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5

못하면 나갈 수 없는 비경

이상하다. 느비예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가 벌어진 것은 점심시간 산책을 겸해 프레미네와 만나 성 주변을 걷던 중의 일이었다. 갑자기 초원에서 큰 지진이 나더니,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밝아진 시야는, 직전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실내였다. 오래된 유적처럼 보였다. 느비예트는 이 양식을 사용하는 지역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마치 무언가의 압도적인 힘에 강제로 기억을 수정 당한 듯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의 흐름에서 어딘가에 나갈 곳이 존재한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느비예트 본인은 그렇다 치고, 평범한 인간인 프레미네가 동행하고 있으니 걱정이었다. 흐음, 흠. 느비예트는 고민했다. 일단 겁먹은 듯한 프레미네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나갈 기약도 없는데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건 좋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 일이 끝나자,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걷다 보면 마치 답이 나온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무언가 놓친 게 없을까. 어딘가에, 출구의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옆에서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프레미네가 결국 결심한 듯 느비예트의 손을 꼭 붙잡아 잡아당겼다.

“저기, 느비예트 님…….”

“예, 말씀하십시오.”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가 공중에서 춤을 췄다. 어쩌면 이 푸른 바다와도 같은 색을 가진 눈이야말로, 느비예트보다 많은 유적을 탐험해 봤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딱 거기까지 미쳤을 때, 소년이 곤란한 얼굴로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호, 혹시나 해서……. 그, 아까부터 계속 같은 곳만 돌고 있는데…….”

“……아. 미안합니다. 생각을 조금 하다가 그만. 앞서 걸어도 좋습니다.”

……이런. 굳이 말하자면 느비예트는 길을 잘 헤매는 편이었다. 본인에게도 자각은 있었다. 아니, 반쯤 있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되도록 혼자 걷지 않았다. 아까 바람의 흐름을 느끼느니 어쩌니 했지만, 사실 물길보다는 바람길에 어두운 편이었다. 물밑이라면 뭐, 여기저기 물어볼 곳도 있겠다, 애초에 묻지 않아도 알아서 멋대로 느비예트가 가고 싶은 곳을 주변에서 알려주는 게 문제였다. 해양생물, 그리고 물 자체의 기억. 결국 느비예트는 길찾기에 한해 지독히 수동적인 인간-인지 용인지-이 되고 말았다. 변명할 방도가 없었다.

프레미네가 가자는 곳으로 이리저리 발을 옮기니, 과연 본 적 없는 방이 나왔다.

“처음 보는 곳입니다. 보라는 듯이 제단이 있군요.”

“실은 저희 불시착한 곳 바로 앞이에요…….”

“…….”

느비예트는 머리에서 길치라는 두 글자를 빡빡히 지웠다. 어디든, 누구와 함께든 제대로 된 곳에 도달하면 그만이다. 프레미네와 함께라면 최소 100여 년은 문제없을 테니 됐다.

말 그대로, 나는 오래된 유적이오 하고 말하는 듯한 낡은 양식의 제단. 딱히 무언가 제사를 지냈거나 제물을 바쳤던 흔적은 적어도 최근에는 없어 보였다. 다만 정중앙에 먼지 쌓인 비석이 하나. 공기 중의 수분으로 먼지를 치우면, 그곳에는 주변 양식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게도, 왜인지 티바트 공용 문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에 발 들인 자, 접문接吻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으리니.

“…….”

“…….”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는 느비예트가 입 다물고 있으니 프레미네가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깨닫고 느비예트가 시선을 건네자, 프레미네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입을 열었다.

“느비예트 님, 접문이 뭐예요……?”

확실히, 프레미네 세대가 알 만큼 요즘 쓰는 말이 아니기는 했다. 그런 주제에 깔끔하게 최신 맞춤법을 사용한 티바트 공용 문자라니. 꿈을 꾸기라도 하는 모양인가. 느비예트는 가볍게 프레미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술과 입술의 접촉을 말하는 겁니다. 흠, 그러니까 키스하면 나갈 수 있다, 이 말인듯합니다.”

