호감이 있는데 왜 부정하는 겁니까?”

“그만. 정말 대화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난 아니라고 말했어. 싫다고. 멋대로 판단하지 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대상이 당신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을 통해 깨닫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젠장! 좀 놔줘요. 떨어져. 제발, 제발 그만 키스해요!”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지?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 나는, 타르탈리아 씨가 제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해요. 당신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우리 둘 사이에 껄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원만하게 끝났잖아요. 부디 마음 좀 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요. 미치겠군. 내 말을 듣질 않으니 대화가 되질 않네요. 정말 이해가 안 돼! 당신은 리월의 암왕제군이면서 왜 굳이 스네즈나야 사람인 나한테 추태를 부립니까?”

“그야, 제가 용왕자리니까요. 당신의 운명의 자리, 봉황자리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 운명의 자리는 그게 아닙니다. 고래자리라고요.”

“그게 무슨.”

똑똑.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그들이 멈춘 것은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이 저택의 사용인인 늙은 집사의 목소리가 서재 문 너머로 들려왔다.

“도련님? 손님방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알겠어요.”

타르탈리아는 조용히 종려를 노려보다가 그의 어깨를 퍽 밀쳤다. 아까와 달리 그는 쉽게 밀렸다. 흘러내린 바지를 올리고 그 안으로 주섬주섬 셔츠를 넣는다. 흘러내린 멜빵을 정돈하는 사이, 종려는 혼란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린다.

“봉황자리가 아니라니. 그게 사실입니까?”

“난 ’봉황’이 뭔지도 몰라!”

“하늘을, 하늘을 나는 붉은새입니다. …정말 아니라는 겁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타르탈리아의 운명의 자리는 경천(鯨天)자리다. ‘하늘’의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새’는 절대 아니었다.

“제발 부탁인데 남의 말 좀 듣지 그래요? 아니라고. 봉황자리도 붉은새자리도 아니라고!”

“…미안합니다.”

“….”

“제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저는.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제… 반려인 줄 알고.”

신경질적으로 톡 쏘아붙이자 순순한 사과가 되돌아왔다. 끈질기게 매달릴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심지어 또다시 벽돌을 쌓은 것 같은 장황한 말을 줄줄 내뱉을 줄 알았는데, 침묵하기까지 했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분위기에 타르탈리아는 괜스레 민망하여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계속 이 서재에서 민망할 정도로 밀착하여 입술과 뺨을 문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일단, 가시죠. 손님방을 안내해드릴게요.”

“….”

암왕제군의 방문으로 들떴던 저택의 분위기도 밤이 깊어지자 서서히 가라앉았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종려의 걸음 속도를 의식하며 저택의 복도를 가로지른다. 서재에서 나온 이후 전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상념에 잠긴다.

어찌 되었든 종려는 손님이다. 타르탈리아는 이 가문의 삼남이자 우인단의 집행관으로서 그를 접대해야만 했다.

대화는 흐지부지 되었지만, 종려 역시 흥분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내 몸을 원한다고 봐야 하겠지. 그는 계속 끌어안았고, 나를 어루만졌고, 나에게 키스했다…. 젠장. 자칫 하다간 그 서재에서 그대로 일을 치를 뻔했어―! 그 정도로 저 자식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태도는 뭐지?

예전에 뭐라고 했더라? 종려는 용이라고 했던가. 그가 지닌 뿔이나 꼬리는 마치 장식품 같아서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를 포함한 리월의 삼안오현 선인들은 전부 반인반수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용의 특성이 ‘일평생 단 한 명만을 반려로 삼는다.’고 말했을 때, 타르탈리아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게 뭐 어쩌라고, 싶었다. 스네즈나야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딱히 대단한 문화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스네즈나야인, 타르탈리아의 경우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리월의 삼안오현 선인은 일부일처제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리월은 따뜻한 날씨 덕에 밤 문화와 야시장이 매우 성행한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성적으로 아주 개방되어서, 성별, 나이, 종족도 신경 쓰지 않고 관계를 가진다고 했다. 그런 문화에서 단 한 명만 사랑한다고 하니. 용이 맹목과 헌신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운명의 자리까지 헤아리는 건, 지나치게 고리타분한 옛 방식이 아닌가? 태어난 날짜, 시간, 별자리의 형태에 따라 정해진다는 운명의 자리는 사람마다 다르게 타고나지만. 요즘 세상에 대체 누가 운명의 자리를 물어본다고? 자신의 운명의 자리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타르탈리아조차 자신이 경천자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봉황이라는 건 또 뭔데?

리월에는 참 다양한 종족이 있다. 흔하디 흔한 토끼, 여우, 강아지, 고양이, 이런 종류 뿐만 아니라, 기린, 해태, 두루미, 사슴, 학 등등…. 스네즈나야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동물이 많았다. 아마 봉황도 그 중 하나겠거니, 했다. 그러니까, 봉황은 붉은 새인가?

손님을 위해 마련된 별채로 가기 위해 긴 통로를 건널 때였다.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

나선형의 계단 위에서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하게 느껴지는 천상의 목소리는 서서히 가까워진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솜사탕처럼 풍성한 주황색 머리카락을 지닌… 토니아였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려오던 그녀는 아약스를 발견하고 방긋 웃는다.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숨겨진 진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토니아의 운명의 자리가, 붉은 카나리아였다… ‘붉은새자리’다!

수 년 전, 그녀를 입학 시킬 학교를 알아보던 때에 토니아의 운명의 자리를 거론했던 적이 있었다. 붉은 카나리아는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운명의 자리니까 토니아를 종합 예술 학교에 입학시키면 좋을 것 같다고 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노래를 잘하긴 했지만, 추운 스네즈나야에서 성대를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대신 바이올린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이올린 또한 보란 듯이 잘 해내어,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극찬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그때도 운명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흘려 들었었다. 운명의 자리가 토니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토니아가 바이올린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알았으니까! 명문 학교를 보내준 아약스에게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받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암왕제군! 별채로 가시는 건가요?!”

토니아가 또 실내화를 신은 채 몇 계단을 한 번에 점프해버릴까 봐 아약스의 마음을 조마조마 하게 만들었다. 안톤이 몇 번이나 고릴라라고 놀려도 그 거친 움직임은 전혀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당탕탕 내려오려던 토니아는 순간 자세를 고친다. 곧 새침한 아가씨처럼 도도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성숙한 여인처럼 치맛자락을 살짝 붙들고 인사를 올리자 종려 역시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예. 토니아 양. 아직 처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오… 오늘은 잠이 안 와서요. 저도 같이 별채에 가도 될까요? 별채는 안 가본지 저도 오래돼서요! 어떻게 청소했는지도 궁금하고!”

“토니아. 너무 늦었어. 이만 올라가. 너는 다 큰 처녀가….”

“그치만, 이 저택은 우리 집인 걸. 오빠가 이따가 방까지 데려다 주면 되잖아. 응? 제발.”

누가 봐도 종려와 함께 있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타르탈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토니아를 바라보다가 종려를 힐끗 응시했다. 종려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턱을 괸 채다.

그는 자신과 나눈 암묵적인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토니아와 너무 깊은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마음 같아선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으니 이제 동행하는 것은 오빠인 아약스의 허락을 맡겠다는 식이다. 물론 자신이 함께 있을 테니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내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토니아가 종려와 정을 쌓지 않아야만 했다. 그런 줄 알면서도.

“….”

타르탈리아는 지끈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토니아를 바라보았다. 두 손을 모아 애달픈 눈빛을 보내자 무시할 수가 없어졌다.

“…너무 소란스럽게 굴지 마. 알겠니?”

“응!”

토니아는 설렘과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종려를 바라본다. 타르탈리아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토니아는 잽싸게 종려 옆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녀는 카나리아처럼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약스에게 팔짱을 낀 채지만, 토니아의 얼굴과 몸은 거의 종려에게 붙어 있었다. 셋이서 나란히 걷던 토니아는 자연스럽게 날아가듯 벗어나 종려와 앞으로 나아간다. 아약스는 일부러 걸음 속도를 살짝 늦추고 앞서 나가는 그 둘을 바라본다. 그 둘은 딱히 접촉하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다. 그러나 종려는 한 결 같이 최소한의 예의만 다할 뿐 시종일관 관심 없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뒷짐을 진다든지 쳐다보지 않는다든지. 토니아만 잰 걸음으로 커다란 사내를 따라잡느라 여간 바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타르탈리아의 마음은 영 불편하다. 그는 종려가 토니아에게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었으면 하다가도 그의 냉정한 태도에 안도감이 들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병아리처럼 암왕제군의 뒤를 쫓는 토니아가 가엾고 안쓰럽다. 한 번은 크게 앓을 병치레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가도 이토록 무력하고 무능했던 적이 없었기에 실로 언짢을 뿐이다.

“괜찮다면 내일은 함께 활쏘기 하실래요? 말은 타보셨나요? 혹시 격구는 어떠세요?”

“네. 좋습니다.”