“키, 키스.”

프레미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고는 시간차를 두고 당장 불타오를 듯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 왜 그러십니까? 얼른 나가도록 하지요.”

“하, 하지만.”

“음?”

“키, 키스. 그런 거. 그러니까, 느비예트 님이랑.”

“예, 단순히 입술만 맞대면 되는 모양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소년의 파란 눈이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느비예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키스 한두 번으로 당황할 사이던가?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수없이 한 게 키스가 아니던가. 소년은 낯을 가리는 만큼 눈치가 빨랐다. 느비예트의 표정에서 의아함을 읽은 게 틀림없어서, 후하, 후, 하고 몇 번 심호흡하더니 불쌍할 정도로 파들파들 떨었다.

“그, 그러니까, 저기, ……수분 확인, 이 아니고요?”

“호오.”

아무래도 이 어린 양은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이다. 수분 확인을 위해 키스한다면, 느비예트는 온 세상의 모든 폰타인 사람과 키스해야 했다. 어디,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일단 이 답답하고 수분은 점점 줄어가는 공간에서 얼른 나가고 싶은데.

“해명과 설명은 나중에 하고 듣겠습니다. 잠시 실례를.”

입을 맞춘다고 나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일단 이 빌어먹을 공간을 있는 대로 박살을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느비예트는 결심하며 프레미네의 턱을 살며시 들었다. 허리를 숙이면, 움찔하고 놀란 파란 눈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고 해, 프레미네의 허리를 가볍게 잡아야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닿을 뿐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에 닿으면, 버릇처럼 푸르고 기다란 촉각을 작은 손이 쥐었다. 분명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있는데, 긴장하면 전부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해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 느비예트는 조심스레 프레미네의 손을 풀어내며 작은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한참 만에 닿은 타인의 수분은 달았다. 그리고 뭔가 비명 같은 게 들린 것 같다.

눈을 뜨면 유적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푸른 초원과 폰타인의 익숙한 「바다」였다. 돌아왔나. 꿈은 아닌 모양이다. 후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정확하게 들려왔다.

“……느, 느비예트 님, 거짓말쟁이…….”

“무슨 말입니까?”

“다, 닿을 뿐이라면서요…….”

“먼저 약속을 어긴 게 누구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고개를 갸우뚱하면, 프레미네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풀 죽어버렸다. 가엾게도. 달래줄 셈으로 품에 꼭 끌어안으면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굳어버렸다. 유적에서 이상한 냄새라도 묻히고 온 걸까. 더럽게도 무거운 제 옷을 킁킁 냄새 맡아도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그런 느비예트를 빤히 보다가 프레미네는 새빨간 얼굴로 이내 마주 안아왔다.

“이 이상한 경험에 대한 조사는 나중으로 미뤄둬야겠군요. 개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걸 알아버렸으니 말입니다.”

“……우웃…….”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까? 제가 온 폰타인 사람과 키스하는 색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에요…….”

품 안의 작은 인간은 조금 떨고 있었다. 느비예트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품에서 떨어져 나갈 생각도 없어 보여서, 달래듯이 등을 두드려 줄 뿐이었다.

“……저기, 저.”

“예.”

“이런, 거. 물어보면. 미움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일 없으니 편히 물어보십시오.”

“……키스, 하는 이유, 물어봐도 돼요?”

생각 이상으로 직접적인 말에, 느비예트는 프레미네가 어느 정도 용기를 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얀 귀는 새빨갛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며, 조금, 물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건 그의 안에서 꽤 중요한 문제인 모양이다. 그간 표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전달되지 않았던 걸까.

“프레미네 군을 좋아하니까요.”

“……예?”

“음?”

“……네?”