별채라고 해도 바로 옆 건물인데다 거의 쓰지 않아 간단히 청소와 정돈만 하는 곳인데, 암왕제군의 방문으로 평소보다 훨씬 더 우아한 분위기가 되었다. 소장하던 예술품을 다시 배치하고 등불까지 새로 조정한 탓에 늦은 밤인데도 마치 미술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물론 타르탈리아가 보기엔 지나치게 거창한 느낌도 든다. 어차피 며칠 머물다 떠날 이들을 위해 쓸데없이 꾸미기까지 해야 하는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비죽이며 나선형 계단을 오르던 타르탈리아는 잠시 멈추었다.

아아…. 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가.

흑색 정장을 입은 사내는 우두커니 서 있다. 심술궂게 입을 꽉 다문 듯하지만, 황금색 눈동자는 부드럽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무척 청초하지만, 붉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화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정말 잘 어울린다. 색채의 대비가 이렇게나 아름답게 느껴지다니. 빛이 들지 않는 심연 같은 그림자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타르탈리아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토니아 양. 내일 뵙지요.”

“네!”

“…타르탈리아 씨도 안내해주어 감사합니다.”

“….”

종려는 잠시 멈추었다가 턱을 쓰다듬었다. 토니아는 부러 생긋 웃으며 종려를 올려다본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종려는 살짝 토니아의 손을 들어 올리고 손등에 입을 맞춰준다. 스네즈나야의 예절을 제대로 배운 모양이다. 토니아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꼰다.

곧 그의 시선이 타르탈리아에게 향한다. 아무 말 없는 타르탈리아를 잠깐 응시하던 종려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그 말을 끝으로 종려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도카니 서 있던 토니아가 일순 입을 틀어막더니 후다닥 계단을 내려와 타르탈리아 앞에 섰다.

“어쩜! 손 키스도 저렇게 우아하게 할 수 있다니! 정말 너무 근사하신 분이야! 아아. 오빠가 보기엔 어때? 응?”

“가자, 토니아. 데려다줄게.”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암왕제군께서도 날 좋아하실까?”

“토니아!”

“아우,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 정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내가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아? 오빠가 보기엔 내가 한참 모자라 보여?”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에헤헤. 그건 그래. 제군께선 나 같은 건 보지도 않으실 거야. 그냥 꿈꾸는 거지. 황후가 되는 꿈.”

토니아는 아약스에게 팔짱을 낀 채 오라버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한껏 상기된 얼굴을 비비며 눈웃음을 치는 것이 어린 아기여우 같았다. 타르탈리아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미소는 금세 증발된다. 그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토니아는 아약스의 팔을 쓰다듬다가 손끝에서 날아오른다. 춤을 추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며 멀어지는 모습을 본다. 나비처럼 살랑대는 모습은 왜 이리도 아름다운지. 아마도 그녀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리라.

죽음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기 가득한 봄날의 처녀로다. 그저 화사하고 청순하기만 하여라.

그렇게 멀어진 토니아의 앞에 높은 의자가 있었다. 의자를 오르는 새하얀 발을 보자 아약스는 심장이 타는 듯이 아팠다. 그가 보던 맨발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밧줄을 쥔 가느다란 팔을 보자 이제 아약스는 실성했다. 목에 밧줄이 걸리자 붉은 머리카락이 함께 조여든다. 아약스가 몇 번이나 묶어주고 풀어주었던 머리카락이었다.

왜 자살을 한 거야, 토니아? 제발 좀 알려줘. 정말 모르겠어. 정말로 자살이 맞기는 한 거야? 그곳에서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 돼!!! 토니아, 제발. 제발!!!

다급하게 뛰어가 토니아의 몸을 붙드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여명. 어슴푸레한 새벽의 기운에 헐떡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타르탈리아는 이불을 걷어냈다. 땀으로 흥건한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다독이며 세면대 앞으로 나아갔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대빙벽에서는 죽음이 익숙하다. 천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과 마물을 상대하는 그들에게 있어 전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혹독하고 냉랭한 그곳에서 자살하는 놈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인단은 대부분 자살하는 놈들을 무척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허락된 자살은 임무 중 특공대처럼 목숨을 불사르는 놈들에게만 허용하는 자랑스러운 임무 중 하나일 뿐이어서 자살이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잡놈이라고 욕을 해대며 제대로 된 장례도 치러주지 않았고 그들의 형제자매는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차라리 전장에 나가서 죽어야지 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스네즈나야를 향한 모욕이라고 여겼으므로.

하지만. 그 말은 즉 괴물이나 마수를 상대하는 것만큼 힘들었다는 뜻이었을 텐데. 마음이 무척 아팠다는 뜻일 텐데. 지금까지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해왔는지….

그래. 네가 더는 아플 일은 없어. 네 마음이 최우선이야. 토니아, 네 감정, 네 기분이… 제일 중요해.

타르탈리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스네즈나야의 아침은 이르게 시작된다. 겨울나라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새벽부터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약스는 삼남인지라 상대적으로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으나 집행관으로서 지내온 세월 때문인지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내였다. 마음 같아선 훈련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이 저택에 있는 시설은 아이들 장난이나 귀족 놀음 같아서 시선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멀리 나가 얼음낚시라도 하면 좋을 텐데 제게 주어진 임무 때문에 발이 묶인 상태다. 물론 종려에게 함께 가자고 하면 해결될 문제이긴 했지만.

차라리 나태하고 말지. 그렇게 생각하며 돌이 깔린 정원을 홀로 산책하던 중이었다. 지난밤의 악몽을 완전히 떨쳐내기도 전에 달갑지 않은 사내와 마주쳤다.

종려 역시 아침부터 산책이라도 나온 건지 검은색 한푸를 입은 채였다. 넓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천의 모양새는 스네즈나야에서 보기 힘든 형태인지라 그 신비로움에 시선을 빼앗겼다. 새하얀 정원을 등지고 있는 그는 마치 수묵화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곰방대를 태우고 있었는데 그 연기가 마치 물안개처럼 몽글몽글 넓게 퍼지고 있어서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종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늦게 타르탈리아를 응시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아아, 네. 뭐.”

“담배를 어디서 피워야할지 몰라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왔습니다.”

“괜찮아요.”

정적이 찾아왔다. 종려가 곰방대를 씹고 깊게 연기를 내뱉은 후에 불씨를 탁탁 소리 내어 껐다. 그가 주섬주섬 곰방대와 재떨이를 정리하여 품 안에 넣을 때까지도 오가는 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산책을 방해한 것 같군요.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달라붙던 사내는 온데간데없었다.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종려를 보자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타르탈리아는 일순 낯선 기분에 뒷목을 긁적거렸다.

“어제 대화는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나?”

저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태도로 팔짱을 끼자 종려는 우뚝 멈춰 서서 타르탈리아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는 곧 턱을 쓰다듬었다가 이내 상념에 잠긴 듯 눈을 내리 깔았다.

“놀랍네요. 타르탈리아 씨가 저랑 대화하려고 하실 줄 몰랐는데요.”

“…뭐, 그건 됐고. 운명의 자리니 뭐니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음. 스네즈나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리월에서는 운명의 자리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운명이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는 무게감이 다릅니다. 운명의 자리는 보통 존재가 타고나는 기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 사람들은 운명의 자리에 대해 별로 믿는 추세는 아니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군. 하지만 운명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이 대륙에 새겨진 천궁의 흐름에 의해,”

“잡담은 그만하고 본론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용(龍)에게는 봉황(鳳凰)이 운명이라고들 합니다. 음. 사실 봉황이란 각각 봉(鳳)이 수컷, 황(凰)이 암컷을 뜻합니다. 봉황이라는 상서로운 동물은 옛적엔 부부로서 하나임을 뜻하였는데 최근에는 실은 부부가 아니라 ‘사이좋은 남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자웅동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는 부부라는 해석이 더 우세하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네, 반인반수는 다양하지만, 봉황이 서로 부부가 되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은 일이 되었기 때문에 운명의 자리를 해석하는 것 또한 시대상에 맞추어 변하게 되었다고,”

“이봐. 본론이 뭐냐고.”

“타르탈리아 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종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제가 처음 스네즈나야에 왔을 때요. 행진을 따라가던 도중 누군가의 눈빛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인파 속에서 당신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고, 깃털이 달린 우인단 코트를 걸치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히 당신이 남자인 걸 알았지만, 사실 제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봉(鳳)은 수컷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시대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게 여길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진심을 다하면 반드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명의 자리고.”

“하, 진짜. 뭔, 뭔 헛소리야? 진짜 그런 미신을 믿어? 말도 안 되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경천 자리입니다. 하늘고래 자리예요. 당신이랑 나는 운명이 아니야.”

“…네. 그건. 이제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포기해주는 건가?”

“…그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던 종려는 입을 다물었다. 늘 즐거운 듯이 온갖 말을 늘어놓던 사내가 조용해지자 타르탈리아는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종려가 깊게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그는 무언가에 떠밀린 사람처럼 마지못해 속삭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더는… 좋아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실례했습니다.”

일순 쥐어짜는 듯 고통스러웠던 가슴 언저리가 편안해졌다. 오래 앓고 있던 쓰라림이 사라진 듯 개운하다 못해 상쾌한 감각이 온몸을 떠돌았다. 아아, 알았다. 조금 전 눈앞의 남자의 심장 일부가 죽었다.

내 심장을 가져간 고대 악이 즐거워 심장 위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어찌나 기뻐하는지 세차게 뛰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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