“……음.”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과의 소통이란 어찌하여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느비예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갈 길이 멀었다. 느비예트의 표정이 약간 흐려진 것을 보고 프레미네는 벼락이라도 맞은 양 화들짝 놀랐다.

“아, 저, 저기, 미안해요. 그런데도 계속, 친구라고, ……답답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몰랐다면, 이참에 조금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미안하군요. 서로 꽤 오해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이러한 행동도 말입니다.”

느비예트는 조심스레 프레미네를 품 안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레미네의 표정이 흐려졌다. 이건, 아무래도 정말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느비예트는 프레미네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저에게는 시간이 많으므로, 프레미네 군의 이야기는 천천히 들려주어도 좋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요.”

“자, 잠시만요!”

등을 돌리자마자 다시 손을 잡혔다. 그리고 조금 갈라진, 들은 적도 없는 커다란 목소리도. 놀라 돌아보자 소년은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낸 게 원인인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이쪽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게, 마치 처음 만난 날 같다고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수면 아래로 들어가서 말 붙일 기회조차 없었던 날.

“저, 저, 조금 놀랐지만. 제대로, 제대로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조금 더 곁에 있어 주세요. 마지막 말은 거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였다. 느비예트는 풀숲에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려 노력했다. 새파란 눈은, 비 오는 날처럼 흐려져 있었다.

“느비예트 님은, 나쁘지 않아요. ……이런 거, 해도 된다고 제대로 이야기해 줬잖아요.”

여전히 약간의 주저가 느껴졌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본인의 의지로 프레미네는 느비예트를 끌어안았다.

“제가, 나쁜 거예요. 느비예트 님은 계속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또 눈앞에서 누가 사라지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잘, 듣지 않았어요. 정말 미안해요.”

느비예트는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이 소년이 무언가의 상실을 계속 두려워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말하는 것 이상으로 행동에 배어있는 만큼 깊은 공포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이제야 그 그림자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입맛이 썼다.

“그건 프레미네 군이 나쁜 게 아닙니다. 프레미네 군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런 거……!”

“물론, 누군가를 탓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마주 끌어안은 작은 몸은, 역시나 믿음직하지 못하게 가녀렸다.

“이제부터 알았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잘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는 거예요. 그건 사람의 등에 있는 태엽이 시키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살아있으면 갖고 있는, 마음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부탁이 있어요.”

“예.”

“놀라면 안 돼요.”

프레미네는 마치 도둑질을 하듯이 갑작스레 입맞춤해 왔다. 그저 거기에 있다는 걸 확인하듯, 닿을 뿐인 키스. 그리고 느비예트의 품에 쓰러지듯 기대어, 부탁을 듣지 못하고 둥그렇게 떠진 눈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요. 이제 너무 많은 걸 받아서, 느비예트 님이 제 태엽이 되어버린 것 같아. ……그리고, 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조금만, 더 같이 있어요.”

“안아서 돌아갈까요?”

“……그런 건 부끄러워요……. 그리고 리니랑 리넷이 보면 혼날지도 몰라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제가 안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느비예트는 프레미네를 품에 안고 그 자리에 앉았다. 프레미네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어른이 되는 거, 싫었는데. 지금은……, 조금이지만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어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느비예트 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부끄러운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건, ……말할 수 없지만…….”

대강 짐작은 하고 있다. 아니, 실제로 알고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느비예트는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권능을 찾은 지금, 천리라도 상대할 수 있는데 일곱 신이 문제일까. 물론 이 장대한 계획을 이야기하기에는, 눈앞의 소년은 너무나도 어렸다.

“어른이 되어도 곁에 있어 주십시오.”

“……후후.”

“제대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지켜드릴 테니, 그런 표정 짓지 않기로 합시다.”

“알았어요.”

이 무겁고 깊은, 심해보다 더한 감정의 진실을 알게 되면 소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느비예트는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처음 있는 일이라 해서 실패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눈앞 소년의 이름과 제 성을 맞추어 보고, 발음이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